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여행이라 하면 으레 반짝이는 도심의 마천루, 쇼핑, 그리고 야경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익숙한 도시 풍경을 잠시 벗어나 바닷바람 스치는 란타우 섬 끝자락의 어촌 마을 타이오를 목적지로 정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시골 마을만의 맛은 뭘까?”
홍콩의 서쪽 끝, 수상가옥이 줄지어 있는 작은 마을 타이오는 보통 옹핑 케이블카 여행 중 당일치기로 스쳐 지나가는 코스다. 하지만 2박을 묵기로 한 만큼 관광객이 빠져나간 마을 분위기를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첫 끼는 반드시 이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 타이오의 첫 끼를 찾아
이곳의 향토 특산품을 찾아보니 무려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새우젓’. 햇볕 아래 말려 은은하지만 강렬한 향을 내는 타이오 새우젓은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다양한 요리에 활용되며 독특한 풍미를 더한다고 한다.
"그래 이거다. '🦐' 딱이다."
그리고 맛집을 찾아보다 현지산 식재료를 쓰는 것으로 유명한 크로싱 보트 레스토랑(Crossing Boat Restaurant 橫水渡小廚)의 연잎 찜통밥(롱차이 밥)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오 새우젓과 현지 식재료? 첫 끼는 바로 정해졌다.
| 🏘️ 크로싱보트 레스토랑 내외부
식당은 타이오의 유명 포토 스폿인 마을회관 광장(Tai O Rural Committee Square 大澳鄉事委員會廣場 )의 벽화가 그려진 건물이다. 벽화의 오른쪽 골목으로 가야 한다.
골목에 들어서니 비가 갠 후 무지개가 펼쳐졌다. 개인적으로 무척 오랜만에 보는거라 뭔가 럭키할 것 같은 느낌!
중앙의 작은 영어 간판을 확인하고 입장.
들어가자 직원이 맞은편 건물로 다시 안내했다. 음식점 리뷰에서 본 타이오 마을 특유의 건물 구조인 수상가옥(스틸트 하우스) 테라스가 있는 곳이었다.
혼밥러인 나는 언제나 그렇듯 구석으로 안내되었고 :) 한산한 날이라 그런지 리뷰처럼 사람이 붐비진 않고 한 팀만 있었다(너무 좋음). 이 팀은 먹던 도중 발코니 쪽을 가리키며 광둥어로 계속 투덜거렸는데 눈치 상으론 테라스로 왜 못나가는지에 대한 불만 같았다. 말이 안 통해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손님이 없어 테라스를 닫고 실내 영업만 하는 것 같았다.
암튼 음식은 (처음 들어갔던) 저쪽 건물에서 요리한 뒤 이쪽 건물로 배달되는 특이한 방식이었다.
테이블이 모두 다인용으로 큼직큼직하다
내부는 전형적인 홍콩 로컬 식당 분위기.
모든 테이블에 놓여 있는 한자로만 적혀 있는 오늘의 추천 메뉴.
| 🍽 메뉴 소개와 주문
한자 메뉴보고 어? 번역기 켜야 하나 싶었는데 이내 책자 메뉴를 준다. 주요 메뉴들은 사진과 함께 한자+영어로 병기되어 있어 주문은 어렵지 않다.
첫 장엔 큼지막하게 4대 메뉴—롱차이 밥, 오징어튀김, 두부요리, 숯불거위구이—가 보인다. 구글/오픈라이스 리뷰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주인공’들이다(이 집 거위가 그렇게 맛있다고...). 다음 장부터는 각종 시그니처 메뉴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고 요리 수가 꽤 다양했다 (장을 넘길수록 사진은 없어진다).
예상대로 타이오 새우젓을 활용한 요리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롱차이 밥과 사이드로 초이썸 채소찜(+ 텁텁함을 달래줄 차이니즈 티)를 주문했다. '롱차이'는 '찜통'이란 뜻이다.
🍽️ 롱차이 밥 메뉴설명:
咸鮮蝦乾荷葉籠仔飯 (함씬하곤 호입 롱짜이판)
"Long Chai” rice.
-Steamed local dried seafood, pork and rice with shrimp paste, wrapped in lotus leave
현지산 건해산물, 돼지고기, 새우젓이 들어간 밥을 연잎에 싸서 찐 요리
원래 '(Fisdherman's) Tai-O Four Treasure' (절인 건해산물 4종에 달걀노른자'를 올린 요리)도 먹고 싶었기 때문에 이거까지 시키면 혼자 먹기 양이 많겠냐고 물었더니 아래와 같은 답이 투박하게 날아왔다.
“일단 두 개 먼저 먹어보고 생각하슈”
뜨내기일 수도 있는 관광객이라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오히려 과한 주문을 말리는 게 배려 깊은 응대 같아 좋았다. 근데 그게 홍콩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나온 말이라 뭔가 츤데레 느낌도 나고, 걍 그 특수한 상황이 좀 재밌게 느껴졌다 :)
| 🍚 타이오 새우젓 요리의 첫맛
주문 후 뜨거운 차를 마시고 다시 뜨거운 차로 식기류를 세척하면서 기다렸다
먼저 초이썸(채심)이 등장했다. 사이드 개념으로 시킨 건데 요리 하나 수준이다. 주문받을 때 굴과 마늘 소스 중 택하라 해서 걍 아무 생각 없이 마늘을 골랐는데 역시 진한 마늘과 연잎향이 느껴진다.
연잎에 둘러싸여 있고 새우젓과 건어물이 곁들여진 스타일이다. 주문한 롱차이 밥의 채소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식재료를 굴복시키고 맛을 삭제하며 식감만 살려주는 특유의 잔인함이 극락의 맛인 굴소스 채소찜에 평생 몸이 절여 있다 보니 마늘 소스 말고 굴소스로 했어야 했나 잠깐 생각했는데,
오히려 채심 줄기의 사각 한 식감은 물론, 식재료들의 본연의 맛과 풍미를 더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롱차이밥은 초이쌈과 마찬가지로 연잎에 싸여 둥근 대나무 찜통에 담겨 나왔다. 다만 초이삼 요리처럼 마늘 소스가 아니라서 그런지 은은한 연잎과 새우젓의 향이 더 깊게 테이블 위로 퍼졌다. 또한 주위에 손님이 없어 그런지 다른 음식향과 섞일 일이 없어 더 잘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평소엔 관광객이 넘치는 곳이라도 이렇게 한가한 날은 로컬 경험을 또 느낄 수 있는 이런 어중간한 날의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좋다.
그리고 사장님이 홍콩 특유의 퉁명스러움으로 잘 비벼 먹으라 하신다. "믹스?" 하니 쿨하게 끄덕끄덕하고 바로 퇴장하셨다.
비빔의 민족답게 열심히 비벼주었다. 속에 숨어 있던 돼지고기, 건해산물 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푸짐하다.
한 입 먹어보니 살짝 꼬릿 한 새우젓의 깊은 풍미가 좋다.
건해산물과 돼지고기의 묵직한 감칠맛, 쫍졸함, 식감이 더해져 기존의 중화볶음밥/덮밥과는 전혀 다른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쫍쫄함도 쫍쫄함인데 감칠맛도 좋다. 건어물의 바다 느낌이 가득하지만 돼지고기의 육지 느낌도 존재감이 있다. 마치 작은 대나무 찜통 안에 타이오 마을을 우려낸 듯한 느낌이라는 혼자만의 망상을 해보았다.
오징어까지 들어있어서 전체 식감은 매우 좋은데 어쩔 수 없이 좀 짜긴 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맛의 향연이 재밌어서 시간을 두며 초이삼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나름 선전했는데 내가 양이 적은 것도 있지만 일단 음식양이 많아서 남겼다. 한 그릇이 1인분이 아니다 (밥도 진짜 많다). 암튼 후회되지 않는 인상 깊었던 타이오에서의 첫 끼였다.
타이오 마을 맛집, 인정!
📍크로싱 보트 레스토랑 기본정보
- 상호: Crossing Boat Restaurant 橫水渡小廚
- 주소: G/F, 33 Kat Hing Street, Tai O, Hong Kong
- 운영 시간: 매일 오전 11:30 – 오후 8:00
- 식사 방식: 매장 내 식사, 테이크아웃 가능 / 배달 불가
크로싱보트 레스토랑(Crossing Boat Restaurant)은 숯불에 구운 거위 요리, 연잎에 싸서 찐 밥, 오징어 패티 등 시그니처 메뉴들이 특히 인기이며 모든 식재료가 현지산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말 그대로 ‘타이오의 맛’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식당으로 꼽힌다. 이름에 ‘횡수도(橫水渡)’가 들어간 것은 과거 이 부근에 다리가 없었던 시절 나룻배로 건너던 포인트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 타이오 새우젓, 그 짧고 깊은 역사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이 일대 해협에서 잡히는 ‘은새우’(銀蝦 krill)는 원래 서민들의 생계형 식재료였다. 팔아도 돈이 안 되는 이 작은 새우를 버리느니 소금에 절여 보관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근데 칼슘, 인, 요오드 등 영양소가 풍부한 은새우는 서민들의 소박한 요리에 찰떡처럼 어울렸고 유명세를 타며 발전했다. 한때 홍콩을 넘어 영국과 미국등의 해외 이민자 커뮤니티까지 수출된 인기 향신료로서 마을의 독보적인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70,'80년대 죄고점을 이후로 도시개발, 고령화, 관광지화 등의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산업은 점차 쇠퇴했고 결정적으로 2013년 해양 생태 보호를 이유로 트롤어업이 전면 금지되며 타이오에서 직접 은새우를 잡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지금은 중국 본토산 새우를 수입해 만든다. 하지만 전통의 생산 방식은 지켜지고 있다.
한때 열 곳이 넘었던 타이오의 새우젓 공장은 이제 싱레이(成利蝦醬廠 Sing Lee)와 쳉청힝(鄭祥興蝦醬廠 Cheng Cheung Hing) 단 두 곳만 남았다. 여전히 손으로 새우를 일일이 다듬고, 대나무 채반에 널어 햇볕에 말린 뒤 직접 맷돌로 가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정확한 수치도, 기계의 도움도 없이 오직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감각과 손맛만으로 완성되는 장인의 세계다. 그러나 이 방식은 체력 소모와 노동 강도가 매우 높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대부분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 있고, 타이오 공장들의 부모 세대 역시 자식들에게 가업 승계를 굳이 강요하지 않기에 이 전통 역시 머지않아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 앞에서 감히 이렇다 할 한마디를 던지기는 어렵다.
타이오 마을 어귀 쪽을 걷다가 본 새우젓 말리는 공간은 말 그대로 DIY 감성 그 자체였다. 공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투박하고 소박한 공방의 느낌이 강해서 그만큼 전통 방식으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가 내려서 실제로 새우젓 말리는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타이오 마을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어딜 가나 새우젓 특유의 쫍쪼름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코끝을 스친다. 크로싱보트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마을 곳곳의 식당과 시장의 유명 간식들에서 타이오 새우젓을 쓰는 걸 보면 이 작은 새우젓이 타이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했다.
쉑사이포 거리(Shek Tsai Po Street)를 따라 타이오 헤리티지 호텔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싱레이와 쳉청힝을 비롯 옛 새우젓 생산지였던 듯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지금은 빨래가 널려 있거나 방치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기억이고 누군가에겐 유산이자 역사일 것이다.
"이곳의 새우젓 음식은 단순히 지역 특산품을 먹는 게 아니라,
타이오 마을 사람들의 역사와 추억을 함께 맛보는 경험이 아닐까"
📍 새우젓 공장 위치
싱레이 成利蝦醬廠 Sing Lee: G/F, 10 Shek Tsai Po St, Tai O, 홍콩
쳉청힝 鄭祥興蝦醬廠 Cheng Cheung Hing Shrimp Sauce: 홍콩 石仔埗街17號A
| 🎥 [추천 영상] Michelin Guide Asia – Hong Kong Chefs' Playbook: Tai O with Vicky Cheng
이 미슐랭 가이드 아시아 영상에서는 홍콩 미슐랭 1 스타 레스토랑 VEA의 셰프, 비키 쳉(Vicky Cheng)이 직접 타이오의 새우젓과 크로싱보트 레스토랑의 음식을 소개하며 이곳에서 받은 영감과 식재료가 자신의 요리에 어떻게 녹아드는지를 이야기한다. 타이오의 현지 풍경, 장인의 작업, 식재료의 디테일이 모두 담겨 있어 여행 전후로 감상하기에 좋다.
“저는 아내처럼 특별한 사람하고만 타이오에 와요.
그 특별한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죠.”
— 비키 쳉 Vicky Cheng, 셰프, VEA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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