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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Vibe Upon the World 25:
CREAM 1992~2002
매시브 클럽 씬의 절대 왕정 Part.3
늙지 않는 피터팬=클럽 파티
클럽 파티 이벤트와 클러버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 하나가 있다면 바로 젊음이다. 클럽 파티 이벤트는 항상 젊음의 경험이고 그 입맛을 맞추며 영원히 늙지 않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클러버들은 인간일 수 밖에 없는 나머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의 주 조직원이 되어 각박한 현실과 직시해야 한다.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그 옛날 청춘의 노스탈지어에 빠져 끝없이 열정을 불태우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클럽 이벤트 자체는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피터팬이지만 그 피터팬에게 삶의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물리적 공간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클러버들의 취향도 끊임 없이 세대에 걸쳐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실의 논리를 망각한 채 호황기의 수입에만 정신이 나가있던 나이트 이벤트는 90년대 하우스와 트랜스를 통한 클러빙 열풍이 식어 내리며 강한 철퇴를 맞았다.
90년대 대형 클러빙의 위기
문제는 복합적 요인들의 작용이었다. 클러버들의 세대 변경은 물론이고 매시브 수퍼 클럽의 호황은 지나친 파티의 상업화와 DJ의 몸 값을 천정부지로 올려 놓았다. 물론 티에스토나 폴 반 다익 같은 수퍼스타 DJ로 인정 받은 이들에게 한한 것이지만 이러한 위험 요소들은 결국 매시브 파티 씬의 몰락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MOS와 함께 파티의 섬 이비자를 점령하며 전 세계적 성공 가도를 날리던 게이트 크래셔 Gatecrasher, 갓즈키츤 Godskitchen 등의 메이져 클럽 나이트가 주말에서 월 이벤트로 그 횟수를 줄이는 등 전반적인 사업의 축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철퇴를 맞은 것은 바로 크림 Cream이었다. 리버풀의 대표 클럽으로서 MOS와 함께 매시브 하우스 씬의 중심에서 많은 젊음의 욕구를 채워주고 가슴 벅찬 추억거리를 만들어준 크림은 클러버들의 세대 교체에 민감하게 반응한 갈란드 Garland나 치부쿠 쉐이크 쉐이크 Chibuku Shake Shake 등의 소형 클럽을 앞세운 신진 세력에 의해 그 위력을 상실해나갔다. (따라서 크림의 마지막은 리버풀의 클러버들에게 큰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영국 젊은이들의 영원한 로망, 크림
영국 젊은이들이 리버풀의 대학 지원의 동기 중 하나가 될 만큼 도시의 밤 문화를 책임졌던 크림은 1992년 네이션 클럽의 주말 나이트 이벤트로 시작되었다. 당시 설립자인 제임스 바튼과 데런 휴즈라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하우스 열풍에 동참하여 순수한 파티 이벤트의 목적으로 시작된 이 이벤트는 로컬 DJ였던 DJ 유세프의 동참으로 수많은 클러버들을 열광 시켰다. 회에 거듭한 성공으로 크림은 이른바 리버풀의 센터 스팟으로 성장하며 여러 수퍼스타 DJ들을 불러들였고 폴 오큰폴드, 폴 반다익, DJ 사샤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이들이 크림을 거쳐갔다. 크림의 최고 전성기는 폴 오큰폴드가 레지던트 DJ였던 97년과 99년 사이였다. 영국 런던의 애시드 하우스 열풍이었던 두 번째 사랑의 여름 '2nd Summer of Love'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큰폴드는 1300명 수용의 크림 코트야드를 뜨겁게 달궜다.
Seb Fontaine의 레지던트 DJ 선택이 불러온 Progressive의 참극
여느 대형 나이트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크림의 전략은 수퍼스타 DJ를 통해서였다. 대형 클럽의 전성기이자 크림의 전성기이기도 했던 97년과 99년 사이 레지던트 DJ였던 폴 오큰폴드가 떠나면서 크림은 두 명의 레지던트 DJ 후보를 올려 놓고 고심하게 된다. 결국 한창 클럽가를 달구기 시작하고 있던 신예 퍼기 Fergie를 (여성 가수 Fergie가 아님) 포기하고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구축하고 있던 셉 폰테인 Seb Fontaine을 선택했지만 결국 '보장된' 안전을 선택한 것이 화근을 불러 왔다.
대형 클러빙의 성공은 당시 들끓던 트랜스와 하우스 음악의 전 세계적 장악을 불러왔다. 언제나 부담 없는 사운드의 하우스와 좀더 큰 규모의 군중을 제어하기에 안성맞춤인 트랜스 장르가 본격적으로 상업화의 길을 들어 스며 사샤 Sash, 존 디그위드와 같은 옛 트랜스 황제들이 프로그레시브 Progressive라는 새로운 흐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레시브 락과 마찬가지로 좀더 미학적이고 프로그레시브 측면이 가미된 새로운 장르에는 크림의 새로운 DJ 셉 폰테인도 가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음악에 트랜스와 하우스의 가볍고 흥겨운 리듬에 맞추어 즐기던 클러버들이 쉽게 적응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결국 셉 폰테인의 '서정적이고' '학구적인' 프로그레시브 사운드는 3000명 수용의 크림의 댄스 플로어를 싹 비워버리는 참극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마지막 6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트랙들이라구... 근데 사람들이 다 나가버리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셉 폰테인은 털어놓았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을 따른 소형 클럽의 약진
이 뿐만이 아니었다.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의 대중화 실패 및 수퍼스타 DJ들에 대한 클러버들의 잃어버린 신뢰뿐만 아니라 작은 소형 클럽들의 약진도 큰 타격을 불러 일으켰다. 대형 나이트의 침체 속에서도 같은 리버풀 위치의 치부쿠 쉐이크 쉐이크 Chibuku Shake Shake이나 갈란드 Garlands와 같은 소형 클럽들은 연일 클러버들로 북적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흐름에도 줄곧 대형 DJ 나이트만을 고수하던 크림은 엄청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룻밤 스핀에 엄청난 개런티를 가져가는 수퍼스타 DJ에 비해 텅 비어버리는 클럽의 금고는 사실 상 더 이상 이벤트의 진행을 불가능하게 했다. 트랜스 나이트로 대형 이벤트의 절대 강자들이었던 갓즈키친 Godskitchen처럼 크림은 결국 클럽의 문을 닫고 월별 및 홀리데이 원샷 나이트 이벤트로 그 전략을 고치게 되었다.
TRIVIA:
1) 크림의 메인 클럽인 네이션은 3 개의 공간으로 구성 되어 있다. 1000명 수용의 메인룸, 700명 수용의 에넥스 Annexe, 1300명 수용의 코트야드의 스펙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2) 라운지 붐에 의해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의 미니바와 성격이 비슷한 베이비 크림 Babycream을 리버풀의 알버트 선착장에 만듬.
3) 클럽의 죽음 이후에도 크림필드 이벤트와 컴필레이션 앨범 발매는 계속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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