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약
정우는 몽환적이면서도 다채로웠고,
박소은은 끊임없이 폭발적이었고,
연정은 당차고 강렬했고,
김사월은 소곤소곤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LG아트센터에서 사흘간 이어진 ‘우리가 만든 음악섬’ 공연 중 이틀을 다녀왔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이 하루씩 짝지어 묶여 있었기에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공연은 두 아티스트가 각각 55분씩 나눠 진행하는 구성이었다. 콜라보가 아닌 각자 무대 중심인 데다가 아트센터의 운영 방침 때문인지 정시에 시작해 정시에 마무리됐다. 고로 일반적인 앙코르는 없었다. 관객도 아티스트도 단콘처럼 100%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간결했고 그래서 더 여운이 남았다. 그래도 아티스트들은 하나 같이 다 멋있었다.

기타를 매개로 모인 네 명의 싱어송라이터 (모두 시를 좋아한다고...).
공연이 진행될수록 각자의 색이 진하게 배인 사운드가 점점 증폭됐고 그 안에서 저마다의 인상적인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덕분에 젊음의 에너지에 흡혈당하고 돌아왔다. 마음은 충전됐고 몸은 탈진했다. 하루 종일 파스를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아주 좋았다.
| Day 1.

공연 시작 전 음료를 주는데 술은 안마셔서 탄산수 받아서 조금 마시고 입장했다.
정우

2집 《클라우드 쿠쿠랜드》를 중심으로 꾸려진 무대였다(비공개 신곡도 포함). 정우는 마치 주술사처럼 묘한 기운을 풍겼다. 부드럽고 섬세한 보컬, 그와 대조적으로 펼쳐지는 록 사운드. 드론, 슈게이즈, 가라지, 인디팝, 레게 등 다양한 질감이 뒤섞여 마치 구름위를 유영하는 듯 몽환적이고 황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인디팝 감성의 '클라우드 쿠쿠랜드'가 흘러나왔을 때 가장 반가웠다(최애곡임). 이외에도 기타 리프와 가사가 인상적인 '들불',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슈게이징 사운드의 '낡은 괴담', 레게와 슈게이즈가 영켜 흐르는 '허물', 청춘의 날카로움을 담은 'Juvenile' 등, 다크 유토피아의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명반, [클라우드 쿠쿠랜드]의 명곡들이 이어졌다.

장르적으로만 보자면 이틀 간의 공연 중 가장 다채로운 사운드를 들려준 무대였다. 차분했다가 격정적이었다가, 조용했다가 다시 몰아치는 흐름. 앨범이 담고 있는 성장통이란 주체처럼 거칠고도 예민한 감각이 돋보였다. 유혹과 불안, 그 사이 어딘가를 걷는 마냥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또다른 버전 같다.
박소은

등장부터 퇴장까지, 박소은의 무대는 그야말로 발칸포.
폭발적이면서도 거침없는 록 사운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휘감았다. 그 가운데서도 인디팝 감성이 묻어나는 ‘반복되는 모든 게 날 괴롭게 해요’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또 한 번 환기되었다. 말랑한 멜로디가 오히려 곡 존재감을 더 뚜렷하게 만들었다.

무대가 절정에 가까워질 즈음, 박소은이 기타를 치며 외쳤다.
“🗣정우야, 나와라!🗣”
첫 타임의 정우가 다시 등장하자 공연장은 더 크게 들끓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박소은의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듣고’와 ‘눈을 맞춰 술잔을 채워’를 불렀다. 이런 공연 아니면 어디서 또 이런 아드레날린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정우는 곧 퇴장했지만 무대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둘이 갠적으로 친해서 각자의 단콘에서는 서로의 음악을 자주 커버한다고 한다.

멋 부리고 왔다가 더워 죽겠다는 박소은은 내내 유쾌하고 솔직한 말투로 관객과 호흡했는데, 마지막 곡 '고강동'의 소개는 유독 인상적이었다. 야망이 넘치던 시절 만들었다며 “나는 아주 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강동을 통째로 다 사버릴 거야!”라는 한 마디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노래를 들으며 'OO를 살거야' 할 때마다 떼창으로 따라 부르는 상황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엄청 비싼 비행기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카메라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컴퓨터를
살 거야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친구들한테
자동차를 선물할 거야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박소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돈과 시간이 그 행복에 제한을 걸자 돈을 벌어야겠다는 야망을 품었다는 배푸고자 하는 아티스트의 순수한 욕심을 엿볼 수 있다. 그 꿈, 변하지 않기를 응원!

에너지 넘치는 하루였다!

그렇게 하루 종료
| 나의 인터미션
스탠딩은 너무너무 힘든 것이었다. 아이돌 스탠딩도 아닌 그냥 서있던 것뿐인데돌아오는 운전 길에 눈도 침침해지고, 어깨허리 쑤시고, 종아리는 후들거려서 비틀거리고 ㅜㅜ. 대신 하루가 좋았는지 길고 재밌는 꿈을 꾸며 꿀잠을 잤다 (난 길고 재밌는 꿈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틴에이져 + 구니스스러운 어드벤처 형 꿈을 꾸다니.

첫날의 여파로 파스 3장을 붙이고 잤다. 하루가 지났다. 어제는 8시였지만 이 날 토요일 공연 시작은 7시. 일어난 후에도 통증은 이어졌다. 이대로는 견딜 수 없다 싶어 점심은 왕갈비탕으로 체력 충전을 했다(근데 맛을 별로). 힘들 때 마지막 나의 희망 같은 황진단도 챙겼다.
| Day 2.

안도 타다오의 공간 한 조각 남김

김사월이 등장하는 날이라 더 많은 관객이 모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어제보다 사람이 적었다.
아티스트에겐 미안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공간 속 숨통이 트이는 듯한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혹시 이날 열렸다는 칸예 콘서트 영향일까? 괜히 망상해 본다.)
연정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아티스트들은 시간이 지나도 신뢰가 간다.
최유리의 ‘동그라미’도 그랬고, 전날 무대에 오른 박소은도 그랬고—이번 공연의 연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지도는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낮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컸고 실제로도 기대 이상이었다.

입담은 타 아티스트들 대비 약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곡 설명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각 곡이 어떤 계기로 탄생했고 어떤 감정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연정의 기타 리프.
록 음악에서 기타 리프는 기본이지만 연정의 연주는 유독 날카롭고 선명해서 눈에 띄었다.
복싱이 취미라고 했던가—기타 연주 속에서 잽잽훅훅, 타격감 있는 리듬이 느껴졌다.
매끄럽기보다는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힘이 있었다, 아, 이게 연정의 사운드구나.

거기다가 더더욱 인상적이었던 이유가, 그녀의 애착 기타로 보이는 펜더재즈마스터(Fender Jazzmaster)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소닉유스, 다이노사워 주니어 등의 슈게이즈와 노이즈 사운드적 향수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제가 말귀는 잘 못 알아들어도 소리는 잘 듣거든요!”
이 한 마디로 떼창을 유도하며 부른 곡은 최애곡 ‘사랑엔 용기가 필요해’였다.
후렴구의 “Love”를 관객과 함께 부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아티스트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가장 기분 좋은 순간.

기타 치며 노래하는 당찬 모습의 연정,
언젠가 단독 공연에서도 꼭 다시 한번 보고 싶다.

퇴장 전 기타 피크를 나눠주는 모습

연정이 나가고 잠깐 쉬는 시간 바닥에 주저앉아 김사월을 기다린다. 이틀 간의 행군은 힘들지만 즐겁다
김사월

이날은 정우–박소은 무대와는 달리 관객수는 적었지만 관객 연령대가 훨씬 다양했다.
전날은 10~30대의 젊은 관객이 압도적이었다면 이날은 40대 이상 관객도 꽤 눈에 띄었다. 한국 포크록 신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탄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안에서 김사월이 가진 인지도와 신뢰도가 반영된 결과 아닐까 싶었다.

그녀의 무대 시간이 다가오자 객석은 점점 더 채워졌고 결국 네 명 중 가장 원숙한 사운드를 들려준 공연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음악 특성상 연정이 두 번째 무대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밝고 경쾌함으로의 마무리가 좋아서..) 어디까지나 관객 개인의 사소한 욕심이다.

김사월의 보컬은 음유시인 같아 루 리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음악은 몽환적이면서도 이상하게 직설적인 것 같은 것이 영화 <트윈픽스> 같은 느낌도 있다. 속삭이는 듯 귓속에서 조용히 반짝이며 스며드는 소리.

하지만 그 안엔 느릿하고 블루지한 그루브가 들어 있다. 모든 곡이 잔잔하지만은 않았고 '독약', '도망자', '누군가에게' 등 느리지만 리듬을 타게 만드는 사운드가 중간중간 공연의 흐름을 밀어 올렸다.

김사월은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가 있고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음악이 시작되면 그 세계가 활짝 열리며 모두를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날 있었던 관객들이라면 다들 느꼈을 것이다. ‘물 마셔 좌’를 오래도록 관찰하듯 바라보던 김사월의 조심스러운(?) 시선. 결코 불쾌하거나 냉소적인 느낌이 아니라 어떤 것과의 조우를 '조심해하는' 모습 같았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강아지가 낯선 사람이 근접했을 때 취하는 모습의 느낌? (나도 멍하니 봐서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은 없다


예상외로 공연 시간이 남았고, 엔딩곡 이후 약 10분의 여유가 생기자 김사월은 흔쾌히 앵콜곡으로 '로맨스'를 들려주었다.
그날 또 다른 기억에 남았던 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상처 주는 키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어’라는 곡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제목이 너무 길어서 ‘사상키’라고 줄여 부르곤 했는데 한 방송에서 진짜 자막 타이틀에 ‘사상키’라고 나간 걸 보고 충격받아서…” 이후론 아무리 길어도 또박또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상처 주는 키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어”라고 다 말한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도 하루가 멋지게 마무리 되었다.
갠적으론 제일 듣고 싶었지만 못 들었던, 김사월의 아우라가 원곡을 지배했던 노래, "보라빛 향기" 커버.

그렇게 이틀 간의 주말은 빨리 흘러갔고 몸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런 라이징 아티스트들의 사운드를 듣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완충받아서 감사한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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