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터에 들어선 음식점들은 항상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애매한 주말 오후건 퇴근 후건 하루 언제라도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었던 위치. 그 자리에 최근 조선호텔의 중화요리 브랜드인 호경전 서초점이 들어섰다. 프리미엄을 지향하는 홍연의 전신인데 이 곳은 캐쥬얼 프리미엄을 지향한다. 오픈 당시 먹었던 단품이 맛있어서 이번엔 코스를 먹어보기로 했다. 


 

| 내부

룸 예약이면 코스 기본이라 2층으로 이동. 원하면 1층 홀 공간에서 먹어도 된다고 한다. 참고로 2층은 화장실 가기가 편하긴 하다. 

이제 팔순 안에 오신 어머니 뒷모습

2층은 모두 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테리어는 신세계점 보다 고급스럽다. 

2인 예약으로 배정 받은 방. 프라이빗 하니 얘기 나누기 딱 좋은 공간이다. 


 

| 메뉴

 코스메뉴는 가격순으로 심연 > 천하 > 담우 > 화현이 있다. 

물론 모두 좋은 식재료를 써서 맛있겠지만 일단 <화현>은 일반 중화요리집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모둠 느낌이 났고, <담우>는 그 날 컨디션으론 왕새우와 누룽지가 딱히 당기진 않았다. 

출처 ❘ 구글지도 @Hyunjae Jo ; 캐치테이블에 메뉴가 없어서 퍼옴

<심연>은 가격도 워낙 쎄고 후식까지 가짓수가 8개라 다 못 먹을 것 같은 부담이... 

<천하> 런치 코스 메뉴

결국 <천하> 코스를 골랐다 (11만 원). 광동식을 참 좋아하는데 '광동식 닭고기 냉채'라는 표현도 맘에 들고, 홍콩이나 중국에 가면 무조건 디폴트로 먹는 가재의 이름이 보여 좋았다 (영어를 안봄 ㅜㅜ). 그리고 그나마 이 정도면 소식좌들이 힘좀 내면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7개.. 그래도 남길까 봐 꽤 걱정 많이 했음)

천하 디너 코스 메뉴

참고로 런치/디너 코스는 동일한 이름들로 제공되는데 디너에서는 메뉴의 형식을 더 고급스럽게 변형을 주었다. 대신 가격은 UP. 위 이미지는 천하코스의 디너 버전이다.


 

| 식사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극적이지 않은데, 밋밋하지도 않으면서 양도 적당하니 좋았다.
담백했다라는 말이 어울릴 듯

 

 

| 사이드 반찬

중국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짜사이와 땅콩이 나오고 중간에 단무지가 자리 잡는다. 인당 나오고 양이 과하지 않아 좋다. 모자라면 언제나 더 달라고 하면 되니. 맛은 크게 특별하진 않았다. 


 

| 광동식 닭고기 냉채

Cantonese Style Chicken Appertizers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보통은 퍽퍽해 외면하는 닭가슴살이지만 저온 수비드로 부드럽게 익힌 살은 촉촉했고 기름기 없는 담백함 위로 산미가 얹혀 입안이 가벼웠다. 입 안에서 탁 터지는 토마토.

재료도 상태가 좋았고 첫 모금부터 온도가 적절해 코스의 첫 문을 차분히 열어 주었다. 맛만 보려다 어느새 접시를 비웠다.


 

| 지존 갈비 계절 야채수프

Steamed Rib and Seasonal Vegitable Soup

수프가 나왔는데 광둥식 향취를 조금 느낄 수 있었던 디쉬였다. 한국으로 치면 갈비탕 같은 건데, 맑지만 우리나라 갈비탕과는 또 다른 느낌의 깊은 육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짠맛이 덜한 대신 은근한 감칠맛이 있다. 

더블보일 방식 (맞겠지?) 때문에 맑고 진한 느낌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메뉴에 왜 '至尊(지존)'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고기 한 입 배 어물면서 이해가 되었다. 부드럽다. 이것도 전부 꿀꺽.


 

| 간장 마늘 소스 바닷가재찜 

Steamed Lobster with Garlic Soy Sauce

광동식 해산물이라길래 메뉴의 '가재'란 단어에만 홀려 홍콩/중국에서 늘 먹던 갯가재로 인식해 버렸는데 서빙된 접시 위엔 바닷가재(랍스터)가 놓여 있었다 (메뉴를 제대로 안 본 나의 착각). 암튼 간장·마늘을 살짝 졸여 부어 낸 맑은 갈색 소스에 홍·청고추 링이 흩뿌려져 있었다. 

 

랍스터 살은 통통과 탄력 사이의 좋은 밸런스. 소스는 짠맛보다는 감칠과 달큼함이 얇게 겹쳐 혀를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고추의 미세한 매운기가 뒤따라와 기름기를 풀어준다. 식재료가 깔끔하게 빛난다. ‘갯가재와의 착각도 나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저것도 꿀꺽, 이미 배가 불러온다 ㅜㅜ

원래 상상했던 홍콩 갯가제 ❘ 출처 Ppond5.com

TRIVIA: 가제/새우 류 중에서는 (Mantis Shrimp) 오줌싸게가제라고도 불리는 갯가제를 제일 좋아한다. 껍질 까기가 귀찮은 놈인데 그 이후 먹는 살의 만맛이 부드러우면서 강한놈이다. 주로 홍콩과 중국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 칠리소스전복

Fried Abalone with Chili Sauce

중화요릿집에서 흔히 만나는 칠리소스인데 익숙한 탕수육의 식감을 가진 그 보호막 껍질을 씹으면 단숨에 부스러지고 그 안에 숨어있던 탱글하고 쫄깃한 전복살이 씹힌다.

어떻게 보면 코스 메뉴 중 제일 자극적인 음식이 나온 셈인데 그마저도 얌전한 맛이 좋다. 물론 아쉬운 건 이미 전 단계에서부터 찾아온 포만감이었다. 맛있었지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 ㅜㅜ

 


| 자연송이 한우 안심

Sauteed Korean Beef with Black Pepper Sauce and Pine Mushroom

메인이 나왔다. 수프에 있었던 소고기는 미국산이지만 메인에 나온 소고기는 한우다. 둘 다 연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이다. 같이 나오는 송이버섯은 언제나 스펀지처럼 토해내는 즙이 맛있다. 

메뉴판에 쓰인 대로 ‘국내산 한우’라는데 내 얄팍한 혀로 미국산·국내산 차이를 가늠할 능력은 없다. 다만 두툼한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보니 근섬유가 곱게 풀릴 만큼 부드러웠고 소스는 블랙페퍼와 굴소스 어딘가의 향이 드는데 짠맛이 강하지 않아 고기 본연의 맛을 지나치게 해치지 않는다. 


 

| 식사: 짜장면과 짬뽕

어디서든 중식코스를 먹으면 항상 머뭇거리는 순간이다. 짜장면과 짬뽕, 혹은 볶음밥, 뭐 먹지? 서버님은 바쁘시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손님으로서 항상 용서해 주길 바라는 시간이다.

짬뽕이냐 짜장면이냐로 티키타카를 잠시 하다가 서로가 먹을 것을 정하고 결국 짜장면과 짬뽕을 시킨다 (볶음밥도 약간 떙겼는데 서버분은 짜장면을 추천하셨다). 어머니는 여기 짜장면을 몇 번 드셔보신지라 내게 양보하셨다 (근데 둘 다 맛있음).  

짬뽕은 건더기가 참 실하다. 그리고 중요한건, 맛.있.다.

짜장면은 면발의 맛이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푸짐한 토핑들로 인한 식감이 참 좋다. 요즘 동네 짜장면들이 맛이 없어지는 기후가 있는데 여긴 참 맛있는 짜장면. 식후 음식으로 나오는대도 불구하고 얹힌 식재료들이 메인만큼 푸짐한 느낌이어서 더욱 좋았다. 


| 디저트

마지막 디저트는 망고사고 (芒果西米露, Mango Sago)였다. 내가 제대로 느낀 게 맞다면 망고의 진한 향에다가 코코넛 향이 살짝 감싸서 앞선 중국식 음식들 특유의 기름기의 여운을 산뜻하게 씻어주는 역할이었다. 


 

 

| 마무리

꽤나 괜찮은 평일의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여유있는 점심이었다. 이 날 든 생각은, 어머니가 나이가 계속 들어가다 보니 프라이빗한 룸에서 나누는 사적인 얘기 분위기도 좋지만 홀에서 사람들이 뭘 먹나, 저건 또 무슨 음식인가 하는 그런 타인의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이 더 좋으신 것 같다. 그래서 다음에 또 가게되면 다시 홀에 자리잡아 보아야겠다.


 

 

 

| TRIVIA.2: 배달도 된다!

갑자기 호경전 짜장면이 먹고 싶다 하셔서 시켜드림

 

언제부턴가인진 모르겠지만 배달도 된다! 나이 때문에 이동이 힘든 어머니가 참 좋아하신다. 베달로도 먹을 수 있다고.

배달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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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숭뢰리에 자리한 1938년생 돌기와 한옥 ‘돌기와집’은 납작한 석와 지붕과 중정을 그대로 간직한 고택이다. 1994년 식당으로 문을 연 뒤 압력솥에 잔가시까지 부드럽게 녹여 내는 달큼·매콤한 붕어찜으로 30년째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다.


강화도에서 흔히 만나는 논두렁 길 따라 崇雷里 (숭뢰리)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날의 루트

숙소인 남단끝 동검도에서 강화도 북단 끝으로 32km 약 50분. 민간 마을에 자리 잡은 곳이라 도로에서 벗어나 시골길을 쭉 따라 들어가야 하는데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이런 곳에 정말 음식점이 있다고?"를 남발했다. 


 

| 외부

도착하면 누가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옛 근대 한옥이 맞이해준다. 고택 바로 앞마당과 길건너에 주차자리가 있다. 한옥은 1938년에 지어졌으니 올해(2025년)로 87년째를 맞는다

건너편 주차장 공간엔 붉은 글씨로 '돌기와집'이라 쓰인 투박한 입간판이 수줍게 구석에 서있다. 받치고 있는 낡은 고철과 글씨가 뭔가 무림의 맛집 분위기를 풍긴다.

상도숭뢰길 - 오솔길처럼 아담하고 예뻐보여 카메라를 꺼냈다. 꽤 좁은데도 불구하고 덤프트럭이 후드득 나무들을 쳐대며 지나가는 장면이 신기했다. 암튼 차 세우고 이 작은 폭의 길을 너면 음식점 입구다. 쭉 길을 따라가면 음식점이 원래 붕어와 메기를 공수했던 숭뢰지(대산저수지)가 나온다. 

오랜 세월의 맛을 더해주듯 나무 덩굴에 휩싸여 있는 굴뚝 모양의 구조가 눈에 띄었는데 붕어찜을 끓이는 주방과 이어져 있다.

1930년대는 개량한옥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절이라고 하는데 콘크리트/시멘트 같은 현대 재료들과 섞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좌측이 화장실인데 들어가 보진 않았다. 

입구부터 입식 타일 바닥·노출 배선·개방 통로가 겹겹이 보인다. 여러 세월에 걸쳐 전통 한옥 원형에 덫대진 흔적들을 느낄 수 있다. 긴 입구 공간이 계절에 따라 바람-온도-시선 등에서 잘 지켜줄 것 같다.

깊다 싶은 입구를 지나면 가운데가 하늘로 향해 ㅁ자(정사각형으)로 뻥 뚫려있는 중정 공간이 나오는데 개방감이 굉장히 좋다. 낯에는 이렇게 자연광, 밤엔 또 달빛이 스며들어 이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부엌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좌측에 보이는 공간은 곳간이나 외양간 같은 곳이었을까? 암튼 사면이 이렇게 둘려 싸여 있으니 문만 꽁꽁 닫아두면 추운 겨울바람도 잘 막아줄 것 같다.

부엌을 바라본 모습

입구를 통과하면 정중앙에 식사 공간이 있고 우측에는 맛있는 붕어찜을 삶는 재래식 부엌이 보인다. 음식을 맛보기도 전에 고택 구조를 보며 재미를 느끼게 된다. 


| 내부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오면 마루와 안방 모두 식사하는 공간으로 꾸려져 있다. 활짝 열려 있어 개방감이 유지된다. 문틀들 사이 비닐발이 보이는데 90년대 느낌도 난다. 시간 여행 온 느낌이랄까. 

원래 좌식이었을텐데 시대의 흐름을 따라 테이블식으로 바뀌었다 (몸이 안 좋고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좌식이 참 힘들긴 하다).

여름 초입 날씨가 참 좋았던 날이라 뒷뜰로 보이는 공간으로 이어진 문이 달린 곳에 자리를 잡았다. 통창이 있으니 개방감도 좋고 시골에서 밥을 먹는 분위기도 같이 안겨준다.

메뉴는 간단하다. 시그니처인 붕어찜과 새우매운탕. 민물새우튀김이 궁금했는데 소식좌라 붕어찜만 시켰다. 이 집은 원래 인근 대산저수지 (숭뢰지)에서 들여온 민물고기 매운탕집이었는데 우연히 내놓은 붕어찜 맛에 손님들이 매료되며 오늘날 붕어찜 전문집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고로 여럿 온 테이블들은 우렁무침도 사이드로 시켜 먹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 식사 - 주옥같은 반찬들

정갈해 보이는 비주얼의 반찬들이 정성스럽게 세팅된다. 이 집은 음식과 대응 자체에 예의 스러움이 스며들어 있다. 반찬들 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맛있다. 갠적으론 3,6,7(깻잎),9시(무채) 방향 반찬들이 특히 맛있었다.

챗GPT의 설명

너무 맛있어서 이름을 알고 싶었는데 사장님 바쁘시고 정신 없으셔서 그냥 챗GPT한테 물어봤다. 각각 미나리(6시)와 열무(3시) 나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듣고 식감과 비주얼을 비교해 보니 그럴싸하다. 100%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참 좋아졌다. 오래된 한옥에서 가장 최첨단 기술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니.

시큼 새콤한 무채 절임은 약간 기름지고 달짝지근한 붕어찜과 먹기 굉장히 좋았다.

깻잎은 짜지 않아서 좋았다. 결국 마지막 한 장까지 알토란 하게 강화섬쌀밥에 맛있게 싸 먹었다. 


| 붕어찜

드디어 붕어찜 등장. 이렇게 한상이 완성되었다. 

반찬들이 워낙 맛있어서 원래도 높았던 메인 요리의 기대치가 더 올라갔던 붕어찜이었다. 찜에서 우러나온 국물과 통통한 붕어 위에 올려진 양념 건더기들의 비주얼이 식욕을 자극한다. 그리고 시래기가 주조연처럼 올라간 점이 눈에 띄었다. 붕어는 원래 인근 숭뢰지에서 가져왔지만 퀄리티가 떨어지면서 지금은 충청 예당 저수지에서 공급한다고 한다. 

해체를 시작한다. 돌기와집 리뷰에서 다들 말하듯 붕어의 가장 힘든 점인 잔가시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뭐 꽁치조림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압력솥에 푹 고아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붕어 고유의 형태를 해치지 않는 것도 이 집만의 실력이겠지.

원래 붕어의 잔가시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붕어찜은 달짝지근하고 매콤하다. 매콤은 매운 매콤이 아니라 미디엄 정도다. 부드럽다. 생선 잔가시 정말 세상 귀찮아하는 나도 그냥 먹어도 될 정도다. 특히 갓지은 요리의 따듯함과 깊은 풍미가 돋보인다. 붕어 특유의 흙냄새 비린내도 느끼질 못했다. 

시래기와 아주 찰떡궁합이다. 계속먹다보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기름지고 달짝지근함을 중화해 준다 (그렇다고 이 기름짐과 달짝지근함은 전혀 자극적이거나 과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시래기도 모자르다면 이 시큼 새콤 무채와 곁들이면 입 안이 끊임없이 중화된다. 연신 맛있다를 외치며 계속 먹게 된다.

살면서 아주아주 가끔, 손에 꼽을 만큼 음식을 먹고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평생 못 잊을 맛 같은 거. 돌기와집이 그랬다. 찬 하나하나 내어줌과 음식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성스러움과 대접받는다는 느낌. 음식이고 찬이고 어느 하나 거르기 힘든 맛과 분위기. 

이 행복하고 감사한 경험은 1시간 정도가 지나 끝이 났다. 이처럼 홀린 듯 먹어본게 얼마만인지. 그리고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감사하며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맛의 폭풍이 휩쓸고 간 후 이제 끝났나 싶더니 식혜를 내어 주신다. 술은 밥과 누룩을 섞어서 발효시켜 만들지만 누룩 대신 엿기름을 사용하면 알코올 없이 단맛 강한 음료로 탄생한다는 식혜,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조상님들의 디저트맛에 감사할 따름이다. 모든 걸 쭉 내려가게 만들어주는 식혜와 함께 정말 깔끔한 마무리를 했다. 

저녁 생각이 싹 가실 정도로 배터지게 먹었다. 감동적인 한 끼였다. 오후 1시 20분경의 모습이다. 


 

| TRIVIA

붕어요리는 강화도의 향토음식이 아니다. 옛 임산부들의 특식이었던 잉어와는 별개로 내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국적 흔한 식재료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옛 시절 서민들의 영양섭취를 책임져 줬다 (둘의 차이는 크기와 수염이 있냐 없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도까지 와서 굳이 향토음식을 맛보지 않고 이 집을 찾아가는 이유를 비로소 나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큰 감동을 받고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다가 이런 별 하나짜리 리뷰를 발견했다. 듣고보니 맞다. 이건 조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리 짜고 맵지 않은 조림.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나 맛있는데 저 유저가 처음 맛봤을 때의 그 맛은 또 얼마나 맛있었길래 이런 리뷰를 남겼을까 하며 그 옛 경험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계산을 하고 걸어나오는 길. 6만원 돈이 단 한 푼도 안 아까웠던 한 끼였다.

이건 전경

강화도는 실향민들의 흔적이 특히 많다. 이 집도 원래 주인이 황해도에서 남으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백두산 등지에서 공수하여 직접 실은 돌들로 쌓은 기와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집은 '돌기와집'이 아닌 '널 기와집'이라고 불려야 한다고도 하는데 돌너와, 널기와, 돌기와, 석와라고도 불리는 것 같다.

요리를 먹고 난 후,

이 집 지붕의 납작한 돌들이 서로 얹혀 자아내는 자태를 보니

비로소 붕어의 비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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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방향) 루시갱, 페어리마이, 브린, 유명한아이

2010년대 초반을 10대로 보낸 Z세대 디지털 네이티브가 등장하며 복고의 중심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고 있다. 
Part 1의 연속선 위에 두어지는 네 명의 아티스트를 다루는 2탄이다.

- 브린 (BRYN)
- 루시갱 (LUCI GANG)
- 유명한아이 (YUMEWANAII)
- 페어리 마이 (Fairy Mai)*

(Part 1 보러 가기 → Effie / The Deep / 노덕순)
 

🌀 하이퍼팝/힙합 레트로 뮤비에 담긴 Z세대의 디지털 기억법 | 파트 1/2

Z세대가 기억하는 2010년대는 VHS보다 DV, 아날로그보다 로우 한 디지털이다.EffieThe DeepNoducksoon 2010년대 후반 시티팝이 유행하던 시절엔전 세대의 아날로그 감성을 상상하며 따라가는 복고의 느낌

electronica.tistory.com

 


 

 

| BRYN 브린

Dry 2025.5.7

Dry’는 매우 선명한 고화질이지만 중간중간 삽입된 VHS 노이즈, 글리치, 웹캠 샷, PIP 프레임 등으로 불완전한 디지털 질감을 얹는다. 영상은 디지털 핸디캠 특유의 살짝 기울어진 앵글, 손떨림, 저조도에서의 거친 그레인 같은 요소들을 복원한다. 배경이 일본이라는 점도 아날로그-디지털 사이의 공간적 감각을 강화한다.

Dry MV

스티커 사진기에서 나온 듯한 버블 폰트, 워드아트 스타일의 텍스트, 난잡한 스크랩북 구성, 스티커 그래픽 등이 반복적으로 화면을 장식하며 잘 정돈된 이미지 위에 지속적으로 오류를 주입하는 듯한 키치적 연출을 보여준다.


 

| LUCI GANG 루시갱

쿵쿵쿵 2025.4.18

쿵쿵쿵’ 뮤직비디오는 DV캠 특유의 저해상도 질감의 4:3비율 영상 속, 콘크리트 바닥과 한국 골목과 같은 특유의 날 것스러운 배경이 어우러지며 거친 사운드와 잘 맞아떨어진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캠코더는 JVC Everio GZ-MS100으로 보이는데, 2008년 출시된 이 모델은 SD/SDHC 기반 보급형 디지털 핸디캠이다. 코니카 미놀타 렌즈와 야간 촬영 모드를 탑재했고 당시의 유튜버들을 겨냥했었다.

쿵쿵쿵 MV
JVC 캠코더

실제로 MV를 저 캠코더로 촬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등장 자체만으로도 MV전체의 디지털 노이즈와 불완전한 색감의 연출과 함께 디지털 복고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중 하나다.


 

| 유명한아이 YUMEWANAII

금천구 독산로 2024.1.22

유명한아이의 뮤직비디오는 시각적으로는 (포스팅에서 다루고자 했던) 레트로 이펙트가 그리 강하진 않다.‘금천구 독산로’ 정도가 DV로 직접 촬영한 느낌의 영상으로 인해 교집합을 이루고, ‘빌고 빌었지만’은 곳곳에 VHS/그레인 등의 이펙트가 삽입되어 있는 게 눈에 띄는 정도다.

금천구 독산로 MV

다만 그녀의 음악 속 자전적 서사와 지역적 배경이 그 시절의 감정을 생생히 호출하며 ‘다큐멘터리’ 같은 경험을 준다. 따라서 영상보다는 가사의 호소가 더 강한 음악을 구사한다.

빌고 빌었지만 MV

가족을 위해 가난과 굴욕을 참아낸다는 다짐의 ‘Ride or Die’, 사랑조차 분수에 맞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조던’, 서울 외곽의 동네에서 자신만의 좌표와 안식처를 되찾는 ‘금천구 독산로’까지—유명한아이의 음악은 한 세대가 경험한 어떠한 한 ‘생존기’를 담고 있다.

영화, 마이제너레이션 트레일러, 2004
이 작품은 2004년의 한국영화, <마이 제너레이션>이다. IMF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신용불량, 취업난 등-를 다룬 2000년대식 청년 파산 선언서이다. 아마도 유명한아이의 음악 그리고 뮤비들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낙후된 지역과 골목, 그 속의 안팎 풍경 등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음악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 같다(꽤나 하드한 영화기 때문에 맘 잡고 보는 것을 추천하다).

 

| 마무리

기록과 표현 수단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세대는 어린 시절 DV 핸디캠으로 찍힌 가족 영상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고 웹캠, 싸이월드, UCC 같은 저해상도 디지털 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10대 시절부터는 스마트폰 기반의 고화질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불황, ‘헬조선’ 담론,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구조적 스트레스가 지속되었고 그 속에서 아이폰, 카카오톡·페북·인스타그램, LoL·배틀그라운드, 넷플릭스·틱톡 등 디지털 기술과 문화는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경험 위에서 만들어진 Z세대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는 저해상도 디지털과 고화질 스마트폰 사이에 걸친 기억을 ‘디지털 노이즈’라는 언어로 되살려낸 동시대적 자기서사이자 감각의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1996 ~ 2002년생 Z세대가 10,20대(2009-2024) 동안 맞닥뜨린 주요 이슈·문화 키워드]

2009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 첫 아이폰(3GS) 국내 등장, 싸이월드 막바지
2010 등록금 인상 → 반값 등록금 집회 카카오톡 출시,
LoL·피파온라인 등 PC방 세대 교체
2011 3포세대 - 주거/연애/결혼 포기 담론 스마트폰 보급 급속화, 카톡·페북 일상화
2012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 수 30억 돌파  K-Pop 붐 
2013 대학 등록금 최고점, 비정규직법 논쟁 인스타그램
2014 ‘헬조선’ 유행어 확산 이통3사 아이폰 출시 (아이폰6)
2015 청년실업률 10 % 돌파,
공시·자격증 열풍, N포세대 담론
유튜브 1인 크리에이터·먹방·ASMR
2017 ‘가즈아’ 암호화폐 광풍, 영끌·빚투 욕망  e스포츠, 인스타 인플루언서
2018 최저임금 인상 → 편의점 알바 단축·해고 논쟁
젠더갈등 심화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문화
2020 코로나19 팬데믹, 비대면 수업 Nintendo ‘동물의 숲’,
Zoom·슬랙·OTT 생활화, 리셀문화
2022 집값·금리 동반 급등, 2030 ‘영끌 부채’ 최고치 ZEPETO·메타버스 밈, 숏폼(틱톡·릴스)
2024 물가·월세 상승, ‘고정비 지옥’ 담론 AI 생성 이미지·챗GPT 체험 붐

 

| 번외: 페어리 마이 Fairy Mai

Light Please 2025.5.28

페어리 마이는 한일 합작 걸그룹 eite 출신으로 인디아티스트가 아닌 아이돌 기획색이 묻어나는 프로젝트라 번외로 뺐다. 레트로를 추구하는 걸그룹 MV 영상은 현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페어리 마이의 ‘Light Please’는 강렬하고 인상적인 사운드와 레트로 무드를 보여준다.

Light Please MV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DV와 VHS 질감, 워드아트, 스티커, 웹캠 샷 등의 레트로 이펙트뿐 아니라, 고질라나 울트라맨 같은 일본 괴수물, 마블 시리즈, ‘체인소 맨’, ‘진격의 거인’처럼 도시형 크리처물 감성도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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