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영화를 말할 때 문학적 전개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문학적이다..."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정의가 확실 한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전개되면서도 서로 얽혀있는 다층적 내러티브라던지,
스쳐가거나 작은 사건들을 통해 캐릭터의 내면을 깊이 탐구할 기회를 주는 디테일한 일상 묘사,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엿보게 해주는 심층적 대화 등...
인물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방식을 통한 심리적 깊이 등을 통해 영화는 전개되고 마지막에 가서 큰 울림을 받으며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캐릭터들의 감정에 동화되어 긴 여운을 느끼게 되는 식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연출 기법이 관객들에게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한 깊은 감정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중 OTT (Watcha)에서 볼 수 있는 3편의 영화를 추천한다. ('21년작 '우연과 상상'은 보지 못해서 제외)
Happy Hour 해피아워
2015 | 개인별점 5/ 평균별점 4.1
몸도 별로 안 좋은 상태에서 좀처럼 만나긴 힘든 5시간 28분의 런닝타임은 개인적으로 위대한 도전이었다 (화장실은 한 3번 정도 간 듯하다). 그리고 영화 종료 후 지나간 시간 1초 1초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통해 인간 관계의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걸작이다. 긴 러닝타임인 만큼 네 명의 여성들이 각자의 삶에서 겪는 위기와 변화를 참 세밀하게도 그려낸다. 캐릭터들의 일상 대화와 서로 간의 상호작용 속에 숨겨진 감정의 깊이는 마치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읽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4명의 주인공 들 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인상적인데, 전문적인 연기가 아닌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 같은 것들이 오히려 영화의 리얼리티를 더 잘 살려주었던 것 같다. 특히 특별한 감정선 없이 기복 없는 톤으로 쭉 이어지는 낭독회 신 (그리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일련의 작은 사건들) 또한 이런 영화의 전체적 흐름과 잘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Asako (I&II) 아사코
2018 | 개인별점 4.5/평균별점 3.9
처음으로 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라 그런지 영화 종료 후 더더욱 많은 여운을 느꼈었다. 이 여화는 사랑과 정체성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는 (미스테리한) 로맨틱 드라마로 감독의 섬세한 스토리텔링이 빛난다. 주인공 아사코가 사랑하는 남자 바쿠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그 이후 료헤이를 만나면서 겪는 감정의 혼란은 마치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가 겪는 상실과 회복의 은유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감독은 아사코의 여정을 통해 사라의 본질과 인간관계의 변화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관계의 관점으로 본 다면, 사람은 변할 수 있는가? 과거의 상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가?
사랑의 본질이라는 관점으로 본 다면, 사랑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사랑은 동일한 사람에게서 재현될 수 있는가?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영화 '아사코'는 감각적이고 로맨틱한 비주얼 스타일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앞서 말한 하마구치의 문학적인 연출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Drive My Car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 개인별점 5 / 평균별점 4.0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상실과 치유, 그리고 예술을 통한 자기 발견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 가후쿠가 아내의 죽음 이후 자동차 여행과 연극 준비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는 어딘가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을 세밀하게 표현하며, 과거와 현재의 이갸기를 교차시키며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을 통해 상처와 치유, 그리고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개인적으로는 안톤 체호프, 무라카미 하루키, 하마구치 류스케, 이 3개의 감성이 만들어낸 삼각주 같았다. 솔직히 마지막 씬은 이해할 수 없어서 제외하고. 전작 <아사코>에서처럼, 계속 빌드업되고는 있지만 미처 솟구쳐 올라오지 않고 결코 폭발하지 않았던 느려터진 아르페지오 같은 그 감성의 운율이 많이 느껴졌다. 신파 영화도 아닌데 그러한 감성 때문에 펑펑 운 게 정말 오랜만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세 작품 모두 인간관계와 감정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영화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각각 다른 주제와 스타일을 통해 깊은 감정적 경험을 선사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상처와 치유는 비단 하마쿠치 감독만의 영화가 가진 상징성은 아니지만 (그 재해 이후 거의 모든 일본 영화는 알게 모르게 이 감성을 항상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 또한 본인의 영화 속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 해피아워는 대지진 이후 사회적 불안과 소통의 어려움이, 매우 길고 느린 페이스의 전개를 통해 인물들의 섬세한 관계 변화를 통해 다뤄진다.
- 아사코는 대지진을 상실과 회복의 메타포로서 사용하며, 전형적인 로맨스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인물의 감정 변화와 관계 복잡성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 드라이브 마이 카는 대지진의 직접적인 배경과 상실과 치유의 과정을, 플래시백과 현재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치유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하나같이 모두 심리적 복잡성을 지닌 캐릭터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데, 이렇게 영화의 주요 서사를 이끌어 가는 하마구치 감독 특유의 깊이와 섬세함이 돋보이는 걸작들로서 왜 이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후 일본에서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감독을 평가받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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