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적 공식을 다룬 1탄에 이은 슬래셔 영화 시리즈 2탄은 슬래셔 장르가 어떻게 각 시대상을 반영해 왔나를 10년 주기로 바라보았다. 3탄은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참고로 각 시대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장르의 탄생지이자 진화지인 미국이 기준일 수밖에 없었다
슬래셔 영화는 일반적으로 고찰적이거나 심각하다기보다는, 자극적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 영화 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장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바로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를 반영하며, 동시대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슬래셔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사회/현실적 공포와 불안을 통해 '자아'를 실현시킨다. 특히 미국은 역사 속에서 항상 다양한 요인의 사회적 폭력과 범죄에 시달려온 대표적인 나라다. (현재의 경찰총기사고나 학교 총기 테러 등) 이러한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슬래셔 영화는 어떻게 장르적 공식에 충실하거나 뒤틀며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시겼을까?
장르가 태어난 70년대부터 슬래셔 영화들이 그려온 시대상을 살펴보면, 사회의 불안감과 공포의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시대를 되돌아보며, 대표적인 슬래셔 영화들이 어떻게 그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며 작품을 펼쳤는지 살펴보고 장르의 공식에만 묻혀 잊혀진 슬래셔 영화들과 기억에 남는 대표작들 간의 차이도 함께 알아보았다
| 1970년대
70년대의 미국은 Suburb(근교)를 포함한 어번 Urban(도시 지역)에서 범죄율이 상승하고 집행 기관의 대처 실패에 대한 우려가 컸던 시기였다. 이는 주거 지역에서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낳았다. (슬래셔 뿐만 아니라 유독 이 시절 갱, 형사 영화, TV 시리즈가 특히 넘쳐났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적인 통념과 전통적인 권력구조와 규범에 도전하는 시민, 여성,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1975년의 베트남 전쟁 종전 또한 미국인들에게 큰 사회적 불안과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공산주의를 상대로 한 전쟁의 패배 및 이후 사회로 돌아온 베트남 전쟁 베테랑들과 기존 사회의 불협화음 등)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1978년의 "할로윈"은 슬래셔 영화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1980년대 초중반 슬래셔 영화 부흥의 불쏘시개였다. 이 영화는 미국의 Suburb(근교)를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나는 안전한가?라는 불안감을 대중에게 안겼다. 벽도 없고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는 자유롭고 행복한 그림 같은 환경의 서버브 환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마가 나타나 청소년들을 살해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상징적 축제 문화인 '핼러윈 데이'에...
이 작품은 슬래셔 영화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담아내면서도 70년대의 미국의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반영하였다. 할로윈의 살인마가 주변의 평화롭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조용히 범행을 저지르는 모습은, 편안하게 '느껴/보여지는' 현실 세계에서의 잠재적 위협에 대한 불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74년의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 있다. 이 작품은 미국 사회의 폭력성과 소비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았다. (미국 소비문화는 언제나 많은 각종 영화 장르들의 탐구 대상이긴 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폭력은 시대적인 불안과 공포를 강조하며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전달했다 (심지어 실화 바탕이라는 것 또한 크나큰 충격이었던...)
이 두 영화가 슬래셔 역사에 있어 장르적 정의를 세운 가장 상징적인 작품들로 꼽히며, "블랙크리스마스 (1974)", "투어리스트 트랩 (1979)", "커뮤니언 (1976)", "웬 어 스트레인저 콜스 (1979)" 등등 70년대의 슬래셔 영화들은 시대/사회적 문제와 불안감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재미와 긴장감을 제공했다
| 1980년대
1980년대 또한 70년대와 마찬가지로 혼돈의 시기였으며 다양한 사회적 불안과 범죄 요인들이 증폭되었다. 이 시대의 특징으로는 코카인이나 헤로인을 넘어 엑스터시 등과 같은 새로운 마약의 등장과 갱단들의 폭력 범죄, 애덤 월시 미아 납치 살인사건 등의 각종 범죄들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안이 두드러졌다. 레이건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 선언 및 사회적 범죄에 대한 제재를 위해 더욱 강력한 처벌과 교도소 시스템의 대규모 확장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움직임들이 국민들에게 더 큰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기도 했다. (일례로 마약과의 전쟁 선언 후 미국 내 마약 사용은 더 늘어났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어찌하였건 90년대에 이르러서는 범죄율의 낮아지는 양상을 보이긴 했다. 물론 이전 대비...)
<13일의 금요일 (1980)>은 이러한 사회가 야기하는 대중의 불안을 잘 꿰뚫은 작품으로 80년대 슬래셔 영화의 엄청난 부흥을 이끈 작품이었다. 이 시리즈는 제이슨 보헤스라는 슬래셔 하면 연상되는 대표적 아이콘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이후 이를 모방하거나 영감을 받은 많은 영화 및 시리즈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으며 캠프, 산, 숲과 같은 고립된 장소에서의 살인을 다루는 스토리가 흔해지게 되었다. 아무튼 <할로윈>의 모방이자 아류작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할로윈>이 불쏘시개고 <13일의 금요일>은 거의 화염방사기급 레벨로, 이 영화의 매력이 실로 대단했던 나머지, 슬래셔 장르의 상징적인 요소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오랜 시간 동안 시리즈물로 이어지게 되며 슬래셔 영화 역사에 큰 정점을 찍었다. (시리즈물로 이어져가며 캐릭터로서 제이슨의 실질적 활약은 2탄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제이슨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하키 마스크는 1982년의 3탄에나 가서 등장한다. 중간에 쉘리라는 캐릭터가 사람들 놀라게 하기 위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마스크였는데 그를 죽인 후 그것을 쓰게 되는 것이 이후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제이슨의 모습이다
<나이트메어> (1984)도 슬래셔 장르에 있어 기가막힌 발상의 전환이 눈에 띄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일반적인 슬래셔 영화들이 피지컬과 물리적인 측면의 공포를 선사했다면 이 시리즈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꿈속에서 주인공들을 쫓는다는 새로운 개념의 긴장감과 공포감을 선사했다. 특히 이 부분은 80년대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마약과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동시에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 불분명을 통해 경제와 사회적 불안정성이 공존하던 그 시절의 불안과 공포를 더욱 극대화했다
일례로, 프레디는 자는 동안의 인간을 목표로 삼는다. 수면은 개인들이 물리적 휴식을 취하기도 위함이지만 외부 세계의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후퇴'하는 심리적 잠재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안전한 피난처로 추정되는 꿈이라는 영역에 침투하고 테러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통상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영역들의 취약성과 무력함을 가감 없이 보여둔다
프레디가 출현하는 주인공들의 꿈들의 연속을 따라가다 보면 침실, 복도, 병원, 집 안 공간과 같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익숙한 환경들을 접하게 된다. 어디서나 프레디라는 공포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현실 어디에서도 '안전한' 공간은 없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프레디 크루거는 인간이었던 시절 자신 또한 아버지에 의한 아동학대와 학교에서의 '왕따'를 당했었고, 자해는 물론 동물학대 등의 극도의 정신불안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후 성인이 된 후 수많은 아이들의 연쇄 유괴/살인범이 되고, 결국 이 사건에 분노한 마을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악령과 같은 존재로 태어나며 주로 10대를 자신의 타깃으로 삶는데 이는 자신을 죽인 그 부모들에 대한 복수(그들의 아이들을 해치는)로서 해석되는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 및 복수와 폭력의 끝없는 순환을 영구화시킴으로써 영화 속 피해자들은 물론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잠재의식적 영역까지 침범하며 공포와 서스펜스를 펼쳐낸다
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나이트메어 시리즈를 통해 슬래셔 장르가 대중의 정신적 영역의 불안감을 시각화하여 건드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리고 웨스 크레이븐 감독은 이후 90년대를 뒤집어엎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크림> 시리즈를 감독하게 된다. 아무튼 국가적, 사회적 불안감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되어 개개인의 정신적 불안감의 영역까지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신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고,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한 법. 음... 아무렴...
암튼 앞서 말했듯이 뻔한 공식, 일방적인 모방과 자극적 요소만 추구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작품들의 질도 떨어졌음은 물론 이러한 반복되는 유사성에 의해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피로도 또한 극도로 높아졌다. 이로 인해 90년대에 가까워지며 슬래셔 영화는 암울한 쇠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몇몇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들도 꾸준히 등장하기는 했는데 대표적으로 <헬레이져> (1987)와 <쳐키> (1988) 등이 있다
|1990년대
60년대부터 시작한 꾸준한 범죄율의 흐름에 이어 1992년의 'LA 폭동' 등 폭력과 범죄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해서 미국의 사회적 문제와 관심사였지만, 90년대가 흘러가며 미국은 범죄율이 대폭 감소하는 징조를 보이며 안전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표 참조)
이러한 안정적인 상황 속에서 그 알다가도 모를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과 함께 경제적 번영과 기술적 발전이 돋보였던 시기였던 만큼 대중의 사회적 관심사도 더욱더 다각화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미 80년대부터 대중의 외면을 받은 슬래셔 영화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 보였지만 이는 어떤 면에서는 미국이 현대 역사에 있어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적어도 2000년 9/11이 터지기 전 까지는...)
80년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과장된 표현이 지배적이었으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경향은 점차 사그라들고, 자기반성과 자기 인식이 중요시되는 시기로 변화하고 있었고 특히 X-세대가 부각되면서 새로운 문화와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서태지를 통한 하이틴 문화와 자기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2000년대를 향한 밀레니엄의 공포도 사회적 불안의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오히려 90년대 X-세대들에게는 더 큰 실험, 새로움, 즐거움을 선사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90년대 세대들은 밀레니엄을 향한 사회적 불안의 상황을 더욱 즐기며 소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와중에도 몇몇 슬래셔 작품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극복하며 90년대에 흥행 역사를 기록했다. 위에서 말했듯 이 작품들은 기존의 공식의 한계를 어느 정도 뛰어넘으며 작게는 또 크게 새로운 장르적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대안=얼터너티브=그런지=너바나=90년대라는 공식이 갑자기 생각나는 건 왜일까...)
대표적으로 도시전설과 흑인 빌런을 통한 트위스트로 인종문제 이슈를 역으로 잘 소화해 낸 1992년의 <캔디맨>, 슬래셔 장르의 문법 자체를 완전히 전복시켰다고 볼 수 있는 걸작인 1996년의 <스크림>, 로맨스 요소의 강조 등을 통해 관계와 갈등의 요소를 좀 더 깊게 활용하며 지난 실수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처벌이라는 테마를 더욱 강조하며 캐릭터 및 스토리 개발에 힘쓴 '어린' 성인들의 이야기인 1997년의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도시 전설을 살인의 동기와 연결시키는 동시에 대학생들의 일상과 공포를 결합시키며 클리셰를 재해석하고 활용한 1998년의 <캠퍼스 레전드>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작품들은 90년대의 슬래셔 영화 시장에서 굉장한 서프라이즈로 평가받을만한 작품들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상징적인 작품은 80년대 <나이트메어>의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이다. 슬래셔 영화의 오래된 공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전복시키며 많은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전통적인 관습과 클리셰에 대한 유머러스한 조롱과 자기반성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장르적 의미로서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슬래셔의 기본은 유지하면서도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 팝 컬처 속에 젖어있던 대중의 감성의 정곡을 제대로 찌르며 공감대를 이루어 냈다는 것에도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의 슬래셔 영화는 그 시대의 사회적 변화와 관심사를 반영하며,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OOO처럼) 대중이 사랑했던 슬래셔 장르에 기본은 갖추되, 예측 가능한 공식을 더 깊고 넓게 개발하거나 지나치게 관습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독창적이라고 인식될 만한 작품들이 주목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80년대의 과장된 표현에서 벗어나 자기반성과 자기 인식이 중요시되는 시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동시에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동시대적 불안감과 공포를 끄집어내며 호응을 이끌어 낸 특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니멀리즘 음악의 거장 중의 거장, 필립 글라스의 <캔디맨> OST 중 'Helen's Theme'을 들어보자...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ㄷㅣ...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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