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와 노포 감성, 그리고 다양한 손님층이 어우러진 명동 행화촌 중화요리집 후기다. 간짜장, 울면, 닭튀김, 군만두, 그리고 소고기 오향장육을 맛보며 옛 중화요리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행화촌은 杏花村, 살구꽃 핀 마을, 주막(酒幕)이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랜만의 주말 명동 나들이.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명동의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명동성당에서 지인들 만남. 형태가 꽤나 변하긴 했지만 옛 추억이 많은 곳이라 항상 이곳의 사진은 언덕 느낌이 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명동성당 건너편 그 인스타 카페. 아주아주 오래전 저 터 지하엔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닭고기 수프가 참 맛있었던 경양식 집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지인들을 만나 다시 걸어왔던 롯데 백화점 방향으로 방향을 바꾼다. 모임의 장소는 언제나 그렇듯 근처 맛있는 중화요릿집을 찾아!
명동길을 따라 쭉 내려오다 명동지하센터 지점에서 중앙우체국 방향으로 꺾으면, 중국대사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한때 이곳은 외국 문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골목이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외국 톱스타들의 포토와 책받침이 가득했고, WWF, 논노 같은 외국 잡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마치 신세계로 가는 포털 같은 곳이었다.
주현미와 진미령 및 쯔위가 다녔던 한성화교소학교 방향으로 중국대사관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한국은행 방향 골목으로 꺾는다. 이 골목에는 오랜 명성을 이어온 중화요리집들이 늘어서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도향촌, 산동교자, 일품향, 개화, 향미, 행화촌. 명동엔 곳곳에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골목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이 좋다
우리가 원래 가고 싶었던 곳은 향미였다. 하지만 기존 단골들마저 싹 쓸고 가는 메뚜기 떼 현상을 일으킨다고 하는 한 인플루언서 덕분에 이 근방도 이미 혼란 상태라고 들었었다. 그나마 주말이라 개화는 아예 문을 닫았고 향미도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산동교자는 다행히 줄이 없었지만 우리가 원래 가려던 곳은 아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건물 2, 3층에 자리한 행화촌으로 이동했다. 건물 외벽에 달린, 아슬아슬해 보이는 돌출 발코니가 인상적인 곳. 오래된 노포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건물이다
2층 계단을 따라 올라와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오후 3시 50분경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테이블에는 이미 손님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꽉 차진 않아 쾌적한 기분이었다. 사진은 프런트의 모습이다. 화장실은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북적임이 없는 늦오후의 분위기가 좋았다.
짜장면 5천 원…???!!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짜장면 5천 원이라니? 게다가 간짜장도 7,500원. 이건 흥미롭다. 우리 시계는 지금 2025년을 향해 가고 있지만 이곳의 가격표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기다란 판으로 '닭튀김’이라는 정체불명의 메뉴가 적혀 있다. 중국집에서 닭튀김? 오늘 우리는 뭘 먹어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배고픈 돼지들로 빙의해 무지성 선택을 하기로 한다.
"일단 오향장육을 먹어보자"
"좋아!"
"근데 만두는?"
"물, 군?"
"멀라, 군만두 ㄱㄱ!"
"근데 저 닭튀김 판때기 저거 신경 쓰이지 않냐?"
"어, 맞아 시키자."
"나중에 식사 생각해야니까 일단 이 정도?"
"ㅇㅋ"
가장 먼저 나온 오향장육은 돼지고기가 아닌 아롱사태 소고기였다. 쫀득한 결이 살아 있는 식감, 엊혀보며 느끼는 혀를 스치는 은근한 소스, 그리고 은은하게 배어드는 향신료의 풍미. 아롱사태 특유의 구두 씹는 듯한 질감은 평소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향신료가 어우러지며 살짝 시릿하게 퍼지는 감칠맛 덕분에 그저 꿀떡꿀떡 넘어간다
고기를 파헤치니 잔뜩 깔린 신선한 양배추가 슬며시 등장한다. 그냥 곁들여진 것 같지만 상당히 잘 어울린다. 아삭한 식감 덕에 느끼함 없이 개운하게 넘어간다. 대파도 함께 먹으면 알싸한 향이 더해져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이내 군만두가 나왔다. 요즘 중국집들은 갈수록 바삭함만 과하게 강조해 딱딱하거나, 혹은 눅눅하거나 등등 겉과 속의 밸런스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겉은 적당히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육즙과 감칠맛이 살아 있다. 과하지 않은 균형감. 잘 만든 영화 속 탁월한 조연 같은 맛. 부담 없이 계속 손이 간다.
다음에 나온 닭튀김은 한국식인 듯 아닌듯 뭔가 살짝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버펄로윙에 가깝다. 튀김옷이 바삭하진 않지만 부드러운 속살, 기본적인 간장 베이스까지는 익숙한데 어디선가 아주 미세하게 중국 향이 스친다. "이거 뭐지?" 싶은 순간 사라지는 정도. 한국 치킨이면서도 미묘하게 중화의 기운이 스며든 맛
꽤 괜찮아서 "이건 하나 더 포장해 가야겠는데?" 싶었지만… 아쉽게도 닭 소진 ㅠㅠ.
식사 시간이다. 간짜장, 소고기 짜장, 짜장면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요즘은 제대로 된 간짜장을 먹을 만한 곳이 드물다는 생각에 간짜장 곱빼기를 주문했다. 요즘 중국집들은 계란 하나 올려놓고 옛날 간짜장인 척만 할 뿐 정작 맛은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여기는 좀 달랐다. 짙은 춘장 향과 은근한 단맛이 밸런스를 맞추고 볶아진 재료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옛맛이 살아 있었다 (괜히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많은게 아닌듯). 거기에 우리가 직접 고춧가루를 솔솔 뿌려 마무리. 단맛을 눌러주고 옛 감성을 더 선명하게 살려준다.
울면은, 와... 숟가락으로 국물 한 번 맛 보는 순간, 술 많이 마신 다음 날 해장으로 이걸 먹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싶다는 상상을 했다. 전분이 녹아든 진득한 국물이 속을 포근히 감싸는 느낌. 양도 푸짐하다. 한 숟갈에도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의 농도, 은근하게 퍼지는 감칠맛. 무엇보다 이날 행화촌에서 가장 옛 원형의 맛을 깊게 느꼈던 메뉴였다.
식당에서 계속 신경 쓰였던 저 공간, 저기가 이 가게의 상석인 듯하다. 물론 지금은 발코니로 나갈 수 없지만, 왠지 옛날엔 저기서 담배 한 대 피우던 자리였을 것 같은 느낌? ㅋ
저게 보이는데, 신세계 미디어 파사드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영상들을 배경으로 옛 감성을 간직한 중국집에서 식사를 한다는 느낌. 아이러니하지만 그 조합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그런 의미에서 저 자리는 그냥 식사 공간이 아니라 명동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점처럼 느껴진다.
음식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이곳을 채운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혼밥하는 손님, 다정한 커플,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 친구들 모임, 그리고 가끔 보이는 외국인 관광객까지. 연령대도 제각각이었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공간. 어떤 형태든 어떤 이유든 다양한 발길이 머무는 곳. 그런 가게야말로 진짜 오래 사랑받는 곳이 아닐까.
다 먹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거리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식당을 나서며 한 번 더 바라본 외관, 왠지 안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노포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사장님의 친절함이 기억에 남는다. 이날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손님들에게도 유하게 응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우리 옆자리에서 혼밥하던 관광객에게도 친절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게 하나둘 쌓여 '관광 코리아'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 아닐까.
노포 기준, 모든 면에서 별 다섯개 만점. 명동에 온다면 행화촌 추천.
| 번외 : 돌아가는 길
행화촌에서 나와 바라본 신세계 미디어 파사드는 여전히 화려했다. 신기하게도 도시의 밤은 변함없이 화려한데 묘하게도 오래된 중국집에서의 시간이 더 선명하게 남는다
그 건너편 보라색 향기의 한국은행 건물
뭔가 방공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대피소 겸) 지하도
그 지하도를 지나가며 쌩뚱맞다 싶었던 위치의 미니멀리스틱 그라피티 감성의 김밥집이 인상적이었다. 김밥 3천 원도...
레트로 감성 잔뜩 한 지하도를 나간다
건너편에서 다시 만나는 신세계의 미디어 파사드. 맛있는 음식에 잠깐의 레트로 경험, 아주 좋은 날이었다
📌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정보
- 상호명: 행화촌(杏花村)
- 주소: 서울 중구 명동 2가 105 (중국대사관 골목 내, 향미 건물 2~3층)
- 영업시간: 매일 11:00 ~ 21:00
- 주차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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