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VUW (누락본) -
헤드칸디의 탄생에서 지금까지
** 옛날이라기엔 너무 요즘이고 요즘이라기에는 너무 철이 좀 지났다 싶어 누락된 헤드칸디 테마의 누락본 원고입니다...^^ㅋ -Groovie
국내에서 성행하고 있는 여러 파티 문화 그리고 각종 일러스트레이션에 많이 차용되고 있는 Hed Kandi는 영국의 프로듀서/DJ 마크 도일에 의해 태어난 하우스 음악 브랜드다. 철저한 테마 위주의 하우스 컴필레이션 앨범을 선보이며 제이슨 브룩스의 칸디걸 앨범 아트와 함께 현재 하우스 클럽 문화에 있어 '쿨 Cool'함의 대명사인 동시에 새로운 하우스 클럽 문화 스타일을 제시해 주었다.
Mark Doyle's Hed Kandi 1999~2007
1988년 영국은 런던과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쓰나미와 같은 애시드 하우스 붐에 뒤덮여 있었다. 이 때 런던에서 작은 클럽 이벤트를 열고 있던 마크 도일은 애시드 하우스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니키 홀로웨이가 운영하던 씬 클럽을 방문하게 되었다. 런던의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아스토리아에 위치하고 있던 이 클럽에서는 마침 DJ 피트 통이 현란한 스피닝으로 애시드 클러버들로 꽉 찬 댄스 플로어를 한껏 달구고 있었다. 누구나 그러했듯 애시드 하우스의 바이브는 마크 도일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고 그는 그 밤의 경험을 토대로 헤이븐 스테이블즈에서 '프리스타일 Freestyle' 나이트를 열었다. 트랙스와 시티 사운드 레코드 샵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크 도일은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12" 미국 임포트 레코드를 중심으로 헤이븐 스테이블즈를 런던 클러빙 씬의 중심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새로운 하우스 문화를 정의할 마크 도일이 DJ로서 첫 번째 작은 성공을 거둔 순간이었다. (그 시절의 플레이 리스트와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Back to Love> 컴필레이션을 내놓기도 했다.)
1999년 마크 도일은 GMG 라디오 산하의 스무스 재즈 라디오 스테이션인 JazzFM에 들어가게 되며 본격적으로 그가 사랑하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컴필레이션 앨범 구상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열린 분위기의 JazzFM은 그의 아이디어를 펼치기에 알맞은 곳이었고 JazzFM 이름 하에서 지금 헤드 칸디의 모태가 되는 비공식적인 최초의 소울 사운드 중심의 컴필레이션인 <Nu Cool Vol.1>과 <Nu Cool Vol.2>를 선보였다. (이때 두 번째 앨범 아트 워크를 제이슨 브룩스가 맡았다.) 그에게 있어 디제잉이란 같은 시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음악을 선사하는 것이었고 앨범을 만드는 것이란 그 시공간의 경험을 더욱 오랜 동안 그리고 더 멀리 확장 시키는 의미였다. 따라서 마크 도일은 실 시간적인 디제잉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저 예산 컴필레이션 앨범 기획에 대한 꿈을 실현 시키고자 한 발짝 더 나아갔고 마침내 헤드 칸디 레이블을 탄생 시켰다. 이렇게 태어난 <Nu Cool Vol.3>는 공식적인 최초의 헤드 칸디 앨범으로 기록된다.
Hed Kandi 이름의 어원
그가 진행하던 JazzFM의 프로그램 이름에서 따온 헤드 칸디의 이름은 전적으로 마크 도일의 아이디어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어 캔디 'Ear Candy'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이 캔디 'Eye Candy'를 처음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적인 센세이션은 모두 머리 Head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 발음 되는 소리를 따와 헤드 Hed Kandi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하였건 헤드 캔디가 아닌 '칸디'로 읽혀진다.)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행복함! 각종 테마를 바탕으로 한 뛰어난 선별력이 돋보이는 음악의 초이스와 제이슨 브룩스의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앨범 아트 워크로 대변되는 헤드 칸디! 바로 여기에 헤드 칸디 시리즈의 모든 핵심 요소가 담겨 있다.
지금은 헤드 칸디가 성공신화의 전설로서 알려져 있지만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레코드사는 마크 도일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투자를 하기를 꺼렸고 그는 마침내 사비를 들여 클러빙의 메카인 이비자 섬의 여러 클럽과 바에 앨범을 뿌렸으며 무료로 디제잉을 하며 2년여 동안 헤드 칸디의 홍보에 주력했다.
헤드 칸디 홍보에 있어 겪은 GMG와의 잦은 마찰에 의해 마크 도일은 갤럭시 라디오 스테이션으로 거처를 옮겼고 드디어 헤드 칸디의 성공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클럽 플로어를 쉽게 달굴 수 있는 뛰어난 음악들로 가득 찬 컴필레이션들도 그 종류가 늘어났고 제이슨 브룩스의 섹시하면서도 미니멀적인 앨범 아트 워크와의 조화는 '스타일은 곧 삶이다'라는 시대의 흐름과 적중했다. 그때부터 헤드 칸디는 단순한 음악 컴필레이션을 초월한 일종의 나이트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고 정의하는 시대의 심볼이 되어갔다. 레이블이 탄생하고 7년의 시간 동안 나온 50개가 넘는 앨범들 중 2개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Top 10에 들어갔고 500백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전 세계를 돌며 1000여 개가 넘는 파티를 소화해 냈다.
Post-Doyle Period
저 예산 레이블의 컨셉으로 시작된 헤드 칸디는 마침내 전 세계 클럽 씬에서 겉잡을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상업적 성공을 바라보며 마크 도일은 다시 한번 그의 일생을 돌아보았다. 과연 정해진 성공 가도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음악을 사랑하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일까? 거짓말처럼 그는 다가올 모든 부귀영화의 기회를 날려버리기로 결심했다. 이미 GMG 소유였던 헤드 칸디는 2007년 클러빙 브랜드의 거대 공룡인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에 (이하 MOS) 매각되었다. (놀랍게도 헤드 칸디의 창시자 임에도 불구하고 마크 도일은 소유자는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 헤드 칸디 팬들은 광분했다. 어떤 이들은 상업적 이윤에만 눈독 들이는 MOS 버젼의 헤드 칸디에 대해 우려했고 어떤 이들은 마크 도일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크 도일은 기존 헤드 칸디의 팬들을 실망 시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통제하기에는 불능의 상태로 덩치가 커져 버린 부담에 의해 그만 둔 헤드 칸디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그만의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피어스 엔젤Fierce Angel'라는 새로운 레이블의 컴필레이션 시리즈를 내 놓으며 초기 헤드 칸디의 순수한 사운드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본격적인 일렉트로, Funky 등의 크로스오버와 실험적인 액션을 취하며 오히려 기존 헤드 칸디의 사운드보다 더 탄탄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또한 헤드 칸디 성공의 핵심 주역인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의 가세로 전 세계 클러버들을 다시 한번 흥분시켰다.
한편 도일이 없는 MOS의 포스트 헤드 칸디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마크 도일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미 자신이 통제하기에는 불능의 상태로 덩치가 커져 버린 부담스러운 헤드 칸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MOS와 같은 거대 시스템이 오히려 지금의 헤드 칸디를 꾸려 나가기에 적격이라고 믿었다. 이미 도일이 구축해 놓았던 헤드 칸디의 브랜드 인지도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지만 지나친 상업성에 대해서는 많은 질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MOS의 성격이 그러하듯 헤드 칸디의 앨범은 공장에서 생산되듯 한 시즌에만도 엄청나게 발매되고 그 질적인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 기존의 전 세계 헤드 칸디 파티 투어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지만 기존의 헤드 칸디 팬들은 이미 등을 돌린 상태이고 무작정 유행만 따라 다니는 힙스터들만 난무할 뿐이었다. 마크 도일과 함께 떠나버린 앨범 커버 일러스트레이터인 제이슨 브룩스의 부재 또한 문제였다. 바톤을 이어받은 유명 디자인 그룹 Vault 49은 브룩스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고수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원작의 엄청난 아우라에 지배되던 팬들에게는 낯설고 어설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논란이 많이 줄어든 상태이긴 하다.)
어쨋든 이런 질적인 논란을 떠나 미니스트리 오브 사운드의 헤드 칸디의 상업적/마케팅적 성적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마크 도일의 헤드 칸디 사운드에 큰 변화를 두지 않은 액션은 기존 헤드 칸디 팬들에게는 역부족일지는 몰라도 클러빙과 하우스 문화에 갓 눈을 뜬 새로운 구매자와 클러버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게 여겨진다. 비난 받았던 Vault 49의 앨범 아트워크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고 2008년 마침내 제이슨 브룩스가 <Hed Kandi:The Mix>를 통해 옛 집으로 돌아오며 팬들을 흥분시켰다. MOS의 헤드 칸디 활용은 파티 이벤트와 음반 생산에만 멈추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라운지와 새로운 개념의 바 문화 열풍에 동참하며 숱한 화제를 뿌린 미니바를 발표하며 헤드 칸디를 테마로 한 칸디바 Kandi-Bar의 공간을 마련했다. 헤드 칸디 특유의 그래픽 그리고 주옥 같은 헤드 칸디 음악과 함께 여유 있게 칵테일 한잔을 나눌 수 있는 라운지 형식의 공간이다.
Tokyo Project, <Fierce Angel>
헤드 칸디가 MOS에서 새 삶을 개척해나가는 한편 마크 도일은 도쿄 프로젝트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레이블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5년에 시작된 이 레이블은 MOS의 저작권 소송 문제로 곧 문을 닫게 되고 피어스 엔젤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미 헤드 칸디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던 마크 도일이었기에 평단과 클러버들의 호평과 함께 순조로운 시작을 했다. 헤드 칸디와 엇비슷한 컨셉으로 <Tokyo Disco>, <Beach Angel>, <Es Vive Ibiza> 등의 새로운 컨셉 컴필레이션을 내놓았다. '성난 천사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레이블의 명칭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독립하여 열정적인 클럽씬을 위한 마크 도일과 그 동지들의 한층 더해진 열정과 결단을 엿볼 수 있다.
타인들에게 '성공한 사람'이라 인정받는 이들에게 성공의 이유를 묻는다면 10명 중 9명은 분명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공식적인 위치에서의 대답이라 그런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품어질 정도로 진부한 대답이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비단 겸손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마크 도일은 항상 음악을 향한 자신의 열정과 사랑에 대해 외쳐왔다. 그가 초기 헤드 칸디 홍보를 위해 자신의 사비와 시간을 바치면서 까지 이리저리 전전긍긍 한 것 또한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믿음 때문이었고 그 밑에는 클럽 음악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라는 원동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성공적인 DJ의 길을 걷고 있던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컴필레이션 앨범 제작의 모험을 떠난 것도 그러한 이유가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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