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ent 02: Film & Electronica
도시의 음악들
봄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약간 들뜬 마음이라면 가을은 무언가의 끝을 준비하는 듯한 덤덤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그 스산한 분위기 속에 하루쯤은 휴식을 위해 엠비언스 가득한 음악과 하는 예술 영화 한 편도 괜찮을 듯 하다.
ROCK: [Zabriskie Point, 1970] by Michelangelo Antonioni
건축가 출신답게 탁월한 공간감과 동시대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보여줬던 이 거장은 작년 세상을 떠나며 많은 영화인들을 슬프게 했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타 감독들 못지 않게 훌륭한 사운드트랙을 선사하며 영상미를 더욱 세련되고 철학적으로 덮어씌웠다.
[자브리스키 포인트]는 클래식 락 음악의 거성들인 핑크플로이드, 제리 가르시아, 롤링 스톤즈 등을 내세워 70년대 미국 카운터컬쳐의 한 단면을 그려낸다. 두 명의 외톨이 같은 주인공들은 히피의 잔상과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대한 찬양을 보낼 듯 하지만 영화가 흐르며 이도 저도 아닌 회색 분자의 행적을 남긴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정치도 이념도 존재하지 않는 엑스타시 속의 어느 한 무릉도원이다. 이 곳은 바로 미국 데스벨리의 자브리스키 포인트란 곳이며 제리 가르시아의 음악에 맞춰 펼쳐치는 집단 난교 씬은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대담하게 내세운 초현실주의적 영상, 이념에서 벗어난 순수한 아담들과 이브들이 사막 위에서 서로 엉키어 뒹구는 공간을 채우는 가르시아의 블루지한 기타 선율의 엠비언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 장면이다. 만약 자신이 이념과 물질주의를 모두 거부한 이 시대의 진정한 회색분자이자 노마드라고 자부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저주받은 걸작이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실패와 평단의 혹평을 받았다.
JAZZ: [Manhattan, 1979] by Woody Allen
이번엔 잠시 달콤하고 낭만적인 스윙재즈로 넘어가 보자. 마틴 스콜세시 감독과 함께 맨하탄을 가장 사랑하는 감독이 바로 우디 알렌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애니홀]을 통해 처음으로 작품 상을 받았을 때도 자신이 정기적으로 연주하던 재즈바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우디 알렌의 재즈 사랑은 그의 영화와 맨하탄을 향한 사랑 못지 않다. 특히 그의 영화는 감미로운 스윙 재즈 사운드로 맨하탄이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을 로맨틱하게 표현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우디 알렌과의 최고의 케미스트리를 자랑하는 다이엔 키튼과 함께 한 흑백 영화, [맨하탄]이다. "챕터1, 그는 뉴욕 시티를 사랑했다"로 시작하는 오프닝 씬은 재즈와 클라시컬 음악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던 죠지 거시윈의 '랩소디 인 블루'가 흐르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시작으로 그 안의 삶의 군상들 그리고 마지막의 폭죽 셀레브레이션과 함께 마감하며 맨하탄이라는 공간을 사랑과 낭만의 엠비언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진정 낭만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도시라는 공간에게 바치는 최고의 데이트 영화가 아닐까 한다.
AMBIENT: [Wingsof Desire, 1987] by Wim Wenders
국내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는 [욕망의 날개]다. 코카콜라와 락큰롤에 취한 영원한 로드 무비의 아버지, 빔 벤더스는 여기서 삶에 대한 고찰과 동서독의 화합을 염원하는 세레나데와 같은 음악과 영상을 보여준다.
하늘과 인간 사이의 중간인 천사를 의미라도 하듯 울려 퍼지는 중성적인 첼로 선율과 함께 영화는 공중에서 도시를 바라보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하늘 위에서 인간 군상을 호기심과 애증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천사의 시점이다. 공허한 베를린의 도시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슬픔과 걱정이 교차한다. 그리고 천사는 질문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영화는 인간과 천사의 시점을 오고 가며 통일 전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캔버스를 채워나간다.
이 영화에서 도시를 채워나가는 엠비언스는 여러 개의 레이어로 나뉜다. 사람들의 애환은 짙지만 스트링 선율과 함께 천사가 누비는 베를린은 너무나도 진공상태의 느낌을 줄만큼 고요하다. 동서의 통일에 의해 찾아올 복받치는 환희와 그 후 다가올 산더미 같은 경제와 이념 문제들로 인한 엄청난 폭풍의 전야와 같은 느낌을 전해줄 정도다. (물론 천사 다미엔이 인간이 되며 느낄 혼란의 이전상태도 포함해서)
다음은 여기저기서 들리는 인간 마음의 목소리들이며 비극적인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불만과 걱정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들이 곧 공허하고 슬픔 가득한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채워나가는 요인들이다. 그리고 전파를 타고 흐르는 TV와 라디오의 방송은 그 사람들을 조종하는 미디어를 의미한다.
하지만 중간중간 데미안은 마리아 릴케의 시를 지속적으로 읊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로 시작되며 반복되는 이 모놀로그는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것이 비극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린 중요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일깨워 준다. 그것은 호기심에 가득 찼던 데미안이 인간으로 거듭나 색깔을 보고 환희를 느끼고 곡예사와 관계를 가지며 느끼는 그런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감정, 바로 사랑이다. 결국 사람들이 잊어버린 그 사랑이란 느낌으로 도시는 비극에서 벗어나 동서간 그리고 사람간 사랑과 화합이라는 환희의 공간을 기약하며 매듭을 짓는다
ELECTRONICA: [Irreversible, 2002] by Gaspar Noe
그래도 클럽 문화 잡지 블링인데 순수 전자댄스 음악에 대한 얘기가 없으면 허전하기에 다프트 펑크로 이야기를 돌린다. [돌이킬 수 없는]은 다프트 펑크의 반 쪽 토마스 뱅갤터가 사운드트랙을 맞았고 충격적인 영상과 내러티브의 전개로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후보로까지 오른 2002년의 화제작이었다.
하나의 트랙으로 듣기에는 Paris by Night을 절대적으로 추천하지만 (특히 펼쳐지는 영화의 긴장과 엑스타시 후에 느껴지는 허무함에 대한 총합으로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시작부터 약 15분 동안 펼쳐지는 사운드 디스토션이 영화의 사운드적 클라이맥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미가 날 정도로 뒤틀리는 영상과 뱅갤터의 잡음과 같은 사운드 이펙트는 영화의 긴장과 처절함에 무게 감을 더한다. 클럽, 지하도, 밤거리와 같은 실제 공간은 물론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섹스 그리고 인간의 심리적 공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사운드 트랙이 가지고 있는 엠비언스적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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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라며 시작하는 영화의 대사는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하다. 물리학에서 공간의 차원은 4차원이든 10차원이든 존재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차원은 언제나 하나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앞당길 수도 없다. 하지만 시간을 자유자재로 뒤틀며 시공간의 경험을 바꿀 수가 있는 마법사가 있으니 그는 바로 DJ다. 지금 당장 클럽으로 뛰어들어 스테이지의 엠비언스를 가득 메울 DJ와 함께 시간이 당신을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시간을 무너뜨려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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