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뭐 리서치를 한 것도 아니고 7,80년대 아이돌 음악을 듣고 있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위키피디아를 뒤져 봤다.. 거의 위키피디아를 번역해 놓은 내용들이니 내 글이라고는 할 수 없고 걍 중간중간 내 말도 들어가 있긴 하다.. ^^ㅋ
1970s::: 새로운 음악과 아이돌의 등장
70년대는 이른바 "새로운 음악"이 도래하던 시기였다. 통기타 형식의 포크 음악에서 좀더 심화된 구조를 가지게 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락큰롤의 영향에 의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는 곧 좀더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메시지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랑같은...)
72년도에 타쿠로 요시다와 히로미 고가 데뷰하여 히트송들을 내놓고 73년에는 35주간 오리콘 1위를 장식한 코리노세카이를 부른 요수이 이노우에가 데뷰했다. 이 때 주목할 것이 유미 마츠토야 (유미 아라이)라는 여가수로 '아노히니 카에리타이'와 '오요게 타이야키쿤'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미유키 나카지마, 아미 오자키, 준코 야가미 등도 이 시대 인기를 누리던 아티스트들이었으며 마이 아마치, 모모에 야마쿠치, 캔디즈 등의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76년 데뷰한 핑크 레이디가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히트 곡이었던 페퍼 케이부 이후로 세계적인 대 스타로 성장하게 된다.
동영상:
Otokono Ko Onnano Ko by Hiromi Go 男の子女の子 ::: 郷 ひろみ
70년대 당시 고로 노구찌, 히데키 사이조와 함께 '새로운 3인방'으로 불리웠던 인기 아티스트.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최근에 일본의 게이-Wannabe 커미디언 하드 게이와 함께 방송에 출연한 것은 물론 일본 버젼의 리빙 라 비다 로카 (릭키 마틴)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제목은 Goldfinger '99이었다. 영상은 그의 70년대 히트곡인 '남자애 여자애' ^^
코리노 세카이, 얼음의 세계라는 음악으로 이노우에의 공전의 히트곡으로서 73년에 발표돼었다. 일본 음악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제작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69년 포크락 싱어로 데뷰했다. 일본에서 가수로 활동 중인 이후 사라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94년에 타미오 오쿠다와 함께 Puffy의 음반을 제작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Ano Hi ni Kaeritaiby Yumi Arai aka Yumi Matsutoya あの日に帰りたい :::荒井 由実
아라이 유미는 유미 마츠토야의 본명으로서 76년 마사타카 마츠토야와의 결혼 이후 유미 마츠토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가수 생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던 유미는 결국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며 78년 새 앨범을 시작으로 한 해에 두 앨범씩 꼬박꼬박 내며 활동하지만 그녀의 전성기였던 70년대 초중반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치달아 옛 명성을 되찾는다. 아무튼 가수 생활 총 420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운 대형급 아티스트다. 음악은 그녀를 최초로 오리콘 정상에 올려놓은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어'라는 곡으로 TBS 테레비 드라마인 [카데이 노 히미츠, 1975]에 삽입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은 감미로운 보사노바 풍의 포크 송.
메어리 홉킨의 Those are the Days를 떠올리는 77년대 발표된 와카레타 우타를 시작으로 80년대 초반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싱어송라이터다. 호카이도 사뽀로 출신 아티스트로 정치와 의학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고3시절 처음으로 컨서트를 경험하고 음악 인생을 살기로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음악말고도 90여개가 넘는 음악을 작곡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80년대 거물급 아이돌 스타였던 시즈카 쿠도의 히트곡 "Fu-Ji-Tsu"도 포함되어 있다.
幸せの時by Junko Yagami 1974 幸せの時 :::八神純子
미즈이로노 아메로 널리 알려진 준코 야가미의 곡으로 78년 데뷰의 계기를 만들어준 74년 제 8회 팝콘 컨테스트 수상곡이다.. 준코 야가미는 74,75년 모두의 팝콘 컨테스트를 석권했었다. 국내 조성모를 떠올리는 전형적인 오케스트랄 발라드 곡으로 그녀의 다른 히트곡들도 강추할 만큼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미즈이로노 아메를 올리고 싶었지만 위 아라이 유미와 비슷한 보사노바 풍이라 이 곡을 올림)
IDORU: 70년대 나오기 시작한 아이돌 음악들 영상
Light blue Loveby Mari Amachi 1971 Light Blue Love :::天地真理
이런 느낌 때문에 일본 뿐만이 아니라 국내 및 일본의 70,80년대의 음악을 좋아한다. 지금와서 뮤직 비됴를 보니 왠지 [Enchanted Love]라는 디즈니 영화가 생각난다...
마리 아마치의 전성기는 일본 아이돌의 전성기였던 바로 70,80년대였고 나중에 세이코 마츠다에게 깨지긴 했지만 이전까지 5개의 오리콘 넘버원 싱글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Ii Hi Tabidabichiby Yamaguchi Momoe 1978 いい日旅立ち :::山口百恵
70년부터 80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대표적 초기 아이돌 스타 중 한명이다. 음악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이를을 날렸고 토모카즈 미우라와의 결혼을 위해 연예활동을 중단했다. 불과 13세살의 나이에 스타 탄조 대회에 출연해 2위에 머물렀지만 그녀의 숨겨진 매력때문인지 수많은 계약 오퍼를 받았었다. 그녀의 영화와 음악 동시 데뷰였던 토시고로가 저조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두 번째 싱글, 아오이 카지츠가 성공하며 본격적인 모모에 시대를 열게 되었다.
아이돌인 관계로 제작사의 원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음악이 상당한 센세이션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녀의 가사 들 중엔, "날 아무렇게 해도 괜찮아요," "여자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당신께 드릴게요" 같은 노골적인 (?) 면들이 보여졌는데... 13살짜리가 이런 소리를 내게 해댄다고 하면... 음... 롤리타 성향과 거리가 먼 난 좀 당황? 암튼 그녀의 인기가 올라가고 나서 점점 자신의 설정이 자유로워지며 이러한 성향과 거리를 멀리 하고 좀더 강한과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나타내는 음악을 선호했다.
Yasasii Akumaby The Candies 1977 やさしい悪魔 :::キャンディーズ
렌, 수, 미키로 구성된 70년대 3인조 아이돌 그룹으로 73년 데뷰했다. 활동 당시 8개의 탑텝 히트곡을 남겼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던 그룹으로 78년 피크에 다달았을때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고 싶어요'라는 유명한 멘트를 남기고 팀은 해체되었다.
Pink Lady VS. The Candies
캰디즈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70년대 대형 아이돌 스타는 바로 핑크 레이디였다. 캔디즈가 좀더 귀엽고 하모나이즈에 집중하던 그룹이었다면 핑크레이디는 그 화려하고 폭발적인 퍼포먼스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카모토 큐 이후 처음으로 빌보드에 진입했던 핑크 레이디는 일본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대형 스타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의 관계는 지금 원더걸즈 VS 소녀시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비슷한 공식의 대형 아이돌 그룹의 양강 대립 구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대립 구조는 분명 팬들의 입장에서 스포츠와 같은 식의 재미를 안겨줄 뿐더러 수많은 거십거리와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70년대 락 음악의 행방은?
에이키치 야자와의 등장과 함께 그동안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인식되던 락음악은 드디어 대중의 귀를 잠식시키기 시작한다. 토키요토마레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그는 눈을 세계로 돌려 워너 파이오니어 레코드와 계약을 하지만 세계적인 아티스트로서의 성공에는 실패하게 된다.
이 때 즈음 (1978) 일본 락 음악계에 지금까지 사랑받는 두 거성들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내에서도 많은 골수팬을 가지고 있는 케이수케 쿠와타의 사우던 올 스타스며 또 하나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몸을 담고 일렉트로니카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아방가르드 밴드 엘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였다. 특히 류이치 사카모토는 훗날 J-Pop을 이끌게 되는 Mr.Children, Dreams Come to True 등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어쨋든 이들의 등장으로 70년대 일본 뉴뮤직 에라는 끝이 나고 새로운 물결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작을 알린 대중적 신호탄은 79년 Chage and Aska의 사요나라라는 곡이다.
동영상:
Travelin' Busby Eikichi Yazawa トラベリンバス :::矢沢永吉
역시 일본 대중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77년 솔로 락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부도칸 컨서트를 치루었고 그 때 모인 인파는 약 13000여명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100번의 부도칸 컨서트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78년 그는 도쿄 홈구장에서 40000명의 인파를 상대로 컨서트를 열기도 한다.
Metropolisby Yellow Magic Orchestra aka YMO 1979
듣자 마자 딱 Kraftwerk를 연상 시키는 일렉트로 팝 그룹으로서 이런 류의 전자 음악이 일본에서는 테크노팝이라 불리우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015B의 등장이 만들어낸 대중가요의 훈훈한 지각변동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의 레벨로서 보면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악 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영향력을 과시한 그룹으로 음악 뿐만이 아니라 패션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일본 중년 남성들이 아직까지 지향하고 있는 소위 테크노컷이라 불리우는 머리 스타일은 바로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