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쿠오카>에서 제문과 소담이 처음 숙소로 들어가는 장면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아직은 모호한 이들의 관계와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우당탕탕 떠난 여행이라는,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초반부에서 이 장면은 관객에게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자연스럽게 심어주는 흥미로운 도입부로 기능한다.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 제문이 꿍시렁 대는데 소담이 날씨 너~무 좋다! 하면서 대화를 뭉개며 같이 들어가는 장면. 제문: 키는 어디서 낫어? 사람도 없고 카운터도 없는데? 소담: 편하잖아요? 굳이 얼굴 안 마주쳐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이런 거 에어비엔비... 아저씨 모르죠? 제문: 에어비엔비... 나도 알어. 소담: 지하에 있다가 나오니까 좋죠?
소담의 발랄함과 제문의 투덜거림이 묘하게 어우러져 영화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이 장면은 후쿠오카 남쪽의 조용한 골목길에서 촬영되었다.
영화 <후쿠오카>의 촬영지 중 가장 찾기 어려웠던 장소다. 대부분의 촬영이 후쿠오카 메인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위 노란색 박스 범위) 이곳은 유독 남쪽에 혼자 동떨어져 있어 (빨간색 박스) 찾는 데 한참을 헤맸다.
심지어 1년에 한 번 열린다는 후쿠오카 최대 축제인 하카타 기온을 뒤로하고 찾으러 온 촬영지다.
맨션 입구는 안 쪽 골목길에 있다.
한 분이 이 제문이 서 있던 공간에서 꽤나 오랬동안 담배를 피고 있어서 앞에서 '이츠 오완다요? 하는 식으로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고 (그러다 한 대 맞을 듯 ㅋ) 해서 담배 다 필 때까지 빌딩 주위를 한 세바퀴 돈 것 같다 ㅎ.
영화에서 첫날밤 제문이 숙소에서 바깥 대로변을 발보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숙소의 분위기와 공간감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의 배경은 건물의 뒤 쪽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영화 속 맑은 날씨와 달리 비가 꽤 내리던 날이었다. 건물 뒤편으로 가보니 대로변이 펼쳐져 있었고 공간 구성의 특징이 흥미로웠다. 주거 공간은 골목 쪽에 위치하고 대로변 쪽으로는 등을 지는 형식으로 프라이빗 공간과 퍼블릭 공간을 명확히 구분한 설계로 보였다. 건물의 뒤쪽 외관은 공공적인 파사드로 활용되고 골목에서 진입하면 주거 공간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반대로 외부에서 진입하면 가게나 다목적 공간 등 공공적인 시설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공간의 기능을 명확히 나누면서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름은 신 다카사고 멘션 빌딩이라는 곳이다. 주오구의 키요카와라는 곳에 있다. 1977년 준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 건물로 지속적인 리노베이션을 통해 현대적인 주거 및 업무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라고 한다. 1층에는 '키요카와 로터리 플레이스'라는 복합 상업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고 (현재는 바뀌었을 수도), 디자인 사무소와 카페 등이 입점해다. 텐진과 하카타 같은 주요 도심과 가까워 직주근접 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매력적인 장소라고 한다. (위 공홈에 들어가 보면 빌딩 디자인 이야기와 다양한 오피스/주거 공간의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구글 지도 주소는 다음과 같다. 新高砂マンションビル, 2-chōme-4-29 Kiyokawa, Chuo Ward, Fukuoka, 810-0005
| 번외 이야기
구글 지도에서 본 신 다카사고 멘션 옆 건물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이자카야일 것 같아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의외로 감성적인 숙박 시설이었다. 100년 된 집을 리노베이션한 곳으로 에어비앤비에서 확인해 보니 1박 가격이 상당히 높았다. 압도적으로 레트로스러운 외관과 현대적인 감각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매력적이었지만, 가격대를 보고 감상만 하기로 했다. 이런 독특한 숙박 시설이 근처에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닥터 스트레인지 (2016)>에서 생텀은 마블 유니버스에서 지구를 지키는 마법 거점으로 뉴욕, 런던, 홍콩 세 곳에 위치한다. '생텀(Sanctum)'은 신성한 장소를 뜻하지만 여기에 그 중에서도 더 신성하다라는 '생토럼(Sanctorum)'이라는 표현을 더해 마법사들의 본거지이자 지구 방어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의미를 강조한다. 특히 홍콩 생텀은 영화의 역/정방향 전투신이 15분 동안 숨 가쁘게 펼쳐지는 배경으로 등장하며 아카데미 VFX 부문 후보로도 주목받는데 한몫 했다.
| 홍콩 생텀 생토럼의 위치와 제작
영화에서 홍콩 생텀 전투신의 배경은 카메론 스트리트 (Cameron St.)와 프랫 애비뉴 (Prat Ave.), 카나본 로드 (Carnarvon Rd)와 채텀 로드 사우스 (Chatam Rd. S.) 사이로 설정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를 쫙 스캔 한 후 실제 촬영은 영국 롱크로스 스튜디오에 240여 미터 길이의 세트를 만들고 진행하며 CG로 재창조되어 마법적인 분위기를 더했다고.
다만 실제 홍콩 생텀의 모티브가 된 건물이 위치한 곳은 프랫 애비뉴에서 3.5km 떨어진 프린스 에드워드역 근처 라이치콕 로드에 있다. 마블 영화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마블 생텀 특유의 동그란 비샨티 문양 창문의 유무다. 홍콩 생텀의 디자인과 역파괴 전투신이 어떤 방식으로 촬영 되었는지는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 홍콩 생텀의 모티브: 레이싱춘 (Lui Seng Chun) 빌딩
레이싱춘(雷生春) 빌딩은 1931년 광둥 출신 사업가 레이 량(雷亮)에 의해 설립된 상가주택으로 1층은 전통 약국, 상층부는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레이싱춘 (뇌생춘)'이라는 이름은 약국의 약이 환자를 회복시키고 새로운 생명력을 가져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레이 량 사후 가족들이 떠나며 1980년대부터 방치되었지만, 가족들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며 이를 2000년 홍콩 정부에 전례 없이 무상으로 기증했다. 이후 2003년 소유권이 홍콩 정부로 넘어가 보존 및 레노베이션이 진행되었다. 홍콩 초기 근대 건축사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2022년 1급 역사건물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으로 치면 국보 1군 멤버들 중 하나 정도로 해석, 홍콩은 1'호' 개념이 없음), 현재 홍콩 침례대학교의 중의학 센터로 활용되고 있으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홍콩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홍콩의 그레이드 1등급 건물은 '24년 기준 총 177개다.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콩 AAB (문화재 위원회) 홈페이지로 가서 그레이드 별 (1~3) 건물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 홍콩이나 역사적 건물 탐방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여행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다.
| 건축적 특징:
레이생춘(Lui Seng Chun) 건물은 삼각주 형태의 도로 교차점에 위치한 대표적인 통라우(Tong Lau, 중국식 상가주택, 우리나라로 치면 주상복합인데 서민형 주상복합 같은거?)로 실용적 중국 요소와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의 안정성, 그리고 1930년대 홍콩에서 유행한 세련된 아르데코(Art Deco)의 세련된 스타일이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매력을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미학이니 양식이니 뭐니 복잡하다 싶으면 그냥 신고전주의는 덕수궁 석조전이나 미국 백악관, 아르 데코는 옛 서울역사나 크라이슬러 빌딩을 떠올리면 될 듯.
신고전주의 = 질서 정연, 반듯한 형태, 직선 vs 아르데코 = 정교하고 세련된 라인, 곡선
중국식 요소로는 광둥 지역 특유의 기후에 맞춘 깊은 베란다 설계를 꼽을 수 있다. 이 베란다는 에어컨이 없던 시절 햇빛과 비를 차단하며 실내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실용적인 구조로 하층부는 상업 공간, 상층부는 가족의 주거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통라우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통라우는 홍콩 발전으로 인한 1840년대부터 중국인 이민자들의 가성비 주거지의 공간양식으로 자리 잡으며 현재까지도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홍콩 도시 스케이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신고전주의적 특징으로는 대칭적인 구조와 상층부의 발코니를 지탱하는 8개의 화강암 기둥, 그리고 상점 상단에 위치한 파손된 삼각형 장식(Broken Pediment)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웅장함과 안정감을 강조하며 신고전의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느낌의 품격을 더한다. (와중에 중앙 기둥 두 개를 기준으로, 왼쪽은 기둥 네 갠데 좌측은 두 개임 ㅎ)
아르데코 양식의 특징은 삼각주 형태의 코너블록을 곡선형 파사드와 발코니로 풀어낸 세련된 디자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발코니와 항아리 형태의 장식을 가진 난간(Balustrade)은 기본적으로 신고전주의적인 요소이지만 이를 곡선형으로 표현하며 아르데코의 미적 감각을 더해 독창적인 조화를 이룬다.
결론적으로 레이생춘은 홍콩 건축의 독창성과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홍콩만의 독특한 도시 경관의 형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건물의 우측 파사드 방향으로 뒤쪽에 가보면 홍콩 침례대학교의 중의학 센터로 활용되기 위해 모던 형식으로 증축된 부분이 보인다. 이 새로운 볼륨은 기존의 전통적 양식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어댑티브 리유즈 방식이 싹 다 밀고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더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영화 촬영지 순례를 몇 번 하다보니 재미가 붙었다. 그냥 일상에서 심심할 때 찾아보거나, 영화를 보다가 인상깊은 곳이 있으면 조금 씩 만들어 가려고 한다. 인생에 영향을 줄 만큼 영화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마지막 남은 생애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가는 마음으로 하나씩 소소하게 만들어 보려고 한다. 무대는 주로 가까운 아시아권이다. 1~4시간 비행 시간 컷으로. 나중에는 어떤 지도가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꽤 나 재밌다. 영화가 기준이긴 한데, 만화, 드라마도 가끔 껴 있다. 특히 영화 속에 나왔던 식당들을 가보고 싶다.
찜통 속에서 갓 나왔는지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의 매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곳은 언젠지 모를 옛 시절의 맛을 변함없이 간직해 온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다.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맛보다는 나는 이런 옛날식 강렬한 한 방이 좋다. 오래도록 지켜온 그 깊은 맛.
남대문역 5번 출구에서 시장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눈으로 찾지 않아도 은은히 퍼지는 담백한 향이 발길을 잡아끈다. 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곳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도착한다.
몽글몽글한 김치만두, 보자마자 군침이 돈다. 겉모습도 먹음직스럽지만 무엇보다도 그 동안 맛있게 먹었던 기억들이 뇌 속 깊이 각인된 탓인지 더욱 강렬하게 나를 유혹하는 듯하다. 나는 이 집 만두의 노예나 다름없다.
칼국수도 파는 곳이지만 먹어봐야지 하면서도 막상 가면 늘 만두에만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맛보진 못했다. 메뉴판에 적힌 '만두 100개 10만원'이라는 문구는 특히 인상 깊다. 만두나 빵처럼 낱개로 파는 식당 가서 '100개' 메뉴를 본 적이 있었던가? 마치 무슨 부품 대량납품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이곳 만두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집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이 녀석들은 아직 조리 전인 만두다.
찐 후에는 이런 러블리한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낸다. 마치 예쁜 조형물에 생명이 깃든 것처럼, 김을 모락모락 내뿜으며 나오는 만두들. 보통 줄이 긴 편이지만 로테이션이 빨라 기다림도 그리 길진 않다. 사실 그 보다도 군침 도는 만두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내 앞에서 만두가 모두 소진되어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잠깐 기다리다가 이내 나오는 찐만두를 첫 번째로 받아가는 순간의 행복함은 짜릿할 정도다. (너무 좋아서 한 두 번 "예에~"하고 소리쳐본 적 적도 있다)
짜잔~ 고기만두.
이곳에서 직접 먹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포장 해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포장만할 때도 조금이 아닌 듬뿍 담아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특히 집이 멀어 자주 오기 힘들다면, 한두 번 더 즐길 수 있도록 넉넉히 포장해 가길 추천한다.
왜. 나. 면.
어느 날 밤, 하얀 토끼를 쫗아가며 무스와 도도, 애벌레와 마주하고, 아기 돼지와 카드 병정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그 기묘한 밤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 밤 높은 확률로 그 만두가 떠오르며 잠 못 이루는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 (위는 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판타지스럽게 표현한 이미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두의 모습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직도 입 안이 기억하고 있는 듯한 그 맛.
내 몸과 정신이 함께 기억하며 나를 안달 나게 만드는 그 맛. 다 식어도 여전히 맛있는 만두, 다음 날 먹어도 변함없는 만두.
피처링 찐빵, 예쁘게 생겼다 (먹어보지는 못함, 정말 항상 만두만 먹으니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 김... 내 상상 속에서는 마치 해무처럼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여운을 남긴다. 날씨가 추워지니 가메골옛날손왕만두가 자꾸 생각난다.
요즘 가끔 내 머릿속에서는 남대문 한복판에 왕만두 판타지가 펼쳐진다. 수많은 왕만두들이 증기를 내뿜으며 둥실둥실 떠다니고, 나는 그 속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리는 기분이다. 한입 베어 물면 따뜻한 속이 터지고, 부드러운 만두피와 어우러진 맛이 가득 찰 것 같다. 하지만 먹을 수는 없다. 향기로운 추억이 입안에 퍼지며 그 순간에 잠시 빠져든다.
이런 날이 있다. 특별한 일도 아닌데 단순한 음식 하나에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날이 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왕만두의 그리운 맛을 상상하며 이 미묘한 갈망을 꾹 참아본다. 남대문이 너무 멀어서 쉽게 갈 수 없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가벼운 책가방 하나에, 밤에라도 식사를 할 수 있길 바라며 비행기 앞좌석을 추가 비용까지 들여 구매했지만, 살짝 먼저 도착한 홍콩발 방문객들 덕분에 출국심사가 두 시간이나 걸렸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특급 열차 라피트 (RAPI:T). 뜻하지 않은 키오스크에서의 카드 결제 오류까지 있어서 포기하고 카운터로 후다닥 뛰어가 출발 3분 전에 가까스로 현장에서 표를 구매했다.
승강장 내려가기 직전에 있는 화장실까지 급히 다녀온 후 열차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비틀비틀ㅜㅜ).탑승하고 몸을 실은 1분 뒤 바로 열차가 출발한다.
| 니시나리 구
약 40분 만에 신이마미야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오사카 도심까지 택시비가 원화로 약 15~20만원이라 급행열차를 탔지만 정신없이 달려온 탓에 여유를 즐기지 못한 점은 아쉽다. (라피트 편도는 현장 구매 시 약 1,350엔, 12,000원 정도다.)
신이마미역 (新今宮駅)에서 니시나리의 숙소까지는 약 700미터, 10분 거리. 걷다 보니 금세 '도부쓰엔마에(動物園前)' 역 사거리에 도착했는데 어딘가 익숙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실종> 촬영지다. 좌측 파친코가 있는 '한분야' 건물과 우측 '패밀리마트' 사이 철길 뒤로 하얀 '마루한 신세카이점'과 '츠텐카쿠' 타워의 머리, 영화 속 장면이 그대로 펼쳐진 듯한 순간이다
영화 <실종>은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가타야마 신조 감독 작품으로 어딘가 요즘 한국 스릴러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이한 일본 영화다.
횡단보도 신호등을 기다리며 영화 오프닝의 딱 그곳에서 찍어 봤다. 오사카 배경 영화들에서 봤던 니시나리 스트리트 라이프의 상징 같은 츠텐카쿠 타워를 맞이하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구글 지도에서 루트를 미리 확인해 놓았었지만 이렇게 금방 도착할 줄이야.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긴 여정과 삽질을 거쳐 찾아야 할 아이템을 너무 쉽게 찾아버린 기분이다. 원래라면 좀 헤매고 힘들게 찾아야 RPG 감성이 사는 건데, 이건 너무 직진 느낌이라 살짝 허무하기도 하다.
파노라마 식으로 보면 이곳이 꽤 큰 사거리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중앙에 빛나는 하얀 건물은 오모7(Omo7)호텔이다. 흔히 오사카가 숨기고픈 '슬럼가' 이미지로 알려진 니시나리구 아이린 지역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세워졌다고도 한다. 진위는 관계자들만 알겠지만, 공격적인 마케팅의 호시노 리조트 주식회사가 이 지역에 고급 호텔을 선보인 점은 흥미롭다. 이 지역 특성 때문인지 5성급 호텔임에도 가격대가 꽤 합리적이긴 하다. 관광지인 북쪽의 신세카이 쪽으로는 열려있지만 아이린 지구 방향으로는 밖을 나갈 필요 없다는 듯, 큰 정원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아이린지구 ((구) 가마가사키)
매우 대략적으로 아이린 지구 행정 구역을 표시해 보았다. 지도에서 중간의 노란색 라인은 코코룸 게스트하우스로 가던 길을 표시한 것. 아이린지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구) 가마가사키 노동복지센터'와 '삼각공원'을 표시해 두었는데, 이 주변이 전 세계 블로거나 유튜버들이 "일본/오사카 최대 우범지대!" 같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주 방문하는 지역이다.
오사카 최대 유곽인 토비타신치가 아이린지구와 아베노 재개발 지구의 경계를 이루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최근 오사카 엑스포를 앞두고, 토비타신치와 아이린 지구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루머가 인터넷에 돌고 있다. 오모 7과 아베노하루카스 300은 이 대대적인 변화를 위한 몸풀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막상 지도를 보니 언제 공격을 할 지 모르는, 양 옆에서 은근 압박을 주는 더블 볼란치 같은 느낌이다.
1970년대 아이린지구(당시 가마가사키)의 전성기를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이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전후, 대규모 건설 붐이 일어나며 일본 전역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던 시기. 이 때 가마가사키 노동복지센터가 건설되었으며, 일러스트의 좌측에 보이는 모던 형식의 건물이 바로 그 센터다.
영화, <실종>에서 묘사 되었던 삼각공원 (하기노차야 미나미 공원)의 노숙자들을 위한 배급 모습.
영화 <실종>에서 묘사된 삼각공원(하기노차야 미나미 공원)은 노숙자들을 위한 배급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곳은 한때 활기찼던 일용직 노동자들이 몰락하며 노숙자로 전락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카마가사키 포럼'의 자료를 참고해보면 저 이이린 지구의 간단 역사는 아래와 같다.
- 1945년 전후 복구: 전쟁 이후 가마가사키는 빈민가로 급속히 재건됨 - 도야마촌 형성: 1950~70년대,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로 도야(저렴한 숙소)와 판잣집이 가득 참 - 1970년 엑스포와 건설 붐: 엑스포 준비로 노동자들이 몰리며 아이린 센터가 설립 - 1980 버블 경제의 붐과 갈등: 1980년대 후반, 버블 경제로 노동 수요가 폭락하며 폭동과 갈등이 격화됨. 90년대는 대규모 폭동도 발생. - 현재: 버블 붕괴와 변화: 경제 침체, 노동자 고령화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며 현재 자연스러운 제트리피케이션을 겪는 중
| 일본 같지 않다는 일본 속 일본 같지 않은 숙소
숙소가 있는 도부츠엔마에상점가와 산노 시장으로 가는 길, 처음 접하는 분위기에 살짝 긴장감이 감돈다. 골목 곳곳에서 들려오는 가라오케 소리 덕분에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는 현실감이 든다.
OMO 7과 함께 고민하다가 로컬 분위기를 체험하고자 선택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레이트 체크인이라 문이 닫혀 있었는데 여기 묵고 있는 빨간머리의 '서양인'에게 도움을 받고 출입한다.
"어? 나 일본에 있는 거 맞아? 이게 뭐야?"
예상과는 달리 늦은 시간인데도 내부는 북적였다. 서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의 전형적인 분위기와는 너무 달라 순간 여기가 일본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던 순간, 한 일본인 스태프가 유창하게 영어로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보통 일본에서는 영어로 물어도 일본어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은데, 낙후 지역이라는 니시나리에서 마주친 첫 일본인이 영어를 이렇게 술술 한다고???). 일본에서의 첫 저녁에 일본인과 영어로 “나이스 투 밋츄, 마이 네임 이즈 땡땡땡,” 같은 형식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이름은 후유 상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배가 고팠기에, 그런이런저런 분위기는 잠시 뒤로하고 방에 짐을 재빨리 풀고 뭘 좀 먹으러 나섰다. 나가는 길에 퇴근 중인 후유상을 다시 마주쳤다. 혹시 이 시간에 문 연 곳이 있을까 물으니, 구글맵으로 바로 '토비타 식당'을 찾아 추천해 주셨다.
처음에 ‘토비타’라는 이름 때문에 잠깐 ‘응?’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오사카 최대의 유곽 지역이라는 ‘토비타신치’가 있기 때문. ‘飛田(토비타)’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잘 모르겠지만, 관련 역사를 찾아보면 주로 토비타신치와 현재는 없어진 토비타 철도 정류장(토비타 테이류죠) 정도가 나올 뿐이어서, ‘토비타’는 보통 이 유곽 지역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 식당으로
암튼 숙소에서 약 240미터 3분 거리라 구글맵 보며, 영업 종료 후 시간 대 니시나리 가라오케 아케이드의 분위기를 살피며 식당으로 향한다.
영화 <실종>의 오프닝인데, 영화 속에서는 아마도 이 아케이드 안 '타마데'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촬영스폿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식당으로 가는 길도 꽤나 비슷한 느낌이 나서 영화를 기억하며 거닐었다. 처음 도착했던 9시 30분 즘에는 꽤나 사람들이 많았는데 10시가 넘으니 인적도 좀 없어지고 거의 모든 가게들이 다 닫아 거리엔 적막이 흘렀다.
| 토비타 식당 모습과 메뉴
슬럼가 옆이라 그런지 여기는 대부분 허름한 느낌의 가게들이 대부분일 것 같은 느낌인데, 길가 끝 코너에 위치한 이 식당은 외관이 꽤나 깔끔했다. 외관 모습을 보니 나름 신식인 것 같다. 간판의 가게 이름 옆엔 메시(밥), 톤지루(돼지고기 된장국)라고 적혀 있는 곳을 보니 시그니처 메뉴인가 보다. 일본식 가정식 느낌이 아닌가 싶다.
문 열고 들어가니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는 카운터와 문 없이 트인 좌식 자리로 구성된 매우 익숙한 구조와 느낌의 이자카야 같은 공간이다. 굉장히 깔끔했다. 전혀 슬럼가 근처의 식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지역에 묵게 되어 깔끔한 곳이 가고 싶다면 좋은 선택일 것 같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진 몰라도 좌식 좌석에 가족으로 보이는 한 팀만이 단란하니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카운터 자리로 안내받았다. 아이스크림도 전문인지 외부와 내부에도 아이스크림 관련 포스터들이 많다. 달콤하니 사르르 녹아들 것 같지만 혈당 안정화를 위해 난 패스.
언제까지 영업하는지 물으니 자정 (12시)까지라고 한다. 사진 좀 찍어도 되냐 물으니 "이 쓰요 ↘ ↗ ~" 하며 흔쾌히 승낙하신다. 과하지 않고 깔끔하니 적당히 거리 있게 친절한 느낌? 이 분의 말투가 갠적으로 꽤나 좋았다. I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
외국인들도 꽤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영어 메뉴도 준비되어 있다. 대표 메뉴인 1번 돼지고기 된장국을 필두로 전반적으로 기본적이고 서민적인 일본 경양식과 가정식이 주를 이루는 느낌이다.
나폴리탄도 메뉴에 있어서 살짝 끌렸지만, 더 눈에 들어온 건 7번의 '레바니라'. 이번 오사카 여행에서 일본식 중화요리들도 맛보는 게 중요 목표였는데, 그중 하나가 니라레바(간부추볶음)였다.
오사카로 오면서 비행기에서부터 동네 맛있는 중화요릿집을 어떻게 찾아볼지 고민했는데, 여기에서 딱 그 메뉴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암튼, 순간 헷갈려서 "니바레라"라고 주문했더니 바로 알아듣고 "레바니라, 네?" 하고 되묻는다. (레바니라, 니라레바… 같은 의미이니, 내가 ‘니바레라’라고 해도 바로 알아듣는 듯 ㅋ) 워낙 대중적인 메뉴다 보니 어떤 발음으로 말해도 금방 알아듣는 것 같다. 정식 세트를 추천해 주길래 그렇게 주문했다. 단품들이랑 정식은 한 100~200엔 차이 정도로 예상된다.
당시 배고픈 나로서는 밥까지 나오니 오히려 좋았다. 현금 결제고 영수증은 버린 후라 저 800엔의 가격이 세전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행 전 들었던 니시나리 지역 치고는 아주 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근데 그마저도 조금 (좁쌀만큼) 사치하는 느낌이랄까? 오사카 내 다른 관광지와 비교하면 매우 합리적인 가격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가게도 이렇게 잘 관리되어 있는데 저 가격이면 혜자라고 본다.
| 가정식 한끼
우왕~ 맛있겠다! 먹기도 전부터 숙주의 아삭함과 저넘들을 싹 돠 스까 먹을게 기대된다. 비율 대비 밥이 많긴 하다.
간판에까지 언급된 시그니쳐, 돼지고기 된장국도 옆에 있다. 고깃국물의 특유한 담백함과 쫍쪼름이 어우러진 솔직한 맛이다.
특별하진 않지만 '와카코와 술'에서 와카코가 "풋, 슈~"하며 담백하게 음미하는 그 느낌이 떠오른다. 다만 이건 술이 아니라 장국일뿐.
한 상차림으로 샐러드, 무조림, 단무지가 함께 나온다. 무우 오른쪽에 놓인 돼지고기 부위(정확한 부위는 모르겠지만)는 쫄깃하고 아득한 식감이 인상적이었다. 오사카 여행 중 유일하게 맛본 일본식 단무지 ‘닥꽝’도 소소하게 좋았다. 한국의 단무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달짝지근한 일본 가정식 백반 한 상을 즐기는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레바니라는 구운 간의 퍽퍽한 식감을 야채들의 아삭함이 적절하니 '이븐'하게 중화해 준다. 역시 밥과 함께 국물, 그리고 비빔의 민족답게 다른 반찬들을 이것저것 함께 섞어 먹는 맛이 좋다. 일본 특유의 단짠 조화가 이 요리에도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다.
| 간부추볶음, 레바니라? 니라레바?
'레바니라 レバニラ ' 혹은 '니라레바 ニラレバ '는 돼지나 소의 간과 부추를 소금, 간장 등으로 간단히 볶아낸 일본식 중화요리다. 한국의 짜장면이나 짬뽕처럼 중화요리가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군만두, 라멘, 나가사키 짬뽕 등). 특히 레바니라는 꽤나 대중적이며 서도 '간' 때문에 그런지 스태미나 음식으로 인식되어, 꼭 중화요리 식당이 아닌 이런 일반 식당에서도 제공할 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많이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레바’는 ‘간’을 의미하는 일본어 표현으로, 영어의 ‘liver’에서 온 단어이고, ‘니라’는 ‘부추’를 뜻한다. 일본인들조차도 ‘레바니라’인지 ‘니라레바’인지 명칭을 왔다리 갔다리 하게 된 이유는 60-70년대 인기를 끌었던 만화 <천재 바카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아빠 캐릭터가 항상 명칭을 반대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고... 그래서 니라레바를 레바니라로 부름)
레바니라 관련은 한 두 개가 아닌 것 같지만 만화의 관련한 한 에피소드를 간단히 번역해 보면:
단순히 이름만 바꿔 부르는 게 이 만화의 웃음 포인트였는데, 이 장난이 크게 인기를 끌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레바니라'와 '니라레바'를 혼동하게 되었고 지금도 일본인들 사이에서 두 명칭이 뒤섞여 사용되는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2019년에 일본에서 “당신은 니라레바파인가, 레바니라파인가?”라는 주제로 전국 설문조사도 진행된 적이 있다. 총 555명(?)이 참여한 이 설문에서 압도적으로 ‘레바니라’파가 승리했다고 한다. 원래 정식 명칭은 ‘니라레바’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레바니라’가 대중에게 더 익숙해진 것. 이제는 ‘레바니라’도 표준 표현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오사카 지역에서는 거의 ‘레바니라’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라고 한다.
매체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뜻밖의 깔끔한 니시나리의 한 식당에서 늦은 저녁 식사와 목표 중 하나였던 일본식 중화요리를 만족스럽게 즐기고 나서 다시 한번 식당 외관을 찍어본다. 오사카에서의 첫 일정.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게 게스트하우스의 후유상 덕분,
"신세가 많았습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 니시나리, 밤 11시
밥 먹고 숙소 가려니 애써 온 이 밤이 뭔가 아쉬워 이곳 아케이드 명물인 가라오케 바에 가보려고 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대부분 문을 닫았는데, 신이마미역에서 내려올 때 기억이 났던 카라오케 바가 하나 있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 본다. 방문한 동네의 로컬 느낌을 느끼기에 외진 이자카야나 가라오케 바 같은 곳만큼 적절한 곳도 없다.
운전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배가 출출해진다. 여전히 '여행이 시작됐다!'는 실감은 나지 않지만 여행의 첫 장면은 언제나 휴게소에서 시작된다. 오전 8시 56분,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다. 맛은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비주얼에 이끌려 매번 같은 선택을 하게 되고 배만 살짝 채운다. 실망할 걸 알면서도 매번 반복되는 휴게소 식사, 어쩌면 이것도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 같은 순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근히 보이는 일상에서 만나지는 않을 작은 풍경들이 앞으로 펼쳐질 여정의 첫 단추가 된다. '나, 이제 어디로 떠나는건가?'라는 설렘이 서서히 스며든다.
| 충청도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서해대교를 건너는 순간 바다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47분, 국내에서 유일하게 섬에 자리한 휴게소인 행담도 휴게소에 잠시 들러 짧은 휴식을 취했다.
그래도 섬 쪽이라 바다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서해안의 서천, 비인해변. 이제 뭔가 본격적인 해안로 여행이 시작되는 느낌. 점심 먹으러 옴. 벌써 오후 2시...
점심으로 선택한 홍어와칼국수 식당의 메뉴는 1인분 8,000원짜리 2인상. 그 당시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이 점심 한 끼가 이제야 나를 완전히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듯했다.
점심을 마친 뒤 오후 3시, 서천의 풍경은 층층이 쌓인 레이어처럼 겹쳐져 있었다. 저 멀리 갯벌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고요하게 드리워져, 시간마저도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이런 여유로운 순간들이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문득 깨닫게 된다. (나는 가끔 이렇게 사소한 생각들에 잠겨버리는 피곤한 인간이다.)
다시 이동 후 도착한 죽도, 커다란 밤섬의 모습에 이끌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 섬에서 유명한 상화원에는 들르지 못했지만 바닷가 근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바다를 바라봤다. 멀리서 낚시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디를 가도 이들의 모습이 빠지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번 여행 첫번째 숙소 도착 후 근처 산책. 가을의 기운이 스며든 느낌이다.
아름다운 서해의 어두워지기 직전의 모습. 배가 고프다. 다시 비인해변 쪽이다. 저 앞에 밤섬인 쌍도가 보인다.
굴까지 주는 서해안에서의 조개구이 저녁식사 @웰빙칼국수. 허름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실내 테이블 관리도 잘 되어 있고 쾌적해 보이는 수조가 좋았던 곳. "그래, 서해안에 왔으면 조개구이 먹어줘야지!"
숙소로 돌아온 밤, 온통 세기말적 분위기로 가득 찼다. 어둠 속에 멈춘 듯 서 있는 빛나는 풍차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다음날 아침 7시30분 경 장항항의 장항 6080 음식골목 맛나로로 내려갔다. 이곳의 백반을 참 맛보고 싶었는데 '금일 휴업' ㅜㅜ
아침식사 가능한 곳을 급히 찾아보다가 다시 북쪽으로 33km을 이동하여 홍원항으로 간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홍원백반집.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지만 이미 현지 어부들은 어업을 끝내고 뒷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거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불타는 주말의 밤을 연상시키는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시계는 겨우 아침 8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지의 강한 에너지가 가득한 이 공간에서, 그 속에 압도되면서도 묘한 편안함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기분 좋은 집밥 같은 한끼 후 근처에서 사진도 찍어주고,
이런 풍경들을 좋아한다. 숨 막히게 채워져 있는 느낌과 간단해 보이지만 또 트여 있는 느낌. 이래서 바다와 항이 좋다.
숙소를 떠나 세만금방조제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가 눈앞에 펼쳐졌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이 구조물을 바라보며 그 웅장함에 압도되었다. 동시에 이 방조제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 속에 묻혀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19년에 걸쳐 세계 최대의 방조제로 완성된 이곳은 총 길이 33.9km로 마치 자연과 인간이 대치하는 방패와도 같다. 한쪽에서는 거친 파도가 부딪히고 반대쪽은 평온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 상반된 풍경은 거대한 인공 구조물의 위력을 더욱 실감케 했다.
맨날 뻘만 가득한 서해바다만 주로 봤었는데 이런 딥한 풍경도 보고,
대한민국 어느 바닷가를 가도 빠지지 않는 낚시꾼들의 모습. 그들은 바다와 마주하며 자연에 도전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바다 풍경 사진 속의 완벽한 피사체 같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낚싯대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은 바다와 인간의 끊임없는 교감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서해안에서 느끼는 파도의 철썩임
끝없이 펼쳐지는 세만금 드라이브. 바다와 인공 구조물이 맞닿아 만들어내는 이 독특한 풍경이 길 위에서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요거는 움짤보다는 조금 긴 버전의 세만금 드라이브 풍경이다.
| 전라북도
군산을 지나 강아지들의 산책을 위해 도착한 김제 심포항. 조용하고 한적한 이 공간은 마치 일부러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전시회장처럼 방치된 '부서진 조각들'이 인상 깊었다. 주위에는 폐건물처럼 보이는 구조물들이 서 있어 약간 기괴하면서도 흥미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분위기가... 스산하면서도 신기함.
어찌하였던 이 곳도 푸들시츄 연합이 접수합니다.
| 잠깐 내륙으로, 전주
남해안으로 내려갈 때는 힘들기 때문에 항상 중간 지점에서 쉰다. 군산이나 변산이 끌리는데 그곳들은 마땅히 갈 애견펜션이 없어 내륙이지만 항상 전주에 들리게 된다.
한옥마을 한 가운데 괜찮은 애견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이번에 가보니 루프탑도 생겼다. 사장님이 직접 관리를 잘하시는 듯하다. 이름은 '꼴 게스트하우스'.
전주 한옥마을의 가을 느낌, 그러고 보니 한옥의 나무 색깔 때문인지 가을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상차림이 맛있다는 '경기전막걸리'에서 저녁. 음식보다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기억에 남는 곳이다. 백숙을 끓이던 버너의 부탄가스에 불이 붙어, 가스통의 1/4 정도가 불에 휩싸였던 순간은 태어나서 처음 본 광경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옆 테이블들, 종업원 모두 현실감이 없는 듯 손가락만 가리키며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던 그 약 30초 정도...? 다행히도 불은 결국 달려온 직원분에 의해 꺼지긴 했다.
제3자가 이 상황을 듣는다면 "빨리 불부터 꺼야지, 뭐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의 충격은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던 것 같다. 비일상적인 상황은 오히려 빠른 대처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재난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밤 묵었던 숙소는 손님이 우리뿐이라 거실까지 전부 쓸 수 있었다. 아늑하고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여행의 여운을 느끼며 조용한 밤을 맞이했다.
비밀의 화원 느낌 마냥 거실과 이어진 루프탑으로 가는 계단
편한 전용 쿠션. 이제 한 숨 자자고 친구들~
다음 날 아침 6시 경에 찾은 전주왱이 콩나물국밥 전문점. 가을이라 아직은 아침이 어둡다
연약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느낌의 동글동글 인상적인 계란의 모양
정확히 월요일 아침 6시 22분의 풍경이다. 한 주가 막 시작되었지만, 밖은 여전히 어둡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른 시간에 사람들이 꽉 들어찬 모습을 보며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얼리버드들의 잔치라고나 할까. 어둠 속에서 이미 하루를 시작한 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그들의 결연한 일상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작고 소박한 발코니에서 아침 풍경을 바라보는 강아지, 이제 다시 떠날 시간이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었다.
| 전라남도, 남해안
다시 바다 여행을 이어가기 위해 다음 행선지인 목포로 향했다. 중간에 오전 10시 즈음 정읍 녹두장군 휴게소에서 강아지들 산책.
목포와 신안은 갈만한 애견펜션이 없어 언젠가 있을 다음 여행에 집중하기로 하여 이번 코스에서는 제외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기엔 못내 아쉬워 목포 남경회관에 들러 백반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1인분 9,000원에 가성비도 굉장히 좋았고 맛도 만족스러웠다. "다음엔 꼭 목포 여행을 와야지!" 다짐했던 순간이다.
밥을 먹고 근처 난영공원에 들러 강아지들과 잠깐 산책을 했다. 나름 테마가 해안로 따라 여행인데 내륙인 전주에서 목포 도심으로 바로 진입하다 보니 바다의 흔적을 잠시 잃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공원에서 그나마 물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여기서 느껴지는 가을의 신호들을 편안히 즐겼다.
한산하고 넓은 공간 속에서, 사람이 없을 때 강아지를 잠시 풀어줬다. 겁이 많은 녀석이라 할 일 하고 이내 돌아온다.
이제 다시 해안로 따라의 여행을 위해 고금도의 고금대교를 지나 신지도의 장보고대교를 넘으며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통영여행 전 가슴을 뛰게 만드는 키워드 두 개는 단연 복국과 다찌(실비)다. 복국은 언제나 가도 그때 그 느낌이지만 다찌는 항상 뭔가가 바뀌는 느낌이다.
주말에 통영 다찌 골목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인파와 차량으로 북적였고, 간신히 자리를 찾아갔지만, 요즘 다찌는 한정식 코스처럼 너무 정형화된 느낌이라 실망스러웠다. 예전에는 메뉴가 정해지지 않고, 사장님이 그날의 신선한 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내주던 그 묘한 기대감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 재미가 사라진 듯하다.
최근 '반다찌'라는 단어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다찌보다 저렴한 2~4만원의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코스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그만큼 다찌의 자유로움과 낭만이 줄어든 것이 아쉽다. 암튼 전 날 다찌집의 한정식 코스 느낌을 다시 경험하기는 너무 싫어서 일부러 네이버 리뷰를 통해 요즘 잘 나가는 집들을 최대한 걸렀고, 오히려 리뷰가 별로 없거나 옛 시절 느낌이 나는 곳 기준으로 찾다가 '통나무 다찌'라는 곳을 찾았다. 어제저녁 다찌 골목을 돌다가 눈여겨봤던 곳이기도 하다. 평일 저녁이라 한산한 지 전화해 보니 그냥 오라고 하신다.
주차는 근처 어딘가에 해야해서 자리를 하나 찾았는데 한번 가보고 싶었던 부일식당! 이미 문을 닫아서 그 앞에 주차를 한다.
무언가 90,2000년대에서 본 듯한 옛날 식 네온사인의 범벅, 가게 이름이 여기저기 남발식으로 써져 있다. 심지어 색상이 튀지가 않아 '통나무'가 아닌 '통니무'로 읽힌다. 이때 느낌이 왔다. "여기는 모! 아니면 도! 다" 하지만 '모' 쪽으로 느낌이 쏠린다.
입구 문 열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 옛 느낌이다. 문에 있는 서체나 색상들이나 너무 옛 느낌이다. 좋다. 기대된다.
가게는 선선했다. 뭔 날인지 세 테이블 정도 있었는데 모두 커플. 나이는 매우 다양. 30, 40, 50대 정도. 가격은 1인당 4만원이다.
가게도 딱 옛날 느낌이다. 2000년대 초반에 술집 가면 이런 느낌인 곳 많았던 것 같은데. 오른쪽 위 테이블 커플은 약간 상남자 스타일의 아저씨였는데, 우리가 청양고추 주문 했을 때 가게에 없었는데 그 소리 듣고 자기들도 먹고 싶어서 중간에 시장에서 사 왔다면서 우리 테이블에 잔뜩 주셨다. 감사한 분들! 우리 건너편 테이블 커플과도 많은 대화를 하셨다.
화장실 들어가는 입구의 형태도 뭔가 옛날 느낌. 커튼도 눈에 들어 온다. (나 이런 거 너무 좋아함)
다찌문화의 설명도 걸려 있다. 옛날 통영 다찌 집에서 사장님이 오늘은 이게 좋다, 이게 많이 들어왔다, 오늘은 특별히 주는 거야 등등하시며 음식 깔아주던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스쳐갔다.
먼저 나온 채소 접시. 고추는 맵지 않다. 청양 고추가 엄청 마려웠다. 일단 애퍼타이저로 배추 한 잎 사각사각 먹어준다.
회무침?
남해 여행 때 지겹도록 먹었던 멸치회무침인데 오랜만에 먹으니 부드럽고 감칠맛이 좋다. 시작의 느낌이 좋다.
병어회가 나온다. 저 소스에 찍어 먹고 이 차디찬 살얼음 같은 식감, 이 한 입으로 이 가게에 온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다! 냉기가 가시기 전에 다 먹고 싶은데, 앞으로 또 어느 음식들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니 자제를 자제를 하고 싶어도...
하.. 절편... 떡... 꿀에 찍어 먹어도 맛있고, 그냥 먹어도 맛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찌걱찌적 쩍쩍 입천장에 달라붙는 그 쫄깃한 잘 만든 떡 특유의 식감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떡 먹으면 배불러서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맛있어서 계속 손이 갔다. 나중에 다른 음식 먹고 다 식은 채로 먹었는데도 맛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와중에 저 떡이 또 생각난다. 그래도 바로 먹어야 제 맛이다.
한번 삶았냐 싶은 오징어가 나온다. 싱싱함이 느껴진다. 그래. 이렇게 한접시, 한 접시 요리가 나오는 느낌이 좋다. 어제처럼, 정식 코스처럼, 레디메이드처럼 다다다 다닥 준비되어 후다다다닥 세팅되는 다찌는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이 것만으로도 벌써 행복하다.
이번엔 또 뭔가 했더니 아나고 (붕장어)와 전어 회가 나온다. 맛을 말해 뭐 해. 고소함과 식감이 죽이는 조합이다. 다시 흡입.
키야, 해산물 모듬. 이번 여행에 돌멍게를 제대로 못 먹은 게 아쉽긴 한데 그래도 멍게는 맛있다. 그리고 쟤네들 전부 식감 깡패들이라. 뭐라 더 표현할 말이 없다.
후우... 맛있게 먹고 있는 중.
대각선 테이블에서 주신 청양고추. 느무느무 감사했어요~!!!
소라 회가 저렇게 살짝 닫혀 있어서 입구를 젓가락으로 툭 쳐주니,
안의 내용물이 이미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후두둑 튀어나온다. 식감 깡패.
싱싱한 해산물들의 향연이 끝났다 보다. 생선 구이가 나온다. 돔 종류였는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 데 암튼 맛있었다. 바로 조리한 거라 껍질은 또 빠삭!. 일단 저 정도의 스테이지면 맛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어 나온 전. 뭔가 바로바로 조리되자 마자 나오는 그 맛이 참 좋은 곳이다. 나오자마자 먹는 맛이 참 기가 막히다.
서비스로 주신 멍게 비빔밥. 와.. 지금까지 먹은 걸로도 대만족인데 이것까지 먹고 갈 줄이야!
스까!
한구인의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묵은지. 김치.
묵은지와 한입. 쥑임.
이내 나오는 미역국. 통영에서도 미역국은 항상 기대됨.
생선 미역국이었는데 이 생선으로 맛 낸 거라고 뭐라 뭐라 친절히 설명해 주셨는데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맛있었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꽂혀 있다.
이것이 천국.
어차피 술은 못 마시니 킨 사이다!. 정말 참다 참다 이럴 때 한번 빗장 풀고 마셔주는 탄산의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소중한 순간에만 마시는 청량음료. 청량음료의 맛은 너무 강하다 보니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의 아쉬움을 한방에 쓸어 준다. 이젠 갈 시간이라고. 이 보다 더 좋은 디저트가 있으랴.
음식마다 나오면 물어볼 때 친절하게 설명해 수진 점도 좋았다. 특히 가게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는 듯 느낌이지만 동시에 과하지 않은 설명! 손님 입장에선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커플 2인석들만 옹기종기 자리 잡은 느낌도 참 좋았다. 30~50대들의 모임. 계산하고 내려가니 계단 위에 이런 것 도 보인다.
대한민국 래트로 감성
안녕 통나무!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옛날 느낌의 다찌집의 경험을 주어서 좋았던 집.
숙소에 돌아오니 달이 참 동그랗고 강하다. 참 좋은 한 끼를 먹은 통영에서의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오사카에서의 이틀 여행. 그 짧은 일정 동안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인상 깊게 봤던 오사카 배경 영화와 드라마들이 주로 니시나리 지역에서 촬영된 걸 떠올렸다. 그래서 니시나리를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급히 짰다.
니시나리 지역에 대해 유튜버들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제발 절대 가지 마세요", "일본 최악의 빈민촌", "일본 최대의 슬럼가"라고 소개하는 걸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그냥 조금 지저분한 정도일 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오히려 색다른 풍경과 매력이 가득한 곳이다. 궁금하다면 키워드로 "니시나리+가마가사키"와 "니시나리+아이린"을 검색해 보면 된다.
쨋든, 영화 <오사카 소녀>에서 인상 깊었던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스케로쿠(助六) 우동집이었다. 영화 속에서 짧게 등장하지만, 그 외관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니시나리 산왕( 山王 ,Sanno) 시장에 위치한 이 가게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옛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시하라 타카히로 감독의 영화들이 대부분 오사카에서 촬영되었는데, 이 영화도 니시나리 일대에서 촬영된 것 같다.
잉? 산왕?
아, 물론 그 슬램덩크의 산왕공고와는 전혀 관계없다. 완전 다른 지역.
타베로그와 구글리뷰, 유튜브 리뷰를 보았을 때 아래와 같은 인상 깊었던 키워드들이 있었다.
영화세트 같은, 쇼와시대로 타임슬립, 부드러운 오사카의 맛, 옛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레트로,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기울어져 있는 의자, 용기를 내어 들어가자 (너무 노포 같은 느낌이라 문 닫은 줄들 알아서 그런 듯) 등등
| 첫 날 방문: 외관과 내부
스케로쿠 우동집은 외관만 봐도 영화 세트처럼, 딱 내가 좋아하는 노포의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이곳은 아침 8시 30분에 열고 오후 2시 30분에 닫는다. 이런 가게들이 보통 일찍 닫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재료가 일찍 소진되거나,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운영하거나. 어쨌든, 이런 가게는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니시나리의 아침은 독특한 느낌이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해 피곤했지만, 어느새부턴가 아침형 인간으로 변해버린 나는 자연스럽게 5시에 눈이 떠졌다. 신기한 숙소 곳곳을 둘러보고, 비영업 시간의 토비타신치 유곽, 가라오케 아케이드, 슬럼가 등을 탐방하며 8시에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니시나리 윗동네인 신세카이까지 산책하며 영화 촬영지들도 방문했다.
아침식사에서 채운 배를 충분히 비운 뒤 점심을 위해 찾은 이번 오사카 여행 최고의 하이라이트 계획 두 개 중 하나였던 스케로쿠, 아침과는 달리 영업 중임을 알리는 노렌(입구의 천으로 된 팔랑이 커튼)이 달려 있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 자전거(오른쪽)도 <오사카소녀, 2019년> 때와는 달라 보인다.
그동안 일본에서 지겹도록 겪은 '줄서기'에 대한 피로감이 있어서, 이곳도 혹시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맛집이 아닐까? 또 이른 종료 시간의 압박까지 더해지니, 점심시간인 12시 56분쯤 가면 줄을 서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가게에 도착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사장님께서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내부를 둘러보니, 리뷰에서 본 일본인들이 말하는 그 '쇼와 시대'의 레트로 감성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곳이 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옛날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가게는 작지만 아늑했고, 대략 두 테이블 정도로 7~8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신 물 한 잔도 어딘가 소박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이쿠! 엉덩이가 살짝쿵 들어갈 정도로 자리가 꺼져 있어서 살짝 당황했다. 나무 특유의 딱딱함과 함께 홈이 엉덩이 형태처럼 패여 있는 느낌이 있었다. 리뷰에서 봤던 그 살짝 기울어진 의자라는 묘사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7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끼니를 해결하며 남긴 흔적이, 의자에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오랜 시간이 새겨진 듯한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무언가 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왼쪽에는 모든 메뉴가 적혀있다 (오른쪽은 우동, 왼쪽은 덮밥과 소바 같은 그 외 메뉴. 판의 뒷켠은 주방으로 아주 살짝 안이 보인다). 일어 옆의 작은 글씨는 영어라 외국인에게도 접근성이 좋고 세후 가격으로 적혀 있다. 수요일은 정기 휴일인 것 같고, 리뷰에서 보던 파리종이(파리 끈끈이)도 보인다! 저거였구나! (사진 상 우측 상단 메뉴판을 가리며 내려온 넥타이 형태의 브라운 색)
저 1인 용 테이블도 레트로 감성 듬뿍인데 손님용 의자는 아닌 듯 싶다. 와... 우측의 저 양철 바구니는 또 뭔데!
항상 출퇴근하시는 모습을 보니 사장님은 이곳에서 생활하시진 않는 듯했다. 왼쪽 방처럼 보이는 공간은 사장님의 휴식처인 것 같았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사장님은 그 방에 걸터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계셨다. 비록 모든 것이 오래되었지만, 가게 자체는 잘 관리되어 있어 지저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노포라도 내버려 둔 느낌보다는, 이렇게 적당히 관리되고 있는 가게가 더 좋다. 방치된 것이 아니라, 계속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듯한 가게는 그 안에 주인장과 손님들의 기억들이 스며들어 있어 더 특별하다. 그게 이런 가게들의 최고의 양념이다.
선풍기도 뭔가 옛날 느낌 (리뷰 보니 한 여름엔 에어컨 빵빵 틀어준다고 함 ㅎㅎ)
선풍기 아래 우측 벽. 설치한지 얼마 안 돼 보이는 휴지 거치대가 인상적이다.
오기 전 가장 먹어보고 싶었던 중간에 저 550엔짜리 키츠네 우동을 주문했다. 5천 원 정도?
장난감 가게에 온 어른아이처럼 가게 내부를 흥미롭게 계속 구경했다. 내 바로 앞에는 오랜 시간을 대변해 주는 듯한, 마치 인생의 풍파를 함께 견딘 노부부 같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특히 왼쪽 의자는 프레임과 등받이가 부러져 나간 듯 보였지만, 다시 봉합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의자 역시 등받이가 삐져 나올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장나기도 했지만,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함께해 온 모습이 꼭 오래된 노부부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진짜 옛날에나 보던 저 컵. 소박하다. 그리고 테이블의 저 긁힌 흔적들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역사와 수명을 보여주는 듯하다.
양념이라곤 간단하게 일곱 가지 맛의 고추인 시(7)치미와 한 가지 맛의 고추인 이(1)치미. 특별히 만들 것 같지는 않고 조촐한 느낌이 좋다.
| 키츠네 우동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키츠네 우동. 역시 비주얼도 가게와 참 잘 어우러지듯 소박하다. 이 집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소박해 보이는 5천 원짜리 우동 한상. 물 한 컵과 우동 한 그릇이 전부였다. 일본이 단짠의 성지라서, 짠 국물을 예상했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의외로 슴슴한 맛에 놀랐다. 면발은 쫄깃할 줄 알았지만, 부드러웠다. 그렇다고 너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이게 리뷰에서 말하던 오사카의 부드러운 맛일까?' 싶었지만, 오사카에서 먹어본 우동이 이 한 그릇뿐이라 쉽게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묵도 적당히 쫄깃하고 부드러운 맛이었고, 전체적으로 슴슴한 맛 속에서 유독 유부가 꽤 달콤했다. 만약 단무지가 없어 허전하신 분들에게는 이 달콤한 유부가 충분히 그 역할을 대신해 줄 것 같다.
어느 정도 먹고 나서 심심해졌을 때 즘 이치미를 뿌려 본다. 혼합되지 않은 고추 본연의 맛이 좋다. 특히 국물의 맛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그저 감칠맛나게 도와줄 뿐.
시치미 투하. 이젠 거의 다 먹었으니 갈 때까지 가자는 것. 세 번의 맛의 변화를 음미한다. 딱히 특별할 건 없다. 시치미야 MSG 뿌리는 거랑 다를 게 없으니. 전체적으로 그냥 소박하다는 단어에 딱 어울릴 만한 맛이다. 가게의 분위기와 이 소박한 맛이 어우러져 꽤나 좋은 하모니를 연출한다. 이것이 기억에 강하게 남는 점이다.
한 그릇 뚝딱 했다. 양은 일반인에겐 조금 부족할 수도 있는데 나 같은 소식인에게는 딱 괜찮은 한 그릇이었다. 여긴 한 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면은 일단 먹었으니 인터넷에서 봤던 그 덮밥을 먹으러 내일 다시 올 예정. 일정이 짧기도 하거니와 여행 시 한 집 두 번은 잘 안 가게 되는데 이곳은 정말 예외였다. 그렇게 맛이 있어서 또 먹고 싶은 그런게 아닌데도 말이다.
| 두 번째 방문
갑작스러운 여행의 일정에 몸이 힘들었는지 다음 날은 좀 늦게(?) 6시경 (ㅜ-ㅡ) 눈을 떴다. 7시 즈음 니시나리 슬럼가를 정처없이 방황했다.
그리고 8시 30분 오픈 시간에 맞춰 재방문을 위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주 낯익은 분이 자전거를 타고 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며 스쳐갔다, 난처한 표정으로. 쓰케로쿠 사장님이었던 듯한데... 설마설마 어쨌든 우동집에 도착!
역시 문은 닫혀 있고 사장님의 자전거도 없다!!! 노렌도 없고. 아까 본 분이 사장님이 맞았던 것이다. 가게 앞에서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포기하고 숙소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너무너무 아쉬웠다.
진짜 너무너무 (ㅠ_ㅠ). 니시나리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식사는 이렇게 날아가는 것인가!
언젠가 오사카에 다시 올 일이 있으면 꼭 또 와야지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아케이드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아까 봤던 할아버지 사장님이 자전거 앞 소쿠리에 파와 식재료들을 담고,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바쁘게 가고 계셨다. 그 방향이 스케로쿠 쪽이었다. '아, 저건 사장님이 맞다!' 싶어서 나도 다시 음식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도 식재료를 깜빡하신 것 같았다.
8시 47분에 다시 가 보니 자전거도 세워져 있었다. ദ്ദി( ◠‿◠ ) 기쁨! 근데 노렌이 없다. 그래도 입구 문잡이에 자물쇠는 풀려 있어 문을 열어 보았다. 근데 웬걸. 안에서 잠겨 있어 잡아당겨보니 철컹철컹 거리만 할 뿐이다. (;☉_☉) 안에도 도어록이 있는 듯. 근데 그 순간 철컥 자물쇄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장님이 안에서 문을 여신다. 지금 들어가도 괜찮냐고 물어보니 들어오라고 하신다! 서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 ‾́ ◡ ‾́ )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뜻하지 않은 첫 손님이니 나 하나밖에 없었다. 꼴에 한 번 와봤다고 꺼진 자리가 단골 마냥 이내 익숙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물이 아닌 오차가 나왔다. 왼쪽의 저 물과 차 보냉병의 위치가 어제와 기가 막히게 일치한다. 암튼 개장 준비가 아직 덜 되었는지 오늘은 책을 읽지 않으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셨다.
두 번이나 온 이유는 위 유튜브에서 본 덮밥이 참 맛있게 보여서다. 좋아하는 파도 파이지만 어제 먹었던 심심한 듯 안심심한 어묵의 맛도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소고기덮밥) 타닌동을 시켰는데 사장님이 알았다고 하신 뒤 뒤돌아 주방으로 가기 바로 전 갑자기 앗따마(머리)를 왼쪽 손바닥으로 툭 치며 ("아이고"의 느낌) 소리를 내신다. "아!" =͟͟͞͞(꒪ᗜ꒪ ‧̣̥̇). 지금 밥을 안 지어놔서 안된다고 하신다 ㅜㅜ, ━=͟͟͞͞(Ŏ◊Ŏ ‧̣̥̇)━ 면은 되니 타닌우동은 된다고 ㅜㅜ. 우아.. 덮밥 너무 먹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우동으로 시킨다. ( ⩌_⩌)
너무너무너무 아쉬웠다...ㅜㅜ ( ・ᯅ・ ) ㅠㅠ 암튼 오늘 여러모로 잊은 게 많으신 날인가 보다. 그래도 닫혀 있던 가게가 연게 어디냐 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 타인우동
쨋든 나온 고기 우동. 어제는 흰 그릇이었는데 오늘은 검은 그릇이다. 흑백우동! (꒪⌓꒪) 고기들이 생각보다 꽤 많이 들어 있다. 세후 700엔이니 대충 6,7천 원 짜린데 내용물이 좋다. 오야코동이 닭고기와 달걀을 사용하고, 타닌동은 소고기와 달걀이 들어간다. " 타닌(他人)"은 다른 사람인 '타인'을 의미하는데 소고기(소)와 달걀이 가족 관계가 아닌 '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량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그닥 아끼지는 않은 느낌이다. 보다시피 기교 없이 본연에 충실하고 솔직한 맛이다.
계란은 당연히 맛있고, 국물은 어제 키츠네 우동과 달리 담백~하고 살짝 고소하다. 아마도 고기가 섞여 우러난 맛이어서 그런가 보다. 어제처럼 유부를 먹기 전엔 못 느꼈던 달달함도 전체적으로 묻어 있다.
보통 저런 음식에 나오는 고기들은 들러리들이 많아서 건너뛰기도 하는데 여기는 이 음식의 중요한 한 요소처럼 느껴졌다. 아침식사임에도 부담 없이 맛있다. 하아... 이거에 덮밥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면발은 어제와 동일하다. 갠적으로 좋아하는 쫩쫍(?)한 식감은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맛. 특별할 것은 없다. 그냥 맛있고 분위기가 좋으니 또 빠져든다.
슴슴하지 않고 담백한 맛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이치미에 이어 시치미를 일찍 투하한다.
덮밥 못 먹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한 그릇 뚝딱. 맛있기도 했고 양도 많진 않아서 좋았다. 강화도의 강화집 곰탕 분량 정도라면 대충 맞을 것 같다. 서로 다른 맛이지만 가게도 그렇고 전체적인 느낌이 약간 비슷했다.
우동을 먹는 동안, 사장님과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로가 각자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그곳엔 편안한 적막이 흘렀다. 유튜브에서 본 리뷰에선 사장님이 말을 걸면 친절히 응대해 주시던 것을 보아, 말만 걸었더라면 다른 분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날 밤, 가라오케 바에서 마마상과 주고받던 그 시끌벅적한 대화도 좋았지만, 이곳에서 느끼는 고요한 순간들은 그 나름대로의 깊은 안락함이 있었다. 4년 전 리뷰를 보니 원래는 노부부가 운영하던 가게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이틀 동안은 할아버지 혼자였다. 가게 안에서 책을 읽고 계신 그 모습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마치 그곳이 책 속의 한 장면처럼.
요즘 많이 쓰는 표현처럼 찢고, 미치고, 기절할 만큼의 맛은 아니었다. 사실, 내 인생 그런 맛을 살면서 맛본 적은 거의 없다. 태어나 처음 먹은 김치볶음밥이나, 항암 치료 때문에 미각을 아주 오랫동안 상실했던 후 처음으로 먹은 라면 정도가 기억에 남을까. 그래도 이곳은 충분히 괜찮았 곳이다. 맛뿐만 아니라 그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나에게는 다채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못 먹은 덮밥이 아쉽긴 했지만, 어쩌면 그 30%의 아쉬움 덕분에 다시 이곳에 올 이유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오사카에 다시 오면, 그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굳이 다시 찾아올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식당을 뒤로하고, 체크아웃을 위해 5분 남짓한 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가게의 시장지역을 바로 건너면 또 저런 풍경이 펼쳐지는데, 좌측의 옛 목욕탕? 온천시설?이었던 듯한 기둥이 참 인상적이다. 그냥 지역 자체가 레트로 감성천국이다.
| 메뉴정보
외관에 걸려 있는 메뉴 정보. 아마 이 아이들이 간판 메뉴가 아닐까 싶다.
안쪽의 풀 메뉴 1)이다. 전제척인 가격대는 500~700엔이다. 우측은 면 메뉴. 파리끈끈이에 가려진 건 아마 (튀김) 타누키 우동인 듯.
안쪽의 풀 메뉴 2)이다. 좌측이 우동을 제외한 소바, 밥 메뉴다. 덮밥은 800엔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니시나리 지역자체가 숙소 값이 워낙 싸서 중장기 체류하는 여행객들도 특히 많다. 그래서 이를 반영하여 영어 메뉴판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곳의 영업 상태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전거는 있는데 노렌(천 팔랑이)이 없다면 = 준비 중. 자전거도 있고 노렌이 걸려 있다면 = 영업 중. 자전거도 없고 노렌도 없다면 = 영업 종료다. 마치 이 가게만의 작은 신호처럼, 그렇게 사장님은 우리에게 오늘의 스케줄을 알려주고 있었다.
| 웹리뷰들:
아래는 타베로그와 구글리뷰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코멘트 모음이다.
"74년의 영업.. 외관의 임팩트는 방문한 쇼와 식당 중 3손가락 (기타센주 후타코주시 , 효고구 이세야(폐점))" '24.2
여행을 할 때면 항상 지역 시장을 찾아가게 된다. 물론 번쩍이는 관광 명소들도 좋지만, 시장은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 일상, 음식, 전통을 가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침 일찍부터 활기가 넘치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그 지역의 하루를 함께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시장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그 지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곳에서 음식을 먹어보려고 하는데, 그 경험이야말로 여행의 개인적인 묘미 중 하나다.
후쿠오카에서 이른 아침 식사를 검색해 보면 대부분 프랜차이즈 식당들만 나왔지만, 나는 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지의 고유한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후쿠오카 나가하마 선어시장 시장회관 1층에 이른 아침부터 식사할 수 있는 맛집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기대를 안고 그곳을 찾았다
나가하마 선어시장 시장회관에 도착했을 때, 예상했던 전형적인 재래시장의 활기찬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시장'이라기보다는 '시장 회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관은 마치 공무원 청사를 연상시키는 딱딱한 빌딩 같았다. 도매 시장이라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어시장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매월 두 번째 토요일에 일반인에게 개방된다고 하니 다음엔 꼭 그날을 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꼭대기 13층에 무료 전망대가 있다니, 나름대로 그 곳만의 매력을 찾아볼 수 있었다.
| 후쿠오카 토요일 아침 6시 30분
오전 일정인 이토시마 행 첫 버스가 오전 9시 52분이니 아침 일찍 나가하마 선어시장에서 식사를 하기에 시간은 넉넉했다. 숙소에서 시장까지는 약 2km 거리라, 조용한 도심을 산책하며 아침을 시작하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6시30분 즘 밖에 나와 보니 하늘은 여행기간 내내 이어진다는 비 소식처럼 여전히 흐릿했다.
이른 아침의 후쿠오카 번화가는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북적이던 돈키호테와 이치란 라멘 본점 앞도 한산했고, 거리의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걸으며 스냅사진을 찍기에도 딱 좋았다.
오후나 저녁이 되면 분명히 다시 활기로 가득 찰 이곳이지만, 아침의 여유롭고 차분한 분위기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줬다. 이런 고요한 아침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순간이 꽤 편하게 다가왔다.
| 나가하마 선어시장 시장회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어시장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우산 챙기는게 귀찮긴 하지만) 나는 여행 중에 비가 오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빗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기며 내심 기분이 좋았다. 곧 있을 이토시마 바다 구경도 기대가 되었다. 폭우 속에 펼쳐질 바다는 분명히 아름다울 거라고 상상하며 시장에 가까워졌다.
입구로 들어가자 로비가 휑하게 펼쳐졌다. 어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만큼 조금은 단조로운 분위기에 의아했지만, 로비 오른쪽에 학생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게 눈길을 끌었다. 중앙으로 직진하니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 이어졌다.
(위 링크) 나가하마 선어시장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니 식당 안내와 함께 어시장 전체 정보도 얻을 수 있어서 유용했다. 요즘 번역기 덕분에 언어의 장벽도 크게 느껴지지 않아 여행 중에도 편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시장 회관에는 총 8개의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있다고 했는데, 공홈에 따르면 7개의 식당만 영업 중이라고 하니 아마도 '카레야 사라짱(カレー屋サラ ちゃん) '은 운영하지 않는 듯하다. 쨋든 1층 식당가의 규모는 크지 않아서 한 바퀴 쭉 둘러보고 식당을 고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오늘 방문한 곳은 '하카타 우오가시 (博多魚がし) 시장회관점'. 7시 15분경에 도착했는데 벌써 웨이팅이 걸려 있어 살짝 당황했다. 이.시.간.에.도.웨.이.팅.이.라.고??? (아니 7시에 문 연다면서욧!) 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맛이 보장된다는 의미일 거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좌측에 붙어 있는 마츠리 관련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라는 축제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한다. 후쿠오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연례 마츠리라고 한다.
다녀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하필 이 날이 축제의 하이라이트 날이어서 이토시마 바다 구경 후 후쿠오카 도심으로 돌아와 보니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버렸다. 그 덕분에 먹고 싶었던 우동도 못 먹고…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다.
영어 메뉴도 있고 사진 메뉴도 있어서 미리 고르면 나중에 주문할 때 도움이 된다. 나중에 들어가서 보니 노부부 두 분이서 하드캐리하는 음식점이다. 다른 종업원들이 없던 건 아니지만 주문, 요리, 계산까지 이 두 분 체제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싯가 상관 없이 (당시 엔저 최저치...) 후쿠오카 오기 전부터 내 페이버릿인 성게를 무조건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성게카이센돈으로 메뉴를 정했다. 그냥 이거 사진 찍어서 할무이 사장님 주문받으실 때 "고레 니 시마스"하고 주문 끝 ㅎ. 위 보면 제철생선에 따라 메뉴가 바뀐다는 안내가 있는데 역시 이게 시장 식당의 매력이다.
웨이팅 하며 앉아 있으면서 정면 바라보고 찍은 건데 어류 도감이 보인다. 좌측에 홍어 같은 가오리들이 보이는데 일본에서도 홍어를 먹나?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사진은 웨이팅 하면서 오른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많은 사인들이 벽에 보이고, 좌측이 계산하는 곳이다. 주문받던 할무이 사장님이 계산할 때 저곳으로 오신다. 이 이전 내 앞에 어르신 커플 한 팀이 있었고, 나와 거의 동시에 들어온 혼밥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순간 서로 살짝 눈이 마주치자 그분은 구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먼저 앉으라고 손짓을 해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인사하며 먼저 웨이팅 자리에 앉았다. 10분 정도 웨이팅 후 카운터석으로안내받았다.
그 순간 느끼기에, 그 자리에 외국인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가게 내 대부분이 일본인들로 보였고 (뭐 로컬과 후쿠오카에 국내여행 온?), 그 이방인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외국 관광객들도 방문하는 곳일 텐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다. 마치 현지 속에 조용히 스며든 듯한 느낌이랄까. 옆에 앉은 아저씨는 아침부터 시원해 보이는 병맥주를 즐기고 계셨고, 그 여유로운 모습이 어쩐지 인상적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는 내가 좋아하는 우니(성게)가 보였다. 하나에 2,500엔이라니, 한화로 2만 원 조금 넘는 금액인데, 솔직히 이 정도면 꽤 저렴해 보였다. 한국에서는 몇 만 원을 주고 먹는 양과 비교해 봤을 때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나온 우니 카이센돈 정식. 시장에서 먹는 저렴한 정식에 어울리게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비싼 식당들 대비 소박하면서도 알찬 매력이 있다. 옆에 나온 반찬은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우뭇가사리처럼 부드럽고 부담 없이 먹기 좋았다.
당시 엔화 초약세일 때라 한국돈으로 한 9,000원 정도 했는데 이 가격에 성게도 나오고 같이 나온 생선들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양이었다.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적당하게 아침에 먹기 좋은 한 끼였다.
미소수프는 맛있고 (당연히 좀 짜긴 한 와중에) 덜 짠맛이었다. 그리고 여기 한 두어 개 들어있던 저 어묵 조각, 쫄~깃 했다. 인상적이었다.
자리에 두 가지 소스가 있었는데, 하나는 회 찍어 먹는 간장 같았고, 다른 하나는 약간 까나리액젓 비슷한 맛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른쪽 소스는 카이센돈용 소스였다. 두 소스를 섞어 먹어봤는데, 간장은 익숙한 맛이었고, 오른쪽 소스도 생각보다 비리지 않고 괜찮았다
손님들이 많아서 가게 전경 사진은 거의 찍지 못했지만, 가게는 카운터석, 테이블석, 그리고 좌식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옆자리가 비자마자 살짝 찍어본 가게 내부는 벽 쪽에 붙은 메뉴판들이 싯가로 계속 변하는 것 같았고, 노포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원래 흰밥을 많이 안 먹으려 했는데, 생각보다 꽤 많이 먹어버렸다. 평소에 소식하는 편이라 이 날 점심, 저녁도 계획하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도 일반인 기준 많은 양은 아닌 듯?).
계산하고 나가는 길.
가게 밖에서 보니 들어올 때는 못 알아챘는데 TV 디스플레이가 있었다.
가게를 나와 1층을 쭉 걸어가다 보면 각 음식점들의 메뉴를 볼 수 있다. 어떤 곳은 사진, 또 어떤 곳은 모형으로 메뉴를 보여준다. 오늘의 경험이 워낙 좋아서, 나중에 다시 후쿠오카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이 1층에 있는 7개의 식당을 아침 식사로 모두 섭렵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한 번씩만 간다면 그때그때 메뉴를 고르는 정신적 고통이 클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곳의 음식점들은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영업 시작 시간이 각각 다르다. (내가 간 곳은 7시에 오픈). 일요일에는 휴무인 곳도 많으니 방문 전에 영업 시간을 꼭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원래는 70년 노포라는 오키요 식당에 가려 했는데, 내 일정 대비 너무 늦게 열어서 (오전 9시), 더 일찍 여는 옆집인 하카타 우오가시에 갔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대만족이었다.
만족스러운 한 끼를 먹고 가게 밖으로 나서니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추고, 눈앞에 너무나 푸르른 하늘이 펼쳐졌다. 비 오는 날의 분위기도 좋지만 이렇게 맑은 하늘 아래서 바다를 구경할 생각을 하니 또 다른 설렘이 찾아왔다.
1. Popinjays @ 센트럴 2. Mido Cafe @ 야우마테이 3. Cheung Sing Restaurant @ 코즈웨이베이 4. Omahony's Bar (n/e) @ 프린스 에드워드
| 1. 팝핀제이스 Popinjays @ Central
마가렛 (니콜 키드먼)이 첫 등장하는 팝핀제이스 (Popinjays)는 홍콩 머레이 호텔의 루프탑 레스토랑이다. 이곳에서 마가렛이 남편의 50번째 생일 파티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 장면이 촬영되었으며, 카메라는 천천히 배경에서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의 성격과 배경을 암시해 준다.
팝핀제이스는 홍콩의 멋진 야경뿐만 아니라, 낮에도 270도 파노라마 뷰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주말 브런치, 애프터눈 티, 저녁 DJ 공연 등 다양한 특별 이벤트가 자주 열리며, 홍콩에서 럭셔리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장소라고. 탁 트인 전망과 세련된 분위기로 홍콩의 현대적 감성을 느낄 수 있어 보이는 곳이다 (못 가봄).
참고로 팝핀제이스가 위치한 머레이 호텔은 1969년 정부청사로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로, 홍콩의 건축적 유산을 보존하며 2018년에 럭셔리 호텔로 새롭게 개장했다. 상징적인 아치형 구조와 혁신적인 설계로 홍콩의 모던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원래 건축은 론 필립스가 설계했고, 리모델링을 통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럭셔리 호텔로 재 탄생했다.
머레이 호텔의 리모델링은 애플 파크, 런던의 더 거킨, 홍콩 국제공항 등을 설계한 노먼 포스터 경의 작품이다. 팝핀제이스에서도 가까운 HSBC 본사 빌딩 역시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다. 리모델링 전인 1986년의 머레이 빌딩과 노먼 포스터의 HSBC 빌딩 사진을 보니, 팝핀제이스에서 이 역사적 랜드마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 2. 미도 카페 Mido Cafe @ Yau Ma Tei
미도 카페는 이 시리즈의 여러 포스터 중 하나로도 등장한다. 후반부 머시와 챨리가 서로 간의 다툼 이후 재회하는 곳이다. 옛 홍콩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진한 노스탈지아를 불러일으킬 곳으로 이 드라마의 신을 보자마자,
"아, 여기!"
하며 알아봤을 곳일 거다.
야우마테이에 위치한 홍콩의 대표 문화인 차찬텡으로서 1950년대에 문을 연 이후 그 특유의 레트로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곳이다. 특히 빈티지 타일과 나무 가구, 네온 간판과 옛 레트로 홍콩 감성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색상들로 꾸며진 창문들이 주는 클래식한 팔레트의 느낌들. 이곳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를 보면, 홍콩의 근현대 전통을 유지한 공간에 이 외국인들이자리 잡은 모습이 딱, 'expat'의 느낌을 잘 묘사한 것 같다 (물론 관광객의 케이스도 잘 어울리겠지만).
특히 국내에서는 홍콩 느와르 시절 대표 배우 중 하나인 장국영이 단골로 찾았던 곳이라 하여 유명하기도 한 곳. 2024년에 다시 가 보니, 그때 즈음 홍콩영화를 즐겼을 만한 나이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젠 자신들의 자녀를 데리고 왔을 법한 모습도 보였다. 홍콩의 오래된 감성을 간직한 이곳은 세대를 초월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2022년 7월 코로나 시절 문을 닫았다가 같은 해 10월에 문을 열었다. 시리즈를 보며 이 장소도 반가웠지만 이 신에서 흐르는 1993년 홍콩을 열광시켰던 페이 웡(왕비)의 'Summer of Love' 배경음악 또한 향수를 자극했다.
홍콩은 원래 번안 히트곡들이 많았는데, 이 곡 또한 1992년 독일의 헬렌 호프너가 발표한 노래의 번안곡이다. 둘 다 여름이 되면 아직도 즐겨 찾는 참 시원한 느낌의 노래들이다.
| 3. 쳉성찬텡 Cheung Sing Restaurant @ Causeway Bay
에피소드 1의 마지막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는 장면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자신이 짊어진 모든 짐들에서 벗어나고픈 마가렛의 잠깐의 일탈이 연출된다. 코즈웨이 베이의 Tai Hang 타이 항에 위치한 쳉성찬텡이라는 곳이다. 구글 리뷰에서 5점 만점 중 3.8점의 준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외관은 실제 촬영장소 같은데, 내부 장면은 스튜디오 세트다. 시리즈는 우여곡절 끝에 상당히 많은 주요 공간들을 미국으로 돌아가 세트를 만들어 촬영 했다고 하는데, 이 쳉성찬탱도 마찬가지로 내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트 촬영이다. 특히 색감과 분위기를 볼 때 연출 시 미도 카페의 홍콩 레트로 감성을 취하려 한 것 같아 보인다.
실제 인테리어 분위기 사진을 보면 시리즈에서 보는 것과 비교할 때 거의 비슷하지만 좀더 투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국에 돌아가서 세트를 통해 인스타 필터 감성에 성형수술도 약간 한 버전으로 보면 될 듯하다. 현실이지만 상상의 공간이다. 이 시리즈는 보면 볼수록 스토리와 연출보다도 공간들의 매력이 참 좋다. 2014년의 홍콩은 과연 이 모습이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어쨌든 있지만 없는 곳이다.
미도 카페의 'Summer of Love' 장면처럼, 블론디의 'Heart of Glass'는 이 신의 핵심 요소다. 마가렛 (니콜 키드먼)의 남편이 50세인 설정을 볼 때, 이 노래가 나온 건 1979년이므로, 2014년 홍콩 우산혁명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 시리즈에서 50세의 남편을 가진 마가렛도 일단 동갑이라고 가정하면 이 노래가 나왔을 시절 그녀는 15살, 한창 감수성이 폭발하던 틴에이져 시절에 즐겼었을 만한 것이다. (대략 1960~1965년 생으로 베이붐 세대와 X세대 사이의 과도기적 특징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X-세대보다는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변화에 더 갈등을 느꼈을 수도 있을 세대다)
온갖 '힘듬'을 겪고 있는 이 와중에 이젠 자신의 자녀들 만한 나이였던 그녀가 즐겼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다니 그것은 얼마나 특별한 의미였으며 미치도록 흥겨운 것이었을까?
| 4. Omahony's Bar @ Prince Edward
인도계 힐러리의 백인계 영국 남편, 데이비드가 찾는 아지트는 그의 도피처이자 안식처로, 술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려는 장소다. 이 시리즈에서는 마가렛의 남편을 제외하고는 매력적인 남자 캐릭터가 전무후무하며, 그조차도 결국 무너져 내리게 되어 마가렛이 홀로 일어설 수밖에 없는 서사를 보여주는 장치로 한순간 전락해 버린다. 여러모로 전체적으로 이야기보다는 공간의 묘사만 돋보이는게 아쉬운 작품이긴 하다.
암튼, 다른 관객들도 저 아늑하고 멋진 바에서 한 잔하고 싶다고 나처럼 느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곳도 세트다. 위 쳉성찬텡이 외관은 현실을 빌렸지만, 이곳은 외부 '배경'만 현실이고 입구와 인테리어는 모두 CG와 세트다 (내부 인테리어는 어디서 찍었는지는 정확힌 모르겠지만 세트라고 하니 세트로 추정됨)
이 장소는 프린스 에드워드의 노라 로드와 Fa Yuen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구글 스트리트 뷰를 통해 어렵게 찾아냈는데, 처음에는 방문 의사가 없었지만 주변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곳이다. 후쿠오카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듯, 홍콩에서도 이런 뜻밖의 발견이 자주 일어난다. 이렇게 드라마 속 촬영지와 현실이 만나는 순간들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곤 한다.
시리즈와 실제 스트리트를 비교하면서 찾은 장소로, 데이비드가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너기 전 의료원과 거위 요리집요릿집 사인이 결정적인 단서였다 (참고로 노라 로드는 모르겠는데, Fa Yuen Street에 차는 못 들어온다. 데이비드는 노라에서 내리긴 했다). 오마호니 바는 바로 그 거위 요릿집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디테일한 요소들이 촬영 장소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현실과 드라마의 연결점을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이 되었다.
데이비드는 저 거위 집 쪽에서 내려서 중앙 빨간색 간판이 있는 곳 바로 오른쪽 유닛으로 걸어간다.
Fa Yuen Strret 거리 표지판과 겹치는 파란색 파라솔 지붕이 보이는데, 바로 그 뒷편이다. 어차피 바 자체는 CG라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그냥 동대문이나 남대문처럼 잡화를 파는 곳이다.
건너편 거위 요리집에 서서 찍은 사진. 파란색 파라솔 뒤 청록색 비닐 지붕 아래임. 재밌는 건 좌측의 시뻘건 사인인데, 뭔가 한중일 콜라보다. 메인 이름은 일본어로 써져 있는데 밑에 한자는 한국쇠고기 관련이다.
대만 베이스로 보이는 TYRO studio라는 곳의 페이스북에서 찾은 건데 여기서 세트를 작업한 모양이다. 인테리어까지 작업했는지는 모르겠고, 이렇게 외부 모습 작업 사진이 포스팅되어 있다.
사실 왠만한 덕후가 아니고서야 이곳을 시리즈 때문에 방문할 가치가 있어 보이진 않지만, 시장 특유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거리 자체로서의 방문은 추천할 만하다.
2017년 방문 당시 뜨거운 햇살 아래 엄청난 줄을 서서 지친 기억이 있어 처음 방문 이후 선택지에서 제외했던 한양식당. 옛날엔 욕지도에서 유일한 중식당으로 유명했는데 이제는 이 섬도 자본주의의 바람이 급속히 불었는지 중화반점이 두 개나 더 들어섰다.
리모델링을 했는지 파사드 모양새가 바뀌었다. 이렇게 건물의 옛 형태와 기억이 현재와 공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개인적으로 좋더라. (특히나 음식점은 터나 건물이 확 바뀌면 맛도 날아가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사실 처음 방문 당시 '섬의 유일한 중식당'이란 상징성 때문에 그런지 유명세에 비해 맛은 없진 않았으나, 이 고생까지 하며 가봐야 할 집인가 싶었다.
여행 오면 무조건 현지 토속음식이나 백반 메뉴 기준이지만 욕지도 오기 전 통영에서 해산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입가심할 겸 조금 색다른 게 당겼다. 욕지도 도착하고 장보고 새로 생긴 음식점 있나 잠깐 탐색했는데 사람들로 항상 붐비던 한양식당 앞이 썰~렁~ 했다. 영업 외 시간 빼고는 보기 힘들었던 풍경. 첨엔 욕지도에 중화반점들이 더 생겨서 손님들이 분산된 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이 식당 저 식당 가면서 들어보니 추석 연휴 동안 관광객들이 쏟아져 내린 직후 섬 전체가 조용해진 쿨 타임 상태였다고 한다. (기존 일찍 여는 집들도 조금씩 늦게 열더라...)
9:30부터 14:00까지 영업은 변함 없는데 저 웨이팅 리스트가 싹 비어있는 걸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욕지도 놀러 오면 오늘은 사람 얼마나 모였나 궁금해서라도 지나가는 곳인데 말이다.
자, 그럼 숙소에 짐 풀고 한 여름(?) 맑은 욕지도 해안드라이브 즐기며 한양식당이 위치한 욕지항으로 다시 출발~
코스는 대략 위와 같다. 욕지대송펜션에서 욕지면사무소 근처 주차장까지, 욕지일주로 5.8km 약 12분 소요되는 해안 드라이브. 영상의 시작은 바다가 잘 보이는 지점부터 (튜브 오리 캐릭터 지점)
입구도 좀 바뀐 것 같더만 안에도 쫙 레노베이션을 한 모양이다. 훨씬 청결해졌다.
이곳엔 펩시콜라, 칠성사이다, 밀키스와 탬스가 있다. 어디서 들은 소린데 유통회사 때문에 펩시콜라면 칠성사이다가 있고, 코카콜라면 스프라이트나 킨사이다가 있다고 한다. 한양식당 냉장고를 보니 칠성을 설치해서 그런 듯?
피크 시간일 12시 30분경에 방문했는데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어제까지는 손님들이 미어터졌었겠지? 여행할 때 이런 여유로운 분위기 너무 좋다.
이것은 메뉴판. 막걸리 반입금지 사인이 재밌다. 옛날엔 그냥 당연하게 짬뽕이랑 짜장면을 시켜 먹었기 때문에 메뉴가 옛날 그대로 인지는 모르겠다.
여기 온 이유는 통영에서 너무 많이 먹은 해산물에 대한 입가심도 있지만, 통영 숙소에서 우연히 본 김숙TV 한양식당의 잡채밥을 보고 궁금해져서다. 두껍고 질긴 당면 안 좋아하는데 비주얼만 봐도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당면이 맛있어 보였다. 다음 주문은 자장면과 짬뽕 중 고민하다가 짬뽕국물은 볶음밥에 나올 테니 짜장면으로 결정.
단무지 양파 먼저 세팅 되고. 접시도 클래식한 중국집 하얀 앞그릇에서 새 걸로 바뀐 듯하다. 검색 시 2019년까지는 옛날식 건물을 유지하고 있는 것 보니 2020년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온 듯? 욕지도 음식점 리모델링을 본 건 해녀김금단포차 이후 여기가 두 번째인 것 같다.
짜장면 도착.
바로 고추가루 투하하고 비빔 비빔~
하지만 비비고 맛본 후 탈락. 숨 가쁜 연휴 손님들 이후의 방전된 상태 때문일까? 음식이 좀 미지근했다. 그냥 그랬다. 옛날에도 이 맛이었나? 잘 기억나진 않는다.
잡채밥은 괜찮았다. 성공했다. 기대한 만큼이었다. 김숙티비 볼 때 상상했던 그 맛이었다. 부드러운 면에, 고기도 너무 헤비 하지 않게 적당히 섞여 있고 야채들 덕분에 식감도 좋고. 그냥 흰밥이랑 비벼도 괜찮고 달콤한 짜장이랑 셋다 같이 비벼 먹어도 괜찮았다.
여느 중국집 볶음밥 시키면 나오는 수준의 양의 짬뽕 국물도 괜찮았다. 갠적으로 파, 양파 같은 채소 많이 들은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이런 건더기들이 꽤 많았던 짬뽕 국물이랑도 같이 먹어주니 괜찮았다. 둘의 밸런스가 괜찮다! 짜장면을 시키지 말고 차라리 짬뽕을 시킬 걸 그랬나.
욕지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상업화되고 관광화되는 섬의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양식당의 리모델링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처럼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금단해녀포차처럼 리모델링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유지하며 현대적인 매력을 더해가는 곳들도 있다. 그러나 욕지도 곳곳에서는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녀촌 식당은 쯔양 같은 인플루언서의 영향으로 새로운 메뉴가 등장하며, 기존의 사랑받던 메뉴보다 더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욕지도 모노레일은 야심차게 시작되었으나 추락사고 이후 아직도 운행이 되지 못하는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기존 임도였던 도로들은 점차 아스팔트가 깔리고 있다. 그 와중에 자연재해로 인한 욕지일주로의 끊김은 동시에 여기는 자연 속 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또 상기시켜 준다. 과거에는 많았던 바닷가 포장마차들도 이제는 하나만 남아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다. 욕지도는 이러한 여러 변화를 겪으며 상업화와 관광화의 흐름 속에서 옛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방문 때마다 항상 관광화가 적당히, 적절히 된 곳으로 여겨졌었고, 그래서 항상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 여행은 여기도 특이점이 이미 찾아온 느낌이었다. 다만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그 아찔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수 없지 그런 것은. 어찌하였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모습이 교차하는 이 섬은, 매력적인 요소와 함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며 계속해서 생존하고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열혈남아> 촬영지를 따라 트레킹을 마친 후, 무이오(Mui Wo) 선착장 주변을 여유롭게 거닐며 아침 식사할 곳을 찾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른 로컬 카페, 카페 파라디소(Caffè Paradiso).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지만, 옛날 홍콩의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인테리어 때문이 아니라, 공간을 채운 사람들 덕분에 전해졌던 그 따뜻하고 반가운 느낌이었다.
아침식사 할 곳을 찾아 두리번두리번 동네 한 바퀴
그러던 중, 현재 오픈 중인 음식점 구글 검색에서 눈에 띈 카페 파라디소(Caffè Paradiso). 이름에서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이 떠올랐고, 영화 때문에 방문한 동네인 만큼 이 우연이 참 반갑게 느껴졌다. (참고로 이탈리아어에서 카페는 Caffè라고 한다.)
홍콩 감성 잔뜩 느껴지는 저 아기돼지 같은 핑크색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저 에어컨들은 볼 때마다 참 독특한 느낌이란 생각이 든다.
저 핑크아기돼지 빌딩 1층에 위치하고 있는 카페. 바깥에도 앉을 수 있는 2인석 테이블이 3개가 놓여 있다.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인다. 암튼 불투명한 문만 살짝 열려 있어 문을 닫은 줄 알았다.
문 앞까지 가까이 가보니 이렇게 앙증맞게 작은 오픈 사인이 걸려 있다. 암튼 열려 있으니 다행.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앙증맞은 오픈 사인처럼 카페는 작고 귀여운 공간이었다. 카운터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영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먼저 자리를 잡고 계셨고, 나는 제일 앞자리에 여유롭게 앉았다.
메뉴는 위에도 있고,
테이블 위에도 있다. 메뉴판에서 보이는 바다는 카페 바깥의 자리에 앉으면 잡히는 뷰다. (오전 8시 56분경 방문했는데,) 내가 얼리버드형 여행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침 7시 30분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이른 카페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손님이 많지 않아 실내를 둘러볼까 했지만, 워낙 작은 공간이라 복잡할까 싶어 그냥 눈으로 구경만 했다.
테이블은 몇 개 없었고, 공간은 작고 아담했지만 따뜻하고 아기자기 하고 소박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벽화 옆에는 강아지들 사진이 잔뜩인데 카페 배경 샷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곳을 방문했던 아이들인 것 같다.
그 옆으로는 한 때 가게에 진열되었을 것 같은 소품들과 뭔지 모를 책들,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건물에 속한 곳이라 루프탑은 없을 거고 뭔가 개인 공간인 것 같기도 한데 옆에 '계단 미끄러움 주의'라고 되어 있다.
카페 공간이 위에도 있나? 싶다. 인터넷 검색에서는 저 위로 올라간 손님의 사진은 찾을 수는 없었다.
여긴 카운터를 바로 마주 보고 있던 내 자리. 목제 의자라 그런지 작은 공간 속 편안함을 더해 준다. 2000년대 많이 즐겼던 칠 아웃 Chill Out 느낌이 솔솔 들기도 한다.
여름 특별 메뉴인지 수박 스무디와 함께 별도의 메뉴판에 나와 주문했던 프레시 레몬 소다($36)가 금방 나왔다. 설탕을 넣을 거냐는 질문에, 어제 미도카페에서 당을 너무 많이 섭취한 관계로 ''노 슈가"로 주문. 음료수 잔을 채우고 남은 탄산수가 같이 제공된다.
TMI: '창(Chang)'은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싱하(Singha) 탄산수와 마찬가지로 태국산이다. 역사와 판매량 면에서는 싱하가 훨씬 앞서지만, 창은 맥주와 함께 믹서로 즐기는 방식으로 나름의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싱하가 전통적으로 강한 탄산감을 자랑하는 반면, 창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덜 강한 탄산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갠적으론 라임을 선호하는데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더운 날씨에 상큼한 분위기를 더 해주는 노랑이 레몬도 좋다. 탄산수 방울이 뽀골뽀골 올라오는 게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괜히 혼자 흥해서 옆에 있는 만능 소스 HP소스랑 하인즈 케첩과도 줄 세워 사진 한 방 찰칵. 뭔가 부끄럽지만 나, 저 때 꽤나 신났던 모양이다.
레몬워터 마시며 더위를 달래며 주위 디테일도 조금씩 둘러본다. 스누피 캐릭터들이 은근 많이 보였다.
곳곳에 배치되어 은근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피겨들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고, 그 위에 또다시 작은 귀여운 소품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저 뒤에 찻잔과 접시 타일도 인상적이었다.
요번 여행 계획에도 없던 서양 메뉴. 그냥 이곳에 우연히 흘러들어와 홀린 듯 시킨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간촐하다. 여행이니까, 가공육도 그냥 먹고 ㅎ. 간단하고 담백했다. '미쳤다, 찢었다, 꼭 드세요 두 번 드세요, 무조건 드세요 외'의 맛은 아니지만 모나지도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맛이다. 서양식 아침 식사도 오랜만이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속속들이 손님들이 들어오며 자리가 채워진다. 대 놓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서 그냥 들리는 소리와 음식의 흐름을 타고 순간의 분위기를 즐겼다.
두 번째 손님은 발음을 들어보니 미국인인 듯했는데,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차림새를 보니 딱 란타우 섬에서 산행을 위해 온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 듯, 만나자마자 깨가 쏟아졌다. 접시의 반쯤 비우고 있을 때,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국인 손님이 들어왔다. 내 바로 옆 자리를 좀 써도 되겠냐고 영어로 점잖게 물어보셨다. 사람들과 마주할 때, 첫 말투에서 기품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참고로 이 아주머니의 유창한 영국식 영어 발음 때문만은 아니다!) 암튼 발음으로 보아 홍콩 캔토니즈로 추측되었다. 나는 옆으로 공간을 조금 내어드리고 다시 음식을 즐겼다. 이 분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독서를 시작하셨다.
그렇게 첫 번째로 아침을 드시던 영국 할아버지, 그리고 몇 안 되는 익스패츠(거주 외국인)와 관광객들이 묘하게 섞여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조용한 움직임과 대화가 만들어내는 이 공간의 분위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내 바로 옆 자리에 들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 주방에서 나는 음식 준비 소리, 영국 할아버지와 내가 먹으면서 내는 식기가 그릇과 부딪히는 소리, 선풍기와 에어컨, 이 모든게 만들어내는 조용한 엠비언스. 그리고 다른 테이블의 (아마도) 미국 손님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이 작은 공간에서 나는 묘한 감성에 젖어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리웠던 옛 홍콩의 바이브였다.
사실 홍콩 도심을 돌아다닌 첫날, 굉장히 놀랐던 건 공간 자체는 예전 그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론 사라진 것도 많았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오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언제나 예상은 현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반가우면서도 익숙한 그 공간에서, 이제는 예전만큼 광둥어를 듣기 힘들어졌고, 그 대신 만다린어가 더 많이 들려왔다. 그 변화가 신기하면서도 약간 어색하고 충격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홍콩에 살았던 옛 시절만 해도 중국 본토 출신 사람들은 마치 영화 <첨밀밀>에서 느껴지는 그런 낯선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본토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커진 듯, 홍콩 곳곳에서 만다린어가 들려오고, 본토 사람들도 많아지고,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겠지만, 그 변화가 확연히 느껴져 신기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왔다. 꽤 오랜 시간 이곳에 살았었기에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을 수도...
이번 여행을 하며 도심을 벗어나 외곽 지역으로 갈수록, 마치 옛날처럼 광둥어가 더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홍콩은 뉴욕의 멜팅팟과는 또 다른, 유럽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멜팅 팟이었다. 과거 식민지 시절 영국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영국인을 비롯해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여 살던 도시였다. 특히, 서양인 뿐만 아니라, 중국계가 아닌 다양한 동양인들 모두 어우러졌던 곳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익숙했던 그 느낌이 이 날 카페 파라디소에서 마치 축소판처럼 작게 다가왔다. 그 덕분에 옛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난 그 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바깥으로 나가보니, 야외 자리에 앉아있는 누가 봐도 일본인 같은 50대 초반의 아저씨가 보였다. 그 장면을 보며,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이게 바로 홍콩이지!'라는 생각이 또 한번 들었다. 참고로 야외 자리는 따뜻한 햇살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앉아있으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란타우섬은 예전부터 홍콩 도심의 번잡함을 피해 여유를 즐기려는 이들이 주로 찾기도 하고 자리를 잡기도 했던 곳이었는데, 지금도 그 특유의 분위기의 명맥이 이렇게나마 이어져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카페가 항상 이런 분위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우연히 찾아간 그 순간이 운 좋게도 모든 게 딱 맞아떨어졌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경험이 너무 좋아서, 만약 다시 란타우를 방문하게 된다면 꼭 한 번 더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이런게 바로 예상치 못했던 여행의 묘미 아닐지.
💡카페 정보:
카페는 무이워 선착장에서 도보로 근접한 거리에 있다.
홍콩 로컬 음식점 리뷰앱 오픈라이스에서도 이 카페는 매우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맛(Taste)과 가성비(Value)에서 만점을 기록하고 있고, 리뷰를 번역해 보면 인도, 페루, 탄자니아, 이탈리아 등 다양한 커피 원두 선택과 훌륭한 커피 맛에 대한 칭찬이 많다. 특히, 이곳의 편안한 분위기, 여유로움, 조용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발코니 밖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바다로 스며드는 흙탕물마저 운치 있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여행 중 내리는 비는 특별한 감흥을 준다. 차분하게 분위기를 잡아주고, 조금 더 깊숙이 그곳에 스며드는 느낌.
저 멀리 맹그로브 나무 하나가 바닷물에 잠식된 모습이 보이고, 바로 앞엔 하야 새 한 마리 (아마도 왜가리일까?)가 유유히 서 있다. 이 고요함이 좋다.
우산을 챙겨 들고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하러 타이오 마을 메인 시장 거리로 나섰다. 숙소 사장님이 건넨 우산을 쓰고,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옯겼다.
오늘의 목적지는 타이오마을 방문 전 찾아놓았던 화기찬실 (華記餐室).
가게 이름만 봐도 뭔가 로컬 감성이 물씬풍겨오는 이곳은 홍콩 어촌 마을의 소박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뭔 뜻인지는 모름)
홍콩감성 듬뿍인 입구. 찾아보니 화기찬실은 '화씨가 운영하는 식당'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고 한다.
오픈라이스에 따르면 아침 6시에 연다고 하니 꽤나 이른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시작된다는 뜻이 아닐까? 내가 방문한 시간은 8시 38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식당은 꽤 차 있었다.
맨 끝 구석에 2인용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나름 한적하고 식당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는 자리라 마음에 든다. 다행히 자리가 하나 남아있었다.
이 시간에는 아직 관광색이 없을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들은 거의 다 타이오 마을 로컬 주민들이 아닐까 싶었다. 내 주변은 이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나는 혼자 관광객으로 이방인의 묘한 기분을 느끼며 앉아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그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의 주문받기, 이제는 정겹다.
아침이라 속을 달래줄 국수를 시켰다. 원래는 피시볼을 시키려고 했는데 실수로 비프볼 누들 수프를 주문해 버렸다. 반반으로 시킬 걸 그랬나 싶었지만, 괜찮다. 홍콩 여행을 꽤 해 본 이들이라면 익숙하게 느낄 동네 차찬텡 같은 곳이다. 관광객이 없는 로컬 분위기 속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이 묘한 느낌이 좋다.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이곳에 잠시 소속된 듯한 그 기분.
곧 국수가 나온다. "너무 맛있어요!" "인생 맛이에요!" "무조건 드세요!" "찢었다!" 이런 건 오바고, 홍콩 어딜 가나 실패 없는 그 꾸준한 맛을 가진 그런 집인 것 같다. 국물은 구수~하고, 비프볼은 쫄깃쫄깃하며, 씹을 때 그 고소한 풍미가 좋다. 같이 나오는 아삭한 채소와, 건면 같은 그 질감의 면발, 사진에서 상상되는 그대로의 맛이다.
한국에서 칼국수 먹을 때 맑은 국물로 시작해 나중에 양념장을 넣어 맛을 변주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먹다가 매운 고추기름인 라유를 살짝 추가했다.
아... 라류의 기름진 매우맛이 입안에 훅 들어왔다가 금방 사라진다. 진리다, 라유는. (손 맛이 웬만큼 하는 집이라면) 홍콩 어딜가나 맛볼 수 있는 평균적인 홍콩분식 맛이지만,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없는 '동방불패' 같은 그 맛이다. 홍콩에서의 이른 아침, 로컬의 한복판에 앉아 느끼는 이 소박한 행복이 좋다.
만족스러운 아침식사 후, 다시 숙소로 향하며 오늘의 계획을 떠올린다. 숙소에 들려 준비를 하고 Fushan 파우산 뷰잉 포인트를 향해 가는 트레킹을 할 준비를 해야한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트레킹은 또 어떤 느낌일지 기대된다.
홍콩의 다채로운 시티스케이프를 담아낸 아마존프라임 시리즈, <Expats 주재원>의 주요 촬영지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마가렛의 집을 중심으로 한 랜선 투어 두 번째.
1. 가족과 사는 상류층 아파트, Bisney Crest @ Sandy Bay 2. 그 상류층 아파트의 인테리어 @ L.A. studio 3. 마가렛의 아지트, Mei Foo Sun Chuen @ Lai Chi Kok 4. 그 아지트의 인테리어, 59 Hill Rd @Shek Tong Tsui 5. 니콜 키드먼 촬영 중 숙소, Twenty Peak Road @ The Peak
3. 마가렛의 아지트, Mei Foo Sun Chuen @ Lai Chi Kok
극 중 니콜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움의 극치인 홍콩 더 피크의 집에 살면서도 혼자만의 아지트를 가지고 있다. 실제 촬영지는 라이치콕의 메이포선추엔 아파트 단지다. 재밌게도 더 피크가 상류층의 최고급을 상징한다면 이곳은 중산층을 위한 곳이니 마가렛(니콜 키드먼)으로서는 상당한 계급의 계단을 내려오게 된 셈이다.
그런 분위기에 있다 보니 더 피크에서는 아랫 사람에게 자상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모습이 여기서는 바뀌는 걸 목격할 수 있는데, 좋은 예가 작은 동네 마트에서 그녀가 취하는 신경질적 모습이었을 것이다. 최상류 층인 그녀에게 상대는 누가 봐도 (서양인 혹은 상류층으로서 동경의 눈으로 바라봐야 할 의무가 있는(?!)) 빈민이 아닌 이상 중산층이던 서민이던 뭐던 다 똑같아 보일 테니 말이다.
| 포디움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단지
그런 면에서 이 중산층 아파트 단지에서 실제 찍었다는 것도 꽤 재밌게 느껴진다. 이 곳은 99개의 타워와 함께 13,500 유닛이 들어선 홍콩 최초의 대규모 단지였다. 당시 세계 최고 규모급이었다고 한다. 그런 실제적 사실과 역사를 떠나, 가게에서 물건을 산 후 자신의 아지트를 향해 걸어가는 마가렛의 이동을 담아낸 일련의 신들에서 보이는 풍경들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위 이미지의 신도 마찬가지여서 찾아보았다.
메이푸선추엔 단지는 중간중간 많은 포디움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보통 건물의 저층부에 위치해 상업 시설, 주차장 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는 구조, 주거층은 그 위에 자리 잡으며 도시 밀집 지역에서 공간 활용도를 높인다) 다만, 저 공간들이 규칙적으로 많이 만들어져 있고, 건물의 형태와 색상 패턴도 꽤나 규칙적으로 보여 정확한 스폿을 찾기는 힘들다.
당연히 규칙적으로 지어졌을 99개의 타워들 안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자기 집 찾기 빼고는)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 영화 촬영지 구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보면 Glee Path를 따라가는 동선 어딘가로 보이긴 한다. 그 길의 단지 위성사진을 보면 비슷한 구조가 몇 개 보인다. (위 사진 핑크 표시)
| 보행자 다리
메이푸선추엔 신에서는 일단 마가렛이 아주 작은 피사체로 잡힌다. 이렇게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장면들이 특징적이다. 상류층 공간인 더 피크에서는 인테리어의 디테일이 강조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포디움과 마찬가지로 저런 다리 구조물들이 몇 개 있어 보인다. 구글 스트리트 뷰로만 검색을 하니 단지 내부는 (프라이버시 문제인 듯?) 거의 볼 수가 없어서 정확한 확인은 못하겠는데 추정하는 옵션은 두 개 정도 나온다.
1) Nassau ST. 쪽 단지
지도상으로 살펴봤을 때는 우측의 Lai Wan Rd에서 중앙의 Nassau St.으로 꺾어 들어간 후, 동그라미 표시된 영역 어딘가인 것 같다. 구글지도로는 저 보행자 다리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웹에서 따로 찾은 그 근처 사진 두 장과 비교해 보았는데 구조물은 얼추 비슷해 보여 가능성이 있다.
2) Glee Path 쪽 단지
Kawai Chung Rd. 를 중심으로 Nassau 쪽 단지 건너에 Glee Path를 가지고 있는 단지가 있다. (위에서 본 포듐 구조물이 있는 곳으로 예상되는) 이 쪽이 높은 확률로 촬영지일 것 같다. 이유는 메이포선추엔 외관 촬영신은 거의 다 이곳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가렛(니콜 키드먼)의 이동 동선도 얼추 맞아 보인다.
홍콩 부동산 사이트에서 찾은 사진인데, 오른쪽 가로등 배치와 육교의 모양, 그리고 오른 쪽 건물의 구조, 왼쪽 단지의 베이지베이지 브라운 베이지의 색상을 보건대 저기가 제일 비슷해 보인다.
| 마가렛의 아파트 현관
지도에서 표시된 Glee Path와 Kwai Chung Rd 사이의 쪽으로 보인다.
장을 본 후 집에 갈 때까지의 여정
가다가 오른쪽으로 바로 꺾어 들어가는 마가렛. 건너편에 도로와 건너편 단지가 보인다. 나름 여기가 도로변 단지 끝이라는 거.
극 중에서 담벼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고가가 있는 게 보이고, 잠깐 사이에 버스가 휙 내려가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Kwai Chung Rd, 대로변 세대인 것은 확실. 이걸 스트리트뷰를 통해 단지 밖에서 보면 위 정도의 위치로 추정된다. 근처에 딱히 포인트로 찍을 만한 곳은 1층에 위치한 養和堂涼茶館 (양화당량차관)이라는 찻집인데 그 위쪽으로 직접 가서 보면 정확히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
4. 그 아지트의 인테리어, 59 Hill Rd @Shek Tong Tsui, Sai Wan
마가렛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집 안 실내로 장면이 바뀐다. 창틈 창틈 사이로 보이는 주변 건물 모습의 단서로 메이푸선추엔 주위를 구글 스트리트뷰로 엄청 오래 찾았는데 다 헛수고였다. 당시 트위터의 니콜 키드먼 목격담 장소들을 하나하나 방문하다가 겨우 찾았는데 심지어 구룡도 아닌 홍콩섬 쪽에 위치한 59 힐로드 (59 Hill Rd)라는 곳이었다. 근데 힐로드는 홍콩역사에서 꽤 상징적인 이름이다.
이 쉑통츄이 힐로드 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콩대학이 위치해 있고, 1904년부터 1935년까지 홍콩에서 가장 번성한 홍등가 와 오락지구 중 하나였다고 한다. 대규모의 고급 매춘업소와 레스토랑, 극장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당시 홍콩 인구의 10% 이상이 관련 업종에 종사했다고.
장국영과 매염방 주연의 1988년 영화 <연지구 Rouge>가 당시 쉑통추이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로 저 지역 일대에서 촬영되었다. (극 중 매염방이 연기한 매춘부 '플뢰르'의 업소 위치도 함께 추가함.) 이후 1935년 홍콩에서 매춘은 금지되었고, 힐로드 지역 역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조용한 주거지로 변모했다.
마가렛 아지트의 실내 신에서 틈틈이 보이는 저 고가도로 이름은 Hill Road Flyover 힐로드 플라이오버다. 보기 드문 높이와 뱀을 연상시키는 커브 구간의 형태로 유명하다. 극 중 보이는 굽은 커브 부분과 하늘색과 흰색 조합의 옆 건물 모양을 보니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聖公會聖彼得小學 - 彼得樓라는 St.Peter's 초등학교의 피터 하우스라는 곳이다.
신나서 좀 더 나아가 본다.
자신의 아지트에서 오후를 보낸 마가렛은 저녁이 되어 더 피크에 있는 집에 가기 전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아파트의 저녁 풍경을 바라본다. 저 것 보다 훨씬 더 탁 트이고 멋진 뷰를 가진 고급스러운 빌라에 사는 상류층 아내 분께서는 무엇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던 걸까?
대략 이 방향으로 바라본 것 같은데, 바로 앞에 낮은 핑크색 빌딩은 힐뷰가든 (Hillview Garden)이고 그 뒤로 펼쳐진 고층 아파트 단지는 더 벨쳐스 (The Belcher's)의 블록 3~6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저것을 촬영한 곳은?
우측 상단 파스텔톤 건물인데, 없어졌다. 구글스트리트뷰를 보니 2022년까지는 존재했던 것 같다. 창문 쪽 형태들과 고가도로와의 위치, 뷰를 보면 저기가 맞아 보인다. 촬영팀에서 찾은 빈 아파트로, 벽을 허물어 스튜디오 아파트처럼 구성했다고 한다.
4. 니콜 키드먼 촬영 중 숙소, Twenty Peak Road @ The Peak
번외로, 촬영지 찾다 보니 발견해서 끼워서 같이 올린다.
니콜 키드먼의 촬영 중 숙소야말로 극 중 어느 집 보다도 더 럭셔리한, 그리고 실제 The Peak 더 피크에 위치하고 있다. (마가렛의 집 촬영지는 샌디베이였음) 지도를 보면 왼쪽 멀지 않은 곳에 홍콩 야경 구경으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피크타워가 위치한다.
지도를 더 확대해 보면 위치도 일반인들이 거의 근접하기도 힘들 프라이벗 한 곳으로 보인다. 원래 부호였던 어느 개인 사택을 허물고 새로 지은 곳으로, 매입 당시 평당 가격이 홍콩에서 4번 째로 비쌌다고...
인터넷에 나온 사진을 보면 저렇게 4개의 유닛으로 구성된 호화로운 고급 빌라다. 평수는 각각 약 111~195평 정도인 듯.
빅토리아 피크의 아름다운 뷰를 제공한다. 기본 정보는 아래 공홈에 있는데 아직까지 가격 정보는 안 올라오고 있다. 관심 있는 이들에게 따로 프라이빗하게 제공하는 것일지도? https://www.twentypeakroad.hk/
공홈의 평면도인데, 4개의 유닛은 Carlyle, Avalon, Napier, Webste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공홈 평면도에선 이 이름이 아닌 House 1,2,3,5로 되어 있어 어느 게 어느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4'자는 죽을 '사'와 관련되어 '5'로 표현한 듯)
"1號屋Carlyle"라는 문구가 인터넷 검색이 되는 것을 보니 House 1이 칼라일(Carlyle)인 것 같다. 니콜 키드먼이 묶은 유닛이 바로 칼라일이다.
팬데믹의 시작부터 홍콩내 서양인들(+부유&권력층)과 홍콩 원주민 간 마스크와 거리두기 실천 행동 관련한 갈등이 있었는데, 촬영을 위해 도착한 니콜 키드먼은 격리 규정 면제를 받았고 촬영 중도 마찬가지였던 같다. 바로 구설수에 올랐다 (아래는 관련 기사). 애초에 갈등과 대립이 존재했는데 이런 일까지 발생하니 분노가 폭발한 듯.그리고 실제 그녀가 머물렀던 숙소는 이 시리즈에서 나오는 어느 곳보다 더 고급스러운 빌라였는데 당시 매물로도 안 나와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Mui Wo 무이 워는 광둥어로 '메이 웨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북쪽의 Silvermine Beach 실버마인 해변과 함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던 곳이다. Tung Chung 퉁청 라인이 생기기 전까지는 홍콩 도심에서 이어지는 란타우섬의 각종 휴양지들로 이어주는 첫 관문이었다.
영화 속 장만옥과 유덕화가 홍콩 도심에서 오가던 페리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이다. 장만옥의 극 중 고향인 타이오 Tai O로 가는 첫 버스도 이곳에서 출발한다.
| 무이워 Mui Wo 버스 정류장
<열혈남아>에서 가장 유명한 공중전화 키스신의 포스터 촬영지다. 아마도 수많은 영화팬들이 여기를 방문했을 것이다. 비록 그 공중전화는 없지만 그럼에도 추억을 기리기 위해 가는 곳.
무이워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자전거들이었다. 불과 5천여명이 산다는 (그것도 2012년 기준) 작은 지역이니 주요 교통수단일만 하다. 현지 주민들 뿐 아니라 여행객 대여용으로도 보이는 수많은 자전거들의 주차장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렸을 적 이곳을 방문한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하도 오래전이라 이런 기억이 거의 없다.
무이워 선착장과 버스정류장은 짧은 거리로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영화 속 장만옥과 유덕화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다. 앞서 말했듯 홍콩과 란타우섬을 연결하는 유일한 관문인 만큼 유덕화에게는 비정한 거리를 벗어나 평온한 안식처를 찾는, 장만옥에게는 작고 답답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거점으로, 커플의 감정선의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다행히도 그 뒤로 보이는 굴곡진 계단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건물의 형태는 옛 영화 속 모습 그대로였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상상하고 왔지만, 주변에서 진행 중인 인프라 공사로 다소 번잡한 느낌이 들었다. 4박 5일의 홍콩 여행 내내 비가 많이 왔지만 이 시점의 날씨는 너무나도 화창해서 사진을 찍을 때 빛이 번져 나왔다. 그래서 나와서 한 컷 더 찍고 ㅎ, 암튼 이곳은 영화에서 너무나 자주 봤던 장소라 익숙함이 먼저 다가왔다.
| 영화 속 선착장 페리 출입구
영화 속에서 중요한 무대가 되었던 선착장 좌측 출입구. 배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오다 뒤를 바라보면, 유덕화와 장만옥이 서로를 기다리던 그 배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기둥은 영화에서 자주 봤던 것 같아서 같이 나오게 찍었지만,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센트럴에서 온 나는 오른쪽 출입구로 나왔지만, 영화 속에서는 항상 이 왼쪽 출입구가 등장한다.
| 공중전화 박스 터를 찾아서
그리고 키스신.
<열혈남아>의 팬이라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찾을 그 키스신의 공중전화박스.
영화 속에서 상징적인 장면을 연출한 그 공중전화 박스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이곳에 서면 여전히 그 장면을 떠올리며 영화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위치를 대략 추정해 보면,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 정도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통신사업자가 바뀌고, 공중전화의 색깔도 주황색에서 파란색으로, 위치도 조금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2016년의 구글스트리트 뷰에서는 저 PCCW 파란 색의 공중전화박스가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위치조차도 약간 애매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진 인도 코너와 비교해 보면, 공중전화 박스가 조금 더 내려간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카메라의 구도나 렌즈 왜곡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16년 PCCW 박스와 영화 속 HKT 박스 위치가 약간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70,80,90,00년대 옛 무이오 버스 터미널 사진을 한 시간 정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그 오렌지 공중전화박스를 담은 사진은 찾지 못했다. 위 1983년 버스 중 타이오 행 1번 정류장이 가장 끄트머리라 좀 만 더 오른쪽 샷을 담았더라면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증거나 단서를 찾을 수 없으니 아쉽다.
'54년에 홍콩에 처음 공중전화 생기고 특히 7,80년대에 들어 저변(공중전화박스) 인프라를 확장 시켰다고 하니 저 1983년 사진에 공중전화박스가 존재했을 만도 한데 말이다. (영화는 1989년)
참고로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오렌지 공중전화 박스는 홍콩텔레콤 시절 거고, 2000년 이후로 목격되다가 사라진 파란 색 공중전화박스는 PCCW 것이다.
선착장 앞에 있는 다른 공중전화 박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영화 속 공중전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형태는 같아도 색상과 로고가 바뀌었지만, 이곳에서 그나마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래 볼 수 있었다.
영화 속 공중전화 박스 추정 위치에 서서, 버스 정류장의 구조물들을 바라보면 그 허름한 모습 때문에 옛 흔적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아쉬움을 다시 한번 달래준다. 이따가 저기서 버스 타고 장만옥이 일하던 부이 오로 향할 예정이다.
|무이워 개선 작업으로 인한 변화
키스신 공중전화 박스 터를 지날 때의 느낌. 무이 워의 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라 공사가 한창이다.
이 공사는 무이워의 현대화 및 편리성 강화를 위해 계획된 것으로, 남북 워터프런트 산책로, 광장조성, 교통 개선, 공공시설 재배치 및 신축 등을 포함하고 있다. 2023년에 시작된 이 작업은 약 4.5년 동안 계속될 예정이다. 공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가 알던 <열혈남아> 속 무이 워 모습은 아마도 영영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영화 속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영화 속 무이워 촬영지 지분은 배경까지 잡더라도 위 노란 사각형 딱 저 정도다)
| 선착장 주변 산책 한바퀴
영화 속 무이워 선착장/정류장이 등장하는 횟수도 많고 그만큼 임팩트도 강하지만 실제 촬영 장소 반경은 아주 좁아 촬영지 순례는 생각보다 금방 끝난다. 대략 100미터 정도만 걸어도 모두 둘러볼 수 있을 수준인데 물론 그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또 다를 것이다.
계획보다 일찍 온 덕분에, 아침 식사 장소를 찾으며 선착장 주변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영화 속 버스정류장 뒤의 배경이었던 건물도 좀 자세히 살펴보고,
그 건물들 옆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경치도 느껴보고,
공삿길 위로 구도를 잡아보니 야자수들을 보며 열대 지방에 온 느낌도 들었고,
무이워 페리 피어 로드 쪽으로 들어가니 두기봉 감독의 액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집약적인 홍콩 감성의 건물 배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우리에게 익숙한 홍콩 택시는 빨간색인데, 이곳 란타우섬에서는 파란색 택시를 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에 주차된 것처럼)
란타우섬에서만 운행하는 이 파란 택시들은 현재 섬 전체에서 '24년 4월 기준 75여 대가 운행 중이라고 한다. (빨간 도심 15,250데, 녹색 뉴테리토리 2,838대) 다 고유의 운행 영역이 있는데 홍콩국제공항, 디즈니랜드, 홍콩 쪽 홍콩-주하이-마카오 브리지는 예외라고 한다.
홍콩의 간판과 도로 사인들이 건물 배경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감성은 언제는 나를 매료시킨다. 오래전부터 홍콩은 (조금 과장해서) 길을 잃을 수 없을 만큼 도로 표지판이 잘 배치된 도시로 평가받았었다.
코너 블록을 한 바퀴 돌면서 보니 공사가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저런 화살표 전광판 보니 또 괜찮아 보이고,
맑은 하늘아래 따듯한 오렌지 색조가 돋보여서 그랬는지 피자가 왠지 맛있을 것 같았던 음식점.
구글 지도에서 미리 보았던 바다를 바라보는 중국과 레게 느낌이 뭔가 대조적이었던 차이나베어 음식점. 방문 시 문은 닫아 있었다.
우와... 그리고 또다시 마주한 자전거들. 공사 때문에 다 밀려나서 이런 것 같은데 빡빡한 홍콩의 도심 건물 분위기가 자전거 공간에서도 느껴졌다.
블록을 돌며 보이는 무이워 선착장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이 여유로운 산책을 마무리해 갔다.
| 홍콩 로컬 바이브, 카페 파라디소에서 아침식사
구글 지도에서 근처에 실시간으로 열려 있는 곳을 찾아보니, 이름부터 시네마 천국을 연상케 하는 카페 파라디소 Cafe Paradiso가 눈에 띄었다. 느낌이 왔다. 이번 여행에서 홍콩 특유의 빡빡한 느낌의 건물 사진들을 특히 많이 찍었는데 그렇게 찍은 저 핑크색 아기 돼지같은 건물 아래에 위치했다.
요렇게. 카페는 거리 쪽으로 작은 2인용 테이블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처음에는 위 사진 같이 허~한 느낌이 들어 문이 닫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애매~해 보여 한 번 다가가 보았다.
냉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문이 아주 살짝 열려있었고, 작고 소심한 "오픈" 사인이 걸려 있었다. 오전 8시 30분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테이블에 영국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인테리어와 공간이 아주 작고 귀여운 카페였다.
아침부터 날이 더웠던 터라, 상큼한 레몬 프레시 소다(설탕 없이!)와 간단한 영국식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먹는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온 손님들로 작은 공간이 금방 채워졌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에서, 동양과 서양의 오묘한 조화가 느껴지는 옛날에만 느낄 수 있었던 홍콩의 로컬 바이브가 참 좋았다. 요즘 홍콩 도심은 너무 대륙인들에 의해 잠식되어 많이 변했지만, 이곳 무이워의 조용한 카페에서 옛 홍콩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힐링이 되었다. 이 경험이 너무 좋았기에, 나중에 이 카페에 대해 따로 포스팅할 계획이다. 만약 이 카페가 평행우주 선상에서 열혈남아의 타임라인 속에도 존재했다면 분명 유덕화와 장만옥도 이 곳에서 이국적인 자국의 홍콩 바이브를 흠뻑 느끼며 자신들이 아지트로 삼았지 않았을까 싶다.
카페를 나와 건너편을 보니, 또 다른 홍콩 특유의 건물, 혹은 아파트? 무이워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 다시 촬영지 순례: Pui O 부이오를 향해 출발
선착장 앞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눈앞에 펼쳐진 복합적인 바다 뷰가 좋았다.
또다시 마주친 수많은 자전거들이 아까 정박해 있던 페리가 떠나면서 더 눈에 띄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차이나 베어를 지나 멋진 느낌의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무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울창한 자신감을 뽐내며,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 나무의 위용을 보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공적인 마천루 대신 자연이 만들어낸 랜드마크 같았다. 검색해 보니 아마 망고 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그 나무 바로 옆에는 맥도널드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카페 파라디소의 평온함과는 달리 이곳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한 바퀴 돌아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유덕화가 장만옥을 만나러 가던 그 루트를 따라 부이 오 Pui O로 떠날 시간이다. 9시 20분 출발 버스를 타기 위해 9시 16분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3M 번은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운행되지만, 대략 아침 6시부터 밤 11시 45분까지 나름 좁은 간격의 시간대로 운행된다. 주말과 평일의 스케줄도 좀 다르지만, 구글지도나 아래 뉴란타우버스 홈페이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M 말고 다른 번호들도 간다)
3M 버스의 종점은 퉁청 케이블카 버스 터미널이다. 여기가 출발점이라 나와 또 다른 한 명의 승객뿐이어서 저 2층의 맨 앞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원래 부이오를 지나치려 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들르기로 했다. 하차 지점은 부이오 Pui O의 로와이춘 Lo Wai Tsuen이다. 유덕화가 실제로 내렸던 지점은 정식 버스 정류장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로와이춘과 선와이춘 Sun Wai Tsuen 사이다), 나는 유덕화가 내리기 직전 정류장에서 내려 장만옥이 일하던 (구) 시브리즈 레스토랑 Sea Breeze Restaurant이 있던 터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영화에서 잠깐 보였던 저녁 신에서, 장만옥을 만나러 가던 유덕화의 루트다. 영화 속 시절 버스는 1층짜리였지만 아무렴 어떠나, 길은 동일한 사우스란타우로드다. 가자고, 고!
나중에 무이워 벗어나기 전 찍은 건데 고프로도 정면에 설치 완료. 마을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많이 타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저 노랑 안전봉 밑으로 재배치함. 유덕화는 사이드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일치하는 구도는 아니지만 뭐 ㅎㅎ
아침 8시 14분에 도착해 9시20분의 버스를 타기까지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이 워에서 경험한 생각지도 못했던 힐링과 로컬 바이브의 카페 파라디소, 그리고 맥도널드 옆 망고나무의 인상적인 모습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종점에서 부이 오로 출발한다.
여행 중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에서 현지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런 상황도 여행의 큰 묘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홍콩 샤틴의 신흥 맛집, 테오추(치우차우) 비스트로 (Teochew Bistro 陳鵬鵬潮汕菜館 진붕붕 조산채관)를 소개한다 (아직 네이버나 티스토리에서도 리뷰가 안찾아진다는게 포인트!).
| 웨이팅 전 음식점 소개
평일 목요일 저녁 7시경, 사람들로 북적이는 테오추 비스트로 앞. 웨이팅 등록만으로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게 앞에서 이미 ‘이곳은 맛집이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왜냐면 주변에 좀비처럼 웨이팅 중인 사람들의 풍경 때문. 2024년 4월에 오픈했다는 정보가 있는데, 새로 생긴 맛집이라 그런지 인기가 대단한가 보다. 분위기는 고급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딱 캐주얼한 스타일. 접근성은 Shatin 샤틴 역에서 바로 연결된 Citysky 시티스카이 아케이드 7층이라 좋다. 다만, 침샤쵸이에서 조금 거리가 있다는 점은 미리 참고하는게 좋을 듯. 부모님이 "여기는 꼭 와야 한다!"며 데려간 곳인데, 거리가 있어도 자주 오신다고 한다. 역시 중화요리는 한 명이라도 더 해져서 여러 명이 먹어야 제맛!
홍콩 로컬 맛집 앱 , 오픈라이스(Openrice.com)의 평점도 괜찮다. 2900여 명 참여 5점 만점 중 4점.
말 그대로 기다림의 뜨거운 열기가 너무 핫한 나머지 중간에 지쳐 나가 떨어지는 팀도 많았다. 덕분에 생각보다는 일찍 들어갔지만. (6시 40분 즘 등록, 8시 45분경 입성, 두 시간 ㅜㅜ) 전광판 하단 공지를 보면 음식이 불만족스러우면 환불 보장이라는 것 같은데 맛에 자신은 있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도 기다리나.
메뉴에는 당연히 화려한 소개글들이 있는데 번역해 보니 대략 광둥성 치우차우 식 요리집이다. (潮州를 읽으면 한국어로 '조주', '치우차우'는 광둥어 발음, 그 지역권 사람들의 민남어 발음은 '테오추'라고 한다. (나무위키보니) 그 지역 사람들은 만다린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만다린 발음은 차오저우 임)). 암튼 음식점 시그니처 메뉴는 거위요리와 치우차우 식 죽이다. 메뉴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 쉐프관련 '20 프랑스 푸아그라 대회 아시아 지역 챔피언 - 음식점관련 '17년 중화 치우차우 요리 조림거위(직역함) 왕 경연 대회 선정 - 홍콩 치우차우 요리 대회 은메달
암튼 추가 설명까지 요약하면 '16년 탄생한 정통 조주(潮州 치우차우) 식 요리 체인으로 중국 본토에 30개 직영점이 있는데 이번에 홍콩점을 열였고, 마카오점도 열 계획이라고 한다.
단거는 안 먹는 편이라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그 밑에는 달달한 디저트 메뉴를 따로 소개하고 있다. 대만식과 차오산식 그리고 커스터마이즈 할 수 있는 추가 재료들. 潮汕 Chaosan 차오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데, 조주(潮州)는 도시 이름으로 보면 되고, 조산(潮汕 차오산)은 조주와 인근 한 산터우 지역을 모두 포괄하여 부르는 지역 이름이라고 한다. (TMI..ㅜㅜ)
| 가게 내부와 주문
내부공간이 작은 건 아닌데 중국 요리집치고는 또 아주 큰 편은 아니다. 오픈한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청결도는 좋다. 서버 분들은 식당 마스코트처럼 저래 다 흰 티셔츠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메뉴판이 있긴 한데 웨이팅할 때 간이식 종이 메뉴판을 들고 와서 따로 찍진 않았다. 영어 이름이 없는 건 아쉽지만 관광객 용이 아닌 로컬 음식점이라는 느낌을 확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요리들이 사진이 포함되서 번역기도 잘 돌아가는 요즘 세상, 음식 선택은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최고의 난관은 주문 시점인데, QR코드 주문이 기본이다. 위와 같이 위챗, 인스타 등의 앱 QR로 연결하면 스마트 폰에서 메뉴 선택하고 바로 주문하는 방식이다. 우리도 처음에 시도했다가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그냥 웨이트리스 분께 구두로 주문했다. 중간에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놀라면서도 호감적이더라. 특히 만다린으로 주문하니 더 놀라워함. 요즘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서 인종차별 난무하던 옛날 옛적이랑 달리 어딜 가더라도 온도 차이를 크게 느낀다. 암튼 말 안 통하면 대충 사진 가리키며 주문하면 될 듯.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국음식점 주문과 서빙 시 특유의 그 '퉁명스러움'이 전혀 없었다 (익숙해서 별로 상관은 안하지만 ㅋ). 국내 패밀리 레스토랑의 업! 텐션 수준은 아니더라도 매우 친절하다. 뭐 이 정도 수준의 프랜차이즈면 당연한 거긴 하지만 ㅎㅎ.
자리의 기본 세팅. 저 모래시계는 전광판에서 본 그 30분 이내 요리가 안 나오면 돈 안받습니다를 실천하는 모습이다. 해보진 않았는데 재미 삼아 주문하고 시계 돌려놓으면서 가게 내부 풍경도 보고 메뉴도 보면서 기다리면 될 듯.
뭔가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마케팅을 자신있게 설계한 느낌이다. 냅킨 통에 써져 있는 걸 보면 아래와 같다. (번역기 돌린 후 요약)
1. 서비스 요금 없음 2. 식사 전 간식비 안 받음 3. 차 제공하는 자리 비용 안 받음 4. 30분 넘어 나온 요리 비용은 안 받음 5. 맛 없으면 돈 안 받음 6. 식사용 종이 냅킨 돈 안 받음 7. 생수 요금 안 받음
냅킨이 없어서 얘기하니 저 냅킨통을 준 다음 미니 포켓 티슈에서 휴지를 뽑아 꽂아 준다. (포켓 티슈 이미지는 음식점에 쓰는 거랑은 상관없이 인터넷에서 퍼 온 거임)
| 식사, Go!
먼저 주문하기 전에 자리 앉으면 바로 나오는 무료 식전(?) 디저트, 肚臍餅(두제빙). 너무 달아서 한 입만 살짝 베어 맛만 봤다. 비주얼에 딱 보이는 바삭+달달 맛이다. '배꼽떡'이란 건데 차오산 지역에서 유명하다고 한다. 이름은 그냥 배꼽 모양 닮아서 그렇다고 ㅎ. 바삭한 껍질과 얇고 부드러운 흑설탕 필링에 씹으면 질긴 질감이 특징이라고 한다. 단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맘에 들 듯하다.
먼저 나온 거위요리. 원래 시그니쳐는 '金獎卤鹅拼盘 골드메달 거위조림 모둠'인 것 같은데 다른 요리들도 같이 시키다 보니 반반 소짜 느낌의 상등급 부위를 시켰다. 개인적으론 이 날 최고의 맛이었다. 원래 홍콩 오기 전 스트리트 음식 같은 느낌인 하이난 식 치킨 볶음밥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닭도 아닌 심지어 거위로 대체한 날이었다.
'大대.만.족.'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는데 식초 베이스의 저 산미가 풍부한 소스와 찍어 먹으면 기름진 거위의 풍미를 느끼하지 않고 오히려 풍미를 더해주는 판타스틱한 맛이 난다. 특히 상부라 그런지 거위목도 나왔는데 뜯어먹는게 그 식감이 감히 치킨 목살 뜯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고기 밑에 두부도 같이 나오는데 부드러우니 어르신들 먹기도 좋고 맛이 좋다.
그리고, 우리나라 물가가 너무 올라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홍콩달러 98불 (약 1,7000원)인데 서울에서 좀 비싼 냉면 한 그릇 값이다. 이 가격에 이런 맛과 양이라고? 혜자다.
다음에 또 갈 기회가 있다면 오른쪽 상단의 저 모둠을 시켜보면 아주 좋을 것 같다. 거위 고기, 날개, 두부, 달걀 포함이다.
다음은 또 하나의 시그니쳐이자 부모님의 페이버릿, 여긴 이거 먹으러 오신다는, 나무 국자가 인상적인 '조산식 해산물 사골죽 (潮汕砂鍋粥)'이다. 죽이다 보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한테도 부대끼지 않는 소화는 물론 맛까지 모두 커버해 줄 수 있는 기특한 맛이다. 부모님 원픽이라 2인분 시킴. 새우, 바지락, 바닷가재, 게, 굴 등이 들어간 죽인데 굴 맛에 따라 비리게 느낄 수도 있다. 저건 날에 따라 호불호가 있는 듯하다.
다음은 죽과 딸려 나온 피시볼과 비프볼. 와.. 이것도 짭짤 구수 쫄깃~하니 괜찮았다. 술 마시고 싶은 욕망을 뜨거운 차로 다시 쭉쭉 누르며 한 입식 베어 먹어 본다.
비프볼과 피시볼 안의 모습. 이거 먹고 다음 일정인 타이오 어촌 마을 가서 꼭 먹어야 한다는 대왕피시볼 못 먹은 걸 지금까지도 후회 안 하는 이유다.
이어 나온 小吳烤蝦 소이 구이 새우. 코코넛과 함께 구운 거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짜지도 않았고, 이미지에서 보듯 쫄깃하고 바삭한 식감이 좋았다. 일본 식 꼬치와는 또 다른 중국식 꼬치의 맛깔스러움.
그리고 다음 대망의 피날레 장식할 부모님의 두 번째 페이버릿, 제철 해산물을 강조하는 향기로운 팬에 구웠다는 향전창어(香煎鲳魚). (장어 아님! '창'어임)
비주얼만 봐도 빠삭+꼬소~함이 느껴진다, 근데 또 부드러움. 저 작은 파들은 살짝 올라가 있지만 생선튀김 곳곳에 그 상큼함이 배어 있다. 머리와 꼬리는 가장 중요한 분에게 드리는 법.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아주 맛있게 드셨다. 그만큼 튀김의 내부는 또 부드럽다는 반증! 올때마다 해산물 사골죽과 함께 항상 드신다는 메뉴. 먹을 때는 병어라 하셨는데 포스팅할 때 메뉴 보니 창어라고 써져 있어 뭔가 헸다니 병어다. 병어튀김.
여기까지가 세 가족이서 정말 배부르게 최선을 다해 먹었던 음식이었다.
가족식사란 불편한 것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소중한 것인 것 같다.
기.억.
| 음식점 메뉴
과대광고에 솎을 때도 많지만 사람 많은 곳엔 이유가 있다고, 정말 맛있었던 한 끼였다. 메뉴는 위와 같다. 스마트폰 번역기 돌려 보면 될 듯. 아쉽게도 홍콩김치처럼 먹는 초이썸 같은 야채볶음 메뉴는 없었다. 그래도 행복했던 가족 저녁식사. 이거 먹고 완차이 숙소 돌아가 원래 계획했던 일정 다 취소하고 포만감에 휩싸여 바로 잤다. 그 다음 날은 란타우섬 행.
| 위치.location
음식점의 위치는 아래와 같다. 구글지도 링크.
一期7樓703A號舖, 新城市廣場, 18號 Sha Tin Centre St, Sha Tin, 홍콩
홍콩을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침샤쵸이의 MTR 지하철 역 기준으로 샤틴 Shatin 역까지는 약 25~30분이 소요된다.
포스팅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마찬가진데 샤틴역에서 구글 길 찾기를 찍으면 저렇게 밑으로 쭈욱~ 8분 도보로 돌아가라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지도 자세하게 보면 샤틴 역에서 스카이 시티로 바로 이어지는 길 하나가 보일 것이다. 그 길로 조금만 가면 바로 시티스카이 아케이드로 이어진다. 대충 근처 엘리베이터 찾아서 7층으로 가면 된다.
이 스카이시티 아케이드가 지어지지 얼마 안 되었는지 엄청 크고 깨끗하다. 음식점 가서 웨이팅 등록하고 그냥 이것저것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웨이팅 등록하고 30여분 지나면 모두가 좀비가 된다. 주위에 앉을 곳이 있긴 하지만 모두가 좀비처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도 유명한 제이드 가든도 여기에 고급스럽게 자리 잡고 있기도 하고, 여기저기 음식점이 많다. 우리도 기다림에 지쳐 여기 갈 뻔했었다.
| 번외, 이후
그렇게 길고 지치던 기다림도 잊혀주게 한 맛. 특히나 오랜만의 홍콩에서의 가족 식사여서 더 특별했던 하루였다. 하지만 몸이 지치기에 향후 취소한 일정들이 있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몸이 너무 힘드니 홍콩 지하철 MTR 고급석 타기로 했다. 자리가 편하다. 부모님은 먼저 내리고 나는 뷰 좀 잡아보려고 따로 잡은 숙소인 완차이 쪽, 애드머랄티에서 내린다.
여기서 택시 잡고 호텔 가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제2의 고향 홍콩을 방문하고 새삼 느꼈던 것이 왜 이리 택시 잡기가 힘든가!
어케어케 택시 잡고 숙소로 돌아온 후 대충 사진 좀 찍고 이내 잠들었다. 다음 날은 아침에 바로 배 타고 란타우 섬으로 가는 일정.
1989년, 유덕화와 장만옥이 주연을 맡고, 왕가위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영화 <열혈남아 As Tears Go by>는 당시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시절, 관객들은 오우삼의 <영웅본색> 같은 화려한 액션과 낭만이 가득한 홍콩 누아르에 열광하고 있었지만, 왕가위 감독은 좁은 공간과 촉박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1997년 중국 반환을 앞둔 불안한 홍콩의 정서를 담아, 전혀 다른 느낌의 느와르를 선보였다.
| 캐릭터들의 끊임없는 충돌과 그것을 바라보는 감독
<열혈남아>는 로맨스와 액션 느와르를 절묘하게 섞어냈지만, <영웅본색> 같은 비장미 넘치는 액션신이나 화려한 서사는 없다. 대신, 불안함과 고독으로 가득 찬 인물들이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갈등의 파장이 전개된다. 이는 당시 홍콩 사회의 불안정한 분위기를 반영하며, 영화 전반에 걸쳐 어둡고 섬세한 감정선을 유지한다.
| 란타우섬과 홍콩 도심의 몽콕
영화 속 배경은 크게 두 개로 나늰다. 하나는 몽콕을 중심으로 한 구룡반도의 복잡한 홍콩 도심, 다른 하나는 자연과 시골의 느낌이 살아 있는 란타우섬이다.
몽콕은 홍콩 누아르 영화팬들에게 매우 익숙한 상징적인 배경으로, 뒷골목 인생의 무대이자 갈등의 중심지로 곧잘 묘사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원제인 <旺角卡門 왕각가문> ('몽콕 카르멘')에서도 이 지역의 상징성이 드러난다. 몽콕은 헛된 꿈과 갈등, 외로움과 소외가 교차하는 복잡한 현실을 담아내는 공간으로,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고단한 삶의 무대를 제공한다.
반면, 란타우섬은 홍콩에서 가장 큰 섬으로, 도시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의 평온함이 가득한 곳이다. 아화(유덕화)와 아오(장만옥)가 홍콩 도심과 란타우섬을 오가며 끊임없이 만남을 이루는 이 섬은, 장만옥에게는 과거와의 연결, 둘에게는 정체성의 회복, 안정과 평화 및 암울한 운명 속 소박한 희망과 미래의 꿈을 제공하는 상징적 장소로 작용한다. 어쩌면 이 섬은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이상향 같은 곳이었지도 모르겠다.
| 열혈남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홍콩에 살았을 때는 도심의 매력적인 풍경에나 익숙했고, 란타우섬은 주로 학교 소풍이나 단체 야유회로 가는 낯선 공간이었다. 어딘지도 기억도 안 나는데 끽해봤자 디스커버리 베이 정도였을 듯하다. 홍콩에 다시 방문한 이번 여행에서 나는, <열혈남아>의 란타우섬 촬영지를 따라 여행의 대략적 동선을 짜고 싶었다. 도심의 화려함보다는 잘 가보지 않았던 홍콩의 자연 속, 영화 속 공간의 의미도 되새길 겸.
| 그날의 루트: 무이오와 타이오 마을 ft. 옹핑
실제로 영화 속에서 아화(유덕화)와 아오(장만옥)가 도심에서 섬으로 이동했던 루트를 따라가 보았다. 홍콩섬 센트럴에서 무이오(Mui Wo) 선착장까지 페리를 타고, 아화가 섬에 도착해 아오를 보러 갔을 무이오에서 푸이오(Pui O)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아오(장만옥)의 고향으로 묘사된 타이오(Tai O)까지의 여정을 경험하며, 영화 속에서 볼 수 없었던 작은 순간들을 마주한 나만의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영화에서 이 촬영지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연속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즉, 란타우섬 자체가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는 상관없이, 아오(장만옥)의 고향을 상징하는 하나의 작은 세계인 것이다.
위는 란타우섬에서 치료를 위해 구룡에 사는 사촌오빠 유덕화를 처음 만나러 가는 장만옥의 페리 신이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이 페리를 수 없이 타고 다녔을 것이다. 센트럴에서 무이오로, 무이오에서 센트럴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서로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요동치는 감정의 빌드업, 그 격한 감성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만국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다만 저 신은 영화 초반이라 그런 느낌은 없는 걸로...)
그들이 오갔던 이 길을 따라가며 영화 속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 페리로 떠나는 란타우섬
지난 저녁 만찬의 후유증으로 일찍 폭잠들기 전 설치 해둔 고프로로 찍은 타임랩스 영상. 왼쪽에 우뚝 솟은 것이 구룡반도 쪽 몇 안 되는 초고층 마천루인 M+뮤지엄 빌딩.
오늘도 5시에 일어나 충분히 씻은 다음 란타우섬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위는 아침 6시 50분경 18층 하버뷰의 구룡반도 쪽 뷰다. 도심이라도 이른 시간이다 보니 평안해 보인다.
아침 7시경 체크아웃, 프론트에 택시 잡아 달라고 했더니 불러 주는 건지 알았건만 컨시어지 분이 그냥 같이 도로에 나가서 대신 손 흔들어 주는 거였다ㅎ. 완차이에서 센트럴로 가는 택시가 너무 안 잡혀서 그동안 찍어본 사진.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다들 승차 거부. 배가 7시40분 출발이라 나름 여유 있게 나온 건데 슬슬 쫄리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7시 37분에 도착. 이미 Mui Wo 무이오 행 고속 페리는 정박해 있었다. 저거다 싶어 선착장 확인도 안 하고 최대한 빨리 걸어간다. (내가 뛰지를 못 한다 ㅜㅜ) 유덕화는 장만옥을 만나기 위해 뛰었겠지만, 나는 페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출발 3분 전 ㅜㅜ) 참고로 센트럴 무이오 간 Sun Ferry 페리 시간표는 아래서 확인하면 된다. 주중, 주말 그리고 시간대별 약간 차이가 있다. (쾌속선/일반선 및 승강장)
책가방 하나만 매고 다니는 여행이라 숙소를 떠난 8킬로 완전군장 상태라 좀 앉았건만 바로 게이트가 열린다. 시간은 7시 40분 정각. 칼이다. 섬 방향이라 그런지 놀러 가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밑은 이 고프로로 찍은 타임워프 영상. 사실 이 고프로 장비들 때문에 책가방 무게가 항상 많이 나간다...
갑자기 소풍 가는 어린애 마냥 마음속이 설렘으로 가득 찬다. 정말 오랜만에 타 보는 페리, 홍콩 3일 차에 드디어 실행하는 열혈남아 루트에 맑은 하늘까지.
영화시작 홍콩으로 가는 장만옥과는 반대 루트지만 같은 방향의 창가다. 센트럴에서 무이 오 피어까지는 약 15km. 쾌속선으로 약 30~40여분 걸리는 거리다.
그러고 보니 이번 홍콩 여행에서 타는 첫 번째 페리였고 (마지막 날도 페리 타려고 했으나 폭우 경보로 못 탔다) 마지막 페리였다. 홍콩 살던 시절엔 그렇게 지겹도록 타던 페리였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설렘 가득하다. (옛날 보다 페리 운항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결은 다르겠지만 장만옥의 컴백 삐삐를 받고 센트럴로 왔다가 다시 페리 타고 돌아가는 유덕화의 마음도 이렇게 콩닥콩닥 뛰었겠지?
페리가 출발을 위해 후진 회전하며 보여지는 풍경. 왼쪽부터 노먼 포스터 경의 HSBC빌딩, 피어스 브로스난의 미니 시리즈 <노블하우스>로도 유명한 1970년대에 지어진 동그란 구멍들이 인상적인 자딘 하우스 (Jardine House), 그리고 가운데 우뚝 솓은, 현존 홍콩 두 번째로 높고, 세계에서 11번째로 높은 세자 펠리의 IFC 빌딩.
홍콩 반환이 1997년이었는데 IFC 빌딩의 준공도 1997년에 시작되었다. 배트맨 다크나이트와 트랜스포머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빌딩이다.
전 날 폭식으로 인해 저녁 일정을 홀라당 날려 먹었는데, 그중 하나인 AIA 대관람차를 눈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잘 안 쓰는 수퍼슬로우 모션 모드로도 찍어 보았다. 뭐 배 안에서 할 일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ㅎ
쾌속선이라 그런지 한번 속력내니 쭉쭉 잘 나간다. 다른 페리도 금방 따라잡는다.
이제 막 도심의 경계에서 막 벗어나려고 하는 느낌이다. 열혈남아의 유덕화도 자신의 보금자리 같은 란타우 섬의 장만옥을 만나러 갈 때마다 그런 속세를 벗어나는 듯한 안정감과 평안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여행 내내 비가 많이 내렸는데, 이 여정만큼은 맑은 하늘이 반겨준다.
장만옥이 홍콩으로 넘어갈 때 데크에서 섬을 바라보는 신이 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하면 그 섬이 Sunshine Island 선샤인섬이라 추측하고 있다. 위 사진은 영상 찍으면서 선샤인 섬이 찍힌 장면이고, 우측 하단은 장만옥과 내가 서로 반대로 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해 비교를 위해 좌우 반전 시킨 영화의 신이다 (사람은 장만옥). 뒤에 섬 배경이 보이는 것이야 영화 구도 차이를 감안할 수는 있겠다만 저 선샤인섬이 영화의 그 섬이 맞는지는 확정은 못 하겠다. 다만 페리의 루트의 지도를 보면 어느 정도의 규모의 섬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높은 확률로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너무 신난 나머지 좌석에만 있었던 게 좀 아쉬울 뿐이다. 저렇게 데크에도 좀 나가볼걸...
Hei Ling Chau (喜靈洲) 섬일 텐데 도시에서 벗어난 느낌이 확 온다. 무이 오에도 도착이 얼마 안 남았다.
중장거리 쾌속선이라 그런지 홍콩 도심을 왔다 갔다 하는 일반 페리와는 구조가 다르다. 안전 때문인지 일단 창으로 다 막혀 있음. 반대쪽 자리도 볼거리가 많던데 사진을 찍은 시점 상 보니 청차우섬 바로 전의 가우이차우 섬 같다.
드디어 란타우섬 무이오 Mui Wo 선착장에 도착한다. 홍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 파스텔 색상은 항상 정겹다.
나무들은 열대야 느낌도 나니 뜨거운 아침 태양 아래 도시탈출 분위기는 흠뻑 느껴지고, 저 고깃배(맞겠지?) 또한 감성을 더해준다.
자리 창가 사이로 보이는 무이오 선착장의 건물들 모습. 유덕화가 장만옥을 붙잡고 포스터에 나오는 키스신을 찍은 그곳이다. 다만 나는 그럴 일은 없기에 여기에서는 또 어떤 여행의 기쁨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페리가 정박을 위해 잠깐 대기 타고 있는 중. 빨리 내리고 싶다 ㅎㅎ. 영화 속 유덕화 캐릭터도 이 시점에선 정말 미쳐 돌아갔을 것이다. 잠깐의 저 정박하는 시간이 여기를 오는 시간보다 1,400만 6천500백 배는 더했을 것이라. 이 배를 내리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인생의 구원자, 내 사랑, 장만옥이 기다리고 있기에.
바보 같이 이전 글을 삭제해 버려 다시 제작한 관계로 Pt.1과 Pt.2의 포스팅 순서가 뒤바뀌어 있음
최근 홍콩의 낭만적인 시티스케이프를 담아낸 아마존프라임 <Expats 주재원> 촬영지 찾아서 (랜선으로...) 두 번째는 마가렛 (니콜 키드먼 분)의 집들이다 (편의 상 니콜이라 부르자). 그녀의 집들은 다음과 같다. 원래 가족과 사는 상류층 아파트, 그 집의 인테리어, 니콜의 아지트, 그 아지트의 인테리어, 마지막으로 니콜 키드먼이 촬영 중 진짜로 묵은 집. 총 5개.
1. 가족과 사는 상류층 아파트, Bisney Crest @ Sanday Bay 2. 그 상류층 아파트의 인테리어 @ L.A. studio 3. 니콜의 아지트, ***** 4. 그 아지트의 인테리어, ***** 5. 니콜 키드먼 촬영 중 숙소, *****
1. 가족과 사는 상류층 아파트, Bisney Crest @ Sandy Bay
Ep.1의 타이틀인 'the Peak'는 탁월한 뷰를 자랑하는 오래된 홍콩의 상류층 아파트와 빌라가 모여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의 시작이 뭘 의미하는지는 뻔하다. 다만 아파트는 더피크에 있지 않다. 위 사진은 마가렛 (니콜)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힐러리가 근처 조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이다.
이 곳은 홍콩섬 서 쪽 샌디베이의 비즈니 크레스트 Bisney Crest라는 곳이다. 극 중 간판은 책과 같이 'Manors', 그리고 소유주인 'Chinachemp Group'의 로고도 볼 수 있다. 아마 오프닝의 조깅신은 홍콩 도심이 보이는 더 피크 쪽에서 찍은 것 같고 요 올라오는 신부터 이 비즈니 크레스트 지역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힐러리가 입구를 통해 현관을 들어가는 모습이다.
이 역시 구글지도로 줌인하여 확인해보니 입구 형태가 동일하다. 여기가 맞다.
심심해서 좀 더 찾아보았는데, 이 곳은 홍콩섬 서쪽의 란타우섬과 남서쪽의 라마섬 (주윤발의 고향이기도 함) 사이 방향의 탁 트인 오션뷰를 자랑한다. 정확한 지역은 Pok Fu Lam이다. 제일 좋아 보이는 160여평 형 가격을 보니 현재 기준 HK$199M (약 338억원)이다.
지도를 살펴보니 독채 6개 그리고 19의 유닛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나마 제일 작은 평 수인 45여평 (1630sqft)은 뷰는 보장이 안되는 것 같고 한화 약 71억 정도로 독채보다는 훨씬 저렴(?)하다.
2. 그 상류층 아파트의 인테리어 @ L.A. studio
2021년에 촬영한 이 시리즈는 홍콩의 2014년 감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공간들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극 중 배경으로 자주 나오는 2014년의 홍콩 우산혁명과 이야기의 동선을 맞추고 싶었었기 때문일거다. 당시 주요 시위 지점들인 몽콕, 센트럴, 어드미럴티, 코즈웨이베이를 봐도 시리즈에서 서사가 펼쳐지는 공간들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아파트의 외부, 그리고 내부 중 복도 신 까지는 비즈니 크레스트에서 찍은 것 같다. 하지만 내부는 미국 L.A.에 만든 스튜디오 세트다. 이렇게 까지 공들여 실제 인테리어 세트를 만든 것을 보면 뭔가 촬영 스태프들의 기준에 맞는 하우스 인테리어를 찾지 못한 것 같다. 스쳐가듯 읽은 기사에서 촬영 로케를 위해 방문한 홍콩 고급 주택지들의 인테리어들이 좀 올드해서 스튜디오 셋을 진행했다는 인터뷰가 얼핏 기억난다. 그들이 생각한 2014년 홍콩 상류층의 공간의 감성이 무엇일지는 이 세트 안에 표현한 것 같다. 사실 2014년의 홍콩은 잘 모르기 때문에 공감은 잘 못하겠다.
그럼 나중에 목사가 집으로 찾아와 감탄한 "멋진 뷰~"는 어떻게 재현했을까. 바로 위처럼 360도로 파노라마 배경 사진을 깔았다고 한다. 하여 우리는 이 곳을 방문할 수는 없다.
시리즈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아마'를 다뤘다는 것. 아마는 광둥어로 ' 阿媽'의 발음으로 직역하면 '어머니'이지만 보통 가사 일을 돌보는 식모들을 말한다. 공식적으론 Helper 헬퍼라고 부른다. 현재는 '가사도우미'라는 표현도 있지만 '식모'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모습들을 봐온지라... 지금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다. 주로 필리핀 출신들이다.
홍콩의 일요일에 센트럴과 같은 지역을 가면 호화로운 호텔이나 럭셔리 매장들을 배경으로 널판지를 피고 옹기종기 모여 하루를 보내는 필리피노들이라는 참 대조적이고 모순적인 구도의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처음 보면 충격이고, 살다보면 익숙해지는 풍경이다.
보통 주중에 가사도움 생활을 하고 매주 최소 하루는 1일 유급 휴가를 가지게 되어 (주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쓰게됨) 나와야 하나, 딱히 묵을 곳은 없어 주로 센트럴 쪽에 서로 모여 이야기하고, 놀고, 노래부르고 하는데 솔직히 뭐랄까.. 밖에 있어도 흥에 겨운 겹고 밝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때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마 또한 홍콩 문화에서 숨기고 싶어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필리피노들은 음악을 참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봐왔던 수 많은 홍콩 영화들 중 '아마'를 다루거나 배경 속에 등장하는 건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2011년 유덕화 주연의 'a Simple Life'가 직접적으로 이 문화를 다루며 세간의 관심을 일으킨 케이스 정도가 생각날 뿐이다. 저런 서양인들 뿐 아니라 상류층 동양인들도 다 아마를 고용했었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을지는 모르겠는데 그 시절에도 아마 학대, 언어/육체적 폭력, 혹은 아마와 바람나는 남편 뉴스들은 홍콩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이 디지털화 되며 침실에 CCTV 설치 등등) 참고로 80년대부터 시작된 현상이고 당시 고용법 상 '거주'해야만 했다. 현재는 모르겠다.
보통 저 정도의 상류층 집들이면 집 마다 주 중 아마가 잠을 잘 수 있는 개인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극 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저 정도 규모의 공간에서 거의 작은 창고 수준의 공간이 제공된다. 이웃인 힐러리의 아마인 푸리의 공간이 그 것을 잘 표현 해 주고 있는데, 마가렛 (니콜 키드먼)의 아마인 에시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어서 놀랐다. 그 공간도 저 L.A.세트에 같이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극 중 계속 마가렛(니콜 키드먼)이 자기의 아마는 가족의 일부 임을 주장하고 표현하는데 이건 뭐 극 중 캐릭터들도 (아마, 니콜, 가족, 외부인 모두) 그리고 관객들 마저도 쉽게 믿거나 공감이 될까 싶다.
극 중 전 날 저녁 술까지 마시며 그렇게 가족 같이 챙겨주던 힐러리가 다음 날이 되자 해장을 위해 자신의 아마인 푸리에게 아침상 차려 달라는 모습. 그리고 경연대회를 참가 못하게 생겼지만 다시 맘을 곱씹으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흘러나오는 푸리의 대사, "토스트도 같이 드릴까요?" 그냥 딱 그 정도가 상류층 외국인이 이방인으로서 통상 동양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들과 마인드들 중 하나의 좋은 예이기는 해 보인다. 비슷하게 계급사회에서 상류층이 중하류층을 바라보는 모습?
영화 <기생충>에서 그려지던 그 '넘지말아야 할 선' 정도로 생각해도 될 듯하다. 비슷한 예로 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함께 부자, 벼락부자 등 상류사회의 문화도 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홍콩의 '아마'와 비슷하게 '식모'라는 직업이 같이 탄생했고 그 당시의 아파트 구조도도 또한 식모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 시절 삼순이=식모, 버스안내양, 공순이)
그들의 주 업무 공간인 부엌과 거실에 가깝고 나중에는 집주인들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는지 집안 사람들과의 동선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는 동선의 공간 설계로 진화까지하게 된다. <Expats>에서는 그 주인집 분들과의 겹침이 '최소화'된 동선의 공간을 간간히 확인할 수 있다.
김기영 감독의 1971년작, <화녀>에서도 이 식모의 주 공간이 부엌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며 그 만큼의 서스펜스를 전개시키는 명작이다.
THE FUNAMBULIST 기사에 실렸던 홍콩 아마(헬퍼)를 배치하기 위한 한 고릅 아파트의 평면도다. 저기는 아예 대놓고 Maid's Room 가정부 방이라고 지정되어 있다. 당연히 침실과 같은 주인들의 프라이빗한 공간들과는 분리되어 있되, 부엌 그리고 다이닝 공간과는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물론 화장실도 개별.
위는 2023년 발표되고 인권을 무시한 디자인으로 많은 혹평을 받았던 홍콩 아마를 위한 가구 디자인이다. 너비가 68cm다. 저 사다리 위로 올라가서 자는 거다. 상류층만 가정부를 부리는 것이 아닌데 이게 또 무슨 문제를 발생시키냐면, 상류층에서 밑으로 내려올수록 돈이 당연히 없기 때문에 삶의 공간도 작아진다. 그 와중에 가정부를 위한 공간은 더 작아져야 할 수 밖에 없으니 이런 인권을 무시한 괴물같은 디자인이 나오기도 하는 것 같다.
홍콩은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고밀도의 도시다. 삶을 위한 공간 확보는 비단 아마들만의 문제 뿐 아닌 모든 홍콩인들의 공통적인 문제다. 그런 맥락과 상황에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건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타이오 마을을 걷다 보니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을 흔한 게 마주쳤다. 고양이들은 물론이지만 강아지들 (일반인들에겐 개 크기)이 그냥 자유로운 영혼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흔한 시골 강아지와 고양이들의 삶. 솔직히 무서운 건 없었다. 얘네들도 타지인들한테 익숙한 게 티가 낫다. 물론 쓰다듬거나 해보진 않았다. 강아지들은 오히려 살살 피하거나 경계하거나 조심하는 분위기였는데, 고양이들은 얄짤 없이 대놓고 앵기거나 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타이오 마을에서 처음으로 만난 까미
고정되어 있던 괭이
길막하고 있는 애들이 꽤 많다. 상황에 따라 개네들이 비켜주거나 우리가 비켜 가면 된다. 시간이 좀 지나 느낀 건데 재네는 우리한테 그리 큰 관심이 없다. 그냥 빨리 지나가 주면 서로 편안~
보니까 주인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사진엔 안 찍혔지만 좋아서 펄쩍펄쩍 뛰면서 같이 가더라. 찍진 못했는데, 주인 만나 좋다고 살다 살다 유튜버 빅페이스 뒷다리 치기 시전 하는 강아지는 첨 봤음
괭이 특유의 다소 건방진 표정
숙소를 향해 걷는 Shek Tasi Po 쉑차이포 거리에서 본 강아지 대변 처리 장소. 시골에서 이런 곳을 보니 나름 인상적이었다. 도심에서도 이런 공간은 못 본 것 같은데, 차라리 저런 식으로 관리를 하는 게 좋아 보였다. 다만 모순적인 건 이 마을에서 강아지들은 모두 혼자 다닌다. 걔네들이 여기서 알아서 대변볼 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암튼 오히려 견주들과 같이 다니며 견주가 대변을 처리해야 하는 도심 생활에 오히려 더 도움이 될 만한 작은 공간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 봤다.
이건 그냥 숙소에서 찍은 참새들 사진. 참새건 비둘기건 고양이건 강아지들 등등 먹으라고 내 놓은 음식들이 꽤 많이 보인다. 여기는 그게 마을을 굴러가게 하는 장치들인가 보다.
고양이를 테마로 벽화로 꾸민 집. 어촌이라 고양이도 많고, 사람들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고, 마을이 관광화 되면서 고양이 컨셉을 활용하는 곳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수상가옥에 살고 있는 민간 고양이. 어려 보인다. 이름도 있는 것 같고.
타이오 수산 시장 (아주작다) 바로 옆 벤치에 있던 고양이. 아마 들고양이가 같은데 친화력도 좋고 잘 앵겨서 가는 길에 시간을 좀 같이 보냈다.
나름 터줏대감인 듯 한 분위기
솔직히 눈빛이 뭘 좀 내놓으라 하는 것 같아서 쬐금 부담이 갔었다.
얘도 그냥 지 갈 길 가는 애. 누렁이들이 꽤 많다.
이건 숙소 앞에서 찍은건데, 백로? 왜가리? (맞나?)들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여기 근처에서 쉬어 가는 애들이 참 많았다. 크진 않지만 중간중간 맹그로브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타이오 마을의 유일한 고급 호텔인 헤리티지 호텔 앞 벽화에도 이 녀석들이 그려져 있는 것 보니 이 놈들의 서식지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헤리티지 호텔의 음식점, Tai O Look Out의 시그니처 목테일의 이름이 Mangrove special 맹그로브 스페셜이기도 하다. 색깔이 참 이쁘고 맛도 이쁘다.
타이오 호텔은 마을의 끝자락이라 더 이상의 도로가 없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오는 길에 산책 길을 찾다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한문을 까먹었어도 저 정도는 기억하기 때문에, "어? 소림? 소림사? 샤올린? Shaolin?"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뛴다. 옛 기억 때문에. 하지만 닫힌 저 공간 안에 사람의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홈페이지를 보니 소림문화센터라고 하는데 25명 정도 예약이 걸리면 소림사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까지 하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그 소림사 앞에는 꽤 큰 공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퍼져 있는 강아지. 저 놈이 바라보는게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자전거도 타고 프리즈비를 하며 왁자지껄 노는 모습들이다.
마음이 착해졌다. 굴뚝처럼 뿜어내는 연기 속 더럽혀져 있던 나의 마음 속 정신의 구조물이 닦여지는 기분이었다.
어촌에선 흔한 풍경일지 모르겠지만 태어나서 처음보는 유유적적 갯벌 걸어 다니는 강아지. 꽃게라도 잡아먹으려는 건가...
숙소 근처 미니 슈퍼마켓 같은 곳인데 저 자리가 우리나라로 치면 가맥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괭이들이 꽤 많다. 언제 한번 공구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저 빨간 이케아 의자들이 마을 음식점 등등 곳곳에 많이 보이긴 했다. 음료수 사던 곳인데 430ml 비타 퓨어 생수가 HK7달러 (한국돈 약 1,170원) 정도니 타이오 마을에서도 원주민 주거지 쪽에 있는 먼 곳 치고는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고 본다. (홍콩 도심에선 800~1,000원 정도) 암튼 맨날 저기 빼박으로 앉아 항상 낮술 자시던 할배가 계셨는데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난 영어, 할배는 광둥어) 언어로 꽤 오래 얘기한 곳이라 기억에 남는다. 영어와 광둥어 섞어가며 말 붙이시던 친화력 좋은 할배 사장님도 기억에 남는다.
위 이미지는 주성치가 <도성타왕>을 찍었던 양후사원이란 곳이다. 타이오마을 Fushan View Point 트레일을 끝내고 내려와서 만난 곳.
작진만 나름 화려하다. 작은 절로 봤는데 그 작음 속에 중국 특유의 화려함과 옛 무협 영화들에서 느꼈던 감성이 곳곳에 녹아져 있어 홀린 듯 구경했다.
그러다가 어딘가에서 갑자기 훅 튀어 나와 나한테 비비적 비비적거리던 고양이. 나중에는 내 신발에 똥꼬를 내려놓을라고 자리 잡던데 순간 얘가 똥 싸나? 하고 발을 급히 치웠는데 미안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냥 자리 잡으려고 했던 것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 동네는 참 고양이들이 외지인들한테 참 많이 안긴다.
어떡하다가 물 한 통 없이 진행된 란타우 트레일 후 완전 지치코 목말라서 급히 뭐 마실 것을 찾으러 급히 이동하고 있던 중 골목의 길막 강아지. 저 놈도 여길 건널라 하나 부다.
원래 이렇게 만난건대 우측으로 틀고 다시 직진하다가 이 골목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여기로 지나갈까 눈치 보고 있다가 잠깐 딴 데로 가버리니 이내 안심하고 골목을 넘어온 것 같다. 다시 돌아가니 만나서 헬로~
저 놈 보내고 골목을 지나가니 또 비슷하게 생긴 누렁이가 천진난만하게 지나간다. 도플갱언지 평행우주인지 내 눈엔 아까 그놈과 똑 같이 생겼다. 근데 생각해 보니 이 마을 전체 누렁이들 보면 되게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기 마을 강아지들이 좀 매너가 있는 건지 양보받은 적이 꽤 많다는...
Sun Kee 선키 다리에서 만난 강아지. 얘는 동네 강아지라기보다는 관광견 같았다. 동네 개라면 저렇게 냄새 수컹수컹 맡으면 신나게 돌아다니지는 않았을 듯.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점찍어 놓은 카페들이 죄다 문을 닫아 정처 없이 헤매던 중 만난 팔자 좋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에 또 고양이들
그리고 메인거리로 고개를 틀으니, "니 어디 가는데? 못 보던 놈인데?" 하는 듯한 강아지. 딱히 서로 간 트러블은 없었다.
또 지나가다 만난 괭이
아마 도성타왕에서도 나왔던 곳 같은데, 타이오 마을 작은 광장 포토존 같은 곳이다. 벽화와 땅에도 그림이 그려진 곳. 거기서 만난 강아지.
약간 무서운 포스를 자랑하던 놈들. 솔직히 앞에 놈이 더 무서워 보이는데 더 순해 보이는 뒷 놈이 이 자유로운 곳에서 목줄 채워져 있는 것 보니... ㄷㄷㄷ... 하는 생각을 하고 지나가 본다. 코카콜라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이 이 놈들의 갈증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 하기도.
요건 아까 옆 집의 옆 집 강아지. 여기서 저녁 먹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니긴 한데... 이번에 못 먹어서 아쉬웠던 어묵용 대왕 오징어. 저거로 피시볼 만들어주는데, 크긴 크더라.
폭풍우가 쓸고 간 다음 날 아침. 어제 불놀이 이후 남긴 음식을 챙겨가고 있는 참새... 어? 비. 둘. 기??? 역시 야만의 사회는 체급이...
왜가린지 백론지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타이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 밤색왜가리 새끼인지? 새벽아침에 물고기 잡아온 배에 턱 앉아서니 먹이를 노리고 있는 건지. 여기서는 흔한 어촌의 아침 풍경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부터는 타이오 가기 바로 전에 들렀던, 영화 <무간도>와 주성치의 <도성타왕>을 찍었던 옹핑마을에서 본 부처님의 기운을 받고 잘 퍼져 있던 강아지들이다.
더위를 식히려 병콜라로 팔자 좋게 마시고 있는데 더 팔자 좋은 놈이 앞에 있었다.
다 다른 누렁이들이다. 관광객들이 뭐라도 줄까 기다리고 있는 걸까?
숨바꼭질 하 듯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대부분 작은 공간이나 그늘 아래로 피신하고 있었다.
사실 타이오와 옹핑을 통틀어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사이즈의 '강아지'는 못 봤다. 어디들 있는 건지... 혹은 있는 건지... 얘네도 초고령화 저출산 상황인지... 대부분, 아니 내가 이번에 만난 강아지들은 전부다 사이즈가 큰 놈들이었다.
이 것은 또 부이 오 해변가는 길에서 만난 놈인데, 부이 오나 옹핑에선 그냥 이런 엄청난 크기의 물소들이 걍 사람들과 같이 걸어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가는 길에 소 똥도 꽤 많음. 날씨가 하도 더워서 그런지 실제 걸어가는 놈은 못 만났고 이렇게 다들 퍼져 있었다. 역시 8월의 여름은 짐승에게도 강한가 보다. 귀여운 버전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잠깐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