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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바라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란 [맥락]과 [역사]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현 일렉트로니카 문화를 바라보기 위해 그 관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시차는 한 5년 정도가 있으니 지금와서 조금 안맞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등록이 되어있는 글이므로 불펌 바랍니다...

이번은 지난 인트로에 이어 일렉트로니카를 하나의 음악적 사건과 현상으로 바라볼 때 그 컨텍스트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보았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술과 음악의 상호적 관계를 인트로 식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ELECTRONICA의 역사2:

Context ::: Art History & Music



"음악은 그 시대나 세대가 지닌 심리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음악은 감정표현, 미적 즐거움, 오락, 커뮤니케이션, 상징적 표현, 신체적 반응, 사회적 규범, 사회와 문화의 연속성에 기여 등의 기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도시" 또한 회화의 경우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시대별의 주제를 통해 음악과 마찬가지로 (과학과 달리) 주관적인 평가와 과정을 통해 표출 된다. 하지만 음악과 회화는 그 주관적 특성으로 인해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는데, 이는 음악과 회화가 그 시대마다의 사람들의 생활과 조건을 반영해 왔으며 어떻게 사회와 삶에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과 회화는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보여준다는 성격에 있어서 상호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 중세기 기독교적 신앙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배하던 시절 회화와 음악의 주 테마가 대부분 신앙과 전설이었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고대 시대의 벽화에서 볼 수 있던 글들의 주제는 신성한 자연과 신에 관한 것이었다. 고대의 음악은 존재하지 않아 그 특성을 알기에는 불분명 하지만 이미 기원전 1만 8000년 경에 그려진 동굴 벽화에는 이미 음악가들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다 - 웍스. 또한 악보를 옮겨 놓은 듯한 그림들에서는 그리스와 같이 음악을 우주와 인간의 연결점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발견된다. 그리스와 로마 왕국의 파멸 이후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던 중세기에도 표면만 기독교적인 것이 되었을 뿐, 코랄 Choral과 그레고리오 성가 Gregorian Chant의 음악과 회화의 주제는 신성함과 인간의 정신적 믿음 그리고 커뮤니티에 대한 책임 의식 등을 전달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고대 시절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르네상스 Renaissance시대에 접어들며 회화가 발전하고 원근법 perspective 등이 처음 도입되었다. 이는 회화의 주제가 아직도 종교적이고 신상한 성향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인간의 손을 통해 실상이 왜곡 된다는 인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회화에서 보다 인간 중심의 표현 기법과 세계관이 시작되었다는 효시가 되었다. 세큘러 음악 Secular, 세레나데 Serenade 등 음악의 표현 기법 또한 그 전문성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데스페레즈 Desperez 같은 전문 음악인들도 등장했다. 바로크 시대 Baroque의 특징은 회화에서 주를 이룬 주제들이 르네상스의 정적인 측면에서 벗어나서 훨씬 역동적이 된,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들이었다는 것이다. 음악의 경우 또한 16세기에 그 시대의 대중 음악이라 볼 수 있는 오페라 Opera가 탄생했으며 17세기 중후반의 바하 Bach의 등장으로 음악은 더 이상 신앙 사회의 중심이 아닌 보편적 인간 중심의 문화적 사회적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즈음해서 Classical 음악이 탄생했고 이는 비발디 Vivaldi, 하이든 Hydn, 모차르트 Mozart, 베토벤 Beethoven 등의 손을 걸쳐 그 전성기를 맞는다.


19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교회와 군주세력이 그 장악력을 잃어버리는 급변의 시대가 도래한다 - 스트릭랜드. 인간의 세계관 또한 보다 기계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변해 갔으며 이는 인류 문명에서의 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즈음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같이 하나의 양식이 오랜 시간 지속되는 현상 또한 멈추었고 사회의 급변화에 맞물려 예술 분야도 과도기를 맞게 된다. 이 과도기에는 사조 -ism가 탄생한다. 그리고 "음악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거나 귀족들을 위한 점잖은 오락이어야 한다는 사고는 점차 자기 표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 윅스.


제국주의의 팽창,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도시화와 이에 따라 심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프랑스 혁명 등은 인간의 권리에 관한 정치적 문제들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 Romanticism가 시작되었다. 생산과 소비를 통한 진보와 축적을 향해 자연을 갈취하며 끝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산업 사회에 대한 반발로 신성한 자연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 등에 대한 느낌과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중세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바로 "인간과 자연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서로 감응할 수 있으며 인간 내부에 숨겨진 신성함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으며 직관에 의지하며 그들의 신조를 지키려 한 것이다-스트릭랜드."


낭만주의와 같은 사조 이후, 서로에 대해 반동적인 수많은 사조가 끊임없이 탄생했다. 18세기 중반의 만국 박람회를 기점으로 아르 누보 Art Nouveau와 같은 상업적 예술이 태어나기도 했으며 사실주의 Realism, 자연주의 Naturalism회화들은 주로 평범한 서민들의 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 즈음해서 음악의 분야 또한 서민을 위주로 한 플라멩고 Flamenco, 럼바Rhumba, 칼립소 Calypso 등이 유행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모두 사실, 현실, 과학이란 요소로 축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산업혁명에 의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과학과 수학을 진리로 보는 근대 사회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 Impressionism와 같은 예술 운동은 낭만주의를 계승하여 인간 내면의 모습과 고뇌를 표현했다. 인상주의는 신과 자연의 신성함이 무의미해진 근대 사회에서 기댈 곳을 잃고 내면으로 파고 드려는 인간의 의지와 고독함에 대한 페티쉬적 성향을 보여준다.



20세기에 이르러 음악과 회화는 모두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된다. 또한 디자인 Design이란 개념의 탄생과 발달 그리고 재즈 Jazz의 등장 등에서는 르네상스나 바로크와 같이 통합적인 예술 과학 대신 예술과 과학 그리고 대중 문화가 서로 분리 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쇤베르크 Schoenberg의 음렬주의 Serialism는 전통적 작곡 양식에서 과감히 탈피했으며 현 시점까지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인상주의 작곡가인 드뷔시 Debussy를 비롯하여 사티 Satie, 말러 Mahler 등은 음악의 해방과 새로운 표현을 위해 노력했다. 이른바 전통에서 탈피한 음악의 해체주의 Deconstruction가 시작 된 것이다 - 질버만. 20세기 초반의 많은 작곡가들이 과학의 발달로 등장한 새로운 악기와 그에 따르는 음악적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194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전자음악 Electronic Music이란 장르에 대한 구체적인 예술적 탐구가 시작된다. 이것은 곧 기계와 인간의 합성화 Synthesis, 기계를 통한 음악의 본질로의 접근, 기계를 통한 인간의 내면적 성숙과 인간성의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20세기 초에는 보다 많은 사조 -ism들의 탄생을 볼 수 있다. 또한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상업화된 예술과 보다 더 과학적인 측면의 예술적 표현 방식을 볼 수 있었으며 회화의 주제들 또한 음악과 같이 해체되기 시작되었다. 이것은 고대 및 중세의 회화들과 대조하면 잘 드러난다. 시대별로 살펴보면 회화의 주제는 공통적으로 그 시대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생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한 예로, 고대 시대의 주제는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과 자연의 신성함에 대한 숭배와 책임감이었다. 하지만 입체주의 Cubism, 구조주의 Structuralism등 현대 미술의 주제는 신과 자연의 세계가 아닌 인공적인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더니즘 Modernism에서 비롯된 그리드 Grid 및 모듈러 Modular의 개념과 맞물리어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세상을 다시 해체 함으로서 그 본질을 파고 드는 것이다.


또한 재즈 Jazz, 팝 Pop, 락큰롤 Rock n Roll 등의 음악은 대중 문화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대중음악과 문화 또한 예술사조와 상호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달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와 같이 과학, 예술, 문화의 발달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 3가지 요소가 세분화되고 서로 간의 색깔이 뚜렷해 졌으며, 그들을 연결해주는 다리 bridge의 모습이 희미해졌을 뿐이다. 그 좋은 예는 60년대 사이키델릭 락 Psychedelic Rock의 부흥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 사이키델릭 락의 발달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류 문명이 우주에 대한 이미지를 확인 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근원은 미래주의 Futurism와 초현실주의 Super Naturalism다. 회화의 사이키델릭적 표현은 옵아트 Op art, 팝아트 Pop Art에서 나타난다. 미지에 대한 신비와 자연에 속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감을 통한 구원이라는 고대의 사상이 현대 문명의 과학과 맞물려 그 실제를 확인하려 하는 노력이 예술과 대중 문화의 결과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질버만이 그의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중요한 것은 기술적 힘이 사회질서를 선도하고 구조화시키는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것은 기술에 의해 역사가 결정된다는 개념을 우리가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음악적 경험의 거래 수단, 즉 집단의 도구 장비가 어떤 의미에서는 집단 성원들에게 사회적 질서를 인도하고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 중심의 대량 생산에 의해 무의미하게 터져 나오는 대중 문화 산물이 곧 사회는 과학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역사 속에서 보아 온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창의적인 예술과 문화의 생산자들과 수용자들에 의해 과학이란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다시 되찾기 위한 도구로서의 활용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그 자체적인 필요에 의해 제기하는 문제들을 예술이 다루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으로부터 기술이 가져오는 영향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 질버만".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내체하고 있는 일렉트로닉 음악과 문화의 보다 많은 연구와 확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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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바라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란 [맥락]과 [역사]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현 일렉트로니카 문화를 바라보기 위해 그 관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시차는 한 5년 정도가 있으니 지금와서 조금 안맞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등록이 되어있는 글이므로 불펌 바랍니다...


ELECTRONICA의 역사1:

INTRO



 
      
피타고라스는 음악을 일컬어 영혼을 물질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 하였고 플라톤 학파에서는 음악이 천체의 조화이며 영혼이자 순환의 원동력이라 하였다. 음악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감정과 미적인 즐거움을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시대와 고유문화의 심리적 현상을 표현하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또한 악기의 연주 수단의 필요성 때문에 테크놀로지와의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새로운 악기와 장르가 출현하게 되었다.


 
       21세기 정보화 사회,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 혁명은 종족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 세게의 문화를 동일화 시켰다. 그 동일화된 문화 안에서 예술, 문화와 테크놀로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전자음악이 탄생하였고, 레이브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적 폭발을 일으켰다. 미디어는 이러한 전자음악에 전자댄스 음악 및 전반적인 현대 전자음악을 일컫는 ELECTRONICA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음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암시했듯 음악은 인간의 비언어적 의사소통과 한 시대 문화의 심리적 현상 표현을 가능케 하는 미메시스적/메타언어적 기능을 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따라서 현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전자음악 장르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앞으로 더욱 더 복합화될 문화현상을 이해하고 이에 대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서브장르는 무수히 많은데 그것은 장르 자체의 모호성 때문이다. 따라서 서브 장르 간의 차이를 구분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로 클럽의 칠 아웃 Chill Out 공간을 중심으로 한, 일명 '침실음악'으로 통하는 엠비언트 Ambient , 에시드 재즈 Acid Jazz 계열의 음악들과 댄스 플로어를 중심으로 한 테크노 Tehcno, 하우스 House, 트랜스 Trance, 드럼엔베이스 Drum n Bass, 갸라지 Garage 계열의 음악들은 상업 및 파티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테크놀로지와 생활양식 간의 유사성과 전반적인 집단 문화의 다양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 레이버 Raver , 지피 Zippie, 스파이럴 트라이브 Spiral Tribe, 테크노 트라블러 Techno Traveller 등의 하위 문화 집단들이 이러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와 같은 집단 문화들을 이야기할 때면 술, 마약, 폭력, 섹스 등 네가지 요소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국내의 경우, 야니 Yani와 에냐 Enya 등의 뉴에이지 아티스트들이 전자음악 혹은 일렉트로니카와 밀접한 관게를 가지고 있는 장르에 대한 관심을 불어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클럽 문화 활성화에 힘입어 테크노, 트랜스, 힙합, 드럼엔베이스 등의 일렉트로니카 음악 장르를 기반으로 한 하위 문화들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크로스오버적 성향이 깊은 라운지 음악이 서울의 부르주아 문화의 상징인 청담동과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렉트로니카 장르 내부에서 상위문화와 하위문화의 대립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로 다가온다. 이러한 고급성과 저속성의 대립은 요즈음 급부상하는 '파티'문화에서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조차 '즐기는 자'와 '방관하는 자'가 또 한번 크게 나위어 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렉트로니카 문화의 정착이 순조롭지 않게 혹은 지역적 문화특성에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파티' 문화에 대한 이해에 앞서, 파티가 행해지는 시공간 구성요소의 핵심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올바른 이해와 수용을 위한 체계적인 작업과 탐구가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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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VUW 이후 클럽컬쳐 매거진 BLING에 연재되는 새로운 음악 컬럼입니다. 잡지와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혹시 퍼가시게 될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는 센스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Ambient: Film and Electronica 01: 1 Giant Leap
                                                                                  2008년 10월자

Electronica & Ambient            

일렉트로니카는 90년대 중반 하향세를 보이던 팝과 락에 대한 대안으로 급부상한 테크노 음악과 레이브 문화의 하입 조성을 위해 미디어가 만들어낸 단어다. 보통 일렉트로니카라고 하면 ‘뿅뿅’거리는 음악 정도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아마도 국내 미디어가 깊이 없이 만들어 내는 유행어처럼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장르적으로 굳이 분류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뿅뿅’은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속한다.) 일렉트로니카는 비록 미디어 하입으로 태어났지만 테크노, 하우스, 트립합, 덥, 칠 아웃 등의 음악을 이렇게 잘 설명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 안에 들어있는 매력과 참된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ELECTRONICA

전자/전기적 행위에 의해 태어난 음악은 모두 일렉트로니카라고 (필자는 굳이 일렉트로닉 음악과 일렉트로니카를 따로 구분하고 싶지 않다.) 가정했을 때 CD나 레코드에 입혀져 나오거나 라디오 전파, 인터넷 선을 통해 듣게 되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일렉트로니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범주를 보편화 시키다 보면 사실상 일렉트로니카라고 해 봤자 말할 거리가 없어진다. 전기와 전자가 생활의 필수인 우리 문명이 듣고 있는 모든 소리와 음악은 일렉트로니카 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전기가 없었던 아주 오랜 시간 전의 음악, 예를 들어 아프리카 토속 민족이나 원시인들의 의식에서 쓰이던 노래나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서 (스피커 없이!) 라이브로 듣던 교향악단의 심포니 등은 일렉트로니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일까? 일단 위의 가정을 따른다면 일렉트로니카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시대와 문명에 주어진 자원과 도구를 통해 만들어낸, 바로 그 시대와 문명을 표현하는 음악이며 소리라는 점이다. 토속 원주민들은 그들이 가진 목소리와 돌멩이, 나무 등을 사용해 신과 자연을 숭배했고 클래식 음악가들은 스트링과 나무, 금속 등을 사용해 아름다운 관현악과 브라스 소리 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전기를 발견하고 전자의 기술이 발달하며 우리는 저장매체에 음악을 담아 듣기 시작했고 곧 그 것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실험하며 새로운 소리와 음악을 만들어 냈다.

마침내 디지털 시대에 돌입한 우리 문명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라는 엄청난 위력의 저장매체와 응용체제를 통해 더 많은 소스를 확보하고 더 많은 소리와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 그 때 그 때 주어진 문명의 발명과 자원을 모아 이리저리 조합하여 구현하는 점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일렉트로니카란 이 시대를 표현하는 우리 문명의 소리라는 더욱 넓은 관점에서 볼 필요성도 있다. 

여기서 잠깐 컬럼의 제목인 엠비언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엠비언트란 단어도 일렉트로니카만큼이나 의미에 대한 혼란도 많고 쓰여지는 관점도 다양하다. 길게 설명하기 보다는 간단하게 말해 엠비언트는 공간, 환경의 소리/음악이라 말하고 싶다. 엠비언스를 느낀다는 것은 소리를 통해 그 공간감과 환경을 느낀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좁은 공간의 계단에서 또각또각거리며 내려오는 걸음 소리를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공간 안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통해 당신은 그것이 여성이라고 연상할 것이고 더 나아가 구두의 굽을 느끼고 구두의 소리가 계단과 벽을 부딪히며 울리는 진동을 통해 그 공간자체의 여러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엠비언스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1 Giant Leap

전 세계 5개 대륙의 18개가 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담은 각각의 음악과 영상을 ‘다양성에 의한 조화’라는 개념 안에서 다룬 [1 Giant Leap (위대한 도약)]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엠비언트와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이해와 관점을 잘 풀이해주고 있다. 생각해보자. 6개월 간 18개의 도시를 돌며 노트북 컴퓨터 안에 담아낸 소스를 가지고 만들어낸 하나의 멀티미디어 작품이란 점은 디지털 시대가 제공하는 모바일과 멀티미디어 도구를 사용해 전 세계 인류 문명의 소리를 하나의 음악과 영상으로서 담아내려 한 진정 일렉트로니카적이고 엠비언트적인 위대한 모험이자 실험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1 Giant Leap은 진정한 Mash-up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던칸 (음반 프로듀서)과 제이미(그룹 Faithless의 멤버)라는 두 음악인이 만나 인류의 다양성과 조화를 음악을 중심으로 풀어보자는 생각으로 진행되었다. 서양 문명의 관점은 너무 좁고 개발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들의 초점은 자연스럽게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같은 제 3세계로 이어졌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던 시절이었던 만큼 휴대기기들을 통한 ‘모바일’ 환경을 극한까지 활용해 보자며 둘은 의기 투합했고 이내 기나긴 여정에 필수가 될 모바일 믹싱 스튜디오 환경을 구현했다. 모든 영상과 믹싱의 중추 역할을 할 G3 매킨토시 파워북, 그 안에 설치된 로직 오디오 프로그램, 5개의 헤드폰, 마이크, Emu 샘플러, 코르그 프로페시를 포함한 몇 대의 신디사이저,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 등을 준비했고 본격적으로 기나긴 여정을 떠난 것이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이들의 방식은 간단했다. 이메일을 통해 자신들이 생각해 놓은 각 나라의 아티스트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그 아티스트들의 성향과 프로젝트의 개념에 따른 아주 기본적인 음악 샘플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한 아티스트를 만날 때마다 그 음악 샘플을 들려주고 그들이 이에 반응하는 것을 다시 랩탑 안에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나라의 아티스트는 던칸과 제이미가 준비한 음악 샘플에 얹어진 그 전 아티스트의 사운드를 듣고 다시 즉흥적으로 그 만의 사운드를 얹는 방식이었다.

중간중간 아티스트의 성향과 영감에 따른 새로운 발견에 따라 과정 안에서 새로운 샘플이 태어나거나 수정되거나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이를 하나의 완성품으로 구현했다. 따라서 과정은 준비되었지만 지극히 즉흥적이고 창발적인 결과물을 나았다. 새로운 발견 후에 떠오르는 또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의 구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 스튜디오에서 일괄적인 작업으로 구현되는 일종의 장르 같은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음악이 아닌 전 세계가 참여하는, 전 인류의 다양성을 품고 있는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원래 음악 구현만을 염두 해두었던 제이미와 던칸은 스폰서의 조언에 따라 영상작업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뮤직비디오도 아닌 것이 다큐멘터리도 아닌 애매한 멀티미디어 작품을 원했던 이들의 영상을 보면 개념부터 음악과 영상까지 싱크로나이즈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음악에 맞추어 나오는 영상은 당시 아티스트들이 실제로 사운드를 구현하고 있던 그 순간이며 시간, 대립, 섹스, 하느님: 믿음, 신성모독, 화합), 영감, 행복, 돈, 가면, 죽음이라는 각각의 테마를 통해 각 분야의 학자, 철학자, 연예인, 아티스트 등이 생각하는 테마에 대한 생각을 담은 인터뷰와 함께 매쉬업 되어 있다. 더군다나 CD-Rom/DVD라는 선택 가능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는 매체의 특성을 활용하여 시작과 끝이 없는 순환구조 (이 또한 너무나 일렉트로니카적인 Loop의 요소다!)로 이루어져있다. 

하이피델리티의 음질과 HD의 깨끗한 화질만을 추구하는 리스너와 뷰어를 충족시키기에 이 작품은 음질과 화면 구현 면에서는 열악함을 극복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아마추어’의 사운드 시스템과 영상장비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소음과 잡음이 들어가있던 샘플들을 가지고 편집한 이 작품은 오히려 기술이 곧 감동을 전해주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그들이 말하는 테마에 대한 생각은 음악과 영상의 떨어지는 스펙 상의 ‘질’만큼이나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전해주지도 않고 지극히 주관적인 측면도 많다. 하지만 많은 에너지와 집중을 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나가며 들으면 한번 멈추고 음미해 봄직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인터뷰들은 간간히 음악과 함께 오버랩이 되며 일종의 꼴라쥬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듯하다. 꼭 DSLR을 가져야만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스펙이 다는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음은 물론이고 진정한 디지털 유목민의 요소를 활용한 이 경험을 자산 삼아 2002년 그들은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1 Giant Leap의 시퀄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티벳 탄압에 항의하며 올림픽 보이콧을 할 듯했던 각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꼬랑지를 내리고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갈등이 빚어낸 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인류의 화합이라는 올림픽에 대한 의미는 무엇일까? 거의 6년이 지나 다시 들춰보는 1 Giant Leap이 시도한 ‘다양성을 통한 인류의 조화를 음악을 통해 구현해본다’라는 실험과 지금의 올림픽은 사뭇 비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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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돼었던 일렉트로니카 이야기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시리즈로 잡지 원고 종료 이후 블로그에서만 계속되는 컬럼입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Vibe Upon the World 23:
           the Ministry of Sound,
                     
                             매시브 클럽 씬의 절대 왕정1991-present Par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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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ive Clubbing 문화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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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과 90년대 사이 애시드 하우스 붐이 영국을 뒤덮으며 지하에서 움츠려 있던 클럽은 오버그라운드로 뛰쳐 나왔다. 자신들만의 소중한 경험과 기억을 중요시 하던 '파티' 개념의 클러빙은 이제 돈벌이의 중요 수단이 돼어버렸다. 도시에게는 문화를 통한 수익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함은 물론이고 프로모터들에게는 단번에 일확 천금을 안겨줄 당시의 '블루 오션'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작은 지하에서 형성되던 클럽들은 규모를 엄청나게 키워갔으며 각종 단발성 대형 레이브/파티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흐름에 동조하며 1990 모습을 드러낸 리버풀의 크림 Cream 런던의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 Ministry of Sound 각각 영국을 대표하는 대형 클럽으로서 지금까지 클럽뿐만 아니라 레이블, 외식, 라운지 라이프 스타일 관련의 다양한 사업을 벌이며 영국뿐만이 아닌 세계 하우스 클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해 왔다.  


Ministry of Sound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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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인 이튼 출신의 제임스 팔룸보가 애시드 붐에 가세해 런던에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를 (이하 MOS) 세웠을  아무도 작은 클럽이 영국의 댄스 음악 문화를 손에 쥐고 흔들 거대 브랜드로 거듭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세계의 하우스 클럽 컬쳐의 거대 공룡으로 상징되며 지금까지 천오백만 장이 넘는 앨범을 팔아 치웠다. 영국에서만 해도 팔리는 앨범 5 중의 하나는 MOS 것이라고 한다.) 영국에서 애시드로 대변되는 하우스 댄스 문화가 미국에서 건너온 만큼 이에 영향을 받은 팔룸보의 MOS 미국의 웨어하우스 파티를 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1991년부터 시작된 MOS 하우스 음악을 핵심 사운드로 지켜 왔다.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한 빠른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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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을 치달을며 뜨거웠던 영국의 애시드 하우스 붐은 열기가 점차 식어갔다. 대신 정글, 테크노, 개러지 새로운 장르의 음악들이 댄스 음악 씬을 점령했다. 흐름에 편승한 MOS 1995 정글 나이트를 개시하며 하우스 중심이었던 클럽 사운드의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 좀더 다양한 소비자 층을 확보한 MOS 핵심 사운드를 하우스에 두면서도 트렌드에 맞게 정글, 개러지, 트랜스 등으로 확대하며 빠르게 변하는 클러버들의 입맛을 맞춰 나갔다.

 

ATB 9pm Till I Come, MOS 싱글 성공신화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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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나이트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MOS 1999 밀레니엄을 앞두고 ATB '9 pm Till I Come' MOS에서 나온 싱글 최초로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레이블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트랜스 신드롬을 낳고 수퍼스타 DJ 시대를 초래했다. 이때부터 MOS 컴필레이션 앨범이 불티나듯 흥행 고를 올리기 시작했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 세계에 MOS 클럽 확장에 불을 붙였다. 영국을 벗어나 세계 댄스 클럽 음악 문화의 우두머리가  MOS 싱글 성공의 번째 쾌거는 2004 스웨덴 출신 DJ 에릭 프리즈의 "Call on Me" 발표되었을 때다.


80년대 Retro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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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가수 스티브 윈우드의 히트 팝송인 'Valerie' 원곡으로 에릭 프리즈의 'Call on Me' '발레리' 클라이맥스인 'call on me~' 부분만을 따와 리믹스한 전형적인 업템포의 클럽 하우스 댄스 트랙이다. 발매와 동시에 장장 16  영국 댄스 차트 1위를 차지한 트랙은 영국을 들썩이게 만들며 90년대 시작되었던 80년대 일렉트로 사운드를 주류로 올려놨다. 바로 최근 패션, 음악 분야의 트렌드를 장악하고 있는 80년대 레트로 붐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에어로빅을 테마로 뮤직 비디오는 천연색상, 라이크라와 줄무늬 패턴, 레그워머, 박스와 카세트 테이프 등의 요소와 MOS특유의 섹시한 여성 댄서 향연의 조화로  가장 섹시한 뮤직 비디오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특히 뮤직 비디오의 주인공인 딘 베리는 호주 출신으로 이 영상의 안무까지 맡았는데 일략 스타덤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휴즈 프로덕션의 What a Feeling (아이린 카라의 리메이크)의 뮤직 비디오에 다시금 출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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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때부터 80년대 히트곡들의 하우스 리메이크 트랙들이 무차별하게 쏟아져 나오며 물량공세의 의한 질적인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미 MOS 컴필레이션은 80년대를 향유하던 ( 적인) 일렉트로 사운드로 범벅이 되어 있을 정도다. 질적인 비판을 떠나 MOS 보여주는 시대 트렌드 흐름에 대한 파악 능력과 알맞은 타이밍을 통한 마케팅적 공략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의 레이블이라는 절대왕권을 거머쥐게 있는 원동력이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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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블링에 연재 돼었던 PVUW의 마지막 회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ㅋ
    앞으로 [Ambient: Film& Electronica]라는 새로운 시리즈로 만나 뵙겠습니다.
                                                                                                                                      -Groovie


PLUR & Vibe Upon the World 22:
               
최초의 Invitation-Only 파티,
                          David Mancuso’s Loft Party


고아원의 기억, 그리고 로프트 파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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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코가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1965년 경 데이비드 만쿠소라는 한 사나이가 뉴욕의 647 브로드웨이에 로프트 하우스를 처음으로 얻게 되었다. 거주 공간이 아닌 사무 공간으로 꽤 넓은 규모를 가졌던 이 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의 머리 속에는 고아원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이 필름처럼 스쳐갔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녀님이 차려준 저녁을 먹으며 함께 했던 그 식탁 위에는 항상 레코드 플레이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 버려진 어린 아이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제공했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고아원의 넓지만 텅 빈 듯한 내부 공간과 허름한 건물은 이 작은 아이들의 외로움과 고독을 상징하는 듯 했지만 맛있는 음식과 분위기를 한층 돋구는 음악 그리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은 그들에게 작은 파티나 다름 없었다.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마련한 만쿠소의 로프트 하우스의 넓고 낡은 공간은 마치 그를 어린 시절의 행복한 시간으로 돌려 놓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음악과 사람을 사랑했던 만쿠소는 자신의 로프트에서 그 때의 경험을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때가 바로 뉴욕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전설의 언더그라운드 파티인 로프트 파티 The Loft Party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참여자들이 만들어 가는 순수한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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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쿠소의 파티는 여느 클럽 이벤트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입장하기 위한 티켓을 팔지도 혹은 배포하지도 않았으며 음식과 마실 것들은 제공될 뿐, 팔지 않았다. 참여자들 하나하나의 작은 기부를 통해 파티와 렌트 자금을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지인들 간의 인비테이션 온리 Invitation-only 파티였기에 준비하는 과정 속에 친구와 공동체를 위한 정성이 들어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사랑과 어우러짐의 모토와 함께 로프트 파티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훈훈'했다. 프로모터나 DJ가 밥상 차려주듯 내놓는 것이 아닌 참여자들 모두가 함께 만들어나는 분위기와 경험이 바로 로프트 파티만이 가진 '특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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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트 파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람들 간의 평등함이었다. 자신의 옆 사람이 부자였건, 높은 사회 지위를 가진 사람이건, 게이나 레즈비언이건 혹은 유색인종이었든 간에 로프트 안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로프트를 꽉 매운 음악과 행복의 열기 속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만쿠소가 파티를 진행해가며 원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면서도 감사하고 신기했던 현상이었다.

로프트 파티가 그 규모와 유명세를 쌓아가며 서서히 연예인들과 같은 유명인들도 참석하기 시작했지만 로프트 공간 밖에서 '특별했던' 사람들은 내부에서는 똑 같은 로프트 베이비들이었다. 보통 식당이나 파티에 갔을 때 유명한 영화 배우라도 목격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야, 야, 저기 XX가 왔어 봐봐, 우와"하며 수군거리곤 하지만 이런 촌극은 로프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참여자 한 명 한 명 모두가 로프트의 경험에 작은 일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한 시공간에 대해 서로 의무감과 보람을 느꼈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만쿠소의 마술 같은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oft Party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DJ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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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 시절 수녀님이 마련해준 레코드 플레이어처럼 사람들의 유대감을 높여주는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파티를 위해 만쿠소는 정성껏 그의 설렉션을 테이프에 담았으며 이 테이프들 속에는 다양한 장르의 빠르고 느린 음악들이 섞여 있었다. 오늘 날 하우스 클럽 음악의 모태가 되는 라틴 리듬과 소울 풍의 보컬 음악 등이 흥을 돋구는 한편 밴 모리슨의 애스트랄 위크 <Astral Weeks>의 음악들이 흘러 나오기도 했다. 여러 배경의 사람들을 상대로 했던 이비자의 DJ 알프레도 피오리오와 비슷한 맥락의 선상에 서있었다.

또한 기본적인 DJing 스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쿠소는 로프트 파티를 이끌어가는 DJ로서 믹서나 헤드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음악이 끝나기 전 다른 음악으로 넘어가버리는 트랜지션도 없었다. 음악 하나하나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울려 퍼졌다. 음악에 가해지는 볼륨, 피치조정, 리믹싱과 같은 어떠한 인위적 '조작'과 '분절'은 원작자가 의도하고 그 음악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감성과 듣는 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 시키는 행위라고 만쿠소는 믿고 있었다. 시작과 끝의 결말을 맺음으로 그 음악으로부터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음악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는 그의 독특한 DJ 철학이었던 것이다. 만쿠소에게 DJing란 오히려 하나의 긴 여정과 같았으며 파티가 시작해서 끝나는 시점까지의 음악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세트를 이루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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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파 사운드 디자이너 리챠드 롱 Richard Long과 함께 일구어낸 로프트의 사운드 시스템 또한 한 몫 했다. 주류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만쿠소의 손을 떠나 매킨토시 McIntosh 앰프를 타고 클립쉬혼 Klipschorn 스피커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로프트의 바이브Vibe를 최 절정으로 끌어냈다. 알콜 음료도 제공되지 않았던 이 곳에서 만쿠소의 음악에 취해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로프트 베이비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 이었다. (로프트의 사운드 시스템은 그 당시 패러다이스 개러지와 함께 거의 세계 최고 수준으로서 아직까지 전설로 회자 되고 있을 정도다.)


언제나 되돌아오게 되는 로프트 베이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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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의 생일 파티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상 시키듯이 준비된 여러 풍선 장식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거대한 디스코볼이 반사하는 불 빛 아래 수많은 사람들… 그렇게 3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지속된 로프트 파티에 당시 젊은이에 불구했던 로프트 베이비들은 성인이 되고 가정을 가진 후에도 자신들의 아이들과 함께 로프트를 찾았다. 만쿠소에게 있어 이 보다 큰 보상과 보람은 없었다. 이런 특별한 로프트 만의 경험은 수많은 로프트 베이비들로 하여금 인생의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게 해주었다.

  

"개인적으로 로프트 파티는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성행하던 주류 바Bar나 클럽club에 대한 작은 반란이기도 했지요. 전 항상 무언가 개인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정형적인 주류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아주 단순한 일 말이죠."라고 만쿠소는 지나간 시간들을 이렇게 회자하고 있다.


Trivia:

*로프트 파티 이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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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Love Saves the Day' (대략 '사랑으로 오늘을 구원하다'라고 풀이된다)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파티가 거듭나며 사람들 사이의 대화 속에서는 "오늘 (만쿠소의) 로프트로 간다"라는 식의 말이 자주 오고 갔다. (한국말로 풀이해 봐도 "사랑으로 오늘을 구원하다 파티에 간다" 보다는 훨씬 덜 어색해 보이듯)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티의 명칭도 '로프트'로 변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로프트 파티에는 수많은 전설의 DJ들도 함께 했다. 그 이름을 몇 열거하자면, 디스코 DJ인 프랑수아 케보르키안 Francois Kevorkian, 시카고 하우스의 대부 프랭키 넉클스 Frankie Knuckles, 데니 크리빗 Danny Krivit, 역사 상 가장 위대한 DJ로 칭송 받는 래리 러반 Larry Levan, 데이비드 모랄레스 David Morales, 닉키 시아노 Nicky Siano 등이 있다. 만쿠소의 로프트 하우스 파티는 이들 모두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음악적 영감과 경험을 선사했다.

현재 데이비드 만쿠소의 Loft Party는 런던에서도 1년에 4회씩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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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 & Vibe Upon the World18:
 
       Shibuya-Kei Part 2.: 왜 된장의 사운드트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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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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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초반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와 부동산 공황의 여파로 소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경제적 침체기를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10년 전 일본의 모습은 IMF 이후 경제적으로 악화 되어 가는 지금의 한국과 많이 닮았다 그리고 옆의 그래프는 잃어버린 10년 간의 미취업률 분포도이다.)

하지만 언제나 경제가 힘들 때 놀랍게도 언더문화는 발전해 왔다. 영국의 하우스 문화와 일본의 시부야케이가 아주 좋은 예다. 시부야케이는 경제의 침체 속에서 체제를 거부하며 젊음으로부터 발산되는 열정과 창의력 그리고 철학과 실험정신을 통해 시작된 일종의 문화 현상이었다. 결국 경제 침체 속의 분위기에서 그 새로운 문화는 어느 때보다 영광의 빛을 뿜어 내며 가, 애니메와 함께 전 세계에 일본의 선진 문화를 널리 알린 일등 공신이 되었다.
 

경제가 힘들때면 문화는 꽃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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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경제 침체는 소비 시장의 위축을 불러 왔지만 이 새로운 물결은 그 공허한 빈자리를 신선함과 또 다른 열정으로 채웠다. 젊음의 언더문화는 뒷골목의 음침함을 걷어버리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추었다. 대기업의 유통망을 통하지 않은 새로운 패션 스타일과 브랜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곧 음악 취향의 변화도 이끌고 왔다. 통기타와 락 그리고 대중 가요라는 뻔한 선택권 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은 테크노, 힙합, 하우스 같은 다양한 음악 장르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이 것이 꽃피는 곳은 바로 클럽이라는 공간이었다.

더욱 많은 이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무언가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정보화의 흐름에 탄력 받은 디자인과 미디어 매체의 활성화도 따라왔다. 바로 창조적이며 열정적인 실천과 실험에 의해 문화적 다양성이 실현되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90년대 이 열정적인 문화적 움직임의 주역이 바로 시부야케이였던 것이다.    
 

정치적이지도 반항적이지도 않은 별난 언더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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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시부야케이는 언더문화로서 특이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번 질문해 보자. 언더문화의 특징이 뭐냐 물으면 반항, 무정부주의적, 파괴, 폭력, 정치성과 같은 격한 이미지들이 보통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지금까지의 언더문화들이 그래왔기 때문이다.

펑크건 하우스건 그런지건 기성세대와 절대 권력을 향한 강하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이모(Emo) 현상도 별 다를 바 없다. 겉으로만 찔찔 짜고 있을 뿐 내적으로는 철저히 자기 파괴적이라는 성향은 꼭 닮아 있다. 근데 시부야케이는 비폭력적이고 정치적 성향도 없다.

그 뿐인가, 히피와 LSD, 하우스와 엑스타시 처럼 마약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없다. (항상 언더문화의 부록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마약이건만) 그럼 대체 뭔가? 말 그대로 언더문화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언더문화였던 괴물 같은 변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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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의 원인은 그 출발 시점의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구의 언더문화를 보면 대부분 억압받고 위축된 젊은 세대들의 과격한 반항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주역들은 노동계층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하지만 시부야케이의 경우 (서구보다 덜 반항적이고 순종적인 일본인들만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억압된 노동계층의 반란이라기 보다는 좀더 여유 있고 학구적인 중산층들이 시작의 발단에 서있었다. (그렇다고 선택된 엘리트들의 세련된 선택이라는 반 민주주의적 발언은 아니다.)

그리고 철학과 인문적 소양을 발판으로 한 이들의 문제는 마케팅 혹은 프로파간다적 미디어 세뇌를 무기로 한 주류문화에서 어떻게 탈출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오히려 60,70년대 반전을 외치며 정치적 선상에 서있던 우두스톡의 무리들과 정 반대편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 물질/소비주의 사회의 실체를 바라보려 했던 벨벳언더그라운드와 앤디 워홀과 더 닮아 있다.
 
시부야케이는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의 핵심인 소비주의 사회를 끌어 안으며 자신들이 어릴 적 즐겨 듣던 음악들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글로벌리스트 소비 사회의 무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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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주의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지향했던 미국 경제 모델이 발판이었고 그들의 현실을 힘들게 만든 주체임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반감은커녕 오히려 품에 안았다. 소비주의의 특성인 소비하고 수집하고 꾸미는 행위에 대해 언제나 열려있던 현대 일본 문화의 특징을 보면 시부야케이는 물론이고 무라카미 타카시, 요시모토 나라와 같은 걸출한 팝 아티스트들이 터져 나온 맥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더욱 극적인 것은 그들이 찾아낸 표현의 탈출로가 그들이 소싯적 즐겼던 60년대 유럽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세계의 음악적 흐름이었던 샘플링 컬쳐가 만나 하이브리드적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동시대 흐름이었던 힙합, 하우스, 테크노와 그들의 향수 속에 존재했던 프렌치 팝, 이탈리안 사운드 트랙, 보사노바, 매드체스터, 아노락팝, 크라우트 락 등의 여러 요소들이 만나 일종의 짬뽕 세레나데를 일구어 냈다.) 열거한 음악 종류들을 보면서 현기증이 날 듯 하듯이 시부야케이는 어중간한 크로스오버의 레벨을 넘어선 새로운 변종이었다. (이는 1920년대 디자인의 극단을 보여준 다다의 브리콜라쥬와 패스티시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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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민족주의, 특정문화와 같은 절대적 도그마가 사라지며 '정체성'이란 것은 투명하게 사라졌고 테크놀로지, 모더니즘, 팝 아트가 묘하게 혼재된 아주 인공적이고 플라스틱한 레트로 퓨처리즘을 탄생 시켰다. 특히 이 인공적이고 플라스틱한 측면은 소비주의가 내세우는 '세계화' 혹은 글로벌리즘과 꼭 맞아 떨어진다. 세계화의 특징은 특정 문화에 영향 받지 않고 어디에나 침투할 수 있는 '무정체성'이다.

미국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주체로 유럽피안적인 미학을 가미한 시부야케이의 동양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은 사운드의 무정체성은 현재(혹은 그 시대) 글로벌리스트 소비사회를 그대로 비춰주며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사운드 트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일본은 물론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식 소비 사회의 찬양이라고 무작정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 같다. 오히려 하이테크, 기업, 미디어, 소비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시대적인 현실의 감수성을 그대로 담아낸 헬로키티의 괴기한 거울과 같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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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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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로 짧게 나마 다루고 싶은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Digging이라고 하는 수집의 미학이다. 숨어있는, 혹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운드를 찾아내는 DJ의 필수 요소로 DJ Shadow와 DJ Spooky와 같은 턴테이블리스트들이 그 대명사로 꼽힌다.

     시부야케이가 샘플링 컬쳐를 껴안은 만큼 이 디깅의 미학도 빛을 보았다. 옛 유럽 음악들과 새로운 인디 밴드들의 사운드의 소개는 물론 일본에서 들을 수 없었던(그리고 전 세계에서 잊혀졌던) 사운드들이 시부야케이 음악 속에 샘플링 되어 담겨졌다. 저작권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지만 이 디깅의 미학은 시부야케이 아티스트들의 보물 창고로서 그들의 음악성에 있어 절대적인 힘이 되었던 것이다. 시부야의 HMV에서 시부야케이 음악을 찾던 이들의 행위 또한 일종의 디깅이었고 이는 결국 시부야케이라는 용어를 탄생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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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부야케이의 죽음 또한 디깅의 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부야케이가 거대한 대중문화 현상으로 떠올랐을 때 미디어는 호들갑을 떨었다. 결국 시부야케이가 가지고 있었던 디깅을 통한 희소성은 사라졌고 인사이더가 되거나 공들여 찾지 않아도 카페나 미용실에 얹혀져 있는 잡지에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쿨한 트렌드 아이템으로 전락한 것이 바로 몰락의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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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는 여성 아이콘에 관한 것이다. 이 것 또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한 상징적 의미 부여라는 점을 뽑고 싶다.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그룹에서 여성은 귀여움, 섹시함 혹은 아름다움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얼굴 마담의 역할을 전통적으로 행해 왔다. 하지만 그 기괴함을 떠나 카히미 카리에의 철학성과 음악성 그리고 최전선에 나서 코니시 야수하루의 음악에 피치카토 파이브의 그 퍼포먼스/행위적 성격을 더한 당차고 '멋진' 마키 노미야의 모습은 분명 동시대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각개약진 하고 있던 여성들과 억압받던 소수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시부야케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블론디의 데보라 해리에 필적할 만한 아이콘적 위상을 얻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 향상에 대한 상징은 있었을지언정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마키 노미야 폰'이라던지 하는 10대, 20대의 지갑을 노린 우스꽝스러운 소비주의적 마케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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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말이 나온 마당에 하는 얘긴데,
90년대 중반 일어났던 일본의 카페 성황 속에 자리잡았던 시부야케이는 이미 상업전선에 합류된 이후의 일이다. 그 시절 잘 나갔던 카페 아프레미디, 엑셀시오르 커피샵(프랜챠이즈) 등의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분위기 속에서 즐기는 커피와 보사노바 음악, 미용과 패션 정보 그리고 대화들은 시부야케이 문화의 대중화 속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유럽이라기 보다는 '시부야케이가 지향했던 유럽에 대한 판타지적/페티시적' 성향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유럽지향적 카페의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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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미국식 프랜차이즈 카페의 대명사인 스타벅스의 일본 상륙으로 다양한 커피들이라는 선택의 욕구는 채워졌지만 결국 승리자는 유럽지향적인 (특히 프랑스 파리) 카페였다.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의 틀을 부수며 사회 진출을 하고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20,30대 여성들과 패션에 민감한 어린 세대를 위해 카페는 커피와 수다 뿐만이 아닌 혼자 커피 한 잔도 즐길 수 있는 그런 편안하고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는 실내 공간감을 더욱 살려주는 음악 그리고 커피와 더불어 다양하고 전문화된 이른바 Café Cuisine이라고 하는 음식의 요소를 더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 공간은 '유럽'이 아닌 '유럽에 대한 페티시를 담은 판타지적'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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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스타벅스나 섹스 엔 더 시티를 통해 느끼는 것은 바로 뉴욕의 정서가 아닌 '자신이 상상하고 느끼고 싶은 뉴요커에 대한 판타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는 이미 세계화를 특징으로 한 물질/소비주의 사회가 배출해낸 하나의 떳떳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약 5~10년 사이 국내에서도 스타벅스, 브런치 문화와 함께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한바탕 된장 열풍도 겪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가 스타벅스를 사고 미니 홈피를 시부야케이 음악으로 수놓는 그녀들을 향해 된장녀라 감히 욕을 하고 돌맹이를 던질 것인가? 그 '된장'이란 키워드가 만약 소비와 물질주의와 맞물려 있다면 시부야케이만큼 어울리는 음악도 없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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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6:

                                   Madchester Part2


808 State & A Guy Called G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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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파트1에서는 매드체스터의 시작과 그 중심에 있던 밴드들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대체 DJ들은 어디 있었는가? 표면 상으로 볼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는 인디밴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기서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애시드 '하우스' 붐의 한 사건인 매드체스터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일 수 밖에 없듯이 정통 인디밴드의 역사를 자랑하는 맨체스터를 향한 미디어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즉 기존의 락 관련 미디어는 흑인 태생의 하우스의 영향을 무시했고 백인으로 구성된 락의 정신을 가진 듯한 인디밴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먼데이즈와 로지즈 모두 댄스 문화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애시드 문화의 한 일원이 되었다. 먼데이즈의 경우 워낙 복합적인 음악 성향과 리믹스의 활용 그리고 하우스씬에 대한 관여도 면에서 애시드 문화와의 이질성이 발견되지 않지만 로지즈의 경우 'Fool's Gold'를 통해 하우스 음악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정통 인디락 밴드의 성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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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애시드 하우스의 사운드를 품은 초기 그룹은 바로 808 State. 퓨전 재즈, 일렉트로, 신스팝을 중심으로 한 808 State 1988 'Pacific State'를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그룹의 멤버였던 제랄드 심슨은 '가이 콜드 제랄드'라는 이름을 통해 808 state에서 탈퇴하고 'Voodoo Ray'를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애시드 하우스 클럽의 앤섬이 될 만큼 Pacific State에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제랄드 심슨은 차기 앨범 준비에 있어 레코드 회사의 상업화 아이디어의 신물을 느끼고 언더그라운드로 잠적하고 90년대 중반 철저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프로듀서의 모습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드럼 엔 베이스'의 모태가 되는 '정글' 씬을 탄생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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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을 떠나 보낸 808 State는 오히려 상업 레이블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애시드 하우스의 선봉장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이들의 성공은 동시대 아티스트들 (칠아웃 장르를 탄생시킨 KLF, 뉴에이지 이상을 담은 The Shamen, 사이키델리아를 통한 하우스의 정치적 좌파 성향을 더한 Primal Scream )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애시드 하우스가 오늘 날 회고될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이들이야 말로 사운드적 크로스오버와 댄스를 통해 음악과 몸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하우스 문화의 이상을 사운드로 풀어낸 주역들이었다
. (그들에게 있어 하우스 문화의 폭발은 펑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펑크가 자신의 팔의 완력을 최고조화 시켜 기타를 부셔버리는 물리적인 분노의 폭발이었다면 하우스는 몸의 완력을 댄스에 맞추어 완화 시키며 일체화 시키는 트랜스적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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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마찬가지로 마약에 의한 갱들의 개입과 정부의 불법 클러빙 및 레이브 탄압이 시작되었다. 1989 7월경 16살의 클레어 레이튼이라는 소녀가 엑스타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런던과 같은 운명의 스텝을 따르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디어는 야단 법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트렌디/애시드 테드로 구성된 어린 청년들을 애시드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버렸다.

그리고 당시 악명 높았던 살포드 폭력단의 개입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서브컬쳐의 죽음의 상징이 되어온 마약, 코케인이 다시 등장했다. (갱들은 엑스터시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 수입원은 언제나 코케인이였기에) 잦은 갱들 간의 마찰과 살인 사건, 마약의 유통 등은 경찰의 강한 제지를 불러들였고 하시엔다에서는 총기류 검문을 위한 메탈 디텍터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맨체스터는 매드체스터에서 건체스터Gunchester로 불렸고 물론 파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클러빙/레이브 프로모터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드체스터의 기간 동안 사랑과 우정, 이상과 희망으로 쌓아 올린 공동체 의식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며 파도와 같은 사이코시스와 파라노이아를 불러일으켰다. 91년 즈음 하시엔다가 문을 닫은 것은 물론이고 하시엔다와 어깨를 겨누며 시대를 풍미했던 썬더돔과 컨스퍼러시 클럽들 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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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체스터를 대표하던 먼데이즈와 로지즈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걷는 것 같았다. 로지즈는 스파이크 아일랜드 이후 종적을 감추었고 먼데이즈는 저명 음악지 NME지와의 인터뷰에서 매드체스터의 종결을 알리는 듯한 사건을 터뜨린다. 그들은 그 동안 지켜 왔던 노동계급층의 대변자의 위치를 던져버리고 소비주의적 시선에서 돈에 대한 찬양, 게이에 대한 혐오감, 여성 비하 발언 등을 늘어뜨려 놓았다. 물론 이것은 미디어와 대중에게는 용서될 수 없는 비윤리적 발언이었고 즉각 모든 이들이 먼데이즈의 몰락을 예감하게 되었다.

또한 밴드 리더 션 라이더의 헤로인 중독 이후 빚어진 차질과 이로 인해 연기된 뉴오더의 차기 앨범 등의 문제로 인해 팩토리 레이블이 부도가 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90년도 말에 출시 된 먼데이즈의 <Pills 'n' Thrills and Bellyaches> 앨범은 수많은 사건 사고를 떠나 매드체스터 시대를 총망라한 마지막 위대한 앨범으로 기록된다.)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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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매드체스터 향연의 빛이 서서히 꺼졌을 때 맨체스터의 클럽들은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를 완화하는 곳도 있었고 도시의 외각지역에서 이벤트를 여는 클럽도 생겨났다. (갱들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게리 매클라란의 딜라이트 클럽으로 이곳에서 알렉산더 코이라는 새로운 전설의 DJ 클러버들을 광분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매드체스터의 마지막 자락에 혜성처럼 나타난, 믹스매그 매거진이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Sasha 사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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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주목할 점은 갱들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사람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게이 클럽이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회적 소수의 하나인 게이 커뮤니티는 그 특성 상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는 디스코와 마찬가지로 애시드 하우스가 그 숨결을 다시 내 쉴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로서 백인 남성 성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하우스 클럽에서 디스코 댄스에 맞추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근육질의 남성들, 레즈비언, 드래그퀸들이 씬의 모습을 채워가고 있었다. 물론 도어폴리시가 강한 곳이 태반이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갈 시에는 바운서 앞에서동성'의 친구에게 프렌치 키스 등을 감행하며 자신이 '스트레이트'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는 비화도 있다. 이 움직임에 하시엔다 클럽도 맨체스터의 새로운 게이 클럽으로 변모했다. 맨체스터가 매드체스터, 건체스터에 이어 '게이체스터 Gaychester'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매드체스터의 한파로 인한 나이트 라이프의 때 아닌 붐은 곧 도시 수입의 기특한 효자 노릇을 했다. 따라서 광기의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길들어졌을 때 즈음 혹독했던 클럽 라이센스 규제들은 완화되었다. 종전에 비해 바와 클럽은 두 배로 늘어났고 24시간 쉬지 않는 문화와 클러빙 레져의 메카로 맨체스터는 거듭났다. 하지만 갱들 간 마찰, 마약 뒷거래와 같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특성의 문화가 이제는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를 남겼다. 어찌하였건 96년 즈음되어 애시드 하우스는 이제 '올드 스쿨' 사운드가 되어 정글, 테크노, 개러지와 같이 세분화 된 다양한 장르에 문화의 중심 자리를 내 주게 되었다.  

 


 

Recommanded Acid Tracks (순위 기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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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Give Me Some Love by Love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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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eat Dis by Bomb the 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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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Activ-8 (Come with Me) by Altern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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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Everything Starts with an E by E-Zee Pos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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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What Time is Love? By The K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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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eme from SExpress by SEx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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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acific State by 808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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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Voodoo Ray by A Guy called G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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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We Call it Acieed by D M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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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ove Any Mountain by The Sh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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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 & Vibe Upon the World 12 월자: MADCHESTER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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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문화의 중심, 맨체스터  

 박지성 선수로 인해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도시 , 맨체스터는 오랜 동안 영국의 중요한 현대 역사의 순간을 장식해 왔다. 근대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이 곳은 빅토리안 시대의 기업과 상업을 발전 시키며 '세계의 굴뚝'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 사회주의자였던 엥겔스가 머물렀었고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의 아이디어를 얻게 했을 정도였다니 시절의 엄청난 위용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대로 제조업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 이에 대한 탈출구를 새로운 문화와 레져 사업에서 찾게 되며 맨체스터는 음악, 미디어, 스포츠 등을 통해 서서히 영국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도시가 가진 경제력을 통해 얻어지는 추진력과 크지도 좁지도 않은 땅덩어리로 인한 내부 커뮤니티 형성의  용이함을 통해 구축된 탄탄한 음악산업의 인프라스트럭쳐는 케미컬 브라더스, 오아시스, 뉴오더, 찰라탄즈, 스미스 등과 같은 걸출한 음악인들을 배출해 내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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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Order    

영원한 인디락의 도시 맨체스터가 하우스 음악에 빠진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으로 돌아간다. 1980, 'Love will Tears us Apart'로 친숙한 70년대 인디락 밴드, 조이 디비젼 Joy Division의 카리스마틱한 보컬 이언 커티스는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우울증의 영향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이언을 떠나 보낸 나머지 멤버들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 )은 키보디스트였던 모리스의 여자친구를 새로이 영입한다. 이 때부터 이들은 뉴오더라는 이름 하에 기존 밴드 형태에 일렉트로닉 시퀀서와 드럼 머신을 겸비하고 새로운 전자 음악 사운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뉴오더의 사운드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반응은 실로 엄청났었고 그룹 이름이 의미하듯 이들의 새로운 등장은  맨체스터 인디락 씬의 죽음을 선언하고 다가올 전자 댄스 음악의 물결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들의 히트곡  'Blue Monday'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큰 반향을 일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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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cienda Club & Thunderdome  

뉴오더와 각종 신흥 인디 밴드의 고향이었던 팩토리 레이블의 프로듀서 토니 윌슨 (얼마 전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타계 했고 암 투병 속에서도 의지와 희망을 간직했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82년 맨체스터 나이트 라이프 문화의 전설로 남게 될 하씨엔다 클럽을 열게 된다. 뉴오더의 앨범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한 이 클럽은 당시 트렌드에서 앞서 나가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미학을 보여주었다 . 초기 사운드는 소울, 재즈 펑크, 라틴 계열의 음악을 주를 이루지만 1990년까지 6년 동안 이어진 마이크 피커링의 '누드 나이트'가 시작 되며 크라프트베르크 사운드에게 영향을 받은 일렉트로, 힙합 , 테크노팝, 애시드 하우스 등을 소개하고, 88년 즈음 본격적으로 트랙스 레코드, 디제이 인터내셔널에서 흘러 들어온 정통 애시드 하우스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는 당시 클러버들의 주를 이루었던 대학생들과 트렌디들 보다 저돌적이고 보헤미안의 성격을 가진 노동계층의 청년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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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가난한 노동 계층에게의 어필이라는 현상은 히피의 영향이 강했던 런던의 2nd Summer of Love와 크게 차이를 보인 것이었고 많은 이들이 진정한 맨체스터만이 가진 애시드 문화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이 모더니즘적인 사운드에 노팅햄의 개러지 클럽과 세필드의 자이브 터키 클럽도 가세했고 DJ 스투 알렌의 버스 디스 Bus Dis 라디오 쇼가 이 사운드를 소개하며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혜성처럼 등장한 해피 먼데이즈의 미쳤다 싶을 정도의 정열적인 퍼포먼스는 Freaky 프리키 댄싱이라는 표어를 만들어 내고 이른바 Madchester 씬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런던과 함께 맨체스터 서브컬쳐가 애시드 문화에 장악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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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드 문화가 그 덩치를 키워가며 하시엔다 클럽 또한 런던의 슘과 마찬가지로 인사이더들만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 이렇게 해서 맨체스터의 애시드 클럽씬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남쪽은 좀더 도회지향적이고 학생들과 미디어에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북부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거칠고 척박한 삶을 살아가던 노동 계층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 이 때  북부를 상징한 클럽이 바로 썬더돔 Thuderdome이었다. 하시엔다의 사운드가 디스코 디바 앤섬 식의 부드럽고 말랑말랑 한 것이었다면 스핀마스터즈와 스티브 윌리엄즈가 선사한 썬더돔의 사운드는 벨지안 하드비트를 연상 시키는 듯한 강하고 거친 것이었다 . 썬더돔의 위치 또한 맨체스터의 게토에 해당하는 올드햄 로드였고 특유의 하드코어적 사운드와 무너질 듯한 클럽의 내부는 외부인에게 위험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지만 거친 삶을 살아가던 노동계층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천국과 같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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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Mondays  & Stone Roses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과 마찬가지로 맨체스터의 젊은이들 또한 마가렛 데쳐를 향한 증오는 끝없이 불타올랐다 . 런던과 대비해 덜 엘리트적이고 낮은 사회 계층에 속해 있던 맨체스터의 청년층은 데쳐 정부가 펼쳐 놓은 웰페어 시스템에 적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80 년대 말 찾아온 대규모 실업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의 경로를 통한 수익을 찾게 만들었다. 이 때 주 수입원은 짝퉁 디자이너 옷들이나, 해적 레코드/컴퓨터 게임들의 유통, 마약 거래 , 신용카드를 이용한 사기 등이 주를 이뤘다. 이런 현상은 취업이나 어떠한 일에도 관심 없는 수많은 젊은 룸펜-프롤레테리아 (부랑자 혹은 집에서 빈둥거리는 실업 남성)들을 탄생하게 했다 .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며 하씨엔다에 나타난 밴드가 바로 해피 먼데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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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먼데이즈 그들 또한 엄청난 경력의 마약 거래를 자랑했고 ( 그들이 성공한 후에는 팬들에게 공짜 마약을 건네주며 함께 즐겼을 정도였다) 맨체스터 뿐만이 아니라 런던 등의 외부지역까지 손을 뻗쳤다. 하지만 오히려 이 경력이  오크폴드와 같은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의 주역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지도 말고 상관치도 말고 그냥 질러버려! 24시간 자지도 말고 파티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들의 사상과 하층 노동계층 출신의 이력은 당시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이상과 불만을 풀어줄 수 있는 호소력을 사운드 안에 심어 주었다 . (물론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엑스터시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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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비틀즈에게  롤링 스톤즈와 비치 보이즈라는 숙명적 라이벌이 있었듯이 이들에게도 스톤 로지즈 Stone Roses라는 걸출한 라이벌이 있었다. Funk, 노던소울, 펑크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해피 먼데이즈와는 달리 스톤 로지즈는  비틀즈에서 이어지는 60년대의 정통 사이키델리아를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이언 브라운이라는 영국 특유의 콧대 높은 보컬의 카리스마까지 가세해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 (롤링 스톤즈가 이들에게 자신들의 컨서트에서 서포트 밴드가 되어 줄 것을 요청 했지만 이언 브라운은 오히려 롤링스톤즈가 우리의 서포트 밴드가 되어야 한다며 단번에 묵살해 버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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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였건 이들의 활약으로 1989년 말 애시드 붐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대중문화 현상으로 확대되며 미디어 또한  매드체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11월 로지즈가 런던의 알렉산드라 팔레스에서 8000명의 관객을 상대로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가지고 해피먼데이즈가 영국의 탑 오브 더 팝스에 처음 데뷰하게 된 쾌거가 계기였다. 하루 아침에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맨체스터 씬의 하나가 되길 원하는 것만 같았다 . 1990년도 맨체스터 대학교의 지원자 수가 갑자기 전년도 대비로 치솟아 올랐고, 엑스터시의 영향으로 축구 훌리건들의 폭력 사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비록 89년과 90 년 사이의 단기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언더문화 평론가인 스티브 레드헤드는 그 해 겨울 시즌을 "사랑의 겨울'이라 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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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마찬가지로 매드체스터의 엑스타시 현상은 순수한 사랑과 이상의 거대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 그렇게 1990년을 치달으며 먼데이즈는 지미 머핀과 808 State의 서포트에 힘입어 G-Mex 센터에서 8000 명을 상대로 성공적인 이벤트를 마치게 되며 매드체스터 최절정의 순간을 장식한다. 이에 질세라 두 달 후 로지즈 또한 30,000명을 상대로 폴 오큰폴드, 프랭키 본즈 등과  함께 스파이크 아일랜드를 달구었다. 그리고 90년도 여름 뉴오더가 영국의 월드컵 테마송을 맡으며 대형 사고를 치게 되는데 그들이 내놓은 'E for England'이라는 음악 때문이었다 . 표면적으로 E는 잉글랜드의 첫 알파벳을 의미했지만 사실 엑스터시 Ecstasy 마약의 'E'라는 의미 또한 내포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인사이더들을 제외하고 그 누가 'E'의 의미를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덕분에 영국 전체가 "E for England!"를 외치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아이러닉 한 사건이었다. ( 엑스타시와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심의에 의해 'World in Motion'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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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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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3:  2007년  10월자
              2nd Summer of Love, the London tale: 두 번째 사랑의 여름

IBIZA; 발레릭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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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러버들의 영원한 고향인 이비자 섬은60년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곳이었지만 그 시절 공산주의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정책에 의해 새로운 관광의 요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특히 낮았던 스페인 환율 덕분에 이비자는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지 못한 젊은 중산/노동층 영국인들에게 고아와 카쉬만두와 함께 환영 받는 휴가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비자의 공짜 파티, 보헤미안적인 열린 분위기와 아름다운 달과 별빛은 어둡고 우울한 런던에 지친 젊은 브릿들을 따스하게 맞이 했다.

이 때 Pacha와 Amnesia는 이비자의 중심 클럽으로 히피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 시절 Amnesia는 전기 공급이 없는 농장 같은 곳에서 모닥불을 피고 레게와 사이키델릭락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디스코의 시대가 도래하며 히피 세상은 막을 내리고 이비자의 클럽들 또한 나이트클럽으로서의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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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접어들며 젊은 브릿들 뿐 아니라 게이, 뉴 에이지 전도사 등을 포함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비자를 찾게 된다. (이와 동시에 전설의 엘릭시르elixir로 통하는, 엑스타시도 슬슬 이 곳을 상륙한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1987년경 이비자의 산 안토니오에 The Project라는 바가 문을 열게 된다. 영국 DJ 트레버 펑과 이언 세인트 폴이 세운 이 곳은 브릿들만의 일종의 미팅 포인트가 되었다. 프로젝트에 모인 젊은 브릿들은 암네시아로 자리를 옮겨 엑스타시에 취해 DJ 알프레도 피오리오가 선사하는 몽환적인 여행을 떠났다. (Amneisa의 DJ 알프레도 피오리오 Alfredo Fiorillo는 서로 다른 연령과 사회 계층이 주를 이루는 특이한 환경에 의해 다양한 음악으로 그들의 여행을 책임 졌다. 레게와 Funk로 시작해 존 레논의 감미로운 이매진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식의 그 만의 디제잉은 트렌드를 떠나 폭넓은 사람들의 정서를 껴안을 수 있는 이비자 섬만의 에센스를 담아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스라이 동이 터오는 새벽의 신비로움, 히피의 유산 그리고 쾌락의 요소를 담은 발레릭 코드가 탄생하게 되었다.)그리고 Cala Salada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카페 델 마르Cafe Del Mar로 움직여 DJ 호제 파디야가 떨어뜨리는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를 들으며 상쾌한 오전의 공기를 흠뻑 마셨다. 그런 루틴을 반복하며 보낸 그들만의 여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상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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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해 9월 훗날 폭풍처럼 휘몰아쳐올 영국 애시드 하우스 씬을 이끌어 갈 핵심 인물들이 이 프로젝트 바에 모이게 된다. 폴 오큰폴드, 쟈니 워커, 닉키 할러웨이 그리고 대니 램플링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전 브릿들과 마찬가지로 엑스타시와 함께 발레릭 사운드를 처음 접하며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비자의 주술에 휘말린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느낌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리라 결심한다.   


다시 우울한 런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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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가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좌파 정당과 잦고 길었던 스트라이크를 이끈 노동계급의 패배는 젊은 브릿들로 하여금 마가렛 데쳐의 보수정당을 향한 깊은 증오와 패배감만을 안겨 주었다. 또한 데쳐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빈부의 차이는 더욱 늘어나고 모두들 신용을 이용한 소비에 미친 듯이 열을 올렸다. 이는 무인지경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돈이 곧 신이요 법이라는 진리를 만들어 냈다. 이 흐름 속에 찾아온 영국의 경제 침체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열등감과 허탈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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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분위기는 런던의 클럽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런던의 클러빙이란 그저 술에 찌들어 이성에게 집적대고 디자이너 의상으로 화려하게 차린 자신의 쿨 함을 한 것 뽐내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들은 춤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대략 옛날 국내 나이트 실정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 컬쳐의 공간에는 당연히 돈과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낄 수 없는 그런 성역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트렌디들을 향한 ‘가진 것 없고, 촌스럽고 지저분한’ 이들의 열등감은 팽배했다. ‘

   
          사운드적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영국은 Jazz와 Funk 등의 Rare Groove에 의해 주도 되고 있었다. 그 즈음에서 나온 섹스프레스나 M/A/R/R/S 등의 팝 차트 선전이 애시드 하우스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까지 영국에서 애시드 사운드는 일종의 페드fed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조금씩 늘어나는 브릿-이비쟌들의 여름의 향수를 채워줄 공간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클럽 노엘과 딜리리엄이 런던에서 유일하게 애시드 사운드를 제공하였지만 기존의 Funk, Hip Hop 그룹과의 충돌이 잦았다. 예를 들어 그 때 당시 선풍적이었던 디트로이트 테크노 트랙인 데릭 메이의 Strings of Life는 댄스 플로어를 싹 비워버리는 진공 청소기와 같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비자에서의 소중함 기억을 현실화 시키고자 결심했던 오큰폴드, 폴, 램플링, 홀로웨이 등이 각기 런던에 발레릭-애시드 클럽을 열며 영국 전체 클럽 씬은 물론 브릿팝의 판도 자체를 발칵 뒤집어 놓게 된다.   


The Project & Spectrum : 광란의 월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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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데 없이 방황하는 런던의 브릿-이비쟌들에게 오큰폴드와 이언 세인트 폴은 프로젝트 클럽이라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경찰 검문에 의해 금방 문을 닫게 되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 둘은 생츄어리 클럽에서 Future 나이트 파티를 열게 된다. 이비자의 메모리를 바탕으로 한 퓨쳐 나이트를 이끌어감에 있어 오큰폴드에게 주어진 하우스 트랙 설렉션은 긴긴 밤을 책임 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다양한 음악적 배경과 DJ 알프레도의 섬머 앤썸 등을 활용하며 오큰폴드는 발레릭 클럽의 이미지를 부각 시켰다. 그때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한 클러빙 경험은 생소했지만 브릿-이비쟌들과 많은 로컬들은 열광했으며 성공적인 하우스 열풍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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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이비자의 발레릭 바람이 런던 언더그라운드 클럽 계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을 무렵 이언은 오큰폴드와 쟈니 워커에게 엄청난 제안을 한다. 바로 1500명+ 수용의 헤븐 클럽에서 월요일 파티 이벤트를 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해본 적도 없는 무모하게만 보이는 이 계획은 “Spectrum: a Theatre of Madness”라는 타이틀로 감행된다. 클럽 경영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갑자기 엄청난 센세이션과 함께 기적적인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웨스트 엔드 트렌디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디자이너 의상을 던져 버리고 춤추기에 편안한 트레이닝 복과 배기 팬츠로 무장한 클러버들은 황홀경에 빠져 월요일 밤을 뜨겁게 불살랐다. 세련된 드레스 코드 문화와 트렌디의 전통을 무참히 깨어버린 대 사건이었다. “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었으며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억압되었던 에너지의 폭발로 인한 오버나이트 센세이션이었다. 이 새로운 열풍은 곧 i-D매거진과 같은 팬진에 소개되기도 하지만 중심 요소인 엑스타시나 애시드에 관해서는 자세히 소개되지는 않았다. 브릿-이비쟌들에게 있어 이비자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자신들만의 소중한 씬을 지키고 싶은 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The Shoom: 걱정일랑 접어두고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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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큰폴드 등과의 이비자 여행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대니 램플링은 그의 아내, 제니와 함께 1987년 12월경 클럽 역사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슘 클럽을 열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섹시한지를 과시하는 웨스트 엔드와는 달리 슘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한 경험이었다. 사랑, 함께함, 나눔, 인생의 환희를 모토로 삼아 슈머Shoomer들은 애시드 음악에 빠져 사랑과 희열의 밤을 보냈다. 춤이라기 보다는 음악의 비트에 빠진 쿵푸 모션에 더 가까운 그들의 프릭키 댄싱 (Freaky Dacing)은 스타일에 찌들은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이 지쳐있었나를 보여주는 거침 없는 하이킥이었다. 뉴욕의 스튜디오 54를 방불케 할 만큼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에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단 인사이더로 인정 받으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안에서 모두는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들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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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비자의 유포릭Euphoric한 경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시간 상 가장 가까운 모체인 히피 사상을 차용했다. 사랑, 평화, 존중을 외치던 히피의 60년대는 분명 이러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첫 번째 사랑의 여름은 바로 히피의 60년대를 지칭한다) 그러한 영향과 함께 대니는 히피의 상징이었던 노란 스마일리 로고를 슘의 마스코트로 도입한다. 그때부터 “the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Shoom Club”의 글과 함께 수많은 스마일리 로고가 눈처럼 슘의 플라이어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물론 스마일리 페이스가 레이브의 상징이 된 것도 이때부터다) 제2사랑의 여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슘은 철저한 뉴스레터와 클럽 멤버십 스킴 관리에서부터 물, 과일 등의 공짜 제공 등 훗날 레이브 프로모션의 좋은 지침서로 자리 잡았다.

             만약 누군가 갑자기 당신의 볼을 쫙 잡아당기며 “웃어요~”라며 스마일리 스티커를 붙여준다면? 당신은 그를/그녀를 꼭 껴안고 “사랑해요”라며 환한 미소를 건넬 것이다. 슘은 그런 행동이 가능하고 당연한 곳이었다.


 RIP party: 런던 블랙 컬쳐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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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비자 베테랑들과 백인 위주의 성향이 짙었던 애시드 하우스 열풍 속에 RiP파티는 이비자와는 상관없이 기존 런던의 흑인 문화를 위주로 자신들만의 파티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시카고나 뉴욕의 웨어하우스 파티 그리고 레게와 소울의 전통을 지켜나간 폴 스톤과 루 뷰코빅의 RiP(Revolution in Progress)은 테크노,애시드,개러지 사운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파를 소화해 냈다. 슘이 연령, 성, 사회적 계급 등의 벽을 허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파티로만 보여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RiP의 경우 흑인 백인 등의 인종별 다양성을 넘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이었다. 옛 클러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RiP파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과 가장 추악한 사람들 모두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펑크의 배경을 가진 루 뷰코빅은 여기서 애시드 문화가 가진 정치적 힘을 보았다, 바로 새로운 변화의 물고를 틀 수 있는 강력하고 순수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조화의 힘을.

자신들만의 씬을 지키기 위해 뷰코빅은 철저히 미디어의 개입을 막았기 때문에RiP파티는 슘과 스펙트럼만큼 오늘날의 클럽 전설로 회자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에 의해 상처받는 수많은 언더문화들을 보면 그들만이 간직했을 ‘열정과 순수함’은 충분히 상상해 볼 만 하다.


The Trip: 애시드 하우스의 폭발 그리고 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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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6월 런던 웨스트 엔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애스토리아Astoria에 트립 TRIP자리를 잡으며 제2 사랑의 여름이라 불리는 레이브 / 엑스타시 열풍은 오버그라운드화 되어 버린다. 하룻밤 만에 모든 런던 주류의 클럽 사운드가 애시드 하우스로 대체 되며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문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트립의 주인인 닉키 할러웨이는 수많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슘 클럽 또한 ‘그들만의 파티’이기를 포기한 듯 웨스트엔드의 토튼햄 코트로 자릴 옮기고 유명한 셀레브리티들을 모시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메인 파티 이벤트를 오큰폴드의 퓨쳐 나이트와 겹치는 목요일로 재설정하며 이비쟌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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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애시드와 엑스타시에 대해 떠들어 대자 아무 생각 없이 이 흐름에 너도나도 동참하는 애시드 테드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던 ‘그들만의 파티’는 종료되고 기존의 이비자 베테랑들과 애시드 테드들 간의 복잡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비자의 기억과 히피적 사상이 전무했던 애시드 테드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엄청난 양의 엑스타시를 복용하고 “애시~~~~드!!!”를 외치며 미친 망아지들처럼 씬을 휘졌고 다녔다. 그때까지 영국의 클럽은 3시 이후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후 거리로 뛰쳐나와 날뛰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의 사이렌을 붙잡고 전율을 느끼며 “Can You Feel it?”을 외쳤다고까지 하니 그 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스펙트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고 이 언더문화는 도태되기 시작했다. 순수함과 흥미에 의해 시작한 파티 관계자들도 파티 이벤트를 돈의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우정도 깨지기 시작했다. 마약의 유통과 파티 프로모션을 통해 ‘한 몫 챙길 수 있는 장사’의 가능성이 확인되며 갱들도 이 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경찰은 애시드 하우스 파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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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and Groovy” 같은 기사를 통해 새로운 애시드 문화에 친근감을 표했던 미디어는 “요즘 아이들이 어떤 위험한 것에 빠져있나” 레퍼토리를 들고 나오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디어는 엑스타시와 LSD의 차이를 알지도 못한 채 아이들이 클럽에서 문란한 성생활과 폭력에 찌들은 것처럼 선전했다. 영국의 유명한 음악 차트 방송인 Top of the Pops는 Acid란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노래들을 차트에서 제외시키는 이래적인 모라토리움을 선언했고 팝 스타들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마약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깨끗하고 도덕적인 생활의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주제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대중을 선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파시즘적인 미디어의 폭력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찌하였건 이런 기성 세대와 미디어의 소란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청년들이 생각 없이 애시드 열풍에 동조하도록 불만 지핀 셈이었다. 이 때부터 애시드 하우스는 대중 문화를 뛰어넘어 민감한 국가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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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애시드 하우스 클러버들도 큰 문제를 안고 있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디어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엑스타시를 마약으로 조차 여기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1988년 이후로 마약이 이른바 보편적 레져 문화로 올라섰고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은 9 to 5로 대변되는 챗바퀴 같은 자신들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너도 나도 일을 그만두고 쾌락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급기야 애시드 문화의 인사이더인 슘은 뉴스레터를 통해 “제발 당신의 직장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 당시 잊고 있었던 것은 어떠한 좋은 경험이든 영원할 수는 없다는 간단한 인생의 논리였다. 문제는 그토록 그들을 괴롭히던 현실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기에 정신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약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현상에 중심에 엑스타시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 젊은이와 노동계층에게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데쳐 정부에 대한 개인의 무력함에서 따라온 심리적인 거세와 억압이 음악과 춤을 통한 파티라는 대규모의 집단적 문화 현상에 의해 치유되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맨 정신에 환희와 희열의 트랜스를 느낀 한국인들처럼) 이 논리를 깨달은 이비자 베테랑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떠났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현대 전자 댄스 음악의 문화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파티 문화가 세계 이곳 저곳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았던 제 2 사랑의 여름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채 그렇게 끝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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