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EXUS...비논리적이고 편집되지 않은 생각들로 패턴을 찾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그리고 단추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점들...Simplicity


옛 속담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물론 누구나 그 뜻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속담안에 들어있는 해학성을 무시하고 그 말 자체를 literal하게 받아들여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예를 들어 아침에 너무 바쁜 나머지 혹은 정신 없는 나머지 난방의 밑 단추를 잘못 끼워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어라...젠장..시간도 없는데....'
짜증내며 다시 풀고 처음 부터 다시 단추를 낄때가 종종 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중요하다는 얘길 것이다.

조급하더라도 여유를 가져야 하고 항상 모든 과정에 신경을 쓰고 있어야만 단추를 모두 끼웠을 때 옷 맵시가 살아난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건 바로 우리내 인생이나 우리 주위의 현상,사건들이 한장의 옷처럼 잘 디자인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바로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

옷을 입는 행위야 단추를 잠금으로서 옷맵시가 살아나게 디자인되어 있고 단추의 수는 정해져 있으므로 얼마든지 풀고 잠금을 되풀이 할 수 있다. 바로 시작과 끝이 설계되어 있는 '닫힌 계'와 같다. 거기다가 친절하게도 단추 사이에 꼭 맞는 구멍이 있고 거기에 끼기만 하면 된다는 직관적인 방법이 벌써 제시되어 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한 장의 옷 같다면 우주 만물의 수수께끼는 벌써 옛날에 풀렸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상상하던 과거로의 여행도 가능해 지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단추를 풀어버리고 다시 잠금을 시작하면 되니까)

만약 이 세상이 하나의 옷과 같이 디자인 되었더라면 바로 영화 Matrix의 세상과 별다를게 없었겠다....
우연, 공상, 상상, 사고, 발견 등등... 이런 류의 키워드들은 그 의미가 쇠퇴해져 있었을 것이다. 혹은 존재하지도 않았을지도...

단추를 잠글 때 한번의 행위가 끝나면 바로 윗 단추를 잠그는 것처럼 '다음 행위'가 정해져 있다. 사건/현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직관적으로 혹은 어렴풋이나마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조 또한 인지하고 있다; 단추를 4개 잠그면 (단추가 4개일 경우) 난방을 입는 행위가 끝난 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내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한치 앞도 미리 내다볼 수가 없다.
물론 과학의 무궁한 발전에 의해 '어느정도'의 통계적으로 높은 수치의 예측은 가능하다.
하지만 정확한 미래는 내다볼 수가 없다.
심오하고 언뜻보기에 복잡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단추 4개를 잠궈 옷입는 행위를 마무리 한다'라는 것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설계이다. 그리고 그 한장의 난방은 실존하는 천조각이 아닌 개인이 성취하고자 하는 일종의 꿈이자 목표이다.
따라서 모든 단추의 개수는 4개가 될 수도 있고 40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하나의 단추를 잠궜을 때 윗 단추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그냥 자신의 의지와 믿음을 바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단추의 개수를 정한다는 것은 옷 입는 행위를 완성시키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조의 과정 중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각각의 점들이다. (전쟁에서 고지를 정해놓는 것처럼)
따라서 이 점들은 이미 물리적 존재감이 없는 인위적인 실체일 뿐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특정 매트릭스 같은 시스템 안에서 정의 되고 도식화된 점일 것이다.
1년에 한 살씩 먹는 다는 나이도 4계절의 주기적 패턴에 따라 시간에 1년이라는 개념을 두고 그에 맞춰 한 싸이클을 돌아 성장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여기서도 점의 실체는 모호하다는 것이 보인다.

과연 내가 18살이 된 시점을 그 해 나의 생일인가? 내가 호주에 있거나 한국에 있거나 날이 달라지는데? 태어난 날의 그 시각인가? 시각이라면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지역의 시간에 맞춰야 하나? 그린위치 시각에 맞춰야 하나?1월1일? 구정 1월1일? 성인의 날? 아니면 내 나름대로의 자아 성숙기에 맞춰 내가 선언한 '난 18살'이다?

벌써 수많은 도식화된 점들이 보인다. 그리고 무엇하나 틀린 의미를 갖는 점도 없지만 무엇하나 확실한 점도 없이 애매하다.
하지만 공통점은 보인다.
바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수단으로서의 점들이란 대략적인 '점 만들기'의 관념적 패턴이 보인다.

하지만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 할 때 이 점들의 의미는 더욱 모호해진다.
나에게 있어 지각되는 점이 바로 내 앞에 있는 상대방도 똑같은 식으로 지각될 수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그러하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은 상호 간의 이해와 협력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거나 모든 것을 분류한다.
최선의 공통점이라는 분모를 서로 나누기 위해서.
따라서 점은 인위적 실체이지 그 존재성에 관해서는 항상 의심이 들 뿐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점을 '선언'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할 때 대표적으로 그 유사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사성은 일종의 패턴인식과 같다.

인생이 시공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일련의 사건과 현상의 연속이라고 볼 때 하나의 확실한 점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비슷한 사건과 현상이 서로 맞물려 어떠한 형상 혹은 덩어리(개념적이던 시각적이던)를 이루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씩 인식되는 점을 통해 우리는 그 안의 패턴을 인식하고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말 그대로 무질서 속의 질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의 발견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느끼고 이해하며 성숙해간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지구를 하나의 거대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이나 우주의 신비, 문명과 문화의 진화/현상, 역사의 되풀이, 예기치 않은 기후 변화나 주식 시장의 급폭등 혹은 우리의 인생살이 등...쉽사리 한 눈에 혹은 영원히 알 수 없을 지 모를 것 같은 복잡하고 무질서적인 구조의 양상을 띄고 있는 시스템(?)을 마주할 때 그 빛을 더한다. 바로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전일적 holistic인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무한한 자기복제를 가능케 하는 프랙탈 이미지처럼 분류란 끝없는 분류의 분류로 무한한 프랙탈 이미지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분류체계 자체가 너무 커져버려 통제불능의 상태로 느껴질 뿐이다. (마치 인터넷의 구조를 한번에 이해하려는 것처럼)

물론 크고 작은 현상 하나가 그리고 사건 하나가 전체 시스템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무한하다. 나비효과처럼.
하지만 작은 현상 하나가 시스템의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그 현상 하나에만 편협된 마음으로 집착하고 그것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전일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른바 '사건'에서 벗어나 일련의 유사한 사건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들이 다른 유사한 사건들과 맞물리는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고리들을 풀어간다기 보다는 그 고리들이 맞물려 또 하나의 혹은 여러가지의 개념적/시각적으로 이해가능한 (인간의 인지적 한도 내에서) 덩어리를 발견할 때 비로소 복잡한 실타래를 풀었노라고 선언할 수 있는게 아닐까?

인간이란 것이 결국 세포들의 조직성에 의해 창발하는 유기체인 것처럼,
지능이 떨어지는 흰 개미들이 저마다 모여서 거대하고 고차원적인 질서 체계를 창발하는 것처럼,
결국 이 복잡하게 보이는 세상의 심오함이란 어떤 하나의 단순한 질서 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Simplicity.


나의 단순한 키워드들....

Simplicity....Chaos....Entropy....Nexus....Emergence....Consilience....Simplicity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