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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6:

                                   Madchester Part2


808 State & A Guy Called G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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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파트1에서는 매드체스터의 시작과 그 중심에 있던 밴드들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대체 DJ들은 어디 있었는가? 표면 상으로 볼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는 인디밴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기서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애시드 '하우스' 붐의 한 사건인 매드체스터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일 수 밖에 없듯이 정통 인디밴드의 역사를 자랑하는 맨체스터를 향한 미디어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즉 기존의 락 관련 미디어는 흑인 태생의 하우스의 영향을 무시했고 백인으로 구성된 락의 정신을 가진 듯한 인디밴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먼데이즈와 로지즈 모두 댄스 문화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애시드 문화의 한 일원이 되었다. 먼데이즈의 경우 워낙 복합적인 음악 성향과 리믹스의 활용 그리고 하우스씬에 대한 관여도 면에서 애시드 문화와의 이질성이 발견되지 않지만 로지즈의 경우 'Fool's Gold'를 통해 하우스 음악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정통 인디락 밴드의 성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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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애시드 하우스의 사운드를 품은 초기 그룹은 바로 808 State. 퓨전 재즈, 일렉트로, 신스팝을 중심으로 한 808 State 1988 'Pacific State'를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그룹의 멤버였던 제랄드 심슨은 '가이 콜드 제랄드'라는 이름을 통해 808 state에서 탈퇴하고 'Voodoo Ray'를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애시드 하우스 클럽의 앤섬이 될 만큼 Pacific State에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제랄드 심슨은 차기 앨범 준비에 있어 레코드 회사의 상업화 아이디어의 신물을 느끼고 언더그라운드로 잠적하고 90년대 중반 철저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프로듀서의 모습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드럼 엔 베이스'의 모태가 되는 '정글' 씬을 탄생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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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을 떠나 보낸 808 State는 오히려 상업 레이블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애시드 하우스의 선봉장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이들의 성공은 동시대 아티스트들 (칠아웃 장르를 탄생시킨 KLF, 뉴에이지 이상을 담은 The Shamen, 사이키델리아를 통한 하우스의 정치적 좌파 성향을 더한 Primal Scream )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애시드 하우스가 오늘 날 회고될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이들이야 말로 사운드적 크로스오버와 댄스를 통해 음악과 몸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하우스 문화의 이상을 사운드로 풀어낸 주역들이었다
. (그들에게 있어 하우스 문화의 폭발은 펑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펑크가 자신의 팔의 완력을 최고조화 시켜 기타를 부셔버리는 물리적인 분노의 폭발이었다면 하우스는 몸의 완력을 댄스에 맞추어 완화 시키며 일체화 시키는 트랜스적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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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마찬가지로 마약에 의한 갱들의 개입과 정부의 불법 클러빙 및 레이브 탄압이 시작되었다. 1989 7월경 16살의 클레어 레이튼이라는 소녀가 엑스타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런던과 같은 운명의 스텝을 따르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디어는 야단 법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트렌디/애시드 테드로 구성된 어린 청년들을 애시드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버렸다.

그리고 당시 악명 높았던 살포드 폭력단의 개입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서브컬쳐의 죽음의 상징이 되어온 마약, 코케인이 다시 등장했다. (갱들은 엑스터시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 수입원은 언제나 코케인이였기에) 잦은 갱들 간의 마찰과 살인 사건, 마약의 유통 등은 경찰의 강한 제지를 불러들였고 하시엔다에서는 총기류 검문을 위한 메탈 디텍터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맨체스터는 매드체스터에서 건체스터Gunchester로 불렸고 물론 파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클러빙/레이브 프로모터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드체스터의 기간 동안 사랑과 우정, 이상과 희망으로 쌓아 올린 공동체 의식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며 파도와 같은 사이코시스와 파라노이아를 불러일으켰다. 91년 즈음 하시엔다가 문을 닫은 것은 물론이고 하시엔다와 어깨를 겨누며 시대를 풍미했던 썬더돔과 컨스퍼러시 클럽들 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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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체스터를 대표하던 먼데이즈와 로지즈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걷는 것 같았다. 로지즈는 스파이크 아일랜드 이후 종적을 감추었고 먼데이즈는 저명 음악지 NME지와의 인터뷰에서 매드체스터의 종결을 알리는 듯한 사건을 터뜨린다. 그들은 그 동안 지켜 왔던 노동계급층의 대변자의 위치를 던져버리고 소비주의적 시선에서 돈에 대한 찬양, 게이에 대한 혐오감, 여성 비하 발언 등을 늘어뜨려 놓았다. 물론 이것은 미디어와 대중에게는 용서될 수 없는 비윤리적 발언이었고 즉각 모든 이들이 먼데이즈의 몰락을 예감하게 되었다.

또한 밴드 리더 션 라이더의 헤로인 중독 이후 빚어진 차질과 이로 인해 연기된 뉴오더의 차기 앨범 등의 문제로 인해 팩토리 레이블이 부도가 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90년도 말에 출시 된 먼데이즈의 <Pills 'n' Thrills and Bellyaches> 앨범은 수많은 사건 사고를 떠나 매드체스터 시대를 총망라한 마지막 위대한 앨범으로 기록된다.)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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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매드체스터 향연의 빛이 서서히 꺼졌을 때 맨체스터의 클럽들은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를 완화하는 곳도 있었고 도시의 외각지역에서 이벤트를 여는 클럽도 생겨났다. (갱들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게리 매클라란의 딜라이트 클럽으로 이곳에서 알렉산더 코이라는 새로운 전설의 DJ 클러버들을 광분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매드체스터의 마지막 자락에 혜성처럼 나타난, 믹스매그 매거진이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Sasha 사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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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주목할 점은 갱들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사람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게이 클럽이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회적 소수의 하나인 게이 커뮤니티는 그 특성 상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는 디스코와 마찬가지로 애시드 하우스가 그 숨결을 다시 내 쉴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로서 백인 남성 성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하우스 클럽에서 디스코 댄스에 맞추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근육질의 남성들, 레즈비언, 드래그퀸들이 씬의 모습을 채워가고 있었다. 물론 도어폴리시가 강한 곳이 태반이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갈 시에는 바운서 앞에서동성'의 친구에게 프렌치 키스 등을 감행하며 자신이 '스트레이트'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는 비화도 있다. 이 움직임에 하시엔다 클럽도 맨체스터의 새로운 게이 클럽으로 변모했다. 맨체스터가 매드체스터, 건체스터에 이어 '게이체스터 Gaychester'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매드체스터의 한파로 인한 나이트 라이프의 때 아닌 붐은 곧 도시 수입의 기특한 효자 노릇을 했다. 따라서 광기의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길들어졌을 때 즈음 혹독했던 클럽 라이센스 규제들은 완화되었다. 종전에 비해 바와 클럽은 두 배로 늘어났고 24시간 쉬지 않는 문화와 클러빙 레져의 메카로 맨체스터는 거듭났다. 하지만 갱들 간 마찰, 마약 뒷거래와 같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특성의 문화가 이제는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를 남겼다. 어찌하였건 96년 즈음되어 애시드 하우스는 이제 '올드 스쿨' 사운드가 되어 정글, 테크노, 개러지와 같이 세분화 된 다양한 장르에 문화의 중심 자리를 내 주게 되었다.  

 


 

Recommanded Acid Tracks (순위 기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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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Give Me Some Love by Love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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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eat Dis by Bomb the 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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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Activ-8 (Come with Me) by Altern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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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Everything Starts with an E by E-Zee Pos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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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What Time is Love? By The K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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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eme from SExpress by SEx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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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acific State by 808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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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Voodoo Ray by A Guy called G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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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We Call it Acieed by D M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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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ove Any Mountain by The Sh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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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 & Vibe Upon the World 12 월자: MADCHESTER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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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문화의 중심, 맨체스터  

 박지성 선수로 인해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도시 , 맨체스터는 오랜 동안 영국의 중요한 현대 역사의 순간을 장식해 왔다. 근대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이 곳은 빅토리안 시대의 기업과 상업을 발전 시키며 '세계의 굴뚝'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 사회주의자였던 엥겔스가 머물렀었고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의 아이디어를 얻게 했을 정도였다니 시절의 엄청난 위용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대로 제조업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 이에 대한 탈출구를 새로운 문화와 레져 사업에서 찾게 되며 맨체스터는 음악, 미디어, 스포츠 등을 통해 서서히 영국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도시가 가진 경제력을 통해 얻어지는 추진력과 크지도 좁지도 않은 땅덩어리로 인한 내부 커뮤니티 형성의  용이함을 통해 구축된 탄탄한 음악산업의 인프라스트럭쳐는 케미컬 브라더스, 오아시스, 뉴오더, 찰라탄즈, 스미스 등과 같은 걸출한 음악인들을 배출해 내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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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Order    

영원한 인디락의 도시 맨체스터가 하우스 음악에 빠진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으로 돌아간다. 1980, 'Love will Tears us Apart'로 친숙한 70년대 인디락 밴드, 조이 디비젼 Joy Division의 카리스마틱한 보컬 이언 커티스는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우울증의 영향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이언을 떠나 보낸 나머지 멤버들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 )은 키보디스트였던 모리스의 여자친구를 새로이 영입한다. 이 때부터 이들은 뉴오더라는 이름 하에 기존 밴드 형태에 일렉트로닉 시퀀서와 드럼 머신을 겸비하고 새로운 전자 음악 사운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뉴오더의 사운드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반응은 실로 엄청났었고 그룹 이름이 의미하듯 이들의 새로운 등장은  맨체스터 인디락 씬의 죽음을 선언하고 다가올 전자 댄스 음악의 물결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들의 히트곡  'Blue Monday'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큰 반향을 일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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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cienda Club & Thunderdome  

뉴오더와 각종 신흥 인디 밴드의 고향이었던 팩토리 레이블의 프로듀서 토니 윌슨 (얼마 전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타계 했고 암 투병 속에서도 의지와 희망을 간직했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82년 맨체스터 나이트 라이프 문화의 전설로 남게 될 하씨엔다 클럽을 열게 된다. 뉴오더의 앨범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한 이 클럽은 당시 트렌드에서 앞서 나가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미학을 보여주었다 . 초기 사운드는 소울, 재즈 펑크, 라틴 계열의 음악을 주를 이루지만 1990년까지 6년 동안 이어진 마이크 피커링의 '누드 나이트'가 시작 되며 크라프트베르크 사운드에게 영향을 받은 일렉트로, 힙합 , 테크노팝, 애시드 하우스 등을 소개하고, 88년 즈음 본격적으로 트랙스 레코드, 디제이 인터내셔널에서 흘러 들어온 정통 애시드 하우스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는 당시 클러버들의 주를 이루었던 대학생들과 트렌디들 보다 저돌적이고 보헤미안의 성격을 가진 노동계층의 청년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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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가난한 노동 계층에게의 어필이라는 현상은 히피의 영향이 강했던 런던의 2nd Summer of Love와 크게 차이를 보인 것이었고 많은 이들이 진정한 맨체스터만이 가진 애시드 문화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이 모더니즘적인 사운드에 노팅햄의 개러지 클럽과 세필드의 자이브 터키 클럽도 가세했고 DJ 스투 알렌의 버스 디스 Bus Dis 라디오 쇼가 이 사운드를 소개하며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혜성처럼 등장한 해피 먼데이즈의 미쳤다 싶을 정도의 정열적인 퍼포먼스는 Freaky 프리키 댄싱이라는 표어를 만들어 내고 이른바 Madchester 씬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런던과 함께 맨체스터 서브컬쳐가 애시드 문화에 장악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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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드 문화가 그 덩치를 키워가며 하시엔다 클럽 또한 런던의 슘과 마찬가지로 인사이더들만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 이렇게 해서 맨체스터의 애시드 클럽씬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남쪽은 좀더 도회지향적이고 학생들과 미디어에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북부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거칠고 척박한 삶을 살아가던 노동 계층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 이 때  북부를 상징한 클럽이 바로 썬더돔 Thuderdome이었다. 하시엔다의 사운드가 디스코 디바 앤섬 식의 부드럽고 말랑말랑 한 것이었다면 스핀마스터즈와 스티브 윌리엄즈가 선사한 썬더돔의 사운드는 벨지안 하드비트를 연상 시키는 듯한 강하고 거친 것이었다 . 썬더돔의 위치 또한 맨체스터의 게토에 해당하는 올드햄 로드였고 특유의 하드코어적 사운드와 무너질 듯한 클럽의 내부는 외부인에게 위험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지만 거친 삶을 살아가던 노동계층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천국과 같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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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Mondays  & Stone Roses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과 마찬가지로 맨체스터의 젊은이들 또한 마가렛 데쳐를 향한 증오는 끝없이 불타올랐다 . 런던과 대비해 덜 엘리트적이고 낮은 사회 계층에 속해 있던 맨체스터의 청년층은 데쳐 정부가 펼쳐 놓은 웰페어 시스템에 적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80 년대 말 찾아온 대규모 실업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의 경로를 통한 수익을 찾게 만들었다. 이 때 주 수입원은 짝퉁 디자이너 옷들이나, 해적 레코드/컴퓨터 게임들의 유통, 마약 거래 , 신용카드를 이용한 사기 등이 주를 이뤘다. 이런 현상은 취업이나 어떠한 일에도 관심 없는 수많은 젊은 룸펜-프롤레테리아 (부랑자 혹은 집에서 빈둥거리는 실업 남성)들을 탄생하게 했다 .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며 하씨엔다에 나타난 밴드가 바로 해피 먼데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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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먼데이즈 그들 또한 엄청난 경력의 마약 거래를 자랑했고 ( 그들이 성공한 후에는 팬들에게 공짜 마약을 건네주며 함께 즐겼을 정도였다) 맨체스터 뿐만이 아니라 런던 등의 외부지역까지 손을 뻗쳤다. 하지만 오히려 이 경력이  오크폴드와 같은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의 주역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지도 말고 상관치도 말고 그냥 질러버려! 24시간 자지도 말고 파티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들의 사상과 하층 노동계층 출신의 이력은 당시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이상과 불만을 풀어줄 수 있는 호소력을 사운드 안에 심어 주었다 . (물론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엑스터시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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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비틀즈에게  롤링 스톤즈와 비치 보이즈라는 숙명적 라이벌이 있었듯이 이들에게도 스톤 로지즈 Stone Roses라는 걸출한 라이벌이 있었다. Funk, 노던소울, 펑크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해피 먼데이즈와는 달리 스톤 로지즈는  비틀즈에서 이어지는 60년대의 정통 사이키델리아를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이언 브라운이라는 영국 특유의 콧대 높은 보컬의 카리스마까지 가세해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 (롤링 스톤즈가 이들에게 자신들의 컨서트에서 서포트 밴드가 되어 줄 것을 요청 했지만 이언 브라운은 오히려 롤링스톤즈가 우리의 서포트 밴드가 되어야 한다며 단번에 묵살해 버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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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였건 이들의 활약으로 1989년 말 애시드 붐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대중문화 현상으로 확대되며 미디어 또한  매드체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11월 로지즈가 런던의 알렉산드라 팔레스에서 8000명의 관객을 상대로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가지고 해피먼데이즈가 영국의 탑 오브 더 팝스에 처음 데뷰하게 된 쾌거가 계기였다. 하루 아침에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맨체스터 씬의 하나가 되길 원하는 것만 같았다 . 1990년도 맨체스터 대학교의 지원자 수가 갑자기 전년도 대비로 치솟아 올랐고, 엑스터시의 영향으로 축구 훌리건들의 폭력 사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비록 89년과 90 년 사이의 단기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언더문화 평론가인 스티브 레드헤드는 그 해 겨울 시즌을 "사랑의 겨울'이라 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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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마찬가지로 매드체스터의 엑스타시 현상은 순수한 사랑과 이상의 거대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 그렇게 1990년을 치달으며 먼데이즈는 지미 머핀과 808 State의 서포트에 힘입어 G-Mex 센터에서 8000 명을 상대로 성공적인 이벤트를 마치게 되며 매드체스터 최절정의 순간을 장식한다. 이에 질세라 두 달 후 로지즈 또한 30,000명을 상대로 폴 오큰폴드, 프랭키 본즈 등과  함께 스파이크 아일랜드를 달구었다. 그리고 90년도 여름 뉴오더가 영국의 월드컵 테마송을 맡으며 대형 사고를 치게 되는데 그들이 내놓은 'E for England'이라는 음악 때문이었다 . 표면적으로 E는 잉글랜드의 첫 알파벳을 의미했지만 사실 엑스터시 Ecstasy 마약의 'E'라는 의미 또한 내포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인사이더들을 제외하고 그 누가 'E'의 의미를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덕분에 영국 전체가 "E for England!"를 외치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아이러닉 한 사건이었다. ( 엑스타시와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심의에 의해 'World in Motion'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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