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Ambient 이후 클럽컬쳐 매거진 BLING에 연재되는 새로운 음악 컬럼입니다. 잡지와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혹시 퍼가시게 될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는 센스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LECTRONICA world: 05 Sept 2009

La Fabrique: Twee Grrrls Club에게 배운 '논다'라는 것

 

by Groovie (http://electronica.tistory.com)





일본 여행 중 이 날 경험이 상당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여행기처럼 적지만 우선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은 필자는 일본 클러빙 문화에 익숙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단지 하루 밤 동경 로컬 클러빙에 대한 느낌 그 자체이지 이 글이 전체 동경 클럽씬이나 La Fabrique 클럽 또는 Vice Party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이 절대로 될 수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번 여행에서 무언가 주류 클러빙도 경험하고 싶었던 반면 로컬 클러빙 경험도 하고 싶었지만 내정된 도쿄의 주말은 단 하루였고 일본에 가기 전 그 날 파티 스케쥴을 살펴보니 딱히 구미에 당기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딱 하나 눈에 띄는 Big Name이 있었는데 오사와 신이치였다. 파티 장소는 Womb. 일렉트로 하우스라던지 오사와 신이치가 딱히 땡기진 않았지만 그 쪽 로컬 클러빙 경험이 전무한 한 관광객의 입장에서 오사와 신이치와 Womb 클럽은 꽤 안정적인 선택으로 느껴졌다. 암튼 12시가 조금 넘어 시부야에 도착해 Womb의 문을 여니 이건 뭐 인간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20,30분 정도 기다릴게 아니었다. 뭐 처음부터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이내 곧바로 La Fabrique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이 날 La Fabrique에서는 Vice 매거진 주최 [Twee Grrrls vs Threepee Boys]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로컬 클러빙의 경험을 해보겠구나라는 생각에 잘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금 3500엔을 지불하고 내려가니 붉은 조명아래 마침 6 명의 발랄한 소녀들이 Djing을 하고 있었다. 우선 들어가자 마자 샴페인 한잔씩을 든다. 비싸지만 Henriot이다. 그리고 바로 병을 바로 따서 부어준다. 와우~! 

 


음악이 상당히 좋다. 필자도 새로운 음악을 많이 찾는 편인데 발표 된지 겨우 1,2주일에서 한달 정도 되었을 법한 음악들이 지속적으로 튀어나온다. 신난다. 근데 이 소녀 DJ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 무언가 제 각각에 특이하고 이상하다. 그리고 엉망이다. 하지만 즐겁다. 알고 보니 이들이 바로 (찌라시에서 말하길) 도쿄 인디 클럽씬에서 꽤 주목을 끌고 있다는 Twee Grrrls Club(이하 TGC)이다. 인디 음악과 RIOT/DIY 정신이 모토인 이 팀은 6명의 멤버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음악을 튼다. 서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트는 모양인데 인디팝 (이들의 이름처럼 주로 Twee계열)이 흐르다 갑자기 일렉트로팝이 나오다 갑자기 락이 나오는 식이다. 정신 없다. 곡과 곡 사이의 트랜지션이 엄청나게 불안하다. 비트매칭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부스를 보니 CDJ LP가 같이 있었던 것 같다) 더 재미있는 건 겨우겨우 한 곡 넘기면 소리를 지르며 서로들 미친 듯이 좋아한다. 그리고 한 명이 Djing을 하고 있을 동안 나머지 멤버와 스태프들 그 조그마한 부스 안을 꽉 메우고 음악에 맞춰 정말 신나게논다.


 

여기서부터 뭔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체 파티란 것이, Djing이라는 것이,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럴싸한 모토와 스타일리쉬함, 완벽한 코디네이션, 수퍼 디제이 혹은 완벽한 디제잉 스킬, 화려하고 트렌디한 분위기 속에 느끼는 플래너와 클러버의 자아도취물론 완벽한 시나리오 속의 멋진 파티 경험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말이 좋을 뿐이지 그 구현을 위한 어려움과 순수성은 거의 이상에 가깝다. 오히려 이런 요인들은 무서운 함정 같은 것들이 아닐까 한다. 단지 이 하룻밤의 TGC 공연을 보며 느낀 것은 바로 파티에서 가장 중요한 논다는 개념이었다. 논다는 것이 개념적으로 풀이할 수나 있을지 조차 모르겠지만 말이다.

즐겁게만 논다고 모든 것이 엉망이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 열정과 열기가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맥락적으로 생각해보면 TGC, Vice, La Fabrique의 우선적인 인지도와 Fabrique-고어들의 이해 또한 그 파티를 즐기게 되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이런 활기 넘치지만 엉성한 디제잉 이후 등장 한 공연의 완성도는 갈수록 높아지며 더 큰 흡입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파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시나리오를 제공해 그 들이 알아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는 것 보다는 파티를 여는 주최자들 자체가 흥에 겨워 즐겁고 열정적으로 즐기고 노는 것이 파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해서 파티에 온 사람들이 더욱 몰입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랄까? 솔직히 파티뿐 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 스펙라는 덫에 묻혀 사는 국내 사회의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인 면을 느꼈다.

 


TGC의 Djing이 끝난 후 TGC의 멤버 Moe Yuppa 2인조 그룹인 Love & Hates의 공연이 펼쳐졌다. Rap/Break/Lo-Fi 사운드가 주였는데 첫인상이 딱 Cibbo Matto의 소녀 버젼이다. 메인 부스 앞에 불안하게 조성된 스테이지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며 인사하자 마자 멤버 한 명이 그대로 머리부터 땅으로 곤두박질을 친다. (Moe인 듯싶다) 사고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또 한번 정열을 불태우며 신나게 놀며 모두와 함께 그 밤을 재껴버린다. 이내 곧 유명 Rapper Afra가 동반 등장하고 Three Pees Boys를 통해 간만에 Freestyle Beatbox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 후 히데키 카지의 Djing과 인디 댄스락 유닛인 Totemrock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이들 또한 상당히 멜로디컬하고 업리프팅한 사운드로 잊을 수 없는 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었다.


 

이번 파티가 전체적으로 힙합 베이스였던 만큼 Dj들의 주 사운드는 덥스텝이었고 중간중간 드럼엔베이스로 덥스텝 특유의 쳐짐의 공백을 채우는 형식이었다. 국내 클럽씬에서 아직까지도 흔하게 들을 수 없는 사운드라 오히려 더 반가웠고 덥스텝과 힙합뿐만 아니라 락, 일렉트로, 하우스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음악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하나의 파티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운드를 펼쳐보아야 한다는 의견은 아니다. 다만 이상한미니멀과 수퍼스타 DJ로 일관되는 국내 클럽씬 안에서의 사운드와 분위기적 다양성을 느끼고 싶은 것은 필자 혼자뿐 만의 바램은 아닐 것이다라는 것만큼은 말해두고 싶다. 트렌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간다면은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흐름이 될 것이지만 따라가기만 한다면 하나의 fed에 그치게 될 뿐이다.


 

어찌하였건 아침 첫 차가 시작될 때까지 클럽 안에서 버틸 예정이었지만 이젠 나이가 나이인지라 새벽 4시 즘 되니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낀다. 노인네처럼 이제 비워 져버린 VIP실로 올라가 잠깐 누워있다가 결국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가지 아쉬움 점은 춤추기 불편해서 큰 카메라를 록커에 집어넣고 작은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갔는데 찍다 보니 메모리 카드를 호텔에 빼두고 왔다는 것 ㅜㅜ. 카메라 자체 내장 메모리로만 찍다 보니 한 5장 찍고 끝. 이 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못 담아 둔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버렸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Ambient 이후 클럽컬쳐 매거진 BLING에 연재되는 새로운 음악 컬럼입니다. 잡지와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혹시 퍼가시게 될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는 센스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LECTRONICA world: 04 July 2009

Beached! : 한 여름의 사운드트랙

무더운 여름이 시작됐다.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떠나있거나 혹은 아직도 막판 계획에 머리를 싸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여행 속을 시원하게 날려 줄 하우스 및 일렉트로팝 / 인디팝 계열의 사운드트랙 10선을 소개한다. 물론 일렉트로니카 월드 컬럼인만큼 음악들은 불과 몇 개월 안된 따끈따끈 한 놈들이다. 해안도로와 해변의 분위기에 딱 어울릴 사운드 속으로 떠나보자.


 


1.     American Dream (Happy Song) ft. Robyn by Troy This (3:18)

[Indie Pop] 스웨덴의 인디팝/일렉트로팝 스타인 로빈이 피쳐링한 곡으로 깔끔한 업비트의 인디팝 음악으로 설레는 여행길의 초반 부를 장식하기에 딱이다. 데이빗 보위와 티나 터너를 자신의 가장 큰 음악적 영감이라고 말하는 트로이 디스는 미국 출신이지만 세계 최고의 팝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을 베이스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미국을 포함하여) 80년대의 느낌의 전형적인 해피 팝송의 성향을 보여주는 그는 자신의 음악을 모두 무료로 다운로드 제공하고 있기까지 한다.





 2.     Dorchester Hotel by The Sounds (4:08)

[Indie pop / Rock] Seven Days a Week 등으로 인기 몰이를 했던 스웨덴의 댄스락 밴드 더 사운즈의 3번째 앨범인 [Crossing the Rubicon]에 실려 있는 음악으로 지금까지의 제작자들과 결별하고 자신들이 직접 투자하고 제작한 첫 앨범으로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전형적이고 솔직한 댄스락 사운드에 드리미한 기타 리프까지 더한 이 곡은 블론디와 B-52’s의 감성이 가득 담겨 있어 초반 여행길의 흥을 더욱 높여 줄 것이다.



 


3.     Arrows of Eros by The Golden Silvers (3:48)

[Indie Pop/Art Rock] 2008년 글라스튼베리 신인왕을 수상했고 09년 첫 싱글인 True Romance와 함께 화려하게 데뷔한 영국 런던 출신의 밴드다. 키보드와 보컬 담당인 그와일림 골드의 꺼벙한 매력이 돋보이는 골든 실버즈의 에로스의 화살은 그 옛날 맨체스터 밴드인 스미스와 큐어 등의 향수를 진하게 전해준다. 이제 지루한 현실의 감각이 여행길의 중반에 어느 정도 잊혀질 듯 할 때 더욱 휴가의 순간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산뜻한 댄스락 사운드다.



 


4.     Bernadette (Louis La Roche) by Amplid (3:45)

[House/French/Funk] Tracy 레코딩 소속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팀인 Amplid의 곡은 활발하고 동적인 해변가의 분위기를 더할 나위 없이 느낄 수 있는 트랙이다. 워낙 많은 리믹스들이 존재하지만 역시 그 중에서도 포스트 프렌치 하우스 움직임을 책임지고 있는 런던보이 루이즈 라 로쉐의 Funky함이 가미된 이 리믹스가 햇살 가득한 해변가에서 듣기에는 딱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5.
    
Give My Love a Try (Leon Du Star Remix) by Hugo Van Dyck (8:20)



 

[House/French/Funk] 지난번 소개했던 네덜란드의 포스트 프렌치 하우스 레이블인 Us2Music 소속 아티스트인 휴고 반 딕의 트랙으로 클라이맥스를 향해가는 해변가의 클럽 사운드에 적합한 트랙이다. (지난 호에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음으로 여기까지 ^^)













 

6.     How Do I Let You Know by Coeur de Pirate & Le Matos (5:06)

[House/Pop/Synth] 80년대 레트로 하우스를 책임지고 있는 발레리 레이블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Le Matos의 리메이크 트랙으로 09년 초 CBC Radio 차트 1위에 등극하며 모두의 신금을 울렸던 Commes des Enfants의 주인공인 캐나다 여가수 Couer de Pirate가 보컬로 참여했다. 80년대 피비 케이츠 주연의 틴에이지 영화, Private School에서 그녀가 불렀던 음악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잘 표현한 곡으로 환희와 절정의 순간에 어울릴만한 킬러 트랙이다.




 



7.
    
What You Need by Priors (6:08)

[House/French/Funk] 프렌치 하우스하면 대중의 기억에 가장 남아 있는 건 아무래도 Lady Modjo가 아닐까? 모죠가 그리운 이들에게 크나큰 선물과 같은 트랙으로 바로 모죠의 얀데스탈과 Raw Man으로도 알려진 로메인 서의 09년 새로운 프로젝트가 바로 이 프라이어즈다. 환희의 클라이맥스에서 서정적인 밤하늘로 이어지는 그 로맨틱한 순간에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바칠만한 트랙.   



 



8.
    
Night Vision (Daft Punk Cover) by The Twelves (4:57)

[House/Funk/Chill Out] 다프트 펑크의 디스커버리 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2분도 채 안되는 필러트랙을 가지고 리믹스한 트랙으로 처음과 시작의 엠비언트 사운드는 흡사 트웰브즈가 온 브라질의 시원한 열대아를 떠올리게 하며 세련된 스트링 사운드는 프렌치 하우스가 가진 그 세련됨을 부각시킨다. 아마도 애프터 파티를 향하기 전의 그 허전함과 설레임을 달려줄 수 있는 트랙이 아닐까.



 



9.
    
Over You by I Haunt Wizards (1:11)

[Pop/Freestyle] 영국 브라이튼 출신의 팀으로 80,90년대 레트로 감성이 충만한 이들은 불과 16~17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소녀들이다. 특히 이 트랙의 경우 90년대 프리스타일 음악만이 가진 그 로맨스와 댄서블한 요소가 깜찍할 정도로 잘 담겨 있는 트랙으로 늦은 밤 가벼운 인하우스 파티음악으로 너무나도 잘 어울릴 것이다.



 



 

10.  The Ocean, The Sand, The Lorenzo by The Telephones (7:18)

[House/Chill Out/Electro] 항상 분위기가 여물어져 가면 집단에서 모래 사장으로의 연인들끼리의 집단 탈출이 시작된다. 밤 바다와 모래 사장, 그 들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의 분위기에 어울릴만한 칠 아웃 트랙으로 트로피칼 사운드가 특징인 노르웨이의 텔레폰즈의 트랙이다.



 



 

11.  The Rich Cry Too by the Fear of Tigers (4:48)

[House/Electro/Synth] 발레리 레이블의 간판 스타 중 한 명인 피어오브타이거즈의 가장 아름다운 트랙 중 하나로 해변의 새벽을 지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느끼는 그 감동의 순간에 너무나도 어울릴 것 같은 트랙이다. 이 음악의 다른 버전은 트랜스 팀인 4 Strings Turn it Around.






 



    12.
 
Gateaux Blaster (Jesus Juice Edit) by Futurecop! (4:55)



 

[House/Electro/Synth] 이젠 고인이 된 마이클 잭슨의 트리뷰트가 될 수밖에 트랙으로 87년 발표된 Bad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Man in the Mirror의 보컬이 Futurecop! Gateaux Blaster와 절묘하게 블렌딩 되었다. 여행의 대단원을 마감하며 돌아오는 길의 그 아쉬움과 허탈함을 달래줄 단 하나의 트랙!












728x90
반응형
반응형

Ambient 이후 클럽컬쳐 매거진 BLING에 연재되는 새로운 음악 컬럼입니다. 잡지와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혹시 퍼가시게 될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는 센스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LECTRONICA world: 03 June 2009

Us 2 Music Label, French Filter House의 부활

by Groovie

 

무더위의 여름도 좀 있으면 시작할 것 같다. 문득 여름에 가장 어울리는 일렉트로니카 음악은 무얼까 떠올려 봤다. (물론 개인차가 많아 아주 주관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몽롱한 아프페지오 속에 무차별하게 쏴주는 트랜스는 한 물 가보이지만 멜로우함이 좋다. 일렉트로 하우스는 그 동안 너무 많이 터져 나와 지겹고, 크렁크는 아직도 낯설지만 방방 뜀이 좋다. 덥스텝은 너무 어둡지만 이펙트가 좋다. 라운지는 가만히 듣고 앉아 있자니 좀 뻘줌하지만 안락함이 좋다. 프로그레시브나 테크하우스는 너무 끈적끈적해서 더 더워지는 것 같지만 무한반복의 솔리드한 베이스가 좋다. 이렇다 보니 여름엔 역시 프렌치 필터 하우스가 딱이지 않을까? 솔리드하면서도 Funky한 베이스라인 위에 깔리는 업리프팅한 서머 바이브 그리고 감칠 맛나는 필터 이펙트! 물론 말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다. 프렌치 하우스는 겨울에 듣는 그 따뜻한 맛이 제대로지 하고 말할 수도 있으니. 어찌하였건 이번에는 개인적으로무더위의 anthem으로 가장 어울린다 싶은, 그리고 다시 꿈틀거리고 있는 프렌치 필터 하우스를 소개한다.




원래 프렌치 필터 하우스라는게 정해진 장르는 아니다. 가장 자주 쓰이는 총칭은 프렌치 하우스로서 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장르다. 70년대 디스코 음악에 가장 충실한 공식을 가지고 있어 어쩌면 가장 신나고 댄서블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필터 하우스란 이름은 프렌치 하우스 아티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던 컷-오프와 페이징 기법에서 오는 필터 이펙트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French Touch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다. 따라서 프렌치 하우스건, 필터 하우스건, 프렌치 터치건 모두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필터 이펙트는 거의 모든 프렌치 하우스 DJ들이 사용하던 기법으로 가장 유명한 모터 베이스, 다프트 펑크 등의 음악을 떠올리면 된다.

 

90년대 모터 베이스와 다프트펑크에 의해 시작되어 2000년대 초반 Modjo Lady를 정점으로 거의 전 세계 클럽 사운드를 장악하다시피 한 이 사운드는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류의 대규모 레이블의 대량 공세로 인한 질적 레벨 저하와 클러버들의 지겨움 등으로 인해 씬에서 사라진 듯 보였으나 2000년대 중후반부터 그 시절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어린 아티스트들에 의해 재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키추네, 에드 뱅거와 같은 레이블의 사운드가 프렌치 하우스를 그 베이스로 삼고 있지만 지금 말하는 부활의 프렌치 하우스 사운드는 그 시절 (90년대) 프렌치 터치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진화 돼지 않고 마치 냉동되어 있던 얼음인간을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너는 그 동안 너무 많은 클러버들의 피를 빨아먹었으니 잠 좀 들어줘야겠어 하며 가두어버린 프렌치 하우스라는 드라큘라 백작의 관을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열어버린 격이다.

 

프렌치 하우스의 탄생지는 프랑스지만 이 부활의 조짐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네덜란드다. 때 아닌 프렌치 터치를 통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씬의 중심에는 바로 US Two Music Label (이하 USTM) 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프렌치 하우스 사운드를 생산해내고 있는 Alan Braxe Fred Falke, 혹은 신진인 Louis La Roche, the Phantom of the Revenge, Xinobi, Moulinex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레이블이 주도하는 조직적인 체계 속에서 씬의 흐름을 이끌어간다는 관점에서 볼 때 USTM 레이블만한 예도 없는 것 같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06년 시작 당시 이 레이블의 직원 수는 창립자인 Martijn 딱 한 명이었다. 당시 유행하는 클럽 사운드였던 일렉트로와 미니멀 사이에서 프렌치 하우스의 재건이라는 거창한 메니페스토 따위 필요 없이, 그저 즐거움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Martijn USTM의 문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08년을 정점으로 현지 클럽씬과 전 세계 음악 블로그 등 세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USTM 레이블의 간판스타로는 The Franchising, Matt Turner, Marchand, Matt Hughes, David van Driel, Livyo, Hugo Van Dyck 등이 있다.

 

Matt Hughes의 경우 06년 당시 Laidback Luke Don’t Let Go를 리믹스하며 주목 받기 시작하여 08 USTM과 함께한 Get Enough John Digweed Transition과 네덜란드 최대 라디오 스테이션인 3FM에 소개되며 호응을 얻었다. Marchand 역시 08 Starlove Supernova가 당시 현지 클럽씬을 뜨겁게 달구었고 Matt Tuner USTM 뿐만 아니라 Chateau Funk France와 같은 메이져 레이블에서도 활동 중이다. 그리고 David Van Driel True Love 08 Lief Festival의 오피셜 엔섬으로 뽑히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09USTM의 비밀병기는 바로 Hugo van Dyck으로서 연초 Give My Love a Try를 내놓았는데 수려한 외모와 몸매를 자랑하는 Hugo는 디제잉 뿐만 아니라 패션모델, 사진작가, 연기, 패션 디자인 등 전방위적 실력을 뽐내고 있다. 더군다나 USTM은 지난번 소개했던 프랑스의 80년대 레트로 신스 디스코 사운드 레이블인 발레리와도 친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대 발레리의 창립 멤버 중 하나인 The Outrunners These Girls are Dressed to Kill (Russ Chimes Remix)는 이 두 레이블의 합작으로 태어난 트랙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포트폴리오면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진화해나갈지 또 클러버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흥분과 기대 그리고 만족을 안겨줄지 기대할 만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USTM뿐만 아니라 지금 프렌치 하우스의 부활을 이끄는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은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의 어린 나이들이 대부분이란 점이다. 영국의 Louis La Roche의 경우 이제 약 19세 정도니 할 말 다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점은 널려있는 저렴한 디지털 기기들과 폭넓은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성을 이들은 무한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Louis La Roche가 자신의 데뷔 트랙을 Thomas Bangalter (Daft Punk)의 신곡으로 속여 퍼뜨린 사건이 아주 좋은 예다. 그 옛날 제도형식과 같이 저는 데뷔 전 DJ Tiesto 선생님 밑에서 10년을 수련했습니다라는 말이 너무 웃기게 들리지 않는가? 물론 그것도 나쁠 것은 없다만 그만큼 이들이 어린 날의 향수와 자신을 표현하는 시기와 기회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지금도 구석탱이에 짜부러져 이상과 오만의 꿈 속에 갇혀 움츠려 있는 당신들, 당장 방바닥에서 기어 나오든지 커뮤니케이션의 바다로 접속하기 바란다. 직접 부딪히는 것만큼 좋은 기회란 없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Ambient 이후 클럽컬쳐 매거진 BLING에 연재되는 새로운 음악 컬럼입니다. 잡지와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혹시 퍼가시게 될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는 센스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LECTRONICA world: 02 May 2009

일본의 테크노 팝 아티스트들

by Groovie

 

2007
년 폴리리듬으로 시작된 퍼퓸의 오리콘 정복을 이후로 일본의 테크노팝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문화의 활성화가 시작될 때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쟁점은 바로 탄탄한 인프라 구축에 있다. 헌데 일본의 아이돌 시장 또한 야구를 비롯한 타 영역과 마찬가지로 저변부터 탄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따라서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화려한 스팟라이트 속에서 TV에서만 화려하게 비추어지는 남성의 대리애인의 존재를 뛰어 넘어 음악적 사운드와 퍼포먼스까지 출중한 실력을 다지고 있는 면이 가장 눈에 띈다. 퍼퓸의 정신적 지주이자 가장 큰 팬을 자청하는 오츠카 포르쉐의 말처럼 이제는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그 고질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메탈, 슈게이즈, 하드코어, 하우스 등 전 분야에 침투하여 진화하며 사랑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퍼퓸과 함께 눈에 띄는 주목할 만한 요즘 일본의 테크노팝 아티스트들을 소개한다.



 

Perfume 퍼퓸

일본 테크노팝 흐름을 증폭시킨 핵심적인 유닛으로 캡슐의 나카타 야수타카가 뒷받침 해주고 있는 일본의 대형 아이돌로 성장했다. 지금은 발표되는 신곡마다 족족 오리콘 1위에 올라가고 있어 전형적인 아이돌로 보여질 수 있지만 2001년 데뷔 후 8년 간의 무명 활동을 통한 실력파로서 지금까지의 아이돌에 관한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미 퍼퓸은 많이 알려져 있고 옛 컬럼에서도 설명한 관계로 이 정도의 정보만 흘린다. 어찌하였건 그들이 추구해 왔었던 근 미래 테크노팝 유닛에 대한 컨셉을 버리고 또 한번의 진화가 가능할지 기대가 되는 그룹이다.

추천 곡: Electro World, Chocolate Disco, One Room Disco




 

Aira Mitsuki 아이라 미츠키

2007
년 데뷔한 솔로 액트로 대중적 측면에서 볼 때 퍼퓸과 가장 자주 비교되거나 카피캣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라 미츠키의 캐치프레이드가 미래에서 태어난 테크노팝 아이콘이기에 퍼퓸의 근 미래 테크노팝시절을 직접적으로 떠올린다. 퍼퓸에 의해 시작된 일본의 테크노팝 붐에 의해 주목 받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저 카피캣으로만 치부해버리기에는 아까운 아티스트로 60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오디션에 합격해 데뷰했으며 D-Topia 레이블의 테루카다가 제작을 맡고 겡키 로켓츠의 A-Bee, De De Mouse의 체리보이펑션, 섭스탄스와 같은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백업을 해주고 있다. “나는 두 번째 테크노팝 물결 속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자신의 인터뷰에서 밝히는 만큼 아이라의 미츠키의 과제는 퍼퓸 뿐만이 아니라 타 테크노팝, 걸리 하우스 음악과 어떻게 차별화 시키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추천 곡: Robot Honey, Colorful Tokyo Sounds No. 9, China Discotica





 

Cutie Pai 큐티 파이

2001년 결성된 아이돌 유닛으로 무려 8년의 시간을 보냈고 사실 상 퍼퓸과 가장 비교할 만하다. 지금이야 퍼퓸이 일본 최고 레벨의 제작, 안무, 마케팅 등을 받고 있지만 아직 인디 아이돌 유닛인 큐티 파이의 경우 모든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들이 직접 처리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 아마츄어적인 모습들이 눈에 띄지만 음악 작사/작곡부터 시작해 자신들의 프로모션까지 커버하는 사실을 볼 때 진정한 DIY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음악과 더불어 보컬과 microKORG 신디사이저를 담당하고 있는 마유미짱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음악마다 모든 멤버 개개인의 감성과 생각을 투여하려 애쓴다고 한다. 커스튬과 아키하바라 아이돌팝이 베이스기 때문에 전형적인 아키하바라계로 보여질 수 있지만 음악은 테크노팝, 시부야케이, 발라드, 인디팝 등 많은 장르의 사운드를 아우른다. 08년부터 소니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서비스에 소속되어 앞으로 메인스트림으로의 진입이 기대되는 유닛이다. 참고로 큐티 파이의 원래 이름은 Cutie Pie였으나 스펠링 실수로 인해 Cutie Pai로 지속되고 있다.

추천 곡: Music Rendezvous, Chishana Tsubasa, Yes No






 Immi 임미

나카자와 마유란 이름으로 2001년 메이져 데뷰를 했으나 2002년 이후 자취를 감춘 뒤 07 Immi란 필명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위 언급한 유닛들에서 보이는 아이돌팝의 흔적과는 달리 뉴레이브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일렉트로 사운드를 베이스로 한 강한 팝사운드를 구사하는 아티스트다. 활동 재기 당시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어번 주의 싱글에 선택돼 음원 다운로드 5만을 넘기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으며 PARCO, 캐논 등의 CM 송으로 그 녀의 음악이 발탁되었다. 전형적인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녀 또한 클럽 라이브를 주 무대로 삼고 있다.


 

 추천 곡: Marble, Ups % Downs (The Samos Remix), Go with the Flow

 

immi LIVE @ France MIDEM

 

 

 


 

이 밖에 주목해 볼만한 아티스트로는:


Saori@Destiny 사오리앳데스티니

D-Topia 레이블 소속으로 위 아이라 미츠키와 마찬가지로 테루카도가 프로듀서를 맡고 있으며 제2의 겡키 로케츠라는 찬사를 받았다.



Saori@destiny『WOW WAR TECHNO』PV

 

 


 

Ravex 레이벡스

몬도 그로소의 오사와 신이치, FPM의 타나카 토코유키 그리고 M-Flo의 타쿠 타카하시가 모여 새로운 J-Pop의 방향성 제시라는 모토 하에 2008년 결성했다. 그들의 전 색깔과 조금은 비슷하게 걸리 하우스 성향의 음악도 보여주고 있으나 일본의 80년대 레트로 사운드와 레이브의 색깔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 보다는 뮤직 비디오가 더 돋보일 수도 있다.


ravex in Tezuka World
 


 

Suzuki Ami 스즈키 아미

아시아의 카일리 미노그격인 왕년의 아이돌로서 퍼퓸의 프로듀서인 나카타 야수타카와의 만남 이후 대중적인 사운드와 테크노팝의 절충적 사운드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다.





 



 

Sawa 사와

전직 영어강사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메이져 데뷰를 했다. 유명 프로듀서 램 라이더가 뒤를 받치고 있으며 걸리 하우스와 테크노팝이 적절히 섞여있어 대중적인 면이 특징이다.






 



Sweet Vacation 스윗 베케이션

위 소개한 아티스트들 보다는 좀더 인디팝 성향을 띄고 있는 일본 프로듀서와 타이 보컬로 구성된 다국적 혼혈그룹으로 각 국의 최고 대학에 재학 중인 멤버들의 화려한 학력이 눈에 띈다.





 



보너스로 Amu의 뮤비 ^^ㅋ






728x90
반응형
반응형
Ambient 이후 클럽컬쳐 매거진 BLING에 연재되는 새로운 음악 컬럼입니다. 잡지와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혹시 퍼가시게 될 때에는 꼭 출처를 밝혀주시는 센스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LECTRONICA world: 01

2000년 이후 French House의 3가지 동향 :
Valerie, Kitsune, Ed Banger

by Groovie

 

2010년을 을 바라보며 밀레니엄 이후 10년 사이의 음악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시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음악들과 그에 따른 움직임들이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프랑스를 위시로 한 일렉트로 하우스 씬이 가장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클럽 컬쳐에 있어 프랑스는 언제나 생산자가 아닌 수용자의 입장이었다. 남들이 떠다 먹여주는 문화의 밥을 그냥 품위 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다프트 펑크의 등장과 함께 이제 프랑스도 클럽 컬쳐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렸으며 다프트 펑크는 Cerrone 이후 프랑스의 댄스 문화에 있어 가장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했다.

 
DFA, 댄스락의 서막

하지만 유행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프렌치 하우스는 음악시장의 대량생산적인 공세 덕분에 2000년 즈음 큰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지만 금방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때 좀더 공격적인 하우스 음악을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미국의 DFA 레이블이다. 2000년 초기 70,8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 포스트 펑크 씬의 리바이벌 격인 댄스 펑크 장르를 전 세계에 알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리고 포스트 펑크에 비해 더욱 댄서블하고 노이즈/덥의 요소가 가미된 댄스와 락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2000년 중 후반에 이르러 락과 힙합의 감성을 지닌 프랑스의 에드뱅거와 키추네에게 다시 그 흐름을 내주게 된다. 물론 지금도 Hot Chip, LCD Sound System, Hercules and Love Affair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를 거느리고 있지만 우선적으로 포스트 펑크가 가지고 있던 그 댄서블 하지만 서도 어딘가 미학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즉흥적 캐릭터가 90년대 소년소녀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현재 클러버들에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수성의 문제 때문에 오히려 80~90년대로 넘어가며 즐겨 들었던 힙합과 락 그리고 메탈을 떠올리는 (거기다가 다프트 펑크까지!) 에드뱅거와 키추네의 강하고 직접적인 일렉트로 하우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Kitsune와 Ed Banger

이러한 락과 하우스의 조우는 하입 만들기를 정말 좋아하는 영국의 뉴 레이브 Nu Rave’ 선전에 직간접적으로 힘입어 2000년대 하우스 클럽 씬의 큰 흐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흐름의 결정타는 바로 에드 뱅거의 Justice였고 이내 90년대 후반 다프트 펑크가 해냈던 하우스 씬의 재 탈환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도 프랑스의 그 고질적인 수용자적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초기 시절 키추네나 에드 뱅거가 프랑스 출신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레이블에게 영어로 연락을 취하는 촌극도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디 정신에 입각했던 이들은 현지 프랑스 클럽 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새로운 색깔과 방향성을 모색했다. (에드 뱅거와 키추네의 사업의 대부분 또한 프랑스 현지가 아닌 외국과 이루어지며 두 레이블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현지 클럽 씬에 대한 관심도 또한 현저히 낮다.)

 

다프트 펑크라는 모태를 두고 결국 에드 뱅거는 Justice, Sebastian, Para One 등을 앞세워 노이즈와 디스토션을 바탕으로 메탈에 더 가까운 일렉트로 사운드를 선보였고 Uffie를 통한 힙합과의 크로스오버에 중점을 두기 위한 실험을 택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반면에 키추네는 좀더 직접적으로 다프트 펑크 시대의 향수를 살렸고 아티스트 개개인의 앨범 보다는 키추네 메종으로 통하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집중했다. 또한 디자인 브랜드와 접목이 된 레이블인 만큼 앨범의 아트 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락/힙합/하우스를 통한 이들의 움직임은 2000년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 클럽 씬을 달구고 있고 80년대 보다는 오히려 90년대로 넘어가는 트랜지션 시기에 대한 레트로적 감성을 보여주며 또 그 방향성을 잡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아직 미디어에서 떠들어 댈 만큼 90년대 레트로라는 실체는 보이지 않으며 그들이 90년대 레트로를 대변한다고 정확히 말할 상황 또한 아니다. 비단 키추네와 에드뱅거의 설립자들이 각각 다프트 펑크의 프로듀서와 매니져 출신이며 10년이 넘도록 같이 일해온 파트너 관계라는 사실을 넘어 그들의 성공의 직간접적인 원인이자 모태나 다름 없는 다프트 펑크의 존재자체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의 빛 보다는 훗날의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로 드리워질 수도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 터져 나오는 하우스 음악의 대명사 격인 레이블이라고 해도 과연 그 시절 다프트 펑크 정도의 영향력과 충격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회의적이다.) 더욱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이 영원할 수는 없듯 이제 프랑스발 일렉트로 하우스에 지쳐가는 이들도 여기저기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두 레이블이 취하고 있는 실험과 새로운 방향이 얼마나 성공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어쨌든 두 레이블의 문제점이 슬슬 점쳐지고 있는 시점에 프랑스 낭트에서 뜬금없이 80년대 레트로 퓨쳐리즘을 외치며 발레리라는 또 하나의 레이블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Valerie

 

이제 3년 차에 들어선 발레리 레코드는 프랑스 하우스의 주목 받는 후발주자로서 위 언급한 두 레이블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우선적으로 이들은 70년대의 끝자락부터 80년대 중후반 까지의 레트로에 집중한다. 따라서 70년대 펑크 락의 감성을 90년대에 하우스를 통해 표출했던 다프트 펑크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롭다. 또한 그들이 표방하고 있는 80년대 속에 들어있는 퓨쳐리즘적인 사운드/감성뿐만 아니라 몰리 링그월드, 메가드라이브, 트랜스포머스, 마이애미 바이스, 끝없는 여름 등 80년대 만이 가지고 있었던 영화, 만화, 게임, TV 드라마 모두를 아우르는 점은 대중적인 80년대 레트로 팝 문화의 종합 선물과 같다.

 

80년대라는 동일한 관심사와 취향으로 만난 The Outrunners, College, Anoraak, Minitel Rose, Maethelvin 그리고 Russ Chimes를 주축으로 구성된 발레리는 (에드뱅거/키추네와 같이) 락과 힙합처럼 분노와 스트레스 해소적이 아니라 오히려 해변과 여름을 떠올리는 말랑말랑하고 여유 있는 사운드를 구사한다. 또한 공상과학 영화 안에서 보여지던 과거의 레트로 디스코 하우스와 존휴즈의 틴에이지 영화 및 드라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유치하고 로맨틱함을 세련된 사운드로 흠뻑 취하게 한다. 발레리의 음악을 권하는 건 딱 한가지 이유다. 90년대 레트로를 향해가고 있는 지금 20,30대의 클러버들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서 그 유치 찬란했던 80년대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 다신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돼었던 일렉트로니카 이야기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시리즈로 잡지 원고 종료 이후 블로그에서만 계속되는 컬럼입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Vibe Upon the World 25:

CREAM 1992~2002

매시브 클럽 씬의 절대 왕정 Part.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늙지 않는 피터팬=클럽 파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럽 파티 이벤트와 클러버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 하나가 있다면 바로 젊음이다. 클럽 파티 이벤트는 항상 젊음의 경험이고 입맛을 맞추며 영원히 늙지 않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클러버들은 인간일 밖에 없는 나머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의 조직원이 되어 각박한 현실과 직시해야 한다.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옛날 청춘의 노스탈지어에 빠져 끝없이 열정을 불태우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클럽 이벤트 자체는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피터팬이지만 피터팬에게 삶의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물리적 공간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클러버들의 취향도 끊임 없이 세대에 걸쳐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실의 논리를 망각한 호황기의 수입에만 정신이 나가있던 나이트 이벤트는 90년대 하우스와 트랜스를 통한 클러빙 열풍이 식어 내리며 강한 철퇴를 맞았다.

 

90년대 대형 클러빙의 위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제는 복합적 요인들의 작용이었다. 클러버들의 세대 변경은 물론이고 매시브 수퍼 클럽의 호황은 지나친 파티의 상업화와 DJ 값을 천정부지로 올려 놓았. 물론 티에스토나 다익 같은 수퍼스타 DJ 인정 받은 이들에게 한한 것이지만 이러한 위험 요소들은 결국 매시브 파티 씬의 몰락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MOS 함께 파티의 이비자를 점령하며 세계적 성공 가도를 날리던 게이트 크래셔 Gatecrasher, 갓즈키츤 Godskitchen 등의 메이져 클럽 나이트가 주말에서 이벤트로 횟수를 줄이는 전반적인 사업의 축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철퇴를 맞은 것은 바로 크림 Cream이었다. 리버풀의 대표 클럽으로서 MOS 함께 매시브 하우스 씬의 중심에서 많은 젊음의 욕구를 채워주고 가슴 벅찬 추억거리를 만들어준 크림은 클러버들의 세대 교체에 민감하게 반응한 갈란드 Garland 치부쿠 쉐이크 쉐이크 Chibuku Shake Shake 등의 소형 클럽을 앞세운 신진 세력에 의해 위력을 상실해나갔다. (따라서 크림의 마지막은 리버풀의 클러버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영국 젊은이들의 영원한 로망, 크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 젊은이들이 리버풀의 대학 지원의 동기 하나가 만큼 도시의 문화를 책임졌던 크림은 1992 네이션 클럽의 주말 나이트 이벤트로 시작되었다. 당시 설립자인 제임스 바튼과 데런 휴즈라는 20 초반의 젊은이들이 하우스 열풍에 동참하여 순수한 파티 이벤트의 목적으로 시작된 이벤트는 로컬 DJ였던 DJ 유세프의 동참으로 수많은 클러버들을 열광 시켰다. 회에 거듭한 성공으로 크림은 이른바 리버풀의 센터 스팟으로 성장하며 여러 수퍼스타 DJ들을 불러들였고 오큰폴드, 반다익, DJ 사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이들이 크림을 거쳐갔다. 크림의 최고 전성기는 오큰폴드가 레지던트 DJ였던 97년과 99 사이였다. 영국 런던의 애시드 하우스 열풍이었던 번째 사랑의 여름 '2nd Summer of Love' 핵심 인물이었던 오큰폴드는 1300 수용의 크림 코트야드를 뜨겁게 달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eb Fontaine의 레지던트 DJ 선택이 불러온 Progressive의 참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느 대형 나이트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크림의 전략은 수퍼스타 DJ 통해서였다. 대형 클럽의 전성기이자 크림의 전성기이기도 했던 97년과 99 사이 레지던트 DJ였던  오큰폴드가 떠나면서 크림은 명의 레지던트 DJ 후보를 올려 놓고 고심하게 된다. 결국 한창 클럽가를 달구기 시작하고 있던 신예 퍼기 Fergie (여성 가수 Fergie 아님) 포기하고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구축하고 있던 폰테인 Seb Fontaine 선택했지만 결국 '보장된' 안전을 선택한 것이 화근을 불러 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형
클러빙의 성공은 당시 들끓던 트랜스와 하우스 음악의 세계적 장악을 불러왔다. 언제나 부담 없는 사운드의 하우스와 좀더 규모의 군중을 제어하기에 안성맞춤인 트랜스 장르가 본격적으로 상업화의 길을 들어 스며 사샤 Sash, 디그위드와 같은 트랜스 황제들이 프로그레시브 Progressive라는 새로운 흐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레시브 락과 마찬가지로 좀더 미학적이고 프로그레시브 측면이 가미된 새로운 장르에는 크림의 새로운 DJ 폰테인도 가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음악에 트랜스와 하우스의 가볍고 흥겨운 리듬에 맞추어 즐기던 클러버들이 쉽게 적응하기에는 힘든 이었다. 결국 폰테인의 '서정적이고' '학구적인' 프로그레시브 사운드는 3000 수용의 크림의 댄스 플로어를 비워버리는 참극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마지막 6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트랙들이라구... 근데 사람들이 나가버리는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폰테인은 털어놓았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을 따른 소형 클럽의 약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뿐만이 아니었다.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의 대중화 실패 수퍼스타 DJ들에 대한 클러버들의 잃어버린 신뢰뿐만 아니라 작은 소형 클럽들의 약진도 타격을 불러 일으켰다. 대형 나이트의 침체 속에서도 같은 리버풀 위치의 치부쿠 쉐이크 쉐이크 Chibuku Shake Shake이나 갈란드 Garlands 같은 소형 클럽들은 연일 클러버들로 북적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흐름에도 줄곧 대형 DJ 나이트만을 고수하던 크림은 엄청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룻밤 스핀에 엄청난 개런티를 가져가는 수퍼스타 DJ 비해 비어버리는 클럽의 금고 사실 이상 이벤트의 진행을 불가능하게 했다. 트랜스 나이트로 대형 이벤트의 절대 강자들이었던 갓즈키친 Godskitchen처럼 크림은 결국 클럽의 문을 닫고 월별 홀리데이 원샷 나이트 이벤트로 전략을 고치게 되었다.   



TRIVIA: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크림의 메인 클럽인 네이션은 3 개의 공간으로 구성 되어 있다. 1000 수용의 메인룸, 700 수용의 에넥스 Annexe, 1300 수용의 코트야드의 스펙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라운지 붐에 의해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의 미니바와 성격이 비슷한 베이비 크림 Babycream 리버풀의 알버트 선착장에 만듬.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클럽의 죽음 이후에도 크림필드 이벤트와 컴필레이션 앨범 발매는 계속 .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돼었던 일렉트로니카 이야기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시리즈로 잡지 원고 종료 이후 블로그에서만 계속되는 컬럼입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Vibe Upon the World 24:
            Ministry of Sound,
                                           매시브 클럽 씬의 절대왕정 Part.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어발식 사업확장

철저한 상업위주 전략으로 무장한 MOS 어쩔 없이 언더그라운드 클러버들과 아티스트들에게는 공공의 적이자 악의 축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댄스 음악 컬쳐=MOS'라고 여겨질 만큼 문화 제국의 음악부 장관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는 MOS 지금도 세계적인 브랜드 사업 확장과 젊은 층의 빠르게 바뀌는 입맛을 맞추게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OS
클럽은 사업 수익 원의 3%밖에 차지 하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운드 시스템과 다양한 이벤트로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클러버들의 밤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 또한 유럽 뿐만이 아니라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으로 클럽 사업을 확장 시키고 있다. 음악 음반과 클럽 사업을 포함해 웹사이트를 통한 e-커머스, 라이센스 제품, 이벤트 투어 등으로 MOS 글로벌한 프랜차이즈 확장은 확고한 세계적 클럽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 MOS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체들을 열거하자면 펩시콜라, 코카콜라, 하이네켄, 말보로, MTV, 소니, 바카르디-마티니, 버진 항공 세계 1 브랜드기업들이 수두룩하다. (MOS 클럽 내부에는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 룸과 앱솔루트 룸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밖에도 라이프 스타일과 관련해 웰빙 Well-Being 바람에 초점을 맞추어 아웃 컴필레이션에 요가 테마를 더하는가 한편  발표한 미니바 Minibar 통해 라운지 외식 사업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OS 최근 시장의 중심이 IT 디지털 관련 사업에도 분주히 열을 올리고 있다. 미니바는 디지털과 IT 기술이 결합된 터치 스크린을 통한 주문 방식을 도입하여 웨이터/웨이트레스의 존재를 없애며 바에서의 좀더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향상시키는 전략을 선보였다. 또한 2006 런던 MOS 클럽에서 핸드폰을 통한 티켓팅 시스템을 도입하며 음악 관련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에 있어 모바일을 핵으로 하는 젊은 층의 문화를 향한 시장 공략 대한 선두주자 임을 유감 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철저한 상업적 시작과 비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니스트리 오브 캐쉬 Ministry of Cash라고 불릴 만큼 지독한 상업 위주 전략과 무차별 적인 사업 확장 의해 욕을 먹고 있는 MOS 태생부터가 기존의 파티 문화와는 상반된 차이를 보였다. 1993년에 발표된 MOS 로고가 상징하는 또한 기존 언더그라운드 파티 문화나 80년대 성행하던 레이브 파티와의 이상과  차이를 보였다. MOS라는 (미니스트리 Ministry 국가 행정 조직인 외무부나 법무부에서 쓰이는 '~' 의미한다) 선동적인 이름에 걸맞게 거대한 디스코 위에 얹혀진 황실 왕관은 흡사 영국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듯 절대성을 상징했다. 부분만 보더라도 스마일리 페이스과 같은 아이콘을 통해 평화, 평등, 행복, 사랑 등을 의미하던 70,80년대 언더그라운드 파티나 레이브 문화의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클럽 문화에 재등장한 알콜음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번째로 로고 발표와 함께 획득한 알콜 음료 판매 허가 라이센스는 알콜-프리가 주를 이루던 기존의 파티 문화와의 차이를 보였다. 춤과 음악을 통한 신체와 정신의 일체감의 희열을 맛보았던 초기 클럽 파티 그리고 애시드를 통해 알콜 의존도가 현저히 떨어져 버린 레이버들로 인해 알콜 업체가 일대 혼란을 겪었던 적이 있었던 사실을 살펴볼 새로운 젊음의 문화를 선도해가는 MOS 알콜 라이센스 획득은 다시 알콜을 댄스 클럽 문화에 탑재 시키며 업체들로 하여금 하우스 문화에 빠진 젊은 층을 겨냥한 새로운 마케팅 전략과 디자인을 고려하게 만드는 다시 호재를 불러 일으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법적으로
인정 받을 있는 알콜을 받아들이고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마약의 대중적 거부는 지금까지 성공한 여러 대형 댄스 음악 관련 프로모션, 브랜드 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깨끗함' 내세우는 선전 전략에 불과하지 않다. 오히려 당시 젊은이들이 빠져 있던 레이브의 겉모습, 디자인이나 라이프 스타일들을 여전히 자신들의 마케팅 전략에 활용하였음은 물론이고 자체 브랜드 매거진인 <Ministry>에서 장장 6 페이지에 걸쳐 안에서 어떻게 대마초를 키우는가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는 지나친 젊은 층의 거부 반응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진보적 성향을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창립자인 팔룸보는 대외적으로 마약과 담배에 대한 개인적 혐오감을 자주 들어내면서도 담배 회사로부터의 스폰서쉽을 멈추지 않는 클럽 이벤트의 내부 장식을 담배 회사의 로고와 포스터를 수놓는 모순을 연출하는 것도 비난의 중심이 되고 있다. ( 문화의 성격이자 골칫덩어리인 마약거래와 갱들의 개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컴필레이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번째로 MOS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들의 성공 요인이자 수입원인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클럽이나 파티에서의 음악적 경험은 어디까지나 특정 이벤트에서만 얻을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번의 외도를 제외하고 곳에서만 레지던스를 고수한 하우스 DJ 래리 러반이 제공하는 특별한 경험은 패러다이스 개러지에서만 가능했다. 또한 성행하던 레이브나 파티 이벤트 또한 - 개념이 주를 이루며 그날 밤의 경험은 다음 날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신비롭고 특별한 것이었다. 하지만 MOS 경우 수퍼스타 DJ 특정 클럽 나이트에서 울려 퍼지던 '클럽에서만 경험할 있는' 음악을 레코드 형태로 제공하며 공간과 시간의 확장을 꾀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MOS 경험을 알면서도 가지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귀중한 선물 보따리였음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MOS 특유의 문어발 사업 확장처럼 이를 통해 나오는 컴필레이션 앨범들 또한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듯 봇물이 터진 것이 질적인 결함을 초래했다.
 
세간에서 MOS 컴필레이션을 가리켜 "나오는 만큼 사라지는 속도도 빠르다"라는 비아냥이 속출한 것도 바로 문제점이 원인이었다. 최근 세계 하우스 댄스 음악 브랜드의 다크호스로 등장했던 헤드칸디의 매입을 통해 한번 헤드칸디 팬들의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매입 이전 질적인 면에서 뛰어난 수준을 자랑했던 헤드칸디 컴필레이션의 'MOS'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커버의 섹시한 여성 클러버, 드레스 코드의 정형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컴필레이션 하면 빠질 없는 것이 커버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섹시한 여성들의 모습이다. 비키니, 클럽, 코스튬 등의 의상으로 강하게 어필하는 섹시녀들의 모습은 컴필레이션 뿐만이 아니라 주류 대형 클럽의 댄서들의 모습으로도 자주 있게 되었다. 이는 클러버들의 드레스 코드 또한 '섹시함' 'cool'함으로 정형화 시켜버리는 영향을 주었다. 상업화의 폐혜를 다시 한번 느낄 있는 섹슈얼 어필은 동안 레이브와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파티 문화에서 중요시 되던 호모섹슈얼, 마이노리티, 유니섹스 등의 요소를 단번에 거세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돼었던 일렉트로니카 이야기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시리즈로 잡지 원고 종료 이후 블로그에서만 계속되는 컬럼입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Vibe Upon the World 23:
           the Ministry of Sound,
                     
                             매시브 클럽 씬의 절대 왕정1991-present Part1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ssive Clubbing 문화의 탄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80년대 말과 90년대 사이 애시드 하우스 붐이 영국을 뒤덮으며 지하에서 움츠려 있던 클럽은 오버그라운드로 뛰쳐 나왔다. 자신들만의 소중한 경험과 기억을 중요시 하던 '파티' 개념의 클러빙은 이제 돈벌이의 중요 수단이 돼어버렸다. 도시에게는 문화를 통한 수익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함은 물론이고 프로모터들에게는 단번에 일확 천금을 안겨줄 당시의 '블루 오션'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작은 지하에서 형성되던 클럽들은 규모를 엄청나게 키워갔으며 각종 단발성 대형 레이브/파티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흐름에 동조하며 1990 모습을 드러낸 리버풀의 크림 Cream 런던의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 Ministry of Sound 각각 영국을 대표하는 대형 클럽으로서 지금까지 클럽뿐만 아니라 레이블, 외식, 라운지 라이프 스타일 관련의 다양한 사업을 벌이며 영국뿐만이 아닌 세계 하우스 클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해 왔다.  


Ministry of Sound의 탄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문인 이튼 출신의 제임스 팔룸보가 애시드 붐에 가세해 런던에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를 (이하 MOS) 세웠을  아무도 작은 클럽이 영국의 댄스 음악 문화를 손에 쥐고 흔들 거대 브랜드로 거듭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세계의 하우스 클럽 컬쳐의 거대 공룡으로 상징되며 지금까지 천오백만 장이 넘는 앨범을 팔아 치웠다. 영국에서만 해도 팔리는 앨범 5 중의 하나는 MOS 것이라고 한다.) 영국에서 애시드로 대변되는 하우스 댄스 문화가 미국에서 건너온 만큼 이에 영향을 받은 팔룸보의 MOS 미국의 웨어하우스 파티를 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1991년부터 시작된 MOS 하우스 음악을 핵심 사운드로 지켜 왔다.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한 빠른 적응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 중반을 치달을며 뜨거웠던 영국의 애시드 하우스 붐은 열기가 점차 식어갔다. 대신 정글, 테크노, 개러지 새로운 장르의 음악들이 댄스 음악 씬을 점령했다. 흐름에 편승한 MOS 1995 정글 나이트를 개시하며 하우스 중심이었던 클럽 사운드의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 좀더 다양한 소비자 층을 확보한 MOS 핵심 사운드를 하우스에 두면서도 트렌드에 맞게 정글, 개러지, 트랜스 등으로 확대하며 빠르게 변하는 클러버들의 입맛을 맞춰 나갔다.

 

ATB 9pm Till I Come, MOS 싱글 성공신화의 서막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럽 나이트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MOS 1999 밀레니엄을 앞두고 ATB '9 pm Till I Come' MOS에서 나온 싱글 최초로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레이블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트랜스 신드롬을 낳고 수퍼스타 DJ 시대를 초래했다. 이때부터 MOS 컴필레이션 앨범이 불티나듯 흥행 고를 올리기 시작했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 세계에 MOS 클럽 확장에 불을 붙였다. 영국을 벗어나 세계 댄스 클럽 음악 문화의 우두머리가  MOS 싱글 성공의 번째 쾌거는 2004 스웨덴 출신 DJ 에릭 프리즈의 "Call on Me" 발표되었을 때다.


80년대 Retro의 시작

사용자 삽입 이미지
80년대 가수 스티브 윈우드의 히트 팝송인 'Valerie' 원곡으로 에릭 프리즈의 'Call on Me' '발레리' 클라이맥스인 'call on me~' 부분만을 따와 리믹스한 전형적인 업템포의 클럽 하우스 댄스 트랙이다. 발매와 동시에 장장 16  영국 댄스 차트 1위를 차지한 트랙은 영국을 들썩이게 만들며 90년대 시작되었던 80년대 일렉트로 사운드를 주류로 올려놨다. 바로 최근 패션, 음악 분야의 트렌드를 장악하고 있는 80년대 레트로 붐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에어로빅을 테마로 뮤직 비디오는 천연색상, 라이크라와 줄무늬 패턴, 레그워머, 박스와 카세트 테이프 등의 요소와 MOS특유의 섹시한 여성 댄서 향연의 조화로  가장 섹시한 뮤직 비디오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특히 뮤직 비디오의 주인공인 딘 베리는 호주 출신으로 이 영상의 안무까지 맡았는데 일략 스타덤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휴즈 프로덕션의 What a Feeling (아이린 카라의 리메이크)의 뮤직 비디오에 다시금 출연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때부터 80년대 히트곡들의 하우스 리메이크 트랙들이 무차별하게 쏟아져 나오며 물량공세의 의한 질적인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미 MOS 컴필레이션은 80년대를 향유하던 ( 적인) 일렉트로 사운드로 범벅이 되어 있을 정도다. 질적인 비판을 떠나 MOS 보여주는 시대 트렌드 흐름에 대한 파악 능력과 알맞은 타이밍을 통한 마케팅적 공략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의 레이블이라는 절대왕권을 거머쥐게 있는 원동력이었다.


-2부에서 계속


사용자 삽입 이미지
 

RG7eDZcIbdO50HGCwFzILQkMnvBEfpwTggKWb55wcEs=

728x90
반응형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Flickr ID: shine.


Tic Toc (12") by Carrie Lucas


블링매거진 일렉트로니카 컬럼을 마치며...

월드컵 프랑스전이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 때 첫 원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2년이 지나 어느덧 컬럼을 마감하게 되는 시점까지 오니 감회가 새롭게 느껴진다...

모든게 다 그렇듯이 처음 시작할 때는 그동안 익히고 경험해왔던 일렉트로니카 문화와 역사에 대해 쭉 한번 다뤄보자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제목도 PLUR&Vibe Upon the World이라는 나름 의미심장하게 지었건만 -_-ㅋ

막상 끝나는 시점이 되니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반에 반도 못다룬 것 같아 참 아쉽다... (테크노나 트립합, 디엔비같은 장르는 아예 다루지도 못했으니 -_-ㅋ...특히 좋아라 하는 디스코를 아껴둔것도 심히 아쉽다...ㅜㅜㅋ)

뭐 어쨋든 이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이 컬럼은 계속할 생각이지만 전처럼 주기적으로 포스팅을 계속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제 블링 재편과 함께 [Ambient: Film & Electronica]라는 새로운 컬럼을 시작한다. 기존 PVUW 시리즈가 문화와 역사에 치중해 있던 반면 요번 컬럼은 영상과 일렉트로니카를 잇는 만큼 상당히 자유롭고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들어갈 것 같다...

첫 원고는 다소 개괄적이고 Intro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영상과 일렉트로니카 음악이란 틀 안에서 좀더 다양하게 소재를 모아볼 생각이다.

어쨋든 누구다 다 찾아보는 인기 컬럼도 아니고 그리 글재주가 뛰어난 편도 아니라 참 엉성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정말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음악에 관해 쓰는 컬럼이었고 음악관련 직종도 아니기에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많진 않지만 간간히 내 글을 읽고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감사하고 굉장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블링에 연재 돼었던 PVUW의 마지막 회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ㅋ
    앞으로 [Ambient: Film& Electronica]라는 새로운 시리즈로 만나 뵙겠습니다.
                                                                                                                                      -Groovie


PLUR & Vibe Upon the World 22:
               
최초의 Invitation-Only 파티,
                          David Mancuso’s Loft Party


고아원의 기억, 그리고 로프트 파티의 탄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디스코가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1965년 경 데이비드 만쿠소라는 한 사나이가 뉴욕의 647 브로드웨이에 로프트 하우스를 처음으로 얻게 되었다. 거주 공간이 아닌 사무 공간으로 꽤 넓은 규모를 가졌던 이 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의 머리 속에는 고아원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이 필름처럼 스쳐갔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녀님이 차려준 저녁을 먹으며 함께 했던 그 식탁 위에는 항상 레코드 플레이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 버려진 어린 아이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제공했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고아원의 넓지만 텅 빈 듯한 내부 공간과 허름한 건물은 이 작은 아이들의 외로움과 고독을 상징하는 듯 했지만 맛있는 음식과 분위기를 한층 돋구는 음악 그리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은 그들에게 작은 파티나 다름 없었다.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마련한 만쿠소의 로프트 하우스의 넓고 낡은 공간은 마치 그를 어린 시절의 행복한 시간으로 돌려 놓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음악과 사람을 사랑했던 만쿠소는 자신의 로프트에서 그 때의 경험을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때가 바로 뉴욕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전설의 언더그라운드 파티인 로프트 파티 The Loft Party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참여자들이 만들어 가는 순수한 파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만쿠소의 파티는 여느 클럽 이벤트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입장하기 위한 티켓을 팔지도 혹은 배포하지도 않았으며 음식과 마실 것들은 제공될 뿐, 팔지 않았다. 참여자들 하나하나의 작은 기부를 통해 파티와 렌트 자금을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지인들 간의 인비테이션 온리 Invitation-only 파티였기에 준비하는 과정 속에 친구와 공동체를 위한 정성이 들어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사랑과 어우러짐의 모토와 함께 로프트 파티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훈훈'했다. 프로모터나 DJ가 밥상 차려주듯 내놓는 것이 아닌 참여자들 모두가 함께 만들어나는 분위기와 경험이 바로 로프트 파티만이 가진 '특별함'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프트 파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람들 간의 평등함이었다. 자신의 옆 사람이 부자였건, 높은 사회 지위를 가진 사람이건, 게이나 레즈비언이건 혹은 유색인종이었든 간에 로프트 안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로프트를 꽉 매운 음악과 행복의 열기 속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만쿠소가 파티를 진행해가며 원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면서도 감사하고 신기했던 현상이었다.

로프트 파티가 그 규모와 유명세를 쌓아가며 서서히 연예인들과 같은 유명인들도 참석하기 시작했지만 로프트 공간 밖에서 '특별했던' 사람들은 내부에서는 똑 같은 로프트 베이비들이었다. 보통 식당이나 파티에 갔을 때 유명한 영화 배우라도 목격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야, 야, 저기 XX가 왔어 봐봐, 우와"하며 수군거리곤 하지만 이런 촌극은 로프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참여자 한 명 한 명 모두가 로프트의 경험에 작은 일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한 시공간에 대해 서로 의무감과 보람을 느꼈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만쿠소의 마술 같은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oft Party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DJ 철학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아원 시절 수녀님이 마련해준 레코드 플레이어처럼 사람들의 유대감을 높여주는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파티를 위해 만쿠소는 정성껏 그의 설렉션을 테이프에 담았으며 이 테이프들 속에는 다양한 장르의 빠르고 느린 음악들이 섞여 있었다. 오늘 날 하우스 클럽 음악의 모태가 되는 라틴 리듬과 소울 풍의 보컬 음악 등이 흥을 돋구는 한편 밴 모리슨의 애스트랄 위크 <Astral Weeks>의 음악들이 흘러 나오기도 했다. 여러 배경의 사람들을 상대로 했던 이비자의 DJ 알프레도 피오리오와 비슷한 맥락의 선상에 서있었다.

또한 기본적인 DJing 스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쿠소는 로프트 파티를 이끌어가는 DJ로서 믹서나 헤드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음악이 끝나기 전 다른 음악으로 넘어가버리는 트랜지션도 없었다. 음악 하나하나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울려 퍼졌다. 음악에 가해지는 볼륨, 피치조정, 리믹싱과 같은 어떠한 인위적 '조작'과 '분절'은 원작자가 의도하고 그 음악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감성과 듣는 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 시키는 행위라고 만쿠소는 믿고 있었다. 시작과 끝의 결말을 맺음으로 그 음악으로부터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음악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는 그의 독특한 DJ 철학이었던 것이다. 만쿠소에게 DJing란 오히려 하나의 긴 여정과 같았으며 파티가 시작해서 끝나는 시점까지의 음악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세트를 이루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실력파 사운드 디자이너 리챠드 롱 Richard Long과 함께 일구어낸 로프트의 사운드 시스템 또한 한 몫 했다. 주류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만쿠소의 손을 떠나 매킨토시 McIntosh 앰프를 타고 클립쉬혼 Klipschorn 스피커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로프트의 바이브Vibe를 최 절정으로 끌어냈다. 알콜 음료도 제공되지 않았던 이 곳에서 만쿠소의 음악에 취해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로프트 베이비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 이었다. (로프트의 사운드 시스템은 그 당시 패러다이스 개러지와 함께 거의 세계 최고 수준으로서 아직까지 전설로 회자 되고 있을 정도다.)


언제나 되돌아오게 되는 로프트 베이비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린 아이의 생일 파티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상 시키듯이 준비된 여러 풍선 장식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거대한 디스코볼이 반사하는 불 빛 아래 수많은 사람들… 그렇게 3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지속된 로프트 파티에 당시 젊은이에 불구했던 로프트 베이비들은 성인이 되고 가정을 가진 후에도 자신들의 아이들과 함께 로프트를 찾았다. 만쿠소에게 있어 이 보다 큰 보상과 보람은 없었다. 이런 특별한 로프트 만의 경험은 수많은 로프트 베이비들로 하여금 인생의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게 해주었다.

  

"개인적으로 로프트 파티는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성행하던 주류 바Bar나 클럽club에 대한 작은 반란이기도 했지요. 전 항상 무언가 개인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정형적인 주류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아주 단순한 일 말이죠."라고 만쿠소는 지나간 시간들을 이렇게 회자하고 있다.


Trivia:

*로프트 파티 이름의 유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처음에는 'Love Saves the Day' (대략 '사랑으로 오늘을 구원하다'라고 풀이된다)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파티가 거듭나며 사람들 사이의 대화 속에서는 "오늘 (만쿠소의) 로프트로 간다"라는 식의 말이 자주 오고 갔다. (한국말로 풀이해 봐도 "사랑으로 오늘을 구원하다 파티에 간다" 보다는 훨씬 덜 어색해 보이듯)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티의 명칭도 '로프트'로 변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로프트 파티에는 수많은 전설의 DJ들도 함께 했다. 그 이름을 몇 열거하자면, 디스코 DJ인 프랑수아 케보르키안 Francois Kevorkian, 시카고 하우스의 대부 프랭키 넉클스 Frankie Knuckles, 데니 크리빗 Danny Krivit, 역사 상 가장 위대한 DJ로 칭송 받는 래리 러반 Larry Levan, 데이비드 모랄레스 David Morales, 닉키 시아노 Nicky Siano 등이 있다. 만쿠소의 로프트 하우스 파티는 이들 모두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음악적 영감과 경험을 선사했다.

현재 데이비드 만쿠소의 Loft Party는 런던에서도 1년에 4회씩 진행 중이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에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LUR&VIBE UPON THE WORLD 21 6월자:
 
 
The Birth of Rave

매시브 레이브와 상업적 파티 프로모션의 탄생


2nd Summer of Love의 애시드 광풍을 뒤로하며 꿈만 같던 88년을 마감하고 영국 런던의 애시드 하우스 씬도 그 두 번째 진화에 돌입했다. 이 시기에 진입하며 슬슬 Rave Raver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애시드 하우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뒷북을 치던 미디어 뿐이었다. 이비자의 순수한 분위기와 60년대 히피를 떠올리던 사랑과 이상의 분위기는 사라져갔고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철저한 상업정신으로 무장한 2세대 파티 프로모터들의 등장이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애시드 하우스를 경험하며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걸, 이거 돈 좀 되겠네 하는 생각들이었다. (거기다가 세금도 낼 필요도 없고 한 방에 큰 돈이 굴러들어오니 이처럼 매력적인 장사도 어디 있었겠는가?) 이상보다는 비즈니스적 개념이 앞선 이들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레이브의 대형화를 불러왔다. 100 명 남짓을 위한 좁디 좁은 클럽의 공간 보다는 1000, 10000명을 위한 넓은 아웃필드의 공간이 더욱 이득이 많아 보이는 건 당연했고 이로 인해 그 유명한 M25 오비탈 하이웨이나 넓은 대 자연의 공간을 활용한 매시브 레이브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사랑, 평화, 존중으로 대변되는 이상적인 문화의 대명사인 레이브는 이렇게 상업주의적 접근과 함께 태어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상업주의적 파티 프로모션의 붐을 불고 온 중심 인물은 Tony Colston Hayter (이하 토니)라는 21살의 청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과 남의 이목을 받는 것을 중요시 여겼던 토니는 애시드 하우스를 경험하며 일찍이 파티 프로모션의 상업성에 대해 눈을 뜨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대형화와 거대함을 추구한 토니는 손수 미디어를 불러 애시드 하우스의 현장으로 끌고 왔다. 하지만 자극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이들이 파티를 통해 즐겁고 뜻 깊은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 따위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미디어의 초점은 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위험한 아이들로 맞추어 졌고 미디어에 의한 대중의 패닉은 시작되었다. 덕분에 더 많은 아이들이 생각 없이 애시드 하우스가 너도나도 해야 할 쿨한 최신 트렌드인양 생각하며 모여들었고 당시 애시드 문화 속에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순수함마저 없애 버렸다.

 

이렇게 토니는 레이브라는 제2의 애시드 세상의 문을 열었고 그의 선라이즈 파티는 승승장구하며 영국의 모든 청소년들을 거대하고 화려한 유포리아의 시공간으로 이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에너지, 월드 댄스, 바이올로지 등의 대형 레이브 이벤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이처럼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레이브 파티에 의해 프로모터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 했다. 따라서 좀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파티는 좀더 이벤트적 성격을 띄어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먼저 스타 DJ 라인업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종전처럼 한 명의 DJ가 오랜 시간 동안의 여정을 책임지는 리츄얼식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각각의 DJ들은 짧은 시간을 할당 받고 자연스레 여러 음악의 조화라기 보다는 빠르게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수 있는 Anthem 위주의 사운드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어느 파티에서나 거의 같은 설렉션을 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업리프팅한 하우스 그리고 트랜스 음악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파티를 화려하게 장식할 이벤트성 장치들이 세분화 되었다. 엑스터시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라이팅 시스템은 점차 다양해지고 각 파티 플라이어에는 어떠한 사운드 시스템이 사용되어지는지 구체적으로 표기 되었다. 이 밖에 거품 샤워, 대형 풍선의 등장 등 대형 레이브의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대하고 시끄러움을 향해 달려갔다. 자연스레 이비자 베테랑들은 거의 종적을 감추었으며 주 참여자도 자극적인 것에 민감한 어린 연령층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레이브 문화는 이렇게 태어났고 진화했으며 프로모션의 상업주의적 의도와는 또 다르게 레이버들은 자신들만의 유포릭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가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고로 레이브는 엄중한 대정부의 차원의 단속 속에 진행된 불법 파티였다. 따라서 천 명이 넘게 모이는 레이버들을 위해 24시간 파티를 가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경찰의 단속 뿐만이 아니라 레이브의 상업성에 눈독들인 축구 갱단의 위협에 의해 잠시 몸을 숨기고 있던 토니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을 만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휴대폰을 사용한 보이스 뱅크의 활용이었다. 파티 플라이어에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전화번호만을 남겨 놓거나 레코드 샵의 지인들에게만 전화번호를 알려준 후 이 번호로 연결되는 보이스 뱅크에 토니는 장소를 수시로 바꾸며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확정된 파티 장소를 알리며 경찰의 수사망을 이리저리 빠져나가게 되었다. 레이브의 이러한 전통은 훗날에도 계속 이어졌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확장되며 휴대폰, PDA, 이메일, 인터넷 커뮤니티 등의 디지털 매체가 레이브 문화 속에서 크게 활성화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숨바꼭질 같은 여정을 걸쳐 장관 속에 펼쳐지는 레이브의 경험은 레이버들에게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 듯한 일종의 어드벤쳐 식의 짜릿함마저 안겨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간이 지나며 경찰의 단속 방법 또한 심화되었고 급기야 89년에는 파티의 불법화를 강화시킨 그래엄 브라이트 빌이 통과 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브나 파티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하고 매력적인 사업성은 프로모터나 갱단들만이 간파한 것은 아니었다. 매시브 레이브와 매드체스터 이후 런던과 맨체스터 같은 영국의 각 도시들은 엑스터시에 의한 대중의 패닉이 잠잠해지면서 클럽과 파티의 규제를 서서히 완화시켰고 도시의 주수입원으로의 효자 문화 상품으로 길들이게 되었다.  

 

국내에서 성행하는 많은 파티들 중 눈을 찌푸리게 하는 안 좋은 소문들이 종종 들리곤 한다.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돈과 미디어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은 진리다. 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듯 어차피 한 문화가 대중의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 순수함은 없어져 버린다. 따라서 이윤과 세인의 관심을 중요시 하는 파티 프로모션을 무작정 욕만하며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도 24시간을 넘게 미친 듯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던 레이버들이 중요시 한 건 내가 남에게 환영의 손을 내미는 것이었지 나의 콧대를 높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문화에 대한 사랑과 지킴이라는 숙제는 DJ만도, 프로모터만도 아닌 우리 레이버들과 클러버들 모두에게 달려있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Vibe Upon the World 20:
2008년 5월자
My House in Montmarte:
French House

몽마르트 언덕의 하우스: 프렌치 하우스의 역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우스
간단역사: 테크노와 하우스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국은 엑스터시의 요소를 집어 넣어 애시드 하우스에 사이키델리아를 추가했다. 바톤을 이어받은 이태리는 피아노 리프 등의 멜로딕한 요소를 통해 좀더 말랑말랑한 사운드를 만들어냈고 마지막 타자인 프랑스는 특유의 "French Touch" 앞세워 디스코의 Funky 함을 되살려 냈다.


 

70's Disco & Cerrone: 프랑스식 디스코 사운드의 방향성 제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
70년대 디스코의 가장 흐름을 본다면 Salsoul 레이블 식의 funk, 소울, 오케스트랄, 보컬이 가미된 미국식 디스코와 조지오 모로더와 그의 아이스 도나 섬머를 중심으로 하는 차갑고 반복적인 유럽식 일렉트로 디스코가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디스코의 사이드 장르라고 있는 우주적인 테마의 스페이스 디스코 분위기에 매료되었었는데 Cerrone이라는 걸출한 아티스트가 1977 [Super Nature]라는 스페이스 테마의 일렉트로 디스코를 들고 나오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비록 조지오 모로더의 아류라는 원성도 많았지만 모로더 사운드의 공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소울과 섹슈얼한 요소를 더했고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다라는 진정한 예를 보여주며 훗날 프랑스를 전자 댄스 음악의 중심으로 올려 놓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 모방 카피를 통해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 있다라는 관점 그리고 기계음의 조작을 통한 안드로이드적 이미지는 훗날 다프트 펑크에게 까지 이어지는 "French Touch" 통한 하우스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초석이 된다.


 P.S
. 디스코텍이라는 명칭 자체는 프랑스에서 왔지만 어원의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사운드는 세론의 등장 이후에서야 터져 나오는 듯싶었다.


 


French House
의 탄생: Daft Punk와 Motorba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0년대 중반은 프렌치 하우스가 위용을 들어낸 중요한 시기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가 바로 다프트 펑크와 모터베이스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는 하우스 음악의 생산자라기 보다는 즐기는 입장에 가까웠기에 미래의 프렌치 하우스 아티스트들은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레이브를 통해 테크노와 하우스 사운드에 매료 되어있었다. 디트로이트 테크노 사운드에 빠져 있던 Z'dar 힙합에서 하우스 DJ 거듭나며 Etienne de Crecy 함께 Motorbass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고 96 [Pansoul] 앨범을 통해 전형적인 디트로이트 테크노를 연상케 하는 하우스 사운드를 내놓았다. 디스코 시절 세론이 보여주었던 모방의 미학은 다시 부활하게 셈이었다. (Z'Dar 본인도 자신은 디트로이트 사운드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라고 토로한바 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모터베이스 말고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프랑스에 새로운 아티스트가 혜성처럼 등장했는데 이들에 의해 잠시나마 디트로이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초기 프렌치 하우스는 시카고 애시드 하우스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세론의 모방의 미학은 물론이고 70년대 스페이스 디스코의 향수와 성향을 겸비한 새로운 듀오는 바로 다프트 펑크였다. 작은 게이 클럽에서 시작된 Respect 파티를 시작으로 다프트 펑크는 버진 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99 [Home Work] 앨범을 내놓았고 듀오의 반쪽인 토마스 뱅갤터는 여러 프렌치 디스코 아티스트들과의 깊은 연계를 통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프렌치 사운드를 구현했다. 당시 지속 되던 유로 하우스 특유의 디바 보컬과 멋들어진 남성 , 몽롱한 신스 패턴에 식상해 하던 클러버들과 리스너들은 로우패스 필터 스윕을 무기로 다프트 펑크가 만들어 내는 신종 프렌치 사운드에 즉각 매료되었다. 시절 (90년대 중반/) 오랜 문화적 라이벌 영국이 내놓은 트리합과 정글 사운드에 어깨를 견주며 스타일쉬한 프렌치 특유의 감성을 세계에 다시 한번 떨어뜨려 놓았다.


P.S.
Urban Dictionary에서 다프트 펑크를 검색하면 세계가 프랑스를 우습게 없는 한가지 이유라는 말이 나온다. 전자 댄스 음악사에서 프랑스를 살펴보면 그들은 항상 발짝 물러서 있었다. , 생산자라기 보다는 항상 즐기는 입장에 가까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자존심은 다프트 펑크다라는 정의가 그다지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1998
년, 프랑스에 의한 전자 댄스 음악의 지각 변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8년은 모든 것이 끝장 나면서 전혀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던 해였다. Cassius "1999' Stardust "Music Sounds Better with You" 연달아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대체 이게 뭐야?" 외치며 새로운 프렌치 사운드에 열광했다. 그리고 2000 Chic Soup for One 샘플링 Modjo Lady 성공은 프렌치 하우스가 이제 세계 점령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 사살이나 다름 없었다. 이때부터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나 크림과 같은 대형 레이블의 컴필레이션 앨범 그리고 영원한 파티의 고향인 이비자는 즉각 프렌치 사운드를 채용하며 좀더 상업적인 렌더링을 가미하기 시작했음은 물론이고 싱클라는 유럽 MTV 프렌치 하우스 특집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02 동안의 프렌치 하우스 사운드의 집대성이라 있는 컴필레이션 앨범인 My House in Montmarte 발매 되며 기념비적인 성격을 더하게 된다. ( 앨범에 수록된 프렌치 하우스 아티스트로는 Daft Punk, Cassius, Air, I Cube, Dimitri from Paris, Alex Gopher, DJ Mehdi, Superfunk, Alan Braxe 등이 있다)


P.S.
 Motorbass Z’dar 몸담은 Cassius, 아웃 라운지 하우스의 Air, 프랑스에 처음으로 하우스 음악을 소개한 Dimitri from Paris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최초로 국가에서 내리는 예술을 통해 국가를 빛낸 이들을 위한 기사작위를 수여 받았다는 사실은 프렌치 하우스가 세계의 문화에 끼친 영향력이 실로 엄청났음을 있다.


 


Present: 세대 교체 그리고 90년대로의 전환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 초반부터 이미 일렉트로에 관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레트로가 문화 영역의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만큼 전반적인 전자댄스 음악도 일렉트로 성향을 띄며 점차 바뀌어 나갔다. 즈음해서 Funky 프렌치 디스코 하우스도 퇴색되어갔고 이들은 일렉트로에서 대안을 찾아냈다. 당시 주류 클럽 사운드였던 트랜스와 하우스 모두 일렉트로 사운드를 장착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트랜스 쪽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돋보였던 베니 베나시의 펌핑 하우스 스타일 또한 프렌치 하우스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에드 뱅거와 키추네 레이블을 위시로 프랑스는 뒤에서 하니 버티고 있는 다프트 펑크의 백업과 뮤직 블로그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해 일렉트로와 성향을 가미한 강하고 헤비한 일렉트로 하우스를 선보였다. 2 다프트 펑크라 불리며 나타난 이들이 Justice.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로부터 현재까지 동안 프랑스의 Justice 전선의 사령관이 되어 Simian Mobile Disco, 독일의 Digitalism, 캐나다의 MSTRKRFT 함께 세계 클럽 사운드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댄스 성향에 오픈 Klaxons, the Teenagers 등의 밴드들과의 밀접한 연계를 통해 80년대 뉴웨이브 시절을 떠올리는 락과 댄스의 크로스오버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 현상을 이끌고 있는 군단은 키추네와 에드 뱅거 레이블을 주축으로 하며 소속 아티스트들로는 Uffie, Yelle, SebastiAn, DJ Mehdi, DJ Feadz, Mr.Oizo, Hot Chip, Gun ' n Bombs, Cut Copy, Crystal Castles 등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나 특징이 있다면 90년대 출현했던 다프트 펑크 등의 프렌치 아티스트들이 소싯적 80년대 문화를 향유하며 에센스를 그들의 사운드에 담아낸 만큼 이들은 다음 세대임에 걸맞게 90년대를 향유했고 향수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테크토닉 댄스의 불을 당긴 Yelle A Cause des Garcons (Tepr Mix) 뮤직비디오에서도 펌프 운동화, 원색적인 색상 등이 이미 90년대를 향수하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일렉트로 하우스 DJ들의 믹스셋을 들어봐도 80년대는 물론90년대의 팝송들이 간간이 끼워져 있음을 확인할 있다. 5 떠들어 대던 80년대 레트로 현상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로 넘어가던 레이브 문화 시절의 감수성을 많이 지니고 있는 듯하다. 9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세대들이 학생의 신분을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만큼 90년대 레트로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고 있다. 단지 미디어에서 떠들어 대는 시점이 언제가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2008 4 이제 사라진듯한 90년대의 프렌치 하우스와 관련된 작은 사건이 하나 터졌었는데, Louis La Roche라는 십대 영국 DJ 자신의 처녀작을 토머스 뱅갤터의 신보로 알리며 데뷔한 깜짝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일렉트로 하우스가 아직까지 약발이 빠지지 않은 만큼 10 전의 사운드의 부활시킨 청년이 전체 댄스 음악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할 보이지만 지독하리만큼 90년대 프렌치 하우스의 감성을 담아낸 그의 데뷔 앨범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 뜻하지 않게 받은 반가운 안부편지와 같은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French House Playlist~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PLUR&Vibe Upon the World 19:


도시를 그려내는 사운드, Bristol Dubstep & Berlin Minimal Techn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이라는 도시의 영혼을 담은 음악이 나오길 기다리며

몇 십 년이 넘도록 공장기계처럼 찍어내는 사랑타령이 지겹다.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사, 다양성, 규모 면에서 세계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따라서 이 곳에는 신파 말고도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잠깐 눈을 돌려보자. 도시의 중앙을 가로 짓는 한강은 강남/북의 경제적 분단이라는 자본주의적 상징이전에 흘러간 역사를 소리 없이 담아내고 있는 역사적/ 자연적인 스케일의 웅장함을 담고 있다. 도시 이곳 저곳의 공간들은 낯과 밤마다 카멜레온 같은 모습으로 변하며 시공간을 뒤트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메타포가 담겨 있다. 또한 블로그의 힘이 커져가며 옛날 보다 더 길어진 특정 맛 집 앞의 줄서기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클럽과 브런치 카페의 이런 저런 풍경들도 그 질을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적 삶의 풍경이다. 잔해로 변해버린 숭례문, 시멘트 덩어리로 물리적 상징화가 되어버려 기억 속에서 생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유물이 되어버린 시청 앞 광장, 그리고 물질주의와 루키즘에 얽매여 쓰러져가는 도시 속의 지친 영혼들 등 컨텐트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테크노/하우스//포크, 어떤 음악이던 상관 없다. 음악을 듣고 단번에 서울을 떠오르게 만들어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의 삶을 담은, 영혼이 숨쉬는 사운드를 듣고 싶은 마음에서 새롭게 현대의 도시를 재해석하고 있는 베를린과 브리스톨의 사운드를 소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Berlin,  Ellen Allien:
텅 빈 도시를 채워나가는 테크노 비트

베를린은 일단 규모 면에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오랜 역사는 물론이고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아픔까지 껴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독일,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건 대게 차갑거나 텅 빈 이미지다. 장벽 붕괴 이후 소음으로 성낼 이웃도 없고 렌트비도 싼 옛 동독을 중심으로 테크노, 트랜스, 하우스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꽃 피웠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의해 많은 미움을 받았던 트랜스 장르 이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형 사건은 터지지 않았다. (그저 러브 퍼레이드가 지구촌 소식을 매년 장식하는 정도였을 뿐.) 하지만 그 동안 독일의 언더그라운드 DJ들은 지속적으로 테크노 사운드를 계승하며 실험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여성 DJ인 엘렌 앨리엔이다. Bpitch Control 레이블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자신의 사운드에 그려 넣었다.

과연 그녀가 시도하고 있는 실험적인 미니멀 테크노 사운드에 담겨지고 있는 베를린이라는 모습은 무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녀의 몇몇 뮤직 비디오를 보면 거대한 메트로 시스템을 통해 도시를 떠돈다는 느낌을 받는다. 거대하고 텅 빈 도시를 하나의 타이트하면서도 역동적인 유기체로 묶어 주는 것은 바로 이 교통 인프라스트럭쳐가 아닐까? 지하철, 택시, 버스 그리고 자전거와 걸음, 이렇게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매일 자신만의 동선을 그리며 도시라는 세포를 숨쉬게 하고 있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아우토반과 트랜스유럽 익스프레스를 연상시키기라도 하듯 엘리엔의 미니멀한 테크노 비트 속에는 철로의 마디에 의해 반복적으로 덜컹거리는 역동적인 무브먼트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 사운드는 그녀의 말처럼 감성적이고, 몽롱하고, 신비스러우며 섹시하다. 바로 이러한 아티스트들의 실험과 열정이 베를린의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며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아닐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Bristol, Dubstep: 인상에 의한 도시의 풍경

브리스톨은 오랜 사운드 시스템과 브레이크의 문화를 자랑한다. 음악을 향한 오픈 마인드를 통한 실험적 정신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동시대 전자 댄스 음악의 '대안'을 내놓았다. 4월말 발매를 앞두고 있는 트립합의 황제 포티스헤드가 그 위용을 들어내었고 드럼 엔 베이스 이후 그다지 큰 이슈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UK Garage Grime 씬 이후 Dubstep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런던과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덥스텝이라는 장르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약 2,3년 정도 되었지만 덥스텝 아티스트 중 최초로 정규 앨범을 낸 베리얼의 출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138 142 bpm 사이의 빠르기를 오고 가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듯 한 덥스텝은 최초 출현 이후 2Step Garage를 기본 토대로 테크노, 브레이크, 드럼 엔 베이스, , 레게, 하우스 등의 요소를 흡수하며 자체적인 사운드의 진화를 거듭해 왔고 아티스트들의 성격 또한 조금씩 다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에서 언급한 베리얼의 경우 엠비언트한 정글의 에센스를 담고 있다면 애플블림과 핀치의 경우 좀더 테크노적인 사운드를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바로 덥, 베이스 사운드로 인한 진하고 깊은 뎁스와 인상적인 퍼커션의 요소다.

덥스텝, 특히 베리얼의 사운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드럼이다. (브리스톨이라기 보다는 런던 베이스의 DJ이지만 대중에게 접하기에 가장 가까운 사운드의 구사라는 면에서 소개한다.) 시퀀서를 쓰지 않는 베리얼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드럼 패턴을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곳에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드럼 사운드라 부르지 않고 impression of drum sound, '드럼의 인상'이라 표현하는데 바로 여기에 덥스텝의 에센스가 담겨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에서 언급한 엘렌 엘리엔을 위시로 한 베를린 사운드가 도시의 살아 숨쉬는 맥박, 그 유기체적 역동성과 미니멀리즘의 점진성을 서로 묶고 있다면 덥스텝은 한마디로 '풍경'을 담고 있는 듯하다. 떨어지는 듯한 리듬은 UK garage의 톡톡 튀는 듯 직설적이고 작위적이었던 2Step 리듬을 좀더 추상적으로 뭉개 놓았고 정글(드럼 엔 베이스의 모태)의 에센스를 담아내는 듯한 엠비언스와 에픽한 엣모스피어릭의 요소로 풀어내는 도시의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인 모네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수많은 점들이 만들어 내는 그 스냅샷 같은 풍경의 인상이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밀레니엄 바로 이전 트립합은 근 미래를 앞둔 도시 속 인간의 우울함과 불안감을 뼛속 깊은 곳 까지 느끼게 해주었고 정글과 드럼 엔 베이스는 그 정교하고 과학적인 리듬과 엠비언트적인 요소를 통해 매일 정해진 시간과 매트릭스적 시스템 속에서 일개미 마냥 분주히 생활하는 도시인들이 만들어내는 시티스케입을 보여주는 듯 했다. 덥스텝은 트립합과 드럼 엔 베이스/정글을 연상 시키는 그 도시의 황량함, 음산함, 우울함이라는 사운드적 향수를 통해 분절된 리듬의 연속일 뿐이라는 다소 단조로운 UK Garage의 구조를 한 차원 더 승화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받은 전자 댄스 음악 특유의 점진적 진행을 통해 새로운 도시의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분명 지금 세계의 모습은 샴페인을 터뜨리는 파티 분위기는 아니다. 잃어버릴 10년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을 바라보며 노심초사하고 있는 세계의 경제, 무너져 내리는 남극이 보여주는 자연 환경 파괴의 심각성, 극심해지는 노령화와 저 출산으로 야기되는 세계 인구와 복지 문제의 심각성 등, 우리는 아주불안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 대부분의 문제는 도시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베를린의 미니멀 테크노와 브리스톨의 덥스텝, 바로 이런 위기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담은 사운드가 아닐까 한다.



Recommended Berlin Minimal Techno Artists:

1.    Ellen Alllien

2.     Siriusmo

3.     Paul Kalkbrenner

4.     Apparat

5.     Modeselektor

Recommended Dubstep Artists

1.    Burial

2.     Skream

3.     Pinch

4.     Cluekid

5.     Mala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VUW (누락본) -
Hed Kandi Part2
                                                헤드칸디의 탄생에서 지금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옛날이라기엔 너무 요즘이고 요즘이라기에는 너무 철이 좀 지났다 싶어 누락된 헤드칸디 테마의 누락본 원고입니다...^^ㅋ        -Groovie


국내에서 성행하고 있는 여러 파티 문화 그리고 각종 일러스트레이션에 많이 차용되고 있는 Hed Kandi 영국의 프로듀서/DJ 마크 도일에 의해 태어난 하우스 음악 브랜드다. 철저한 테마 위주의 하우스 컴필레이션 앨범을 선보이며 제이슨 브룩스의 칸디걸 앨범 아트와 함께 현재 하우스 클럽 문화에 있어 ' Cool'함의 대명사인 동시에 새로운 하우스 클럽 문화 스타일을 제시해 주었다.

Mark Doyle's Hed Kandi 1999~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8 영국은 런던과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쓰나미와 같은 애시드 하우스 붐에 뒤덮여 있었다.  런던에서 작은 클럽 이벤트를 열고 있던 마크 도일은 애시드 하우스의 선구자 명인 니키 홀로웨이가 운영하던 클럽을 방문하게 되었다. 런던의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라고 있는 아스토리아에 위치하고 있던 클럽에서는 마침 DJ 피트 통이 현란한 스피닝으로 애시드 클러버들로 댄스 플로어를 한껏 달구고 있었다. 누구나 그러했듯 애시드 하우스의 바이브는 마크 도일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고 그는 밤의 경험을 토대로 헤이븐 스테이블즈에서 '프리스타일 Freestyle' 나이트 열었다. 트랙스와 시티 사운드 레코드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크 도일은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12" 미국 임포트 레코드를 중심으로 헤이븐 스테이블즈를 런던 클러빙 씬의 중심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새로운 하우스 문화를 정의할 마크 도일이 DJ로서 번째 작은 성공을 거둔 순간이었다. ( 시절의 플레이 리스트와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Back to Love> 컴필레이션을 내놓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9 마크 도일은 GMG 라디오 산하의 스무스 재즈 라디오 스테이션인 JazzFM 들어가게 되며 본격적으로 그가 사랑하던 음악을 바탕으로 컴필레이션 앨범 구상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열린 분위기의 JazzFM 그의 아이디어를 펼치기에 알맞은 곳이었고 JazzFM 이름 하에서 지금 헤드 칸디의 모태가 되는 비공식적인 최초의 소울 사운드 중심의 컴필레이션인 <Nu Cool Vol.1> <Nu Cool Vol.2> 선보였다. (이때  번째 앨범 아트 워크를 제이슨 브룩스가 맡았다.) 그에게 있어 디제잉이란 같은 시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음악을 선사하는 것이었고 앨범을 만드는 것이란 시공간의 경험을 더욱 오랜 동안 그리고 멀리 확장 시키는 의미였다. 따라서 마크 도일은 시간적인 디제잉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산 컴필레이션 앨범 기획에 대한 꿈을 실현 시키고자 발짝 나아갔고 마침내 헤드 칸디 레이블을 탄생 시켰다. 이렇게 태어난 <Nu Cool Vol.3> 공식적인 최초의 헤드 칸디 앨범으로 기록된다.


 Hed Kandi 이름의 어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가 진행하던 JazzFM 프로그램 이름에서 따온 헤드 칸디의 이름은 전적으로 마크 도일의 아이디어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어 캔디 'Ear Candy'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이 캔디 'Eye Candy' 처음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적인 센세이션은 모두 머리 Head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발음 되는 소리를 따와 헤드 Hed Kandi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하였건 헤드 캔디가 아닌 '칸디' 읽혀진다.)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행복함! 각종 테마를 바탕으로 뛰어난 선별력이 돋보이는 음악의 초이스와 제이슨 브룩스의 빠져들 밖에 없는 앨범 아트 워크로 대변되는 헤드 칸디! 바로 여기에 헤드 칸디 시리즈의 모든 핵심 요소가 담겨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은
헤드 칸디가 성공신화의 전설로서 알려져 있지만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레코드사는 마크 도일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투자를 하기를 꺼렸고 그는 마침내 사비를 들여 클러빙의 메카인 이비자 섬의 여러 클럽과 바에 앨범을 뿌렸으며 무료로 디제잉을 하며 2년여 동안 헤드 칸디의 홍보에 주력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헤드 칸디 홍보에 있어 겪은 GMG와의 잦은 마찰에 의해 마크 도일은 갤럭시 라디오 스테이션으로 거처를 옮겼고 드디어 헤드 칸디의 성공이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클럽 플로어를 쉽게 달굴 있는 뛰어난 음악들로 가득 컴필레이션들도 종류가 늘어났고 제이슨 브룩스의 섹시하면서도 미니멀적인 앨범 아트 워크와의 조화는 '스타일은 삶이다'라는 시대의 흐름과 적중했다. 그때부터 헤드 칸디는 단순한 음악 컴필레이션을 초월한 일종의 나이트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고 정의하는 시대의 심볼이 되어갔다. 레이블이 탄생하고 7년의 시간 동안 나온 50개가 넘는 앨범들 2개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Top 10 들어갔고 500백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세계를 돌며 1000 개가 넘는 파티를 소화해 냈다.

 

Post-Doyle Perio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산 레이블의 컨셉으로 시작된 헤드 칸디는 마침내 세계 클럽 씬에서 겉잡을 없을 정도의 규모와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당장 앞에 펼쳐진 상업적 성공을 바라보며 마크 도일은 다시 한번 그의 일생을 돌아보았다. 과연 정해진 성공 가도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음악을 사랑하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일까? 거짓말처럼 그는 다가올 모든 부귀영화의 기회를 날려버리기로 결심했다. 이미 GMG 소유였던 헤드 칸디는 2007 클러빙 브랜드의 거대 공룡인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에 (이하 MOS) 매각되었다. (놀랍게도 헤드 칸디의 창시자 임에도 불구하고 마크 도일은 소유자는 아니었다.) 사건으로 인해 세계 헤드 칸디 팬들은 광분했다. 어떤 이들은 상업적 이윤에만 눈독 들이는 MOS 버젼의 헤드 칸디에 대해 우려했고 어떤 이들은 마크 도일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크 도일은 기존 헤드 칸디의 팬들을 실망 시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통제하기에는 불능의 상태로 덩치가 커져 버린 부담에 의해 그만  헤드 칸디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그만의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것이다.  '피어스 엔젤Fierce Angel'라는 새로운 레이블의 컴필레이션 시리즈를 놓으며 초기 헤드 칸디의 순수한 사운드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본격적인 일렉트로, Funky 등의 크로스오버와 실험적인 액션을 취하며 오히려 기존 헤드 칸디의 사운드보다 탄탄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또한 헤드 칸디 성공의 핵심 주역인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의 가세로 세계 클러버들을 다시 한번 흥분시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편 도일이 없는 MOS 포스트 헤드 칸디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마크 도일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미 자신이 통제하기에는 불능의 상태로 덩치가 커져 버린 부담스러운 헤드 칸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MOS 같은 거대 시스템이 오히려 지금의 헤드 칸디를 꾸려 나가기에 적격이라고 믿었다. 이미 도일이 구축해 놓았던 헤드 칸디의 브랜드 인지도에 의해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지만 지나친 상업성에 대해서는 많은 질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MOS 성격이 그러하듯 헤드 칸디의 앨범은 공장에서 생산되듯 시즌에만도 엄청나게 발매되고 질적인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 기존의 세계 헤드 칸디 파티 투어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지만 기존의 헤드 칸디 팬들은 이미 등을 돌린 상태이고 무작정 유행만 따라 다니는 힙스터들만 난무할 뿐이었다. 마크 도일과 함께 떠나버린 앨범 커버 일러스트레이터인 제이슨 브룩스의 부재 또한 문제였다. 바톤을 이어받은 유명 디자인 그룹 Vault 49 브룩스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고수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원작의 엄청난 아우라에 지배되던 팬들에게는 낯설고 어설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논란이 많이 줄어든 상태이긴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쨋든 이런 질적인 논란을 떠나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의 헤드 칸디의 상업적/마케팅적 성적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마크 도일의 헤드 칸디 사운드에 변화를 두지 않은 액션은 기존 헤드 칸디 팬들에게는 역부족일지는 몰라도 클러빙과 하우스 문화에 눈을 새로운 구매자와 클러버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게 여겨진다. 비난 받았던 Vault 49 앨범 아트워크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고 2008 마침내 제이슨 브룩스가 <Hed Kandi:The Mix> 통해 집으로 돌아오며 팬들을 흥분시켰다. MOS 헤드 칸디 활용은 파티 이벤트와 음반 생산에만 멈추지 않았다. 세계적인 라운지와 새로운 개념의 문화 열풍에 동참하며 숱한 화제를 뿌린 미니바를 발표하며 헤드 칸디를 테마로 칸디바 Kandi-Bar 공간을 마련했다. 헤드 칸디 특유의 그래픽 그리고 주옥 같은 헤드 칸디 음악과 함께 여유 있게 칵테일 한잔을 나눌 있는 라운지 형식의 공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okyo Project, <Fierce Angel>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헤드 칸디가 MOS에서 삶을 개척해나가는 한편 마크 도일은 도쿄 프로젝트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레이블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5년에 시작된 레이블은 MOS 저작권 소송 문제로 문을 닫게 되고 피어스 엔젤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미 헤드 칸디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던 마크 도일이었기에 평단과 클러버들의 호평과 함께 순조로운 시작을 했다. 헤드 칸디와 엇비슷한 컨셉으로  <Tokyo Disco>, <Beach Angel>, <Es Vive Ibiza> 등의 새로운 컨셉 컴필레이션을 내놓았다. '성난 천사들'이라고 해석할 있는 레이블의 명칭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독립하여 열정적인 클럽씬을 위한 마크 도일과 동지들의 한층 더해진 열정과 결단을 엿볼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인들에게 '성공한 사람'이라 인정받는 이들에게 성공의 이유를 묻는다면 10 9명은 분명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공식적인 위치에서의 대답이라 그런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품어질 정도로 진부한 대답이라 느껴질  있다. 하지만 비단 겸손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마크 도일은 항상 음악을 향한 자신의 열정과 사랑에 대해 외쳐왔다. 그가 초기 헤드 칸디 홍보를 위해 자신의 사비와 시간을 바치면서 까지 이리저리 전전긍긍 또한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믿음 때문이었고 밑에는 클럽 음악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라는 원동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성공적인 DJ 길을 걷고 있던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컴필레이션 앨범 제작의 모험을 떠난 것도 그러한 이유가 바탕이 되었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9:

Hed Kandi: 컴필레이션과 앨범 일러스트레이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코스모폴리탄 라이프를 지향하는 새로운 현대 여성
된장녀
, 귀족녀, 알파걸 다양한 "~'들의 열풍이 불었다. 새로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든 혹은 그런 '~'들이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이런 유행어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 미디어와 소비 사회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타겟이 되었다는 것이다. 된장녀 한파와 함께 찾아온 'Sex & the City' 20대 후반부터는 '노처녀'라는 선입견을 단번에 전복시켰다. 20 후반부터 30 중 후반까지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찾아 코스모폴리탄 라이프를 마음 즐기고 자신의 삶을 해쳐나간다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머니 세대인 윤복희에 의해 시작된 미니스커트 열풍 이후 가장 진보적인 여성들의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성들의 패션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몇 년 미니 스커트와 레깅즈의 열풍도 대단했지만 오히려 놀라운 것은 대다수가 다양한 구두 패션에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마놀로 블라닉과 크리스챤 루브텡의 고가 구두 브랜드가 국내 여성들을 유혹했으며 스타일과 과감한 색상 등 모든 것이 다양해졌다. 언제부턴가 저녁 10시가 훌쩍 뛰어 넘은 시간에도 술집이 아닌 커피숍과 카페에 붐비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분당 정자동의 밤거리를 한 번 보길 바란다... 그 옛날 압구정과 청담 이후 또 하나의 소비사회의 소돔과 고모라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홍대, 이태원, 압구정 등지에서는 클러빙이라는 새로운 언더그라운드 트렌드가 꿈틀거리며 '나이트' 지친 도시인들을 유혹했다. 그뿐인가, 소셜라이징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파티 문화가 인기를 얻으며 새로운 라운지 개념을 도입한 바와 레스토랑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나이트 라이프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그러한 도시 속의 코스모폴리탄 라이프를 대변하는 사운드 트랙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헤드칸디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헤드칸디는 어디까지나 하우스 음악을 중심으로 (클러빙 환경 안에서)주류의 클럽 댄스 사운드를 고수한다. 크게는 대형 클럽 플로어에 어울리는 하우스 댄스 풍과 잔잔하고 편안한 칠 아웃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흑인 정서에 바탕을 디스코나 딥한 소울 풍의 요소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 창시자인 마크 도일은 2007년 헤드칸디를 클럽 산업의 공룡이라고 불리는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 (이하 MOS)에 넘기고 옛날 초기 헤드칸디의 에센스를 살리고 좀 더 실험적인 액션을 취하는 Fierce Angel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았다. 헤드칸디에서 나오는 컴필레이션 시리즈물은 약 12가지를 넘고 있으며 서로 차별화된 성격으로 다양한 청취자들과 클러버들의 욕구를 해소시켜준다.


 


대표 컴필레이션
    


<Disco Kandi>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칸디 레이블의 주 수입원으로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가장 상업적인 시리즈인 만큼 디스코 풍의 디스코 하우스, 비치 하우스, 일렉트로,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의 하우스 음악을 포함하며 <Hed Kandi: The Mix>와 함께 칸디 레이블이 제공하는 댄스 사운드의 총 망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헤드칸디를 처음으로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시리즈다. 앨범 커버의 여성들은 주로 화려한 클럽의 느낌을 단순하지만 추상적으로 표현 한 배경을 뒤로 하며 댄스 플로어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듯 유혹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Disco Heaven>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칸디걸들의 앨범커버를 보여주는 시리즈일 것이다. Funky한 디스코와 딥 하우스가 주 사운드인 이 시리즈는 디스코라는 앨범 타이틀에 걸맞게 거대한 디스코볼과 함께 한 날개를 달은 전형적인 칸디걸을 앞장 세운다. 현실적이고 전형적인 클러버의 모습을 표방한 디스코 칸디걸이나 헤디칸디걸에 비해 마치 천상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한 천사의 모습은 70년대 코스튬 플레이와 유포리아가 주를 이룬 디스코 시절로의 레트로적 감성을 자극시킨다.


 

<Winter Chill>, <Serve Chilled>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댄스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는 화려한 하우스 사운드와는 정반대로 Chill을 테마로 한 시리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앨범 커버의 칸디걸들 또한 겨울의 추위에 의한 약간의 떨림을 전해주는 듯한 의상과 배경을 보여준다. 라운지나 조용한 칠 아웃 룸에 어울릴 만한 라운지, 칠 아웃, 트립합, 인디팝 류의 사운드를 통해 어둡고 깊은 멜랑콜리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칠 아웃을 테마로 한 또 다른 컴필레이션인 <Serve Chilled>시리즈는 어두운 다운템포류가 주를 이루는 윈터칠 앨범과 비슷한 선상에 서 있지만 여름을 배경으로 따사로운 태양 아래 한가로운 오후와 아스라이 떠 오르는 아침의 새벽을 느끼게 해주는 좀더 밝고 차분한 사운드를 선사한다. 여름 배경의 희망찬 딥하우스를 주로 한 <Beach House>의 자매 시리즈이기도 하다.


 

<Fierce Angel>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칸디 레이블을 MOS에게 넘기며 독립해 나온 마크 도일의 또 다른 레이블로서 헤드칸디와 마찬가지로 여러 장르와 시리즈를 제공한다. 특히 헤드칸디에서 같이 빠져 나온 제이슨 브룩스의 절정에 다 달은 듯 한 느낌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맛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량 상업화 되기 이전의 초기 헤드칸디 사운드를 선사하고 있으며 크로스오버와 에지한 일렉트로 사운드등을 통한 좀더 실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he Kandi-Girl, 패셔너블하고 삶을 즐길 줄 아는 현대 여성의 아이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첫눈에 매료되는 헤드 칸디의 앨범 아트워크는 앨범 판매의 숨은 중요 요소로 알려져 있다. (음악과는 상관없이 아트워크 수집을 위해 앨범을 구입하는 이들도 많다) 아트워크의 주인공은 바로 영국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다. RCA 출신의 제이슨 브룩스는 졸업 뉴욕, 런던, 파리 등을 오가며 버사치, 발렌티노 유수의 패션 꾸뜨르 쇼의 일러스트레이션 경험을 쌓게 된다. 런던의 클럽 푸쉬카 Pushca 플라이어 작업으로 세인에게 이름을 알린 제이슨 브룩스는 1999 헤드칸디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본격적으로 구축했다. 현대 여성상을 섹시하고 미니멀적인 요소로 풀어내며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다. 디지털 컴퓨터를 이용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은 제이슨 브룩스가 원조로 알려져 있으며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패션 일러스트레이션계의 붐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이 국내를 포함에 세계적으로 수많은 아류작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대 디자이너들인 조르디 라반다 Jordi Labanda, 데이비드 다운튼 David Downton 등과 함께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계의 선두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헤드 칸디-제이슨 브룩스의 관계는 월페이퍼 매거진-조르디 라반다의 관계와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월페이퍼의 편집장인 타일러 브룰리에 의해 전격 채용된 조르디 라반다는 아날로그 작업을 통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은 클래식과 모던함을 바탕으로 하이 소사이어티 문화에 대한 찬양과 냉소라는 아이러니의 테마를 통해  세계 여피들을 유혹하며 월페이퍼 매거진의 성공에 했다. 월페이퍼 매거진의 성공과 함께 조르디 라반다는 세계 일러스트레이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이슨 브룩스 또한 50여 개에 다 달은 헤드칸디 앨범 아트 워크를 통해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조르디 라반다와 월페이퍼가 전체적인 여피돔과 레트로 성향의 소비주의 사회의 에센스를 담고 있다면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좀더 부분적인 코스모폴리탄의 나이트 라이프와 레져 스타일을 파고 드는 것이 바로 헤드칸디와 제이슨 브룩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반다의 일러스트레이션이 가지고 있는 소비사회를 향한 조롱/풍자와 찬양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사회/문화적 아이러니의 요소는 브룩스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라반다의 작품에 비해 브룩스는 좀더 미니멀적인 접근을 통해 플라스틱하고 직접적인 소비 사회의 매력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젊은 여성들에게 혼란스럽지 않은 요소로서 더욱 어필하고 있다. 학교 혹은 직장과 같은 조직적이고 억압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을 뽐내며 자유를 흠뻑 만끽하는 그녀의 모습을 대변이라도 해주 듯 칸디걸은 섹시하고 글래머러스하며 Funky하고 낙관적이다. 바로 현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엘레강스와 성숙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적 지향성을 대만족 시켰던 것이다.  

 

MOS에 의해 매각된 이후 헤드칸디의 커버디자인은 Vault49 디자인 그룹으로 넘어갔다. 기존 헤드칸디의 사운드와 디자인 방식의 고수함에 따라 초기 칸디걸 디자인은 그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제이슨 브룩스는 <Hed Kandi: The Mix - SUmmer 2007> 앨범으로 다시 헤드칸디의 앨범 일러스트레이터로 컴백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18:
 
       Shibuya-Kei Part 2.: 왜 된장의 사운드트랙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기 침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 초반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와 부동산 공황의 여파로 소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경제적 침체기를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10년 전 일본의 모습은 IMF 이후 경제적으로 악화 되어 가는 지금의 한국과 많이 닮았다 그리고 옆의 그래프는 잃어버린 10년 간의 미취업률 분포도이다.)

하지만 언제나 경제가 힘들 때 놀랍게도 언더문화는 발전해 왔다. 영국의 하우스 문화와 일본의 시부야케이가 아주 좋은 예다. 시부야케이는 경제의 침체 속에서 체제를 거부하며 젊음으로부터 발산되는 열정과 창의력 그리고 철학과 실험정신을 통해 시작된 일종의 문화 현상이었다. 결국 경제 침체 속의 분위기에서 그 새로운 문화는 어느 때보다 영광의 빛을 뿜어 내며 가, 애니메와 함께 전 세계에 일본의 선진 문화를 널리 알린 일등 공신이 되었다.
 

경제가 힘들때면 문화는 꽃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가적 경제 침체는 소비 시장의 위축을 불러 왔지만 이 새로운 물결은 그 공허한 빈자리를 신선함과 또 다른 열정으로 채웠다. 젊음의 언더문화는 뒷골목의 음침함을 걷어버리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추었다. 대기업의 유통망을 통하지 않은 새로운 패션 스타일과 브랜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곧 음악 취향의 변화도 이끌고 왔다. 통기타와 락 그리고 대중 가요라는 뻔한 선택권 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은 테크노, 힙합, 하우스 같은 다양한 음악 장르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이 것이 꽃피는 곳은 바로 클럽이라는 공간이었다.

더욱 많은 이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무언가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정보화의 흐름에 탄력 받은 디자인과 미디어 매체의 활성화도 따라왔다. 바로 창조적이며 열정적인 실천과 실험에 의해 문화적 다양성이 실현되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90년대 이 열정적인 문화적 움직임의 주역이 바로 시부야케이였던 것이다.    
 

정치적이지도 반항적이지도 않은 별난 언더문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헌데 시부야케이는 언더문화로서 특이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번 질문해 보자. 언더문화의 특징이 뭐냐 물으면 반항, 무정부주의적, 파괴, 폭력, 정치성과 같은 격한 이미지들이 보통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지금까지의 언더문화들이 그래왔기 때문이다.

펑크건 하우스건 그런지건 기성세대와 절대 권력을 향한 강하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이모(Emo) 현상도 별 다를 바 없다. 겉으로만 찔찔 짜고 있을 뿐 내적으로는 철저히 자기 파괴적이라는 성향은 꼭 닮아 있다. 근데 시부야케이는 비폭력적이고 정치적 성향도 없다.

그 뿐인가, 히피와 LSD, 하우스와 엑스타시 처럼 마약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없다. (항상 언더문화의 부록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마약이건만) 그럼 대체 뭔가? 말 그대로 언더문화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언더문화였던 괴물 같은 변종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현상의 원인은 그 출발 시점의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구의 언더문화를 보면 대부분 억압받고 위축된 젊은 세대들의 과격한 반항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주역들은 노동계층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하지만 시부야케이의 경우 (서구보다 덜 반항적이고 순종적인 일본인들만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억압된 노동계층의 반란이라기 보다는 좀더 여유 있고 학구적인 중산층들이 시작의 발단에 서있었다. (그렇다고 선택된 엘리트들의 세련된 선택이라는 반 민주주의적 발언은 아니다.)

그리고 철학과 인문적 소양을 발판으로 한 이들의 문제는 마케팅 혹은 프로파간다적 미디어 세뇌를 무기로 한 주류문화에서 어떻게 탈출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오히려 60,70년대 반전을 외치며 정치적 선상에 서있던 우두스톡의 무리들과 정 반대편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 물질/소비주의 사회의 실체를 바라보려 했던 벨벳언더그라운드와 앤디 워홀과 더 닮아 있다.
 
시부야케이는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의 핵심인 소비주의 사회를 끌어 안으며 자신들이 어릴 적 즐겨 듣던 음악들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글로벌리스트 소비 사회의 무정체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비주의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지향했던 미국 경제 모델이 발판이었고 그들의 현실을 힘들게 만든 주체임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반감은커녕 오히려 품에 안았다. 소비주의의 특성인 소비하고 수집하고 꾸미는 행위에 대해 언제나 열려있던 현대 일본 문화의 특징을 보면 시부야케이는 물론이고 무라카미 타카시, 요시모토 나라와 같은 걸출한 팝 아티스트들이 터져 나온 맥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더욱 극적인 것은 그들이 찾아낸 표현의 탈출로가 그들이 소싯적 즐겼던 60년대 유럽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세계의 음악적 흐름이었던 샘플링 컬쳐가 만나 하이브리드적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동시대 흐름이었던 힙합, 하우스, 테크노와 그들의 향수 속에 존재했던 프렌치 팝, 이탈리안 사운드 트랙, 보사노바, 매드체스터, 아노락팝, 크라우트 락 등의 여러 요소들이 만나 일종의 짬뽕 세레나데를 일구어 냈다.) 열거한 음악 종류들을 보면서 현기증이 날 듯 하듯이 시부야케이는 어중간한 크로스오버의 레벨을 넘어선 새로운 변종이었다. (이는 1920년대 디자인의 극단을 보여준 다다의 브리콜라쥬와 패스티시를 연상시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과적으로 민족주의, 특정문화와 같은 절대적 도그마가 사라지며 '정체성'이란 것은 투명하게 사라졌고 테크놀로지, 모더니즘, 팝 아트가 묘하게 혼재된 아주 인공적이고 플라스틱한 레트로 퓨처리즘을 탄생 시켰다. 특히 이 인공적이고 플라스틱한 측면은 소비주의가 내세우는 '세계화' 혹은 글로벌리즘과 꼭 맞아 떨어진다. 세계화의 특징은 특정 문화에 영향 받지 않고 어디에나 침투할 수 있는 '무정체성'이다.

미국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주체로 유럽피안적인 미학을 가미한 시부야케이의 동양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은 사운드의 무정체성은 현재(혹은 그 시대) 글로벌리스트 소비사회를 그대로 비춰주며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사운드 트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일본은 물론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식 소비 사회의 찬양이라고 무작정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 같다. 오히려 하이테크, 기업, 미디어, 소비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시대적인 현실의 감수성을 그대로 담아낸 헬로키티의 괴기한 거울과 같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

그 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외로 짧게 나마 다루고 싶은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Digging이라고 하는 수집의 미학이다. 숨어있는, 혹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운드를 찾아내는 DJ의 필수 요소로 DJ Shadow와 DJ Spooky와 같은 턴테이블리스트들이 그 대명사로 꼽힌다.

     시부야케이가 샘플링 컬쳐를 껴안은 만큼 이 디깅의 미학도 빛을 보았다. 옛 유럽 음악들과 새로운 인디 밴드들의 사운드의 소개는 물론 일본에서 들을 수 없었던(그리고 전 세계에서 잊혀졌던) 사운드들이 시부야케이 음악 속에 샘플링 되어 담겨졌다. 저작권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지만 이 디깅의 미학은 시부야케이 아티스트들의 보물 창고로서 그들의 음악성에 있어 절대적인 힘이 되었던 것이다. 시부야의 HMV에서 시부야케이 음악을 찾던 이들의 행위 또한 일종의 디깅이었고 이는 결국 시부야케이라는 용어를 탄생케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부야케이의 죽음 또한 디깅의 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부야케이가 거대한 대중문화 현상으로 떠올랐을 때 미디어는 호들갑을 떨었다. 결국 시부야케이가 가지고 있었던 디깅을 통한 희소성은 사라졌고 인사이더가 되거나 공들여 찾지 않아도 카페나 미용실에 얹혀져 있는 잡지에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쿨한 트렌드 아이템으로 전락한 것이 바로 몰락의 원인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번째로는 여성 아이콘에 관한 것이다. 이 것 또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한 상징적 의미 부여라는 점을 뽑고 싶다.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그룹에서 여성은 귀여움, 섹시함 혹은 아름다움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얼굴 마담의 역할을 전통적으로 행해 왔다. 하지만 그 기괴함을 떠나 카히미 카리에의 철학성과 음악성 그리고 최전선에 나서 코니시 야수하루의 음악에 피치카토 파이브의 그 퍼포먼스/행위적 성격을 더한 당차고 '멋진' 마키 노미야의 모습은 분명 동시대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각개약진 하고 있던 여성들과 억압받던 소수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시부야케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블론디의 데보라 해리에 필적할 만한 아이콘적 위상을 얻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 향상에 대한 상징은 있었을지언정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마키 노미야 폰'이라던지 하는 10대, 20대의 지갑을 노린 우스꽝스러운 소비주의적 마케팅은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말이 나온 마당에 하는 얘긴데,
90년대 중반 일어났던 일본의 카페 성황 속에 자리잡았던 시부야케이는 이미 상업전선에 합류된 이후의 일이다. 그 시절 잘 나갔던 카페 아프레미디, 엑셀시오르 커피샵(프랜챠이즈) 등의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분위기 속에서 즐기는 커피와 보사노바 음악, 미용과 패션 정보 그리고 대화들은 시부야케이 문화의 대중화 속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유럽이라기 보다는 '시부야케이가 지향했던 유럽에 대한 판타지적/페티시적' 성향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유럽지향적 카페의 성공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96년 미국식 프랜차이즈 카페의 대명사인 스타벅스의 일본 상륙으로 다양한 커피들이라는 선택의 욕구는 채워졌지만 결국 승리자는 유럽지향적인 (특히 프랑스 파리) 카페였다.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의 틀을 부수며 사회 진출을 하고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20,30대 여성들과 패션에 민감한 어린 세대를 위해 카페는 커피와 수다 뿐만이 아닌 혼자 커피 한 잔도 즐길 수 있는 그런 편안하고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는 실내 공간감을 더욱 살려주는 음악 그리고 커피와 더불어 다양하고 전문화된 이른바 Café Cuisine이라고 하는 음식의 요소를 더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 공간은 '유럽'이 아닌 '유럽에 대한 페티시를 담은 판타지적' 공간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내에서 스타벅스나 섹스 엔 더 시티를 통해 느끼는 것은 바로 뉴욕의 정서가 아닌 '자신이 상상하고 느끼고 싶은 뉴요커에 대한 판타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는 이미 세계화를 특징으로 한 물질/소비주의 사회가 배출해낸 하나의 떳떳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약 5~10년 사이 국내에서도 스타벅스, 브런치 문화와 함께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한바탕 된장 열풍도 겪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가 스타벅스를 사고 미니 홈피를 시부야케이 음악으로 수놓는 그녀들을 향해 된장녀라 감히 욕을 하고 돌맹이를 던질 것인가? 그 '된장'이란 키워드가 만약 소비와 물질주의와 맞물려 있다면 시부야케이만큼 어울리는 음악도 없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7:

             Shibuya-Kei Pt1: 살롱뮤직에서 아방가르드 팝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Pre-years: Salon Music & Flippers Guitar
사용자 삽입 이미지
60년대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통기타 포크 음악을 시작으로 90년대 마초 락 밴드까지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씬은 락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J-Pop의 어쩔 수 없는
대중 성향에 의해 일본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에 고리타분함을 느끼는 이들도 슬슬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유럽 지향적 사운드를 장착한 80년대 Salon Band 살롱 밴드의 출현은 시부야케이의 전초전을 알리는 조용한 알람 시계였다.

비록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살롱 밴드는 시부야케이의 시초로 불리는 Flipper's Guitar 플리퍼스 기타를 발굴해낸다. 그리고 1990년 심야 드라마 [클램 스쿨 부기]의 테마송인
Young
, Alive, in Love가 대 성공을 거두며 플리퍼스 기타는 본격적인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1991년 플리퍼스 기타는 해체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시부야케이의 물결이 시작된다. 플리퍼스 기타의 오자와는 상업적 노선을 밟으며 시부야케이와의 연계성이 단절 되지만 오야마다는 Cornelius 코넬리어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시부야케이를 통한 일본 문화 장악에 들어간다.    



시부야케이의 시작, 90년대 초반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 초반 플리퍼스 기타(이후 코넬리어스)와 함께 안티-대형 레이블의 이름을 걸고 다양한 음악적 접목을 시작한 이들로 샤다라파(SDP)Pizzicato 5 피치카토 5가 있다. 특히 피치카토 5는 오야마다와의 합작품인 1993년 앨범 <Bossanova 보사노바>에서 동시대 댄스 음악의 흐름과 60년대 유럽 지향적인 사운드의 크로스 오버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전형적인 시부야 사운드를 구축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 중반, 오자와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코넬리어스는 Tratoria 트라토리아 레이블을 설립하며 당시 일본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외국 앨범의 발매와 일본 인디 그룹의 양성을 통해 시부야케이의 발전에 이바지 한다. 이 때 Towa Tei 토와 테이가 그룹 딜라이트를 떠나 흐름에 합류하고 Denki Groove 덴키 그루브, Love Tambourine 러브탬버린, Venus Peter 비너스 피터 등의 신진 세력들이 씬의 활력을 불어 넣는다. 코넬리어스의 애인인 Kahimi Karie 카히미 카리에 또한 데뷰 앨범을 발표하는데 Jane Birkin 제인 버킨과 Serge Gainsbourg 세르지 갱스부르그의 영향이 극단으로 나타나며 시부야케이의 유럽지향적 성격을 확고히 다지고 코넬리어스의 95년 작 <69/96>는 일본 베트스 셀링 앨범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네오 어쿠스틱, 매드체스터, 이탈리안 사운드트랙, 재즈
, 하우스 등 유럽의 여러 음악 요소들이 하이브리드를 이루는 이들의 사운드에 일본 젊은이들은 매료 되고 이내 언더그라운드 씬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80년대 주를 이루었던 일본의 클럽 씬은 말 그대로 쿨하고 댄디한 이들의 모임이었지만 곧 클럽과 패션 일번지인 우라 하라주쿠 일대는 대형 레이블과 대중 문화에 반감 어린 시부야케이에 영향을 받은, 보드 셔츠로 무장한 중산층 중고등 학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 때 Bathing Ape 베이딩 에입 패션 레이블은 코넬리어스와의 깊은 연계를 통해 젊은 층 패션디자인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감지한 미디어는 곧바로 시부야케이에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전성기, 90년대 말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 말 온 일본 열도는 시부야케이에 의해 들썩거린다. 트라토리아 레이블에 이어 나카 마사시의 Escalator Record 에스컬레이터 레코드, 코니시 야수하루 (피치카토 5)의 Ready Made 레디 메이드 레이블 등을 통해 Yukari Fresh 유카리 프레시, Losefeld 로즈펠드, Fantastic Plastic Machine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 Manfield 맨스필드, Minekawa Takako 미네카와 타카코 등 시부야케이의 얼굴 격인 이들이 본격적으로 데뷰한다. 그리고 코넬리어스의 97년작 <Fantasma 판타즈마>는 지금까지 시부야케이 씬을 집대성한 명작으로 기록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90년대 말의 시부야케이 전성기는 그 상업적 가능성을 인정받는 시기기도 했기에 이 때부터 그 하이브리드 형태의 음악적 접목의 뿌리가 되어온 철학, 디자인, 패스티시, 탈 대중 문화적 성격을 잃어 버리고 일종의 트렌드와 문화 현상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  2000년이 찾아오며 이미 시부야케이는 카페나 대중 잡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쿨한 문화 아이템으로 전락한다. 2001년 코넬리어스의 <Point 포인트> 앨범은 이미 식어버린 원조 시부야케이들의 입장을 반영하며 씬의 죽음과 아방가르드적인 새로운 실험적 형태의 방향을 제시한다. 에스컬레이터 레코드 또한 뉴욕과 베를린에서 한창 진행 중이던 일렉트로와 댄스 펑크로 전환하고 레디메이드는 보다 성숙했지만 그 전과 똑 같은 시부야케이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 마저 시부야케이를 버리고 하우스 DJ로서 새로 거듭났다.)



죽음, 2000년대 초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해서 2000년 이후 음악계에서는 신진 세력에 의한 세대교체가 일어난다. 이것은 일종의 시부야케이의 후기 현상으로서 Havard 하바드 등과 같이 기존 시부야케이 멤버들에게 발탁된 직계 손들이 나타난 반면 Quipthone 큅쏜, Paris Match 파리스 매치, Akakage 아카카게, Cymbalse 심벌즈 등은 시부야케이와의 직접적 연계를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이들은 시대의 문화와 사운드적 흐름에 동참 했을 뿐 시부야케이의 정통을 이어나가는 식의 장인 정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논란의 요지는 있지만) 따라서 엄격히 따질 때 이들을 시부야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고 이들 또한 자신들이 그렇게 불려지는 것에 언짢을 것이다. 이 밖에 시부야케이 원조들이 어린 시절 유럽 음악에 영향을 받았듯이 중고등학교 시절 시부야케이를 들으며 자란 Aprils 에이프릴즈, Dahlia 달리아, Petset 펫셋, Pictogram Color 픽토그램칼라, Capsule 캡슐 등이 있다. 이들도 파리스 매치와 같은 부류와 마찬가지로 시부야케이의 정통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성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초기 아티스트들이 유럽지향적이었다면 이들은 ‘유럽지향적이었던 시부야케이’ 지향적이었다. 즉 샘플링에 의존한 크로스오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운드만 더 세련되어졌을 뿐 똑 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후기 현상: Perfume, YMCK 그리고 아방가르드 팝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부야케이의 죽음 이후 눈에 띄는 3가지 후기 현상이 있다. (필자가 주관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현상 일 뿐 정의 내리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는 이번에 j-pop 아이돌, Ami Suzuki 아미 스즈키의 싱글 참여로 화제가 된 캡슐의 Nakata Yasutaka 나카타 야수타카가 배출해 낸 그룹 Perfume 퍼퓸으로 기존 J-Pop 영역의 문을 두드리며 좀더 상업적인 성격을 더한 일렉트로 팝과 기존 일본 아이돌의 귀여운 이미지를 접목하고 있다. (아마도 야수타카는 퍼퓸을 통해 Kraftwerk 크라프트베르크의 헬로키티 버전을 구상하고 있는 듯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번째는 Usagichang 우사기짱 레코드의 YMCK, Fine AM 파인 AM, Sonic Coaster Pop 소닉 코스터 팝처럼 아방가르드와 디즈니랜드의 유치하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접목된 퓨처팝으로 퍼퓸과 거의 비슷한 맥락에 서있지만 좀더 비 상업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지막으로 2000년대 초 코넬리어스와 카히미 카리에가 취했던 실험적인 측면과 비슷한 맥락에서의 Avantgarde Pop 아방가르드 팝 현상을 들 수 있다
. 제시한 3가지 흐름 중 가장 엘리트 적이고 순수한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흐름으로서 포스트락과 엠비언트 음악의 성향을 가지고 있고 형식적인 면에서 Glitch 글리치 음악이라고도 불린다. (시부야케이는 죽었고 그 이후의 음악적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몇 몇의 시부야케이 원조들이 이러한 엠비언트와 아방가르드의 노선을 선택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아직은 티비나 라디오를 통해서 보다는 비엔날레나 Sonar 소나르 페스티벌에서 더 듣기 쉬운 이 음악들은 오선지에 뿌려놓은 콩나물이라는 정형적인 음악적 한계에서 훨씬 벗어나
소리의 레이어를 통한 텍스쳐 구축이 더 돋보인다. Tsujiko Noriko 츠지코 노리코, Piana 피아나, Takaki Masakatsu 타카기 마사카츠 등은 이미 이 영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해 나가고 있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DJ나 그룹이라기 보다는 사운드 디자이너/아티스트들에 더 가까운 이들의 음악은 최근 덥스텝 (Dubstep) 현상과 같이 미니멀리즘과 아방가르드의 요소가 주류 음악 요소에 침투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퍼퓸과 YMCK의 음악이 아직도 시부야케이가 가지고 있었던 모더니즘과 페티시적인 레트로 퓨처리즘 그리고 소비주의 사회의 찬양에 대해 빠져 있다면 그 어느 때 보다 환경 오염과
느린 삶이 대두되고 있는 현 사회에 있어 올가닉한 가이아의 개념이 스며든 이들의 음악이야 말로 진정한 미래 지향적인 퓨쳐팝Future Pop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러한 흐름은 비단 일본의 것만이 아닌 유럽을 필두로 한 전 세계적 언더그라운드/사운드 디자인적 현상이다.)     




Spike Me into Space by Salon Music               Youg, Alive, in Love by Flipper's Guitar


         Twiggy, Twiggy by Pizzicato 5                       Good Morning World by Kahimi Karie


Cherish Our Love by Love Tambourine                  Hands by VenusPeter


Flashback Disco by Denki Groove                          Butterfly by Towa Tei


Dear Mr.Salesman by FPM ft Nomiya Maki       Star Fruits Surf Rider by Cornelius


Beautiful, but Noir by Dahlia                                  PLastic Girl by Capsule



Chocolate Disco by Perfume                                   Milky Blue by YMCK


White Film by Tujiko Noriko                                Something's Lost by Piana


                             Camera! Camera! Camera! by Flipper's Guitar
                         (미켈란젤로 안토니니의 영화 Blow Up을 패러디 한 듯한)


              보너스 Bonus: 상업전선을 선택하고 성공한 플리퍼스의 오자와 켄지의 Lovley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6:

                                   Madchester Part2


808 State & A Guy Called Geral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번 파트1에서는 매드체스터의 시작과 그 중심에 있던 밴드들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대체 DJ들은 어디 있었는가? 표면 상으로 볼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는 인디밴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기서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애시드 '하우스' 붐의 한 사건인 매드체스터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일 수 밖에 없듯이 정통 인디밴드의 역사를 자랑하는 맨체스터를 향한 미디어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즉 기존의 락 관련 미디어는 흑인 태생의 하우스의 영향을 무시했고 백인으로 구성된 락의 정신을 가진 듯한 인디밴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먼데이즈와 로지즈 모두 댄스 문화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애시드 문화의 한 일원이 되었다. 먼데이즈의 경우 워낙 복합적인 음악 성향과 리믹스의 활용 그리고 하우스씬에 대한 관여도 면에서 애시드 문화와의 이질성이 발견되지 않지만 로지즈의 경우 'Fool's Gold'를 통해 하우스 음악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정통 인디락 밴드의 성향을 고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애시드 하우스의 사운드를 품은 초기 그룹은 바로 808 State. 퓨전 재즈, 일렉트로, 신스팝을 중심으로 한 808 State 1988 'Pacific State'를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그룹의 멤버였던 제랄드 심슨은 '가이 콜드 제랄드'라는 이름을 통해 808 state에서 탈퇴하고 'Voodoo Ray'를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애시드 하우스 클럽의 앤섬이 될 만큼 Pacific State에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제랄드 심슨은 차기 앨범 준비에 있어 레코드 회사의 상업화 아이디어의 신물을 느끼고 언더그라운드로 잠적하고 90년대 중반 철저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프로듀서의 모습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드럼 엔 베이스'의 모태가 되는 '정글' 씬을 탄생 시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심슨을 떠나 보낸 808 State는 오히려 상업 레이블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애시드 하우스의 선봉장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이들의 성공은 동시대 아티스트들 (칠아웃 장르를 탄생시킨 KLF, 뉴에이지 이상을 담은 The Shamen, 사이키델리아를 통한 하우스의 정치적 좌파 성향을 더한 Primal Scream )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애시드 하우스가 오늘 날 회고될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이들이야 말로 사운드적 크로스오버와 댄스를 통해 음악과 몸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하우스 문화의 이상을 사운드로 풀어낸 주역들이었다
. (그들에게 있어 하우스 문화의 폭발은 펑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펑크가 자신의 팔의 완력을 최고조화 시켜 기타를 부셔버리는 물리적인 분노의 폭발이었다면 하우스는 몸의 완력을 댄스에 맞추어 완화 시키며 일체화 시키는 트랜스적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몰락
 

  

사용자 삽입 이미지
런던과 마찬가지로 마약에 의한 갱들의 개입과 정부의 불법 클러빙 및 레이브 탄압이 시작되었다. 1989 7월경 16살의 클레어 레이튼이라는 소녀가 엑스타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런던과 같은 운명의 스텝을 따르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디어는 야단 법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트렌디/애시드 테드로 구성된 어린 청년들을 애시드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버렸다.

그리고 당시 악명 높았던 살포드 폭력단의 개입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서브컬쳐의 죽음의 상징이 되어온 마약, 코케인이 다시 등장했다. (갱들은 엑스터시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 수입원은 언제나 코케인이였기에) 잦은 갱들 간의 마찰과 살인 사건, 마약의 유통 등은 경찰의 강한 제지를 불러들였고 하시엔다에서는 총기류 검문을 위한 메탈 디텍터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맨체스터는 매드체스터에서 건체스터Gunchester로 불렸고 물론 파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클러빙/레이브 프로모터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드체스터의 기간 동안 사랑과 우정, 이상과 희망으로 쌓아 올린 공동체 의식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며 파도와 같은 사이코시스와 파라노이아를 불러일으켰다. 91년 즈음 하시엔다가 문을 닫은 것은 물론이고 하시엔다와 어깨를 겨누며 시대를 풍미했던 썬더돔과 컨스퍼러시 클럽들 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매드체스터를 대표하던 먼데이즈와 로지즈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걷는 것 같았다. 로지즈는 스파이크 아일랜드 이후 종적을 감추었고 먼데이즈는 저명 음악지 NME지와의 인터뷰에서 매드체스터의 종결을 알리는 듯한 사건을 터뜨린다. 그들은 그 동안 지켜 왔던 노동계급층의 대변자의 위치를 던져버리고 소비주의적 시선에서 돈에 대한 찬양, 게이에 대한 혐오감, 여성 비하 발언 등을 늘어뜨려 놓았다. 물론 이것은 미디어와 대중에게는 용서될 수 없는 비윤리적 발언이었고 즉각 모든 이들이 먼데이즈의 몰락을 예감하게 되었다.

또한 밴드 리더 션 라이더의 헤로인 중독 이후 빚어진 차질과 이로 인해 연기된 뉴오더의 차기 앨범 등의 문제로 인해 팩토리 레이블이 부도가 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90년도 말에 출시 된 먼데이즈의 <Pills 'n' Thrills and Bellyaches> 앨범은 수많은 사건 사고를 떠나 매드체스터 시대를 총망라한 마지막 위대한 앨범으로 기록된다.)  


Epilogue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기의 매드체스터 향연의 빛이 서서히 꺼졌을 때 맨체스터의 클럽들은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를 완화하는 곳도 있었고 도시의 외각지역에서 이벤트를 여는 클럽도 생겨났다. (갱들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게리 매클라란의 딜라이트 클럽으로 이곳에서 알렉산더 코이라는 새로운 전설의 DJ 클러버들을 광분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매드체스터의 마지막 자락에 혜성처럼 나타난, 믹스매그 매거진이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Sasha 사샤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밖에 주목할 점은 갱들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사람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게이 클럽이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회적 소수의 하나인 게이 커뮤니티는 그 특성 상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는 디스코와 마찬가지로 애시드 하우스가 그 숨결을 다시 내 쉴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로서 백인 남성 성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하우스 클럽에서 디스코 댄스에 맞추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근육질의 남성들, 레즈비언, 드래그퀸들이 씬의 모습을 채워가고 있었다. 물론 도어폴리시가 강한 곳이 태반이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갈 시에는 바운서 앞에서동성'의 친구에게 프렌치 키스 등을 감행하며 자신이 '스트레이트'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는 비화도 있다. 이 움직임에 하시엔다 클럽도 맨체스터의 새로운 게이 클럽으로 변모했다. 맨체스터가 매드체스터, 건체스터에 이어 '게이체스터 Gaychester'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매드체스터의 한파로 인한 나이트 라이프의 때 아닌 붐은 곧 도시 수입의 기특한 효자 노릇을 했다. 따라서 광기의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길들어졌을 때 즈음 혹독했던 클럽 라이센스 규제들은 완화되었다. 종전에 비해 바와 클럽은 두 배로 늘어났고 24시간 쉬지 않는 문화와 클러빙 레져의 메카로 맨체스터는 거듭났다. 하지만 갱들 간 마찰, 마약 뒷거래와 같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특성의 문화가 이제는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를 남겼다. 어찌하였건 96년 즈음되어 애시드 하우스는 이제 '올드 스쿨' 사운드가 되어 정글, 테크노, 개러지와 같이 세분화 된 다양한 장르에 문화의 중심 자리를 내 주게 되었다.  

 


 

Recommanded Acid Tracks (순위 기준 없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1.Give Me Some Love by Love Corporation


사용자 삽입 이미지
2.Beat Dis by Bomb the Ba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3.Activ-8 (Come with Me) by Altern 8



사용자 삽입 이미지
4.Everything Starts with an E by E-Zee Possee



사용자 삽입 이미지
5.What Time is Love? By The KLF



사용자 삽입 이미지
6.Theme from SExpress by SExpre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7.Pacific State by 808 State



사용자 삽입 이미지
8.Voodoo Ray by A Guy called Gerald



사용자 삽입 이미지
9.We Call it Acieed by D Mob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Move Any Mountain by The Shamen

 

728x90
반응형
반응형

PLUR & Vibe Upon the World 12 월자: MADCHESTER part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 문화의 중심, 맨체스터  

 박지성 선수로 인해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도시 , 맨체스터는 오랜 동안 영국의 중요한 현대 역사의 순간을 장식해 왔다. 근대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이 곳은 빅토리안 시대의 기업과 상업을 발전 시키며 '세계의 굴뚝'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 사회주의자였던 엥겔스가 머물렀었고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의 아이디어를 얻게 했을 정도였다니 시절의 엄청난 위용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대로 제조업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 이에 대한 탈출구를 새로운 문화와 레져 사업에서 찾게 되며 맨체스터는 음악, 미디어, 스포츠 등을 통해 서서히 영국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도시가 가진 경제력을 통해 얻어지는 추진력과 크지도 좁지도 않은 땅덩어리로 인한 내부 커뮤니티 형성의  용이함을 통해 구축된 탄탄한 음악산업의 인프라스트럭쳐는 케미컬 브라더스, 오아시스, 뉴오더, 찰라탄즈, 스미스 등과 같은 걸출한 음악인들을 배출해 내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New Order    

영원한 인디락의 도시 맨체스터가 하우스 음악에 빠진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으로 돌아간다. 1980, 'Love will Tears us Apart'로 친숙한 70년대 인디락 밴드, 조이 디비젼 Joy Division의 카리스마틱한 보컬 이언 커티스는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우울증의 영향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이언을 떠나 보낸 나머지 멤버들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 )은 키보디스트였던 모리스의 여자친구를 새로이 영입한다. 이 때부터 이들은 뉴오더라는 이름 하에 기존 밴드 형태에 일렉트로닉 시퀀서와 드럼 머신을 겸비하고 새로운 전자 음악 사운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뉴오더의 사운드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반응은 실로 엄청났었고 그룹 이름이 의미하듯 이들의 새로운 등장은  맨체스터 인디락 씬의 죽음을 선언하고 다가올 전자 댄스 음악의 물결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들의 히트곡  'Blue Monday'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큰 반향을 일고 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acienda Club & Thunderdome  

뉴오더와 각종 신흥 인디 밴드의 고향이었던 팩토리 레이블의 프로듀서 토니 윌슨 (얼마 전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타계 했고 암 투병 속에서도 의지와 희망을 간직했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82년 맨체스터 나이트 라이프 문화의 전설로 남게 될 하씨엔다 클럽을 열게 된다. 뉴오더의 앨범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한 이 클럽은 당시 트렌드에서 앞서 나가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미학을 보여주었다 . 초기 사운드는 소울, 재즈 펑크, 라틴 계열의 음악을 주를 이루지만 1990년까지 6년 동안 이어진 마이크 피커링의 '누드 나이트'가 시작 되며 크라프트베르크 사운드에게 영향을 받은 일렉트로, 힙합 , 테크노팝, 애시드 하우스 등을 소개하고, 88년 즈음 본격적으로 트랙스 레코드, 디제이 인터내셔널에서 흘러 들어온 정통 애시드 하우스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는 당시 클러버들의 주를 이루었던 대학생들과 트렌디들 보다 저돌적이고 보헤미안의 성격을 가진 노동계층의 청년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칠고 가난한 노동 계층에게의 어필이라는 현상은 히피의 영향이 강했던 런던의 2nd Summer of Love와 크게 차이를 보인 것이었고 많은 이들이 진정한 맨체스터만이 가진 애시드 문화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이 모더니즘적인 사운드에 노팅햄의 개러지 클럽과 세필드의 자이브 터키 클럽도 가세했고 DJ 스투 알렌의 버스 디스 Bus Dis 라디오 쇼가 이 사운드를 소개하며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혜성처럼 등장한 해피 먼데이즈의 미쳤다 싶을 정도의 정열적인 퍼포먼스는 Freaky 프리키 댄싱이라는 표어를 만들어 내고 이른바 Madchester 씬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런던과 함께 맨체스터 서브컬쳐가 애시드 문화에 장악된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애시드 문화가 그 덩치를 키워가며 하시엔다 클럽 또한 런던의 슘과 마찬가지로 인사이더들만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 이렇게 해서 맨체스터의 애시드 클럽씬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남쪽은 좀더 도회지향적이고 학생들과 미디어에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북부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거칠고 척박한 삶을 살아가던 노동 계층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 이 때  북부를 상징한 클럽이 바로 썬더돔 Thuderdome이었다. 하시엔다의 사운드가 디스코 디바 앤섬 식의 부드럽고 말랑말랑 한 것이었다면 스핀마스터즈와 스티브 윌리엄즈가 선사한 썬더돔의 사운드는 벨지안 하드비트를 연상 시키는 듯한 강하고 거친 것이었다 . 썬더돔의 위치 또한 맨체스터의 게토에 해당하는 올드햄 로드였고 특유의 하드코어적 사운드와 무너질 듯한 클럽의 내부는 외부인에게 위험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지만 거친 삶을 살아가던 노동계층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천국과 같은 공간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appy Mondays  & Stone Roses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과 마찬가지로 맨체스터의 젊은이들 또한 마가렛 데쳐를 향한 증오는 끝없이 불타올랐다 . 런던과 대비해 덜 엘리트적이고 낮은 사회 계층에 속해 있던 맨체스터의 청년층은 데쳐 정부가 펼쳐 놓은 웰페어 시스템에 적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80 년대 말 찾아온 대규모 실업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의 경로를 통한 수익을 찾게 만들었다. 이 때 주 수입원은 짝퉁 디자이너 옷들이나, 해적 레코드/컴퓨터 게임들의 유통, 마약 거래 , 신용카드를 이용한 사기 등이 주를 이뤘다. 이런 현상은 취업이나 어떠한 일에도 관심 없는 수많은 젊은 룸펜-프롤레테리아 (부랑자 혹은 집에서 빈둥거리는 실업 남성)들을 탄생하게 했다 .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며 하씨엔다에 나타난 밴드가 바로 해피 먼데이즈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피 먼데이즈 그들 또한 엄청난 경력의 마약 거래를 자랑했고 ( 그들이 성공한 후에는 팬들에게 공짜 마약을 건네주며 함께 즐겼을 정도였다) 맨체스터 뿐만이 아니라 런던 등의 외부지역까지 손을 뻗쳤다. 하지만 오히려 이 경력이  오크폴드와 같은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의 주역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지도 말고 상관치도 말고 그냥 질러버려! 24시간 자지도 말고 파티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들의 사상과 하층 노동계층 출신의 이력은 당시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이상과 불만을 풀어줄 수 있는 호소력을 사운드 안에 심어 주었다 . (물론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엑스터시도 함께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60년대 비틀즈에게  롤링 스톤즈와 비치 보이즈라는 숙명적 라이벌이 있었듯이 이들에게도 스톤 로지즈 Stone Roses라는 걸출한 라이벌이 있었다. Funk, 노던소울, 펑크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해피 먼데이즈와는 달리 스톤 로지즈는  비틀즈에서 이어지는 60년대의 정통 사이키델리아를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이언 브라운이라는 영국 특유의 콧대 높은 보컬의 카리스마까지 가세해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 (롤링 스톤즈가 이들에게 자신들의 컨서트에서 서포트 밴드가 되어 줄 것을 요청 했지만 이언 브라운은 오히려 롤링스톤즈가 우리의 서포트 밴드가 되어야 한다며 단번에 묵살해 버릴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찌하였건 이들의 활약으로 1989년 말 애시드 붐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대중문화 현상으로 확대되며 미디어 또한  매드체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11월 로지즈가 런던의 알렉산드라 팔레스에서 8000명의 관객을 상대로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가지고 해피먼데이즈가 영국의 탑 오브 더 팝스에 처음 데뷰하게 된 쾌거가 계기였다. 하루 아침에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맨체스터 씬의 하나가 되길 원하는 것만 같았다 . 1990년도 맨체스터 대학교의 지원자 수가 갑자기 전년도 대비로 치솟아 올랐고, 엑스터시의 영향으로 축구 훌리건들의 폭력 사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비록 89년과 90 년 사이의 단기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언더문화 평론가인 스티브 레드헤드는 그 해 겨울 시즌을 "사랑의 겨울'이라 부를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런던과 마찬가지로 매드체스터의 엑스타시 현상은 순수한 사랑과 이상의 거대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 그렇게 1990년을 치달으며 먼데이즈는 지미 머핀과 808 State의 서포트에 힘입어 G-Mex 센터에서 8000 명을 상대로 성공적인 이벤트를 마치게 되며 매드체스터 최절정의 순간을 장식한다. 이에 질세라 두 달 후 로지즈 또한 30,000명을 상대로 폴 오큰폴드, 프랭키 본즈 등과  함께 스파이크 아일랜드를 달구었다. 그리고 90년도 여름 뉴오더가 영국의 월드컵 테마송을 맡으며 대형 사고를 치게 되는데 그들이 내놓은 'E for England'이라는 음악 때문이었다 . 표면적으로 E는 잉글랜드의 첫 알파벳을 의미했지만 사실 엑스터시 Ecstasy 마약의 'E'라는 의미 또한 내포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인사이더들을 제외하고 그 누가 'E'의 의미를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덕분에 영국 전체가 "E for England!"를 외치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아이러닉 한 사건이었다. ( 엑스타시와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심의에 의해 'World in Motion'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3:  2007년  10월자
              2nd Summer of Love, the London tale: 두 번째 사랑의 여름

IBIZA; 발레릭 사운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러버들의 영원한 고향인 이비자 섬은60년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곳이었지만 그 시절 공산주의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정책에 의해 새로운 관광의 요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특히 낮았던 스페인 환율 덕분에 이비자는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지 못한 젊은 중산/노동층 영국인들에게 고아와 카쉬만두와 함께 환영 받는 휴가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비자의 공짜 파티, 보헤미안적인 열린 분위기와 아름다운 달과 별빛은 어둡고 우울한 런던에 지친 젊은 브릿들을 따스하게 맞이 했다.

이 때 Pacha와 Amnesia는 이비자의 중심 클럽으로 히피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 시절 Amnesia는 전기 공급이 없는 농장 같은 곳에서 모닥불을 피고 레게와 사이키델릭락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디스코의 시대가 도래하며 히피 세상은 막을 내리고 이비자의 클럽들 또한 나이트클럽으로서의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80년대에 접어들며 젊은 브릿들 뿐 아니라 게이, 뉴 에이지 전도사 등을 포함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비자를 찾게 된다. (이와 동시에 전설의 엘릭시르elixir로 통하는, 엑스타시도 슬슬 이 곳을 상륙한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1987년경 이비자의 산 안토니오에 The Project라는 바가 문을 열게 된다. 영국 DJ 트레버 펑과 이언 세인트 폴이 세운 이 곳은 브릿들만의 일종의 미팅 포인트가 되었다. 프로젝트에 모인 젊은 브릿들은 암네시아로 자리를 옮겨 엑스타시에 취해 DJ 알프레도 피오리오가 선사하는 몽환적인 여행을 떠났다. (Amneisa의 DJ 알프레도 피오리오 Alfredo Fiorillo는 서로 다른 연령과 사회 계층이 주를 이루는 특이한 환경에 의해 다양한 음악으로 그들의 여행을 책임 졌다. 레게와 Funk로 시작해 존 레논의 감미로운 이매진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식의 그 만의 디제잉은 트렌드를 떠나 폭넓은 사람들의 정서를 껴안을 수 있는 이비자 섬만의 에센스를 담아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스라이 동이 터오는 새벽의 신비로움, 히피의 유산 그리고 쾌락의 요소를 담은 발레릭 코드가 탄생하게 되었다.)그리고 Cala Salada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카페 델 마르Cafe Del Mar로 움직여 DJ 호제 파디야가 떨어뜨리는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를 들으며 상쾌한 오전의 공기를 흠뻑 마셨다. 그런 루틴을 반복하며 보낸 그들만의 여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상 그 자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해 9월 훗날 폭풍처럼 휘몰아쳐올 영국 애시드 하우스 씬을 이끌어 갈 핵심 인물들이 이 프로젝트 바에 모이게 된다. 폴 오큰폴드, 쟈니 워커, 닉키 할러웨이 그리고 대니 램플링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전 브릿들과 마찬가지로 엑스타시와 함께 발레릭 사운드를 처음 접하며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비자의 주술에 휘말린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느낌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리라 결심한다.   


다시 우울한 런던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가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좌파 정당과 잦고 길었던 스트라이크를 이끈 노동계급의 패배는 젊은 브릿들로 하여금 마가렛 데쳐의 보수정당을 향한 깊은 증오와 패배감만을 안겨 주었다. 또한 데쳐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빈부의 차이는 더욱 늘어나고 모두들 신용을 이용한 소비에 미친 듯이 열을 올렸다. 이는 무인지경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돈이 곧 신이요 법이라는 진리를 만들어 냈다. 이 흐름 속에 찾아온 영국의 경제 침체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열등감과 허탈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분위기는 런던의 클럽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런던의 클러빙이란 그저 술에 찌들어 이성에게 집적대고 디자이너 의상으로 화려하게 차린 자신의 쿨 함을 한 것 뽐내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들은 춤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대략 옛날 국내 나이트 실정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 컬쳐의 공간에는 당연히 돈과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낄 수 없는 그런 성역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트렌디들을 향한 ‘가진 것 없고, 촌스럽고 지저분한’ 이들의 열등감은 팽배했다. ‘

   
          사운드적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영국은 Jazz와 Funk 등의 Rare Groove에 의해 주도 되고 있었다. 그 즈음에서 나온 섹스프레스나 M/A/R/R/S 등의 팝 차트 선전이 애시드 하우스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까지 영국에서 애시드 사운드는 일종의 페드fed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조금씩 늘어나는 브릿-이비쟌들의 여름의 향수를 채워줄 공간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클럽 노엘과 딜리리엄이 런던에서 유일하게 애시드 사운드를 제공하였지만 기존의 Funk, Hip Hop 그룹과의 충돌이 잦았다. 예를 들어 그 때 당시 선풍적이었던 디트로이트 테크노 트랙인 데릭 메이의 Strings of Life는 댄스 플로어를 싹 비워버리는 진공 청소기와 같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비자에서의 소중함 기억을 현실화 시키고자 결심했던 오큰폴드, 폴, 램플링, 홀로웨이 등이 각기 런던에 발레릭-애시드 클럽을 열며 영국 전체 클럽 씬은 물론 브릿팝의 판도 자체를 발칵 뒤집어 놓게 된다.   


The Project & Spectrum : 광란의 월요일 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갈데 없이 방황하는 런던의 브릿-이비쟌들에게 오큰폴드와 이언 세인트 폴은 프로젝트 클럽이라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경찰 검문에 의해 금방 문을 닫게 되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 둘은 생츄어리 클럽에서 Future 나이트 파티를 열게 된다. 이비자의 메모리를 바탕으로 한 퓨쳐 나이트를 이끌어감에 있어 오큰폴드에게 주어진 하우스 트랙 설렉션은 긴긴 밤을 책임 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다양한 음악적 배경과 DJ 알프레도의 섬머 앤썸 등을 활용하며 오큰폴드는 발레릭 클럽의 이미지를 부각 시켰다. 그때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한 클러빙 경험은 생소했지만 브릿-이비쟌들과 많은 로컬들은 열광했으며 성공적인 하우스 열풍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이비자의 발레릭 바람이 런던 언더그라운드 클럽 계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을 무렵 이언은 오큰폴드와 쟈니 워커에게 엄청난 제안을 한다. 바로 1500명+ 수용의 헤븐 클럽에서 월요일 파티 이벤트를 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해본 적도 없는 무모하게만 보이는 이 계획은 “Spectrum: a Theatre of Madness”라는 타이틀로 감행된다. 클럽 경영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갑자기 엄청난 센세이션과 함께 기적적인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웨스트 엔드 트렌디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디자이너 의상을 던져 버리고 춤추기에 편안한 트레이닝 복과 배기 팬츠로 무장한 클러버들은 황홀경에 빠져 월요일 밤을 뜨겁게 불살랐다. 세련된 드레스 코드 문화와 트렌디의 전통을 무참히 깨어버린 대 사건이었다. “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었으며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억압되었던 에너지의 폭발로 인한 오버나이트 센세이션이었다. 이 새로운 열풍은 곧 i-D매거진과 같은 팬진에 소개되기도 하지만 중심 요소인 엑스타시나 애시드에 관해서는 자세히 소개되지는 않았다. 브릿-이비쟌들에게 있어 이비자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자신들만의 소중한 씬을 지키고 싶은 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The Shoom: 걱정일랑 접어두고 웃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큰폴드 등과의 이비자 여행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대니 램플링은 그의 아내, 제니와 함께 1987년 12월경 클럽 역사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슘 클럽을 열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섹시한지를 과시하는 웨스트 엔드와는 달리 슘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한 경험이었다. 사랑, 함께함, 나눔, 인생의 환희를 모토로 삼아 슈머Shoomer들은 애시드 음악에 빠져 사랑과 희열의 밤을 보냈다. 춤이라기 보다는 음악의 비트에 빠진 쿵푸 모션에 더 가까운 그들의 프릭키 댄싱 (Freaky Dacing)은 스타일에 찌들은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이 지쳐있었나를 보여주는 거침 없는 하이킥이었다. 뉴욕의 스튜디오 54를 방불케 할 만큼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에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단 인사이더로 인정 받으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안에서 모두는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들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비자의 유포릭Euphoric한 경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시간 상 가장 가까운 모체인 히피 사상을 차용했다. 사랑, 평화, 존중을 외치던 히피의 60년대는 분명 이러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첫 번째 사랑의 여름은 바로 히피의 60년대를 지칭한다) 그러한 영향과 함께 대니는 히피의 상징이었던 노란 스마일리 로고를 슘의 마스코트로 도입한다. 그때부터 “the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Shoom Club”의 글과 함께 수많은 스마일리 로고가 눈처럼 슘의 플라이어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물론 스마일리 페이스가 레이브의 상징이 된 것도 이때부터다) 제2사랑의 여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슘은 철저한 뉴스레터와 클럽 멤버십 스킴 관리에서부터 물, 과일 등의 공짜 제공 등 훗날 레이브 프로모션의 좋은 지침서로 자리 잡았다.

             만약 누군가 갑자기 당신의 볼을 쫙 잡아당기며 “웃어요~”라며 스마일리 스티커를 붙여준다면? 당신은 그를/그녀를 꼭 껴안고 “사랑해요”라며 환한 미소를 건넬 것이다. 슘은 그런 행동이 가능하고 당연한 곳이었다.


 RIP party: 런던 블랙 컬쳐의 자존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비자 베테랑들과 백인 위주의 성향이 짙었던 애시드 하우스 열풍 속에 RiP파티는 이비자와는 상관없이 기존 런던의 흑인 문화를 위주로 자신들만의 파티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시카고나 뉴욕의 웨어하우스 파티 그리고 레게와 소울의 전통을 지켜나간 폴 스톤과 루 뷰코빅의 RiP(Revolution in Progress)은 테크노,애시드,개러지 사운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파를 소화해 냈다. 슘이 연령, 성, 사회적 계급 등의 벽을 허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파티로만 보여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RiP의 경우 흑인 백인 등의 인종별 다양성을 넘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이었다. 옛 클러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RiP파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과 가장 추악한 사람들 모두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펑크의 배경을 가진 루 뷰코빅은 여기서 애시드 문화가 가진 정치적 힘을 보았다, 바로 새로운 변화의 물고를 틀 수 있는 강력하고 순수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조화의 힘을.

자신들만의 씬을 지키기 위해 뷰코빅은 철저히 미디어의 개입을 막았기 때문에RiP파티는 슘과 스펙트럼만큼 오늘날의 클럽 전설로 회자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에 의해 상처받는 수많은 언더문화들을 보면 그들만이 간직했을 ‘열정과 순수함’은 충분히 상상해 볼 만 하다.


The Trip: 애시드 하우스의 폭발 그리고 여름의 끝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8년 6월 런던 웨스트 엔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애스토리아Astoria에 트립 TRIP자리를 잡으며 제2 사랑의 여름이라 불리는 레이브 / 엑스타시 열풍은 오버그라운드화 되어 버린다. 하룻밤 만에 모든 런던 주류의 클럽 사운드가 애시드 하우스로 대체 되며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문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트립의 주인인 닉키 할러웨이는 수많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슘 클럽 또한 ‘그들만의 파티’이기를 포기한 듯 웨스트엔드의 토튼햄 코트로 자릴 옮기고 유명한 셀레브리티들을 모시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메인 파티 이벤트를 오큰폴드의 퓨쳐 나이트와 겹치는 목요일로 재설정하며 이비쟌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저기서 애시드와 엑스타시에 대해 떠들어 대자 아무 생각 없이 이 흐름에 너도나도 동참하는 애시드 테드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던 ‘그들만의 파티’는 종료되고 기존의 이비자 베테랑들과 애시드 테드들 간의 복잡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비자의 기억과 히피적 사상이 전무했던 애시드 테드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엄청난 양의 엑스타시를 복용하고 “애시~~~~드!!!”를 외치며 미친 망아지들처럼 씬을 휘졌고 다녔다. 그때까지 영국의 클럽은 3시 이후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후 거리로 뛰쳐나와 날뛰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의 사이렌을 붙잡고 전율을 느끼며 “Can You Feel it?”을 외쳤다고까지 하니 그 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스펙트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고 이 언더문화는 도태되기 시작했다. 순수함과 흥미에 의해 시작한 파티 관계자들도 파티 이벤트를 돈의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우정도 깨지기 시작했다. 마약의 유통과 파티 프로모션을 통해 ‘한 몫 챙길 수 있는 장사’의 가능성이 확인되며 갱들도 이 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경찰은 애시드 하우스 파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ool and Groovy” 같은 기사를 통해 새로운 애시드 문화에 친근감을 표했던 미디어는 “요즘 아이들이 어떤 위험한 것에 빠져있나” 레퍼토리를 들고 나오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디어는 엑스타시와 LSD의 차이를 알지도 못한 채 아이들이 클럽에서 문란한 성생활과 폭력에 찌들은 것처럼 선전했다. 영국의 유명한 음악 차트 방송인 Top of the Pops는 Acid란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노래들을 차트에서 제외시키는 이래적인 모라토리움을 선언했고 팝 스타들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마약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깨끗하고 도덕적인 생활의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주제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대중을 선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파시즘적인 미디어의 폭력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찌하였건 이런 기성 세대와 미디어의 소란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청년들이 생각 없이 애시드 열풍에 동조하도록 불만 지핀 셈이었다. 이 때부터 애시드 하우스는 대중 문화를 뛰어넘어 민감한 국가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애시드 하우스 클러버들도 큰 문제를 안고 있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디어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엑스타시를 마약으로 조차 여기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1988년 이후로 마약이 이른바 보편적 레져 문화로 올라섰고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은 9 to 5로 대변되는 챗바퀴 같은 자신들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너도 나도 일을 그만두고 쾌락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급기야 애시드 문화의 인사이더인 슘은 뉴스레터를 통해 “제발 당신의 직장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 당시 잊고 있었던 것은 어떠한 좋은 경험이든 영원할 수는 없다는 간단한 인생의 논리였다. 문제는 그토록 그들을 괴롭히던 현실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기에 정신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약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현상에 중심에 엑스타시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 젊은이와 노동계층에게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데쳐 정부에 대한 개인의 무력함에서 따라온 심리적인 거세와 억압이 음악과 춤을 통한 파티라는 대규모의 집단적 문화 현상에 의해 치유되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맨 정신에 환희와 희열의 트랜스를 느낀 한국인들처럼) 이 논리를 깨달은 이비자 베테랑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떠났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현대 전자 댄스 음악의 문화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파티 문화가 세계 이곳 저곳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았던 제 2 사랑의 여름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채 그렇게 끝나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