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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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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VIBE UPON THE WORLD 21 6월자:
 
 
The Birth of Rave

매시브 레이브와 상업적 파티 프로모션의 탄생


2nd Summer of Love의 애시드 광풍을 뒤로하며 꿈만 같던 88년을 마감하고 영국 런던의 애시드 하우스 씬도 그 두 번째 진화에 돌입했다. 이 시기에 진입하며 슬슬 Rave Raver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애시드 하우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뒷북을 치던 미디어 뿐이었다. 이비자의 순수한 분위기와 60년대 히피를 떠올리던 사랑과 이상의 분위기는 사라져갔고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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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변화는 바로 철저한 상업정신으로 무장한 2세대 파티 프로모터들의 등장이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애시드 하우스를 경험하며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걸, 이거 돈 좀 되겠네 하는 생각들이었다. (거기다가 세금도 낼 필요도 없고 한 방에 큰 돈이 굴러들어오니 이처럼 매력적인 장사도 어디 있었겠는가?) 이상보다는 비즈니스적 개념이 앞선 이들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레이브의 대형화를 불러왔다. 100 명 남짓을 위한 좁디 좁은 클럽의 공간 보다는 1000, 10000명을 위한 넓은 아웃필드의 공간이 더욱 이득이 많아 보이는 건 당연했고 이로 인해 그 유명한 M25 오비탈 하이웨이나 넓은 대 자연의 공간을 활용한 매시브 레이브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사랑, 평화, 존중으로 대변되는 이상적인 문화의 대명사인 레이브는 이렇게 상업주의적 접근과 함께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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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주의적 파티 프로모션의 붐을 불고 온 중심 인물은 Tony Colston Hayter (이하 토니)라는 21살의 청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과 남의 이목을 받는 것을 중요시 여겼던 토니는 애시드 하우스를 경험하며 일찍이 파티 프로모션의 상업성에 대해 눈을 뜨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대형화와 거대함을 추구한 토니는 손수 미디어를 불러 애시드 하우스의 현장으로 끌고 왔다. 하지만 자극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이들이 파티를 통해 즐겁고 뜻 깊은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 따위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미디어의 초점은 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위험한 아이들로 맞추어 졌고 미디어에 의한 대중의 패닉은 시작되었다. 덕분에 더 많은 아이들이 생각 없이 애시드 하우스가 너도나도 해야 할 쿨한 최신 트렌드인양 생각하며 모여들었고 당시 애시드 문화 속에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순수함마저 없애 버렸다.

 

이렇게 토니는 레이브라는 제2의 애시드 세상의 문을 열었고 그의 선라이즈 파티는 승승장구하며 영국의 모든 청소년들을 거대하고 화려한 유포리아의 시공간으로 이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에너지, 월드 댄스, 바이올로지 등의 대형 레이브 이벤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이처럼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레이브 파티에 의해 프로모터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 했다. 따라서 좀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파티는 좀더 이벤트적 성격을 띄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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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스타 DJ 라인업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종전처럼 한 명의 DJ가 오랜 시간 동안의 여정을 책임지는 리츄얼식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각각의 DJ들은 짧은 시간을 할당 받고 자연스레 여러 음악의 조화라기 보다는 빠르게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수 있는 Anthem 위주의 사운드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어느 파티에서나 거의 같은 설렉션을 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업리프팅한 하우스 그리고 트랜스 음악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파티를 화려하게 장식할 이벤트성 장치들이 세분화 되었다. 엑스터시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라이팅 시스템은 점차 다양해지고 각 파티 플라이어에는 어떠한 사운드 시스템이 사용되어지는지 구체적으로 표기 되었다. 이 밖에 거품 샤워, 대형 풍선의 등장 등 대형 레이브의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대하고 시끄러움을 향해 달려갔다. 자연스레 이비자 베테랑들은 거의 종적을 감추었으며 주 참여자도 자극적인 것에 민감한 어린 연령층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레이브 문화는 이렇게 태어났고 진화했으며 프로모션의 상업주의적 의도와는 또 다르게 레이버들은 자신들만의 유포릭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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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레이브는 엄중한 대정부의 차원의 단속 속에 진행된 불법 파티였다. 따라서 천 명이 넘게 모이는 레이버들을 위해 24시간 파티를 가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경찰의 단속 뿐만이 아니라 레이브의 상업성에 눈독들인 축구 갱단의 위협에 의해 잠시 몸을 숨기고 있던 토니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을 만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휴대폰을 사용한 보이스 뱅크의 활용이었다. 파티 플라이어에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전화번호만을 남겨 놓거나 레코드 샵의 지인들에게만 전화번호를 알려준 후 이 번호로 연결되는 보이스 뱅크에 토니는 장소를 수시로 바꾸며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확정된 파티 장소를 알리며 경찰의 수사망을 이리저리 빠져나가게 되었다. 레이브의 이러한 전통은 훗날에도 계속 이어졌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확장되며 휴대폰, PDA, 이메일, 인터넷 커뮤니티 등의 디지털 매체가 레이브 문화 속에서 크게 활성화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숨바꼭질 같은 여정을 걸쳐 장관 속에 펼쳐지는 레이브의 경험은 레이버들에게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 듯한 일종의 어드벤쳐 식의 짜릿함마저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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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며 경찰의 단속 방법 또한 심화되었고 급기야 89년에는 파티의 불법화를 강화시킨 그래엄 브라이트 빌이 통과 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브나 파티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하고 매력적인 사업성은 프로모터나 갱단들만이 간파한 것은 아니었다. 매시브 레이브와 매드체스터 이후 런던과 맨체스터 같은 영국의 각 도시들은 엑스터시에 의한 대중의 패닉이 잠잠해지면서 클럽과 파티의 규제를 서서히 완화시켰고 도시의 주수입원으로의 효자 문화 상품으로 길들이게 되었다.  

 

국내에서 성행하는 많은 파티들 중 눈을 찌푸리게 하는 안 좋은 소문들이 종종 들리곤 한다.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돈과 미디어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은 진리다. 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듯 어차피 한 문화가 대중의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 순수함은 없어져 버린다. 따라서 이윤과 세인의 관심을 중요시 하는 파티 프로모션을 무작정 욕만하며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도 24시간을 넘게 미친 듯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던 레이버들이 중요시 한 건 내가 남에게 환영의 손을 내미는 것이었지 나의 콧대를 높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문화에 대한 사랑과 지킴이라는 숙제는 DJ만도, 프로모터만도 아닌 우리 레이버들과 클러버들 모두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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