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6:

                                   Madchester Part2


808 State & A Guy Called Geral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번 파트1에서는 매드체스터의 시작과 그 중심에 있던 밴드들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대체 DJ들은 어디 있었는가? 표면 상으로 볼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는 인디밴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기서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애시드 '하우스' 붐의 한 사건인 매드체스터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일 수 밖에 없듯이 정통 인디밴드의 역사를 자랑하는 맨체스터를 향한 미디어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즉 기존의 락 관련 미디어는 흑인 태생의 하우스의 영향을 무시했고 백인으로 구성된 락의 정신을 가진 듯한 인디밴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먼데이즈와 로지즈 모두 댄스 문화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애시드 문화의 한 일원이 되었다. 먼데이즈의 경우 워낙 복합적인 음악 성향과 리믹스의 활용 그리고 하우스씬에 대한 관여도 면에서 애시드 문화와의 이질성이 발견되지 않지만 로지즈의 경우 'Fool's Gold'를 통해 하우스 음악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정통 인디락 밴드의 성향을 고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애시드 하우스의 사운드를 품은 초기 그룹은 바로 808 State. 퓨전 재즈, 일렉트로, 신스팝을 중심으로 한 808 State 1988 'Pacific State'를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그룹의 멤버였던 제랄드 심슨은 '가이 콜드 제랄드'라는 이름을 통해 808 state에서 탈퇴하고 'Voodoo Ray'를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애시드 하우스 클럽의 앤섬이 될 만큼 Pacific State에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제랄드 심슨은 차기 앨범 준비에 있어 레코드 회사의 상업화 아이디어의 신물을 느끼고 언더그라운드로 잠적하고 90년대 중반 철저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프로듀서의 모습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드럼 엔 베이스'의 모태가 되는 '정글' 씬을 탄생 시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심슨을 떠나 보낸 808 State는 오히려 상업 레이블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애시드 하우스의 선봉장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이들의 성공은 동시대 아티스트들 (칠아웃 장르를 탄생시킨 KLF, 뉴에이지 이상을 담은 The Shamen, 사이키델리아를 통한 하우스의 정치적 좌파 성향을 더한 Primal Scream )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애시드 하우스가 오늘 날 회고될 때 먼데이즈와 로지즈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이들이야 말로 사운드적 크로스오버와 댄스를 통해 음악과 몸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하우스 문화의 이상을 사운드로 풀어낸 주역들이었다
. (그들에게 있어 하우스 문화의 폭발은 펑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펑크가 자신의 팔의 완력을 최고조화 시켜 기타를 부셔버리는 물리적인 분노의 폭발이었다면 하우스는 몸의 완력을 댄스에 맞추어 완화 시키며 일체화 시키는 트랜스적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몰락
 

  

사용자 삽입 이미지
런던과 마찬가지로 마약에 의한 갱들의 개입과 정부의 불법 클러빙 및 레이브 탄압이 시작되었다. 1989 7월경 16살의 클레어 레이튼이라는 소녀가 엑스타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런던과 같은 운명의 스텝을 따르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디어는 야단 법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트렌디/애시드 테드로 구성된 어린 청년들을 애시드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버렸다.

그리고 당시 악명 높았던 살포드 폭력단의 개입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서브컬쳐의 죽음의 상징이 되어온 마약, 코케인이 다시 등장했다. (갱들은 엑스터시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 수입원은 언제나 코케인이였기에) 잦은 갱들 간의 마찰과 살인 사건, 마약의 유통 등은 경찰의 강한 제지를 불러들였고 하시엔다에서는 총기류 검문을 위한 메탈 디텍터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맨체스터는 매드체스터에서 건체스터Gunchester로 불렸고 물론 파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클러빙/레이브 프로모터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드체스터의 기간 동안 사랑과 우정, 이상과 희망으로 쌓아 올린 공동체 의식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며 파도와 같은 사이코시스와 파라노이아를 불러일으켰다. 91년 즈음 하시엔다가 문을 닫은 것은 물론이고 하시엔다와 어깨를 겨누며 시대를 풍미했던 썬더돔과 컨스퍼러시 클럽들 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매드체스터를 대표하던 먼데이즈와 로지즈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걷는 것 같았다. 로지즈는 스파이크 아일랜드 이후 종적을 감추었고 먼데이즈는 저명 음악지 NME지와의 인터뷰에서 매드체스터의 종결을 알리는 듯한 사건을 터뜨린다. 그들은 그 동안 지켜 왔던 노동계급층의 대변자의 위치를 던져버리고 소비주의적 시선에서 돈에 대한 찬양, 게이에 대한 혐오감, 여성 비하 발언 등을 늘어뜨려 놓았다. 물론 이것은 미디어와 대중에게는 용서될 수 없는 비윤리적 발언이었고 즉각 모든 이들이 먼데이즈의 몰락을 예감하게 되었다.

또한 밴드 리더 션 라이더의 헤로인 중독 이후 빚어진 차질과 이로 인해 연기된 뉴오더의 차기 앨범 등의 문제로 인해 팩토리 레이블이 부도가 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90년도 말에 출시 된 먼데이즈의 <Pills 'n' Thrills and Bellyaches> 앨범은 수많은 사건 사고를 떠나 매드체스터 시대를 총망라한 마지막 위대한 앨범으로 기록된다.)  


Epilogue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기의 매드체스터 향연의 빛이 서서히 꺼졌을 때 맨체스터의 클럽들은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를 완화하는 곳도 있었고 도시의 외각지역에서 이벤트를 여는 클럽도 생겨났다. (갱들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게리 매클라란의 딜라이트 클럽으로 이곳에서 알렉산더 코이라는 새로운 전설의 DJ 클러버들을 광분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매드체스터의 마지막 자락에 혜성처럼 나타난, 믹스매그 매거진이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Sasha 사샤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밖에 주목할 점은 갱들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사람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게이 클럽이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회적 소수의 하나인 게이 커뮤니티는 그 특성 상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는 디스코와 마찬가지로 애시드 하우스가 그 숨결을 다시 내 쉴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로서 백인 남성 성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하우스 클럽에서 디스코 댄스에 맞추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근육질의 남성들, 레즈비언, 드래그퀸들이 씬의 모습을 채워가고 있었다. 물론 도어폴리시가 강한 곳이 태반이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갈 시에는 바운서 앞에서동성'의 친구에게 프렌치 키스 등을 감행하며 자신이 '스트레이트'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는 비화도 있다. 이 움직임에 하시엔다 클럽도 맨체스터의 새로운 게이 클럽으로 변모했다. 맨체스터가 매드체스터, 건체스터에 이어 '게이체스터 Gaychester'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매드체스터의 한파로 인한 나이트 라이프의 때 아닌 붐은 곧 도시 수입의 기특한 효자 노릇을 했다. 따라서 광기의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길들어졌을 때 즈음 혹독했던 클럽 라이센스 규제들은 완화되었다. 종전에 비해 바와 클럽은 두 배로 늘어났고 24시간 쉬지 않는 문화와 클러빙 레져의 메카로 맨체스터는 거듭났다. 하지만 갱들 간 마찰, 마약 뒷거래와 같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특성의 문화가 이제는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를 남겼다. 어찌하였건 96년 즈음되어 애시드 하우스는 이제 '올드 스쿨' 사운드가 되어 정글, 테크노, 개러지와 같이 세분화 된 다양한 장르에 문화의 중심 자리를 내 주게 되었다.  

 


 

Recommanded Acid Tracks (순위 기준 없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1.Give Me Some Love by Love Corporation


사용자 삽입 이미지
2.Beat Dis by Bomb the Ba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3.Activ-8 (Come with Me) by Altern 8



사용자 삽입 이미지
4.Everything Starts with an E by E-Zee Possee



사용자 삽입 이미지
5.What Time is Love? By The KLF



사용자 삽입 이미지
6.Theme from SExpress by SExpre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7.Pacific State by 808 State



사용자 삽입 이미지
8.Voodoo Ray by A Guy called Gerald



사용자 삽입 이미지
9.We Call it Acieed by D Mob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Move Any Mountain by The Shamen

 

728x90
반응형
반응형

PLUR & Vibe Upon the World 12 월자: MADCHESTER part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 문화의 중심, 맨체스터  

 박지성 선수로 인해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도시 , 맨체스터는 오랜 동안 영국의 중요한 현대 역사의 순간을 장식해 왔다. 근대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이 곳은 빅토리안 시대의 기업과 상업을 발전 시키며 '세계의 굴뚝'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 사회주의자였던 엥겔스가 머물렀었고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의 아이디어를 얻게 했을 정도였다니 시절의 엄청난 위용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대로 제조업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 이에 대한 탈출구를 새로운 문화와 레져 사업에서 찾게 되며 맨체스터는 음악, 미디어, 스포츠 등을 통해 서서히 영국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도시가 가진 경제력을 통해 얻어지는 추진력과 크지도 좁지도 않은 땅덩어리로 인한 내부 커뮤니티 형성의  용이함을 통해 구축된 탄탄한 음악산업의 인프라스트럭쳐는 케미컬 브라더스, 오아시스, 뉴오더, 찰라탄즈, 스미스 등과 같은 걸출한 음악인들을 배출해 내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New Order    

영원한 인디락의 도시 맨체스터가 하우스 음악에 빠진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으로 돌아간다. 1980, 'Love will Tears us Apart'로 친숙한 70년대 인디락 밴드, 조이 디비젼 Joy Division의 카리스마틱한 보컬 이언 커티스는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우울증의 영향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이언을 떠나 보낸 나머지 멤버들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 )은 키보디스트였던 모리스의 여자친구를 새로이 영입한다. 이 때부터 이들은 뉴오더라는 이름 하에 기존 밴드 형태에 일렉트로닉 시퀀서와 드럼 머신을 겸비하고 새로운 전자 음악 사운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뉴오더의 사운드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반응은 실로 엄청났었고 그룹 이름이 의미하듯 이들의 새로운 등장은  맨체스터 인디락 씬의 죽음을 선언하고 다가올 전자 댄스 음악의 물결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들의 히트곡  'Blue Monday'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큰 반향을 일고 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acienda Club & Thunderdome  

뉴오더와 각종 신흥 인디 밴드의 고향이었던 팩토리 레이블의 프로듀서 토니 윌슨 (얼마 전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타계 했고 암 투병 속에서도 의지와 희망을 간직했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82년 맨체스터 나이트 라이프 문화의 전설로 남게 될 하씨엔다 클럽을 열게 된다. 뉴오더의 앨범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한 이 클럽은 당시 트렌드에서 앞서 나가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미학을 보여주었다 . 초기 사운드는 소울, 재즈 펑크, 라틴 계열의 음악을 주를 이루지만 1990년까지 6년 동안 이어진 마이크 피커링의 '누드 나이트'가 시작 되며 크라프트베르크 사운드에게 영향을 받은 일렉트로, 힙합 , 테크노팝, 애시드 하우스 등을 소개하고, 88년 즈음 본격적으로 트랙스 레코드, 디제이 인터내셔널에서 흘러 들어온 정통 애시드 하우스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는 당시 클러버들의 주를 이루었던 대학생들과 트렌디들 보다 저돌적이고 보헤미안의 성격을 가진 노동계층의 청년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칠고 가난한 노동 계층에게의 어필이라는 현상은 히피의 영향이 강했던 런던의 2nd Summer of Love와 크게 차이를 보인 것이었고 많은 이들이 진정한 맨체스터만이 가진 애시드 문화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이 모더니즘적인 사운드에 노팅햄의 개러지 클럽과 세필드의 자이브 터키 클럽도 가세했고 DJ 스투 알렌의 버스 디스 Bus Dis 라디오 쇼가 이 사운드를 소개하며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혜성처럼 등장한 해피 먼데이즈의 미쳤다 싶을 정도의 정열적인 퍼포먼스는 Freaky 프리키 댄싱이라는 표어를 만들어 내고 이른바 Madchester 씬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런던과 함께 맨체스터 서브컬쳐가 애시드 문화에 장악된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애시드 문화가 그 덩치를 키워가며 하시엔다 클럽 또한 런던의 슘과 마찬가지로 인사이더들만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 이렇게 해서 맨체스터의 애시드 클럽씬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남쪽은 좀더 도회지향적이고 학생들과 미디어에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북부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거칠고 척박한 삶을 살아가던 노동 계층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 이 때  북부를 상징한 클럽이 바로 썬더돔 Thuderdome이었다. 하시엔다의 사운드가 디스코 디바 앤섬 식의 부드럽고 말랑말랑 한 것이었다면 스핀마스터즈와 스티브 윌리엄즈가 선사한 썬더돔의 사운드는 벨지안 하드비트를 연상 시키는 듯한 강하고 거친 것이었다 . 썬더돔의 위치 또한 맨체스터의 게토에 해당하는 올드햄 로드였고 특유의 하드코어적 사운드와 무너질 듯한 클럽의 내부는 외부인에게 위험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지만 거친 삶을 살아가던 노동계층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천국과 같은 공간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appy Mondays  & Stone Roses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과 마찬가지로 맨체스터의 젊은이들 또한 마가렛 데쳐를 향한 증오는 끝없이 불타올랐다 . 런던과 대비해 덜 엘리트적이고 낮은 사회 계층에 속해 있던 맨체스터의 청년층은 데쳐 정부가 펼쳐 놓은 웰페어 시스템에 적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80 년대 말 찾아온 대규모 실업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의 경로를 통한 수익을 찾게 만들었다. 이 때 주 수입원은 짝퉁 디자이너 옷들이나, 해적 레코드/컴퓨터 게임들의 유통, 마약 거래 , 신용카드를 이용한 사기 등이 주를 이뤘다. 이런 현상은 취업이나 어떠한 일에도 관심 없는 수많은 젊은 룸펜-프롤레테리아 (부랑자 혹은 집에서 빈둥거리는 실업 남성)들을 탄생하게 했다 .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며 하씨엔다에 나타난 밴드가 바로 해피 먼데이즈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피 먼데이즈 그들 또한 엄청난 경력의 마약 거래를 자랑했고 ( 그들이 성공한 후에는 팬들에게 공짜 마약을 건네주며 함께 즐겼을 정도였다) 맨체스터 뿐만이 아니라 런던 등의 외부지역까지 손을 뻗쳤다. 하지만 오히려 이 경력이  오크폴드와 같은 런던의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의 주역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지도 말고 상관치도 말고 그냥 질러버려! 24시간 자지도 말고 파티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들의 사상과 하층 노동계층 출신의 이력은 당시 맨체스터 젊은이들의 이상과 불만을 풀어줄 수 있는 호소력을 사운드 안에 심어 주었다 . (물론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엑스터시도 함께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60년대 비틀즈에게  롤링 스톤즈와 비치 보이즈라는 숙명적 라이벌이 있었듯이 이들에게도 스톤 로지즈 Stone Roses라는 걸출한 라이벌이 있었다. Funk, 노던소울, 펑크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해피 먼데이즈와는 달리 스톤 로지즈는  비틀즈에서 이어지는 60년대의 정통 사이키델리아를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이언 브라운이라는 영국 특유의 콧대 높은 보컬의 카리스마까지 가세해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 (롤링 스톤즈가 이들에게 자신들의 컨서트에서 서포트 밴드가 되어 줄 것을 요청 했지만 이언 브라운은 오히려 롤링스톤즈가 우리의 서포트 밴드가 되어야 한다며 단번에 묵살해 버릴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찌하였건 이들의 활약으로 1989년 말 애시드 붐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대중문화 현상으로 확대되며 미디어 또한  매드체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11월 로지즈가 런던의 알렉산드라 팔레스에서 8000명의 관객을 상대로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가지고 해피먼데이즈가 영국의 탑 오브 더 팝스에 처음 데뷰하게 된 쾌거가 계기였다. 하루 아침에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맨체스터 씬의 하나가 되길 원하는 것만 같았다 . 1990년도 맨체스터 대학교의 지원자 수가 갑자기 전년도 대비로 치솟아 올랐고, 엑스터시의 영향으로 축구 훌리건들의 폭력 사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비록 89년과 90 년 사이의 단기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언더문화 평론가인 스티브 레드헤드는 그 해 겨울 시즌을 "사랑의 겨울'이라 부를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런던과 마찬가지로 매드체스터의 엑스타시 현상은 순수한 사랑과 이상의 거대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 그렇게 1990년을 치달으며 먼데이즈는 지미 머핀과 808 State의 서포트에 힘입어 G-Mex 센터에서 8000 명을 상대로 성공적인 이벤트를 마치게 되며 매드체스터 최절정의 순간을 장식한다. 이에 질세라 두 달 후 로지즈 또한 30,000명을 상대로 폴 오큰폴드, 프랭키 본즈 등과  함께 스파이크 아일랜드를 달구었다. 그리고 90년도 여름 뉴오더가 영국의 월드컵 테마송을 맡으며 대형 사고를 치게 되는데 그들이 내놓은 'E for England'이라는 음악 때문이었다 . 표면적으로 E는 잉글랜드의 첫 알파벳을 의미했지만 사실 엑스터시 Ecstasy 마약의 'E'라는 의미 또한 내포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인사이더들을 제외하고 그 누가 'E'의 의미를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덕분에 영국 전체가 "E for England!"를 외치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아이러닉 한 사건이었다. ( 엑스타시와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심의에 의해 'World in Motion'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3:  2007년  10월자
              2nd Summer of Love, the London tale: 두 번째 사랑의 여름

IBIZA; 발레릭 사운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러버들의 영원한 고향인 이비자 섬은60년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곳이었지만 그 시절 공산주의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정책에 의해 새로운 관광의 요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특히 낮았던 스페인 환율 덕분에 이비자는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지 못한 젊은 중산/노동층 영국인들에게 고아와 카쉬만두와 함께 환영 받는 휴가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비자의 공짜 파티, 보헤미안적인 열린 분위기와 아름다운 달과 별빛은 어둡고 우울한 런던에 지친 젊은 브릿들을 따스하게 맞이 했다.

이 때 Pacha와 Amnesia는 이비자의 중심 클럽으로 히피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 시절 Amnesia는 전기 공급이 없는 농장 같은 곳에서 모닥불을 피고 레게와 사이키델릭락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디스코의 시대가 도래하며 히피 세상은 막을 내리고 이비자의 클럽들 또한 나이트클럽으로서의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80년대에 접어들며 젊은 브릿들 뿐 아니라 게이, 뉴 에이지 전도사 등을 포함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비자를 찾게 된다. (이와 동시에 전설의 엘릭시르elixir로 통하는, 엑스타시도 슬슬 이 곳을 상륙한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1987년경 이비자의 산 안토니오에 The Project라는 바가 문을 열게 된다. 영국 DJ 트레버 펑과 이언 세인트 폴이 세운 이 곳은 브릿들만의 일종의 미팅 포인트가 되었다. 프로젝트에 모인 젊은 브릿들은 암네시아로 자리를 옮겨 엑스타시에 취해 DJ 알프레도 피오리오가 선사하는 몽환적인 여행을 떠났다. (Amneisa의 DJ 알프레도 피오리오 Alfredo Fiorillo는 서로 다른 연령과 사회 계층이 주를 이루는 특이한 환경에 의해 다양한 음악으로 그들의 여행을 책임 졌다. 레게와 Funk로 시작해 존 레논의 감미로운 이매진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식의 그 만의 디제잉은 트렌드를 떠나 폭넓은 사람들의 정서를 껴안을 수 있는 이비자 섬만의 에센스를 담아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스라이 동이 터오는 새벽의 신비로움, 히피의 유산 그리고 쾌락의 요소를 담은 발레릭 코드가 탄생하게 되었다.)그리고 Cala Salada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카페 델 마르Cafe Del Mar로 움직여 DJ 호제 파디야가 떨어뜨리는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를 들으며 상쾌한 오전의 공기를 흠뻑 마셨다. 그런 루틴을 반복하며 보낸 그들만의 여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상 그 자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해 9월 훗날 폭풍처럼 휘몰아쳐올 영국 애시드 하우스 씬을 이끌어 갈 핵심 인물들이 이 프로젝트 바에 모이게 된다. 폴 오큰폴드, 쟈니 워커, 닉키 할러웨이 그리고 대니 램플링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전 브릿들과 마찬가지로 엑스타시와 함께 발레릭 사운드를 처음 접하며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비자의 주술에 휘말린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느낌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리라 결심한다.   


다시 우울한 런던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가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좌파 정당과 잦고 길었던 스트라이크를 이끈 노동계급의 패배는 젊은 브릿들로 하여금 마가렛 데쳐의 보수정당을 향한 깊은 증오와 패배감만을 안겨 주었다. 또한 데쳐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빈부의 차이는 더욱 늘어나고 모두들 신용을 이용한 소비에 미친 듯이 열을 올렸다. 이는 무인지경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돈이 곧 신이요 법이라는 진리를 만들어 냈다. 이 흐름 속에 찾아온 영국의 경제 침체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열등감과 허탈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분위기는 런던의 클럽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런던의 클러빙이란 그저 술에 찌들어 이성에게 집적대고 디자이너 의상으로 화려하게 차린 자신의 쿨 함을 한 것 뽐내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들은 춤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대략 옛날 국내 나이트 실정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 컬쳐의 공간에는 당연히 돈과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낄 수 없는 그런 성역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트렌디들을 향한 ‘가진 것 없고, 촌스럽고 지저분한’ 이들의 열등감은 팽배했다. ‘

   
          사운드적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영국은 Jazz와 Funk 등의 Rare Groove에 의해 주도 되고 있었다. 그 즈음에서 나온 섹스프레스나 M/A/R/R/S 등의 팝 차트 선전이 애시드 하우스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까지 영국에서 애시드 사운드는 일종의 페드fed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조금씩 늘어나는 브릿-이비쟌들의 여름의 향수를 채워줄 공간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클럽 노엘과 딜리리엄이 런던에서 유일하게 애시드 사운드를 제공하였지만 기존의 Funk, Hip Hop 그룹과의 충돌이 잦았다. 예를 들어 그 때 당시 선풍적이었던 디트로이트 테크노 트랙인 데릭 메이의 Strings of Life는 댄스 플로어를 싹 비워버리는 진공 청소기와 같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비자에서의 소중함 기억을 현실화 시키고자 결심했던 오큰폴드, 폴, 램플링, 홀로웨이 등이 각기 런던에 발레릭-애시드 클럽을 열며 영국 전체 클럽 씬은 물론 브릿팝의 판도 자체를 발칵 뒤집어 놓게 된다.   


The Project & Spectrum : 광란의 월요일 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갈데 없이 방황하는 런던의 브릿-이비쟌들에게 오큰폴드와 이언 세인트 폴은 프로젝트 클럽이라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경찰 검문에 의해 금방 문을 닫게 되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 둘은 생츄어리 클럽에서 Future 나이트 파티를 열게 된다. 이비자의 메모리를 바탕으로 한 퓨쳐 나이트를 이끌어감에 있어 오큰폴드에게 주어진 하우스 트랙 설렉션은 긴긴 밤을 책임 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다양한 음악적 배경과 DJ 알프레도의 섬머 앤썸 등을 활용하며 오큰폴드는 발레릭 클럽의 이미지를 부각 시켰다. 그때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한 클러빙 경험은 생소했지만 브릿-이비쟌들과 많은 로컬들은 열광했으며 성공적인 하우스 열풍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이비자의 발레릭 바람이 런던 언더그라운드 클럽 계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을 무렵 이언은 오큰폴드와 쟈니 워커에게 엄청난 제안을 한다. 바로 1500명+ 수용의 헤븐 클럽에서 월요일 파티 이벤트를 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해본 적도 없는 무모하게만 보이는 이 계획은 “Spectrum: a Theatre of Madness”라는 타이틀로 감행된다. 클럽 경영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갑자기 엄청난 센세이션과 함께 기적적인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웨스트 엔드 트렌디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디자이너 의상을 던져 버리고 춤추기에 편안한 트레이닝 복과 배기 팬츠로 무장한 클러버들은 황홀경에 빠져 월요일 밤을 뜨겁게 불살랐다. 세련된 드레스 코드 문화와 트렌디의 전통을 무참히 깨어버린 대 사건이었다. “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었으며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억압되었던 에너지의 폭발로 인한 오버나이트 센세이션이었다. 이 새로운 열풍은 곧 i-D매거진과 같은 팬진에 소개되기도 하지만 중심 요소인 엑스타시나 애시드에 관해서는 자세히 소개되지는 않았다. 브릿-이비쟌들에게 있어 이비자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자신들만의 소중한 씬을 지키고 싶은 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The Shoom: 걱정일랑 접어두고 웃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큰폴드 등과의 이비자 여행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대니 램플링은 그의 아내, 제니와 함께 1987년 12월경 클럽 역사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슘 클럽을 열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섹시한지를 과시하는 웨스트 엔드와는 달리 슘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한 경험이었다. 사랑, 함께함, 나눔, 인생의 환희를 모토로 삼아 슈머Shoomer들은 애시드 음악에 빠져 사랑과 희열의 밤을 보냈다. 춤이라기 보다는 음악의 비트에 빠진 쿵푸 모션에 더 가까운 그들의 프릭키 댄싱 (Freaky Dacing)은 스타일에 찌들은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이 지쳐있었나를 보여주는 거침 없는 하이킥이었다. 뉴욕의 스튜디오 54를 방불케 할 만큼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에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단 인사이더로 인정 받으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안에서 모두는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들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비자의 유포릭Euphoric한 경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시간 상 가장 가까운 모체인 히피 사상을 차용했다. 사랑, 평화, 존중을 외치던 히피의 60년대는 분명 이러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첫 번째 사랑의 여름은 바로 히피의 60년대를 지칭한다) 그러한 영향과 함께 대니는 히피의 상징이었던 노란 스마일리 로고를 슘의 마스코트로 도입한다. 그때부터 “the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Shoom Club”의 글과 함께 수많은 스마일리 로고가 눈처럼 슘의 플라이어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물론 스마일리 페이스가 레이브의 상징이 된 것도 이때부터다) 제2사랑의 여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슘은 철저한 뉴스레터와 클럽 멤버십 스킴 관리에서부터 물, 과일 등의 공짜 제공 등 훗날 레이브 프로모션의 좋은 지침서로 자리 잡았다.

             만약 누군가 갑자기 당신의 볼을 쫙 잡아당기며 “웃어요~”라며 스마일리 스티커를 붙여준다면? 당신은 그를/그녀를 꼭 껴안고 “사랑해요”라며 환한 미소를 건넬 것이다. 슘은 그런 행동이 가능하고 당연한 곳이었다.


 RIP party: 런던 블랙 컬쳐의 자존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비자 베테랑들과 백인 위주의 성향이 짙었던 애시드 하우스 열풍 속에 RiP파티는 이비자와는 상관없이 기존 런던의 흑인 문화를 위주로 자신들만의 파티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시카고나 뉴욕의 웨어하우스 파티 그리고 레게와 소울의 전통을 지켜나간 폴 스톤과 루 뷰코빅의 RiP(Revolution in Progress)은 테크노,애시드,개러지 사운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파를 소화해 냈다. 슘이 연령, 성, 사회적 계급 등의 벽을 허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파티로만 보여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RiP의 경우 흑인 백인 등의 인종별 다양성을 넘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이었다. 옛 클러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RiP파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과 가장 추악한 사람들 모두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펑크의 배경을 가진 루 뷰코빅은 여기서 애시드 문화가 가진 정치적 힘을 보았다, 바로 새로운 변화의 물고를 틀 수 있는 강력하고 순수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조화의 힘을.

자신들만의 씬을 지키기 위해 뷰코빅은 철저히 미디어의 개입을 막았기 때문에RiP파티는 슘과 스펙트럼만큼 오늘날의 클럽 전설로 회자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에 의해 상처받는 수많은 언더문화들을 보면 그들만이 간직했을 ‘열정과 순수함’은 충분히 상상해 볼 만 하다.


The Trip: 애시드 하우스의 폭발 그리고 여름의 끝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8년 6월 런던 웨스트 엔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애스토리아Astoria에 트립 TRIP자리를 잡으며 제2 사랑의 여름이라 불리는 레이브 / 엑스타시 열풍은 오버그라운드화 되어 버린다. 하룻밤 만에 모든 런던 주류의 클럽 사운드가 애시드 하우스로 대체 되며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문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트립의 주인인 닉키 할러웨이는 수많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슘 클럽 또한 ‘그들만의 파티’이기를 포기한 듯 웨스트엔드의 토튼햄 코트로 자릴 옮기고 유명한 셀레브리티들을 모시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메인 파티 이벤트를 오큰폴드의 퓨쳐 나이트와 겹치는 목요일로 재설정하며 이비쟌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저기서 애시드와 엑스타시에 대해 떠들어 대자 아무 생각 없이 이 흐름에 너도나도 동참하는 애시드 테드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던 ‘그들만의 파티’는 종료되고 기존의 이비자 베테랑들과 애시드 테드들 간의 복잡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비자의 기억과 히피적 사상이 전무했던 애시드 테드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엄청난 양의 엑스타시를 복용하고 “애시~~~~드!!!”를 외치며 미친 망아지들처럼 씬을 휘졌고 다녔다. 그때까지 영국의 클럽은 3시 이후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후 거리로 뛰쳐나와 날뛰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의 사이렌을 붙잡고 전율을 느끼며 “Can You Feel it?”을 외쳤다고까지 하니 그 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스펙트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고 이 언더문화는 도태되기 시작했다. 순수함과 흥미에 의해 시작한 파티 관계자들도 파티 이벤트를 돈의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우정도 깨지기 시작했다. 마약의 유통과 파티 프로모션을 통해 ‘한 몫 챙길 수 있는 장사’의 가능성이 확인되며 갱들도 이 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경찰은 애시드 하우스 파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ool and Groovy” 같은 기사를 통해 새로운 애시드 문화에 친근감을 표했던 미디어는 “요즘 아이들이 어떤 위험한 것에 빠져있나” 레퍼토리를 들고 나오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디어는 엑스타시와 LSD의 차이를 알지도 못한 채 아이들이 클럽에서 문란한 성생활과 폭력에 찌들은 것처럼 선전했다. 영국의 유명한 음악 차트 방송인 Top of the Pops는 Acid란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노래들을 차트에서 제외시키는 이래적인 모라토리움을 선언했고 팝 스타들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마약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깨끗하고 도덕적인 생활의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주제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대중을 선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파시즘적인 미디어의 폭력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찌하였건 이런 기성 세대와 미디어의 소란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청년들이 생각 없이 애시드 열풍에 동조하도록 불만 지핀 셈이었다. 이 때부터 애시드 하우스는 대중 문화를 뛰어넘어 민감한 국가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애시드 하우스 클러버들도 큰 문제를 안고 있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디어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엑스타시를 마약으로 조차 여기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1988년 이후로 마약이 이른바 보편적 레져 문화로 올라섰고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은 9 to 5로 대변되는 챗바퀴 같은 자신들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너도 나도 일을 그만두고 쾌락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급기야 애시드 문화의 인사이더인 슘은 뉴스레터를 통해 “제발 당신의 직장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 당시 잊고 있었던 것은 어떠한 좋은 경험이든 영원할 수는 없다는 간단한 인생의 논리였다. 문제는 그토록 그들을 괴롭히던 현실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기에 정신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약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현상에 중심에 엑스타시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 젊은이와 노동계층에게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데쳐 정부에 대한 개인의 무력함에서 따라온 심리적인 거세와 억압이 음악과 춤을 통한 파티라는 대규모의 집단적 문화 현상에 의해 치유되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맨 정신에 환희와 희열의 트랜스를 느낀 한국인들처럼) 이 논리를 깨달은 이비자 베테랑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떠났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현대 전자 댄스 음악의 문화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파티 문화가 세계 이곳 저곳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았던 제 2 사랑의 여름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채 그렇게 끝나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반응형
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and Vibe Upon the World 03: 06년 12월자

The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 at the Club, but now WHA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 많은 클러버들이 홍대 앞을 외면한지 오래되었고 클러빙의 메카로 새로 자리잡은 모 호텔과 그 옆의 Bar 또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것 같다. 웬만한 클러빙 이벤트가 열리면 “또 거기야?”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곳은 클럽인가? 그렇지는 않다. 분명 Ibiza, 이비자를 (Es Vive Ibiza가 대표적이다) 중심으로 호텔 중심의 one shot 이벤트를 여는 것이 트렌드 임은 분명하지만 누가 주최 하던 어떤 DJ가 오던 뭐가 달라지는 지 모르겠다.
  
    엇비슷한 분위기와 엇비슷한 음악.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는데, 모든 하우스는 OM Record로 통하는가? 점점 광장동으로 향하는 길이 이제 지겹기만 하다. 비슷한 장소에서 열리더라도, 비슷한 소속의 DJ들이 오더라도 나름대로의 정체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프로모션의 몫이 아닐까 싶다. 분명 국내의 장소, 사운드 시스템, 마케팅 측면을 볼 때 사정이 열악한 건 사실 이겠지만 그 옛날 홍대 앞 르네상스 시절의 언더그라운드 스피릿에서라도 배울 점은 조금이라도 없었던 것 일까? 앞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라는 것은 핑계거리다. 프로모션의 목적이 이윤이건 순수한 atmosphere의 구성이건 변화가 필요한 건 바로 이 순간, 지금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나마 홍대 앞에서 외롭게 고군 분투하고 있는 Tool에 감사할 따름이다. 장사 속이건 순수한 열정이건 기본 적으로 필요한 건 치밀한 리서치와 나름대로의 철학 구축이 아닌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배워야 할 '파티 프로모터'들: (왼쪽부터 PLUR의 Frankie Bones 프랭키 본즈; Sunrise의 Tony Colston-Hayter 토니 콜츤 헤이터; Loft Party의 David Mancuso 데이빗 만쿠소; Shoom의 Danny Rampling 대니 램플링; Haicenda의 Tony Wilson 토니 윌슨)



 
사용자 삽입 이미지

frm BBC NEWS

                                                                             2000년도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의 클럽 산업은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2002년도에 영국의 간판 클럽인 Cream도 많은 클러버들의 아쉬움 속에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이 침체기의 많은 이유들 중 하나가 수퍼 스타 DJ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금전적인 몫이 점점 커지면서 급기야 클럽 산업의 악영향까지 끼치게 된 것이다.  비단 Cream 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대형 클럽들이 문을 닫고 있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대응도 필요한 법. 이번에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 변해가는 새로운 클럽들의 모습을 보기로 한다.



Cocoon Club, Frankfurt, Germany by DJ Sven Vath and 3 Deluxe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악과 클럽이라는 공간, 멀티 미디어 그리고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Cocoon Club은 한 차원 향상된 clubbing experience를 제공한다. "끝이란 마지막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절대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라는 트랜스 음악의 아버지 격인 독일의 스타 DJ, Sven Vath의 철학을 여지 없이 보여 주듯 인테리어 건축 회사인 3 Delux와 함께 Sven Vath는 현존 최고의 미래 지향적 Clubbing experience (그렇다. 그저 공간이 아닌 초감각적 경험이다)를 일구어 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밀레니엄이 다가오기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전설의 클럽 Omen이 문을 닫고 독일 클러빙 메카의 자리는 서서히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클럽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고 좀더 고급스럽고 특정 계층을 겨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변화의 흐름의 최전선에 서서 아방가르드 도시의 옛 영광을 되찾은 일등 공신이 바로 Cocoon Club이다. Cocoon Club은 이미 1996년부터 다른 예술 매체와 전자음악의 결합이라는 테마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1999년 이후로 Cocoon 이벤트는 이비자의 Amnesia 클럽에서 음악/댄스와 멀티미디어 요소가 결합된 초감각적 경험을 선사하였고 나아가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2004년 UFO의 건물에 Cocoon Club의 실질적 공간이 들어 앉으며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프랑크푸르트 클럽신의 침체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약 1500명을 수용하는 이 공간은 클러빙, 라운징, 다이닝 (clubbing/lounging/dining)이라는 경험을 감각적 인테리어 디자인과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결합한다는 컨셉트 아래 3개의 대표적인 디자인 존(zone)을 제공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이크로(Micro)는 시간에 따라 라운지에서 댄스 플로어로 변한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수백 개의 파이버글라스 튜브에 의해 반사되는 프로젝션 이미지들은 서로 엮어져서 일종의 멀티 미디어 장식 효과를 자아낸다. 그 옆에 자리 잡은 실크(Silk)는 백색 가죽의 가구가 인상적인 레스토랑으로 dining의 경험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 시킨다는 컨셉트로 지어졌다. 또한 VIP용으로 만들어진 마이크로 캡슐 그리고 메인 댄스 플로어에 마련된 360도의 벌집 모양 membrane, 멤브레인 벽은 인테리어 건축의 절정에 이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ocoon Club은 클러버들 뿐만이 아니라 DJ, VJ, LJ에게도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쉽게 연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클러버들과 하나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사운드 시스템과 jockey, 쟈키 용 세트들 또한 최첨단을 자랑한다. 아마도 70년대 Larry Levan과 Michael Brody가 Paradise Garage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Cocoon Club이 아닌가 싶다.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이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빌바오라는 도시 자체를 되살려 냈다면 3delux와 DJ Sven Vath의 Cocoon Club은 음악과 디자인 철학의 결합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 쇄신은 물론 현 클럽 문화를 재 정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


BabyCream, Liverpool and Leeds, UK by Cream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 세계 클럽 브랜드를 대표하던 Cream도 클럽 산업 침체기의 여파는 피할 수 없었다. 2002년 클러버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오랜 고향인 리버풀에서 문을 닫고 만 것이다. 그 후 크림의 각종 이벤트와 레이블 산업은 계속 되었고 2003년 BabyCream과 함께 리버풀을 다시 찾았다. 유럽 연합으로부터 리버풀이 2008년 유럽 문화의 도시로 지정되면서 크림은 Lyceum Group과 조인하여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문화를 개척하고자 새로운 라운지-바-레스토랑 컨셉트를 내놓았다. BabyCream은 정확히 클럽은 아니지만 Cocoon Club과 맥을 같이 한다. 클럽 음악을 중심으로 스타일과 디자인이 접목하여 제공하는 고 품격 Dining과 Bar 문화가 바로 BabyCream이 추구하는 바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Girl's Powder Room으로 여성들만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 되어 있다 (남성의 출입은 초대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여성들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마음 놓고 화장을 고치거나 여자들만의 수다가 필요하다거나(“woooo, He's so hot…) 말이다. 파우더 룸은 헐리우드 세트를 연상 시키는 화장대, 필립 스탁의 의자 등 여성들에게 주인공이 한편의 연극 출연을 위해 무대 뒤에서 준비할 수 있는 화려한 분장실의 공간을 제공한다. 또한 부둣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을 살려 저녁에는 아주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 있다.



Minibar, Harrogate, UK by Ministry of Sou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실공히 클럽산업 최대 공룡인 Ministry of Sound의 벌여놓은 사업만 따지고 보면 기업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초 클럽 가 최대의 뉴스거리는 Hed Kandi 브랜드의 인수였다. 당연히 인수한 이는 Ministry of Sound다. 얼마 전 요가 비디오 사업까지 뛰어 들은 마당에 새로운 흐름인 restaurant-lounge-bar 컨셉트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니바는 700명 수용 공간에 커다란 샹젤리에 밑에 위치한 그네 식 의자, 자쿠지, VIP 룸을 (VIP 룸은 터치스크린으로 웨이터의 존재를 없애고 프라이버시와 편안함을 더 중요시 하였다) 제공하고 발레릭 비트와 헤드칸디 스타일의 음악이 Martin Audio의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흘러나온다. 유리, 철, 가죽, 털 등으로 장식된 인테리어는 200만 파운드가 들어간 작품이다.  (헤드칸디 컨셉트를 살려 백색 가죽의 편안함을 무기로 한 'Kandi-Bar'를 밑 층에 따로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90년대 한국의 나이트 클럽을 연상케 하는 드레스 코드를 통한 까다로운 '물 관리' 또한 프리미엄 바 이미지에 한 몫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BabyCream의 아류라는 비아냥을 면치 못하고는 있지만 클럽 브랜드의 거인으로서 Ministry of Sound의 미니바가 질적으로 좋고 낮음을 떠나 클럽의 변화라는 이 새로운 트렌드의 정상에 오를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헤드칸디 앨범들도 이젠 공장에서 물품 찍어내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공장 식으로 체인화 될 이 미니바도 멀지 않아 국내에도 생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한번 해본다.



       블링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 즈음이면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들 떠 있을 때다. 프로모션도 연말 파티 준비에 바쁠 것이고. 이번 연말의 최고의 파티는 어디일까? 언제나 그렇듯 광장동, 홍대 앞, 압구정, 이태원 등으로 헤쳐 모이겠지만 이 공간적 Identity Crisis에서 벗어난 이벤트를 맛보기란 과연 가능한 걸까?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and
PLUR you all.
 

딴 세계의 클러빙 신은 어떨까?
1. <http://www.ambrel.net> (NY scene)
2. http://www.ministryofsound.co.uk (UK scene)
3. <http://www.cream.co.uk>  (UK Scene)
4. <http://cyberjapan.tv>  (Tokyo Scene)
5. <http://www.cocoonclub.net> (Frankfurt Scene)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