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후반 시티팝이 유행하던 시절엔 전 세대의 아날로그 감성을 상상하며 따라가는 복고의 느낌이었다.
출처❘ YG엔터테인먼트더딥-에피 MV
반면 요즘 Z세대 힙합·하이퍼팝 아티스트들이 보여주는 레트로는 훨씬 더 개인적이고 디지털 기반이다. 게다가 빅뱅와 2NE1 같은 직접적인 한국적인 무드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출처 ❘ 노덕순 MV
흔히 '20년 주기설'이라 불리는 레트로의 법칙에 따르면 유행은 20년마다 반복된다고들 하는데, 그 시절을 유년기나 십 대로 보낸 세대가 20대 혹은 30대에 접어들며 꺼내보는 기억의 공식에 가깝다.
출처 ❘ Sony.com
여기 소개할 아티스트들은 1996년~2002년생. 2010년대 초반을 10대로 보낸 디지털 네이티브들이다.
출처 ❘ effie MV
핸드헬드 디지털 카메라(DV), 저해상도 영상, 디지털 잔상, 웹캠 자막, PIP 화면, 4:3 비율, 글리치, 스타버스트 이펙트 등— 어릴 적 익숙했던 풍경들을 직접 리믹스하듯 영상에 담는다. 그 결과는 그들만의 감각적 언어처럼 느껴진다.
출처 ❘ effie MV
복고의 중심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간 지금, 2000년대초반과 2010년대에 걸친 Z세대 시간을 기억하고 다루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 변화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소개한다 (추천은 뮤직비디오 영상 기준).
| 에피 Effie
More Hyper 2025.5.9
Effie는 최근 폼을 보면 정점을 찍으며 광폭에 가까운 질주를 하고 있다. <E> EP 앨범은 2025년 대한민국 베스트 앨범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운드와 비주얼도 갈수록 방향이 또렷해지고 있다.
Coca Cola MV
‘코카콜라 (senior ver.)’에서는 태극기, 교복, 옥수역 같은 로컬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특정 시기를 직접적으로 호출했고 이후 ‘maybe baby’와 ‘open ur eyes’에선 기존의 일렉트로팝 기반의 밝은 멜로디 위로 저해상도 영상, 웹캠스러운 디지털 레트로 요소들이 덧붙여져 질주하는 에피의 사운드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More Hyper MV
최신작 ‘MORE HYPER’에서는 응봉산 팔각정, 골목길, 2014년 출시된 SM3와 아이폰 6s 플러스처럼 익숙한 로컬 풍경과 사물 위에 DV 질감과 스타버스트 이펙트, 발칙한 레트로 한국폰트 등을 덧씌워 전체적인 화면을 거칠고 과잉된 느낌으로 밀어붙인다.
More Hyper MV
제레미 스캇 x 아디다스 하이탑처럼 MV들에서 눈에 띄는 등장하는 키치한 운동화를 통해 effie의 개인적 스타일이 부각되는 것도 인상적이다.
open ur eyes MV
추천: 'Down', '미워미워', 'maybe baby', 'open ur eyes'
| 더 딥 The Deep
Effie & The Deep - SRRY♥ 2024. 10. 24.
kpop b!tch ☆゚를 자처하는 The Deep은 굉장히 선명한 색깔을 가진 아티스트다. 하이퍼팝이라기보다는 일렉트로, 하우스, 클럽 댄스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이미지는 2000년대 초 일본 갸루 감성과 미국식 바비걸 및 웨스턴 분위기의 혼종을 보여준다. 귀엽고 장난기 많으면서도 대담하고 직설적인 여성성을 드러내는 비주얼과 사운드가 특징이다.
Make Up ❀ official gyaru MV - 2025.3.11 -
The Deep과의 협업 이후 Effie가 좀 더 과감한 스타일로 넘어간 것도 이 영향일지 모른다. 직접적인 상호작용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둘 다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긴장감과 디지털 시대의 로우파이 미감을 자신만의 언어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영국 런던 공연 포스터 ❘ 출처: 인스타 thedeep
요즘 인스타를 통해 영국 클럽에서 활동 중인 더 딥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bow wow MV
추천: "bow wow", “Shy Girl”, "Sad Girl's Club", "Angel Tatoo" 등을 추천하는데, 레트로 느낌의 영상 기준을 떠나도 좋은 곡들이 많다.
| 노덕순 Noducksoon
drama 2025.5.30
2010년대 초중반 디지털 환경에 대한 감각이 생생하게 반영돼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예다. 이전 싱글 ‘Fancy Car’에서는 PIP 화면, 다이아몬드 블링 폰트, 디지털 핸디캠의 나이트샷 모드 같은 요소를 활용해 비교적 장식적이고 장난기 있는 레트로 디지털 감성을 보여줬다면 최근 공개한 ‘drama’에서는 기존 포맷은 유지하되 화질을 더 떨어뜨리거나 더 과한 이팩트을 통해 날 것처럼 강조한다.
정우는 몽환적이면서도 다채로웠고, 박소은은 끊임없이 폭발적이었고, 연정은 당차고 강렬했고, 김사월은 소곤소곤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Day 1.
LG아트센터에서 사흘간 이어진 ‘우리가 만든 음악섬’ 공연 중 이틀을 다녀왔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이 하루씩 짝지어 묶여 있었기에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공연은 두 아티스트가 각각 55분씩 나눠 진행하는 구성이었다. 콜라보가 아닌 각자 무대 중심인 데다가 아트센터의 운영 방침 때문인지 정시에 시작해 정시에 마무리됐다. 고로 일반적인 앙코르는 없었다. 관객도 아티스트도 단콘처럼 100%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간결했고 그래서 더 여운이 남았다. 그래도 아티스트들은 하나 같이 다 멋있었다.
기타를 매개로 모인 네 명의 싱어송라이터 (모두 시를 좋아한다고...). 공연이 진행될수록 각자의 색이 진하게 배인 사운드가 점점 증폭됐고 그 안에서 저마다의 인상적인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덕분에 젊음의 에너지에 흡혈당하고 돌아왔다. 마음은 충전됐고 몸은 탈진했다. 하루 종일 파스를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아주 좋았다.
| Day 1.
공연 시작 전 음료를 주는데 술은 안마셔서 탄산수 받아서 조금 마시고 입장했다.
정우
2집 《클라우드 쿠쿠랜드》를 중심으로 꾸려진 무대였다(비공개 신곡도 포함). 정우는 마치 주술사처럼 묘한 기운을 풍겼다. 부드럽고 섬세한 보컬, 그와 대조적으로 펼쳐지는 록 사운드. 드론, 슈게이즈, 가라지, 인디팝, 레게 등 다양한 질감이 뒤섞여 마치 구름위를 유영하는 듯 몽환적이고 황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인디팝 감성의 '클라우드 쿠쿠랜드'가 흘러나왔을 때 가장 반가웠다(최애곡임). 이외에도 기타 리프와 가사가 인상적인 '들불',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슈게이징 사운드의 '낡은 괴담', 레게와 슈게이즈가 영켜 흐르는 '허물', 청춘의 날카로움을 담은 'Juvenile' 등, 다크 유토피아의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명반, [클라우드 쿠쿠랜드]의 명곡들이 이어졌다.
장르적으로만 보자면 이틀 간의 공연 중 가장 다채로운 사운드를 들려준 무대였다. 차분했다가 격정적이었다가, 조용했다가 다시 몰아치는 흐름. 앨범이 담고 있는 성장통이란 주체처럼 거칠고도 예민한 감각이 돋보였다. 유혹과 불안, 그 사이 어딘가를 걷는 마냥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또다른 버전 같다.
허물 - 정우, 2023.11
박소은
등장부터 퇴장까지, 박소은의 무대는 그야말로 발칸포. 폭발적이면서도 거침없는 록 사운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휘감았다. 그 가운데서도 인디팝 감성이 묻어나는 ‘반복되는 모든 게 날 괴롭게 해요’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또 한 번 환기되었다. 말랑한 멜로디가 오히려 곡 존재감을 더 뚜렷하게 만들었다.
무대가 절정에 가까워질 즈음, 박소은이 기타를 치며 외쳤다.
“🗣정우야, 나와라!🗣”
첫 타임의 정우가 다시 등장하자 공연장은 더 크게 들끓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박소은의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듣고’와 ‘눈을 맞춰 술잔을 채워’를 불렀다. 이런 공연 아니면 어디서 또 이런 아드레날린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정우는 곧 퇴장했지만 무대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둘의 콜라보 영상이 돋보였던 소녀와 화분 | 2021.7
둘이 갠적으로 친해서 각자의 단콘에서는 서로의 음악을 자주 커버한다고 한다.
멋 부리고 왔다가 더워 죽겠다는 박소은은 내내 유쾌하고 솔직한 말투로 관객과 호흡했는데, 마지막 곡 '고강동'의 소개는 유독 인상적이었다. 야망이 넘치던 시절 만들었다며 “나는 아주 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강동을 통째로 다 사버릴 거야!”라는 한 마디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노래를 들으며 'OO를 살거야' 할 때마다 떼창으로 따라 부르는 상황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엄청 비싼 비행기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카메라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컴퓨터를 살 거야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친구들한테 자동차를 선물할 거야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박소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돈과 시간이 그 행복에 제한을 걸자 돈을 벌어야겠다는 야망을 품었다는 배푸고자 하는 아티스트의 순수한 욕심을 엿볼 수 있다. 그 꿈, 변하지 않기를 응원!
에너지 넘치는 하루였다!
반복되는 모든 게 날 괴롭게 해 2025.2.4
그렇게 하루 종료
| 나의 인터미션
스탠딩은 너무너무 힘든 것이었다. 아이돌 스탠딩도 아닌 그냥 서있던 것뿐인데돌아오는 운전 길에 눈도 침침해지고, 어깨허리 쑤시고, 종아리는 후들거려서 비틀거리고 ㅜㅜ. 대신 하루가 좋았는지 길고 재밌는 꿈을 꾸며 꿀잠을 잤다 (난 길고 재밌는 꿈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틴에이져 + 구니스스러운 어드벤처 형 꿈을 꾸다니.
첫날의 여파로 파스 3장을 붙이고 잤다. 하루가 지났다. 어제는 8시였지만 이 날 토요일 공연 시작은 7시. 일어난 후에도 통증은 이어졌다. 이대로는 견딜 수 없다 싶어 점심은 왕갈비탕으로체력 충전을 했다(근데 맛을 별로). 힘들 때 마지막 나의 희망 같은 황진단도 챙겼다.
| Day 2.
안도 타다오의 공간 한 조각 남김
김사월이 등장하는 날이라 더 많은 관객이 모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어제보다 사람이 적었다. 아티스트에겐 미안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공간 속 숨통이 트이는 듯한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혹시 이날 열렸다는 칸예 콘서트 영향일까? 괜히 망상해 본다.)
연정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아티스트들은 시간이 지나도 신뢰가 간다. 최유리의 ‘동그라미’도 그랬고, 전날 무대에 오른 박소은도 그랬고—이번 공연의 연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지도는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낮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컸고 실제로도 기대 이상이었다.
입담은 타 아티스트들 대비 약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곡 설명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각 곡이 어떤 계기로 탄생했고 어떤 감정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연정의 기타 리프. 록 음악에서 기타 리프는 기본이지만 연정의 연주는 유독 날카롭고 선명해서 눈에 띄었다. 복싱이 취미라고 했던가—기타 연주 속에서 잽잽훅훅, 타격감 있는 리듬이 느껴졌다. 매끄럽기보다는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힘이 있었다, 아, 이게 연정의 사운드구나.
Fender Jazzmaster 기타 : 다이노사워 쥬니어,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소닉유스
거기다가 더더욱 인상적이었던 이유가, 그녀의 애착 기타로 보이는 펜더재즈마스터(Fender Jazzmaster)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소닉유스, 다이노사워 주니어 등의 슈게이즈와 노이즈 사운드적 향수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Teenage Riot - Sonic Youth 1988
“여러분, 제가 말귀는 잘 못 알아들어도 소리는 잘 듣거든요!” 이 한 마디로 떼창을 유도하며 부른 곡은 최애곡 ‘사랑엔 용기가 필요해’였다. 후렴구의 “Love”를 관객과 함께 부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아티스트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가장 기분 좋은 순간.
기타 치며 노래하는 당찬 모습의 연정, 언젠가 단독 공연에서도 꼭 다시 한번 보고 싶다.
퇴장 전 기타 피크를 나눠주는 모습
사랑엔 용기가 필요해 - 연정 202.10.
연정이 나가고 잠깐 쉬는 시간 바닥에 주저앉아 김사월을 기다린다. 이틀 간의 행군은 힘들지만 즐겁다
김사월
이날은 정우–박소은 무대와는 달리 관객수는 적었지만 관객 연령대가 훨씬 다양했다. 전날은 10~30대의 젊은 관객이 압도적이었다면 이날은 40대 이상 관객도 꽤 눈에 띄었다. 한국 포크록 신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탄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안에서 김사월이 가진 인지도와 신뢰도가 반영된 결과 아닐까 싶었다.
저질 체력에 스탠딩은 너무 힘들어서 둘 쩃날은 앞번호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멀리서 편하게 봤다
그녀의 무대 시간이 다가오자 객석은 점점 더 채워졌고 결국 네 명 중 가장 원숙한 사운드를 들려준 공연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음악 특성상 연정이 두 번째 무대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밝고 경쾌함으로의 마무리가 좋아서..) 어디까지나 관객 개인의 사소한 욕심이다.
김사월의 보컬은 음유시인 같아 루 리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음악은 몽환적이면서도 이상하게 직설적인 것 같은 것이 영화 <트윈픽스> 같은 느낌도 있다. 속삭이는 듯 귓속에서 조용히 반짝이며 스며드는 소리.
하지만 그 안엔 느릿하고 블루지한 그루브가 들어 있다. 모든 곡이 잔잔하지만은 않았고 '독약', '도망자', '누군가에게' 등 느리지만 리듬을 타게 만드는 사운드가 중간중간 공연의 흐름을 밀어 올렸다.
약간 이런 느낌이다
김사월은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가 있고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음악이 시작되면 그 세계가 활짝 열리며 모두를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날 있었던 관객들이라면 다들 느꼈을 것이다. ‘물 마셔 좌’를 오래도록 관찰하듯 바라보던 김사월의 조심스러운(?) 시선. 결코 불쾌하거나 냉소적인 느낌이 아니라 어떤 것과의 조우를 '조심해하는' 모습 같았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강아지가 낯선 사람이 근접했을 때 취하는 모습의 느낌? (나도 멍하니 봐서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은 없다
예상외로 공연 시간이 남았고, 엔딩곡 이후 약 10분의 여유가 생기자 김사월은 흔쾌히 앵콜곡으로 '로맨스'를 들려주었다. 그날 또 다른 기억에 남았던 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상처 주는 키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어’라는 곡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제목이 너무 길어서 ‘사상키’라고 줄여 부르곤 했는데 한 방송에서 진짜 자막 타이틀에 ‘사상키’라고 나간 걸 보고 충격받아서…” 이후론 아무리 길어도 또박또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상처 주는 키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어”라고 다 말한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포토타임
오늘도 하루가 멋지게 마무리 되었다.
보라빛 향기 - 김사월 2024.4
갠적으론 제일 듣고 싶었지만 못 들었던, 김사월의 아우라가 원곡을 지배했던 노래, "보라빛 향기" 커버.
LG아트센터에서 나오자마자 보이길래 찍어본 밤 배경 사진
그렇게 이틀 간의 주말은 빨리 흘러갔고 몸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런 라이징 아티스트들의 사운드를 듣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완충받아서 감사한 이틀이었다.
그런 김밥이 있다. 소위 ‘마약 김밥’이라 불리는 김밥. 먹을 땐 그냥저냥 했는데 그날 밤 잠들기 전 문득 생각나며 식욕을 자극하는 김밥.
그리고 이번에 처음 맛본 강화도의 서문김밥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이번엔먹을 때도 맛있었다. 물론 잠들기 전 여운도 컸다.
김밥은 워낙 일상적인 음식이라 파는 곳도 종류도 많다. 그 와중에 이렇게 은은하게 기억에 남는 맛을 만들어낸다는 게 신기하다.
그날 오전 10시 반, 강화도의 센터, 강화읍 풍물시장에서 밴댕이 정식을 브런치로 배불~리 먹었다. 소식좌라 사실상 저녁 식사까지 아무것도 못 먹는 상태 찍음.
풍물시장으로부터 도보 20분, 자동차 6분 정도의 거리다. 1.6km
펜션 입실까지 시간이 남아 마트와 박물관을 들르기로 했고, 마침 그 근처에 서문김밥이 있어 줄만 너무 길지 않으면 먹어보자 하고 들렀다.
평일이라 그런지 다행히 인터넷에서 보던 웨이팅은 없었고 오히려 옆 육갈탕집에만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배가 부른 상태라 "밤에 좀 출출해지면 먹자"는 생각으로 한 줄만 사기로 했다. “혹시몇 줄부터 주문 가능한가요?” 여쭤보니, 사장님은 웃으며 “한 줄도 됩니다. 편하신 대로 시키세요”라고.
맛만큼 기본 예의와친절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그 한마디에 녹아내렸다.
“그럼, 한 줄 부탁드립니다.” “네~”
4,000원에 한 줄 포장. 여긴 포장 전문이라 당연히 은박지에 싸여 나왔다.
검은 비닐에서 꺼내 손에 쥐자마자 느껴지는 갓 만든 듯한 따끈함. 모든 감각을 자극한다. 포만감을 싫어하지만, 결론은 하나 — ‘이건 바로 먹어야 한다.’
방문 예정이던 강화역사(자연사) 박물관까지는 차로 15분 거리, 주차장에서 먹으면 될 것 같았다.
강화역사박물관 바로 옆 강화자연사박물관 쪽 주차장으로 와보니 봉천산을 배경으로 조화롭게 들어선 주택촌의 뷰가 좋아보여 정차하기로 한다.
은박지를 연다.
김밥의 비주얼은 소박하다. 회사 근처 길거리에서 보던 딱 그 옛날 김밥 같은 모습.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자,
“아~ 괜찮네!”
갓 지은 밥, 찰기 있으면서 알알이 씹히는데 특히 간이 잘 되어 있다. 손끝에 살짝 묻는 야채기름(으로 추정되는)의 고소함. 혀와 목, 위장을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
한 줄을 둘이 나눠 먹기에 양도 딱 좋았다. 디저트처럼 먹는 김밥,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포만감에 더한 포만감을 채운 후 강화자연사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좋은 첫경험은 늘 선명하게 남는다. 서문김밥도 그렇게, 기분 좋은 기억으로 저장되었다.
‘여행 동안 매일 아침이나 간식으로 하나씩 사 올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여행 중엔 늘 또 다른 좋은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 결국 실행하긴 어렵다.
서문김밥=출발지점 / 동검도=도착지점
게다가 서문김밥은 동검도 숙소에서 약 20여 킬로, 차로 30~40분쯤 걸리는 거리다.
동검도에서 서문김밥 가는길
여담이지만, 이 구간은 해안도로가 쭉 이어지진 않지만 달리는 내내 강화해협의 수면이 틈틈이 시야에 들어오는괜찮은드라이브 코스다. 마침 꽃도 피기 시작한 시점이라 더 예뻤다.
출처 ❘ 강화군청 공홈
📍강화해협 & 호국돈대길 좋은 풍경과 동시에 격렬한 역사를 가진 이 구간은 강화나들길 제2코스인 '호국돈대길'의 일부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 좁고 긴 바다인 강화해협을 따라 19세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갑곶돈대 - 용진진 - 광성보 - 초지진 등이 줄지어 위치한다.
강화도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7시, 전등사 앞에서 산채정식으로 배를 채운 후 동검도 펜션에서 짐을 정리하고 퇴실했다.
뭔가 조금 아쉬워졌고, 며칠 동안 자꾸 이야기하던 서문김밥을 다시 포장하기로 했다.
이번엔 마음먹고 4줄을 사기로. 당일 점심용 두 줄, 저녁용 두 줄.
뭔가 오~래된 맛집들이 즐비할 것 같은 서문김밥 옆의 좁은 식당 골목
10시 30분쯤 도착. 오늘은 줄이 좀 있었다. 5~6분 대기 후 주문.
오늘은 당당하게 네 줄 주문!
도미노처럼 내 뒤에 있던 모녀 커플도 원래 두 줄만 사려다 내 주문을 보고 짧게 상의 후 따블로 상향주문 ㅋㅋ
(속으로 엄지 척 해드림)
칠판엔 예약 주문이 가득. “아… 이래서 재료 소진되면 일찍 문을 닫는구나…”
너는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
김밥을 받아 들고, 근처에서 집에 가며 마실 커피 한 잔도 샀다 (4박 동안 두 번째이자 마지막 커피).
강화도를 떠나며 차 안에서 은박지 속 온기를 다시 느끼자, 아침부터 산채정식을 먹은 배부른 상태인데도 참을 수 없었다.
시동이 걸린다. 먹기로 한다.
타임루프냐고... ❘ 출처: 토마스모어의영화방
여행 마지막 날이 다시 여행 첫 날로 타임루프 ..
차 안에서 먹는 음식은 또 묘한 맛이 있다. 운전 중 짬 나면 한 입, 짬 없는데 먹고 싶으면 “한 입만…” 하는 그 맛.
그렇게 가는 길에 한 줄이 사라졌다
오무아무아인가...
집에 도착해서는 남은 두 줄을 저녁 즈음 다시 꺼냈다.
(사실 한 줄은 집 도착하자마자 또 먹음)
이젠 식어 있었지만, 그래도 맛있다. 온기의 감촉은 사라졌지만 야채기름의 고소함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하아... 맛있네. 마약김밥 인정. 특히 밥만 먹어도 좋을 마냥 간이 잘 된 이 맛이 참 좋다.
강화도 서문김밥.
다음 강화도 여행에서도 전채음이자 후식 같고, 사이드킥 같기도 한, 꼭 다시 먹고 싶은 김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