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저녁의 Rua da Felicidade, 행복의 거리로

홍콩에서는 거의 사라진 레트로 네온이 마카오의 밤공기 속에서는 여전히 반짝인다. 춥진 않아도 한겨울이라 습도는 다소 잦아들었지만 거리를 지날 때면 특유의 눅눅한 기운이 아직 피부에 살짝 감긴다. 세나두 광장에서 걸어서 5분, 시계는 밤 9시를 향해가고 있다.

이곳은 Rua da Felicidade—‘행복의 거리(福隆新街)’—. 19세기엔 매춘·아편·도박이 뒤엉킨 최상급 홍등가였지만 지금은 마카오 정부의 '보존+재생'에 의해 보행 전용 거리와 단장된 외관으로 되살아난 관광특구다. 옛 사창가 건물은 이제 식당, 간식집, 기념품 가게로 변신해 여행자의 발길을 붙든다.

노란 가로등 아래 녹청색 목문-셔터와 종이등이 이어지는 거리 끝에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과 식당이 서로를 마주 본다. 왼편은 영화 <도둑들> ·<2046>등의 촬영지로 유명한 산바호텔 San Va Hotel(건물 1873 ↠ 여관 1930), 오른편은 오늘의 목적지 - 1903년 개업 노포, Fat Siu Lau(팟시우라우)다.
| 레트로 네온과 외관의 첫인상

이 거리에서 팟시우라우의 레트로 네온 간판은 단연 눈에 띈다. 초서체로 써진 佛笑樓(불소루)는 '부처의 미소가 깃든 집'이란 뜻. 한국의 중화요릿집처럼 '루'자로 끝나는 건 이곳이 3층짜리 누각이기 때문이다. 시그니처 메뉴인 비둘기를 형상화한 이미지도 함께 붙어 있다.

Rua de Felicidadae (거리) 방향의 입구. 광둥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3층 상가주택 파사드에 중국 기와, 포르투갈식 아치, 철제 발코니 등이 층층이 얹혀 있다. 유럽과 중국 감성이 한눈에 읽히는 재미있는 외관이다. 행복의 거리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만의 매력을 가졌다.

골목 방향(Travessa de Felicidade) 입구다. 중국식 기와를 얹은 입구는 옛 모습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원래 근처 Matadouro 골목에서 최초 개업했으나, 이내 곧 손님이 많아지며 이 거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나는 비둘기 구이를 먹으러 이 곳에 왔다

어릴적 홍콩에서 비둘기구이를 맛본 기억은 흐릿하지만 의외로 꽤 맛있었다는 인상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이번엔 '정통식'이라 불리는 팟시우라우에서 그 기억의 실체를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미지의 포털처럼 느껴지는 녹청색 목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안쪽에 계시던 종업원 한 분이 문을 먼저 열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식당의 첫인상이 좋다.
| 실내 홀 풍경

전통 있는 식당답게 연세 지긋한 종업원들은 모두 정장 슈트를 단정히 갖춰 입고 있었고 미소 가득 친절했다. 혼자 방문한 손님이라 조용한 구석 자리에 안내되었지만 오히려 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라 마음에 든다.

입구에서 주방까지 이어지는 기와 처마 아래, 아치형 문과 스터코 벽이 외관의 중국·유럽 요소를 끊김 없이 실내로 연결한다. 100년의 시간을 ‘박제’하지 않고도 원형을 유지한 채 시대에 맞춰 꾸준히 손질해 온 흔적이 곳곳에 베어 있다. 또한 의자마다 씌운 빨간 산타 커버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계절감까지 조용히 환기시킨다.
| 메뉴 : 120년 레시피 vs 마카오 퓨전 메뉴

마카오‑포르투갈 퓨전 요리로 잘 알려진 Fat Siu Lau지만 간판 메뉴인 ‘석기식 비둘기 구이(石岐燒乳鴿)’만큼은 100년 넘게 이어진 정통 광둥식 조리법과 품종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여기에 4대째 가문이 이어온 특제 레시피가 더해진다. 조리 방식은 새끼 비둘기를 마리네이드에 재운 뒤 숯불에 구워내는 것으로 Fat Siu Lau에서는 20~25 일령 비둘기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 시기의 비둘기는 살이 연하고 풍미가 깊다.

이 요리는 광둥성 중산시 내의 ‘석기(石岐)’ 지역에서 유래했다. 인건비와 토지 비용이 증가한 중산 시에서는 현재 품종 유지를 위한 종묘 관리를 맡고, 사육과 출하는 인접한 주하이(珠海) 시로 이관하여 효율적인 공급망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을 유지하되 현실적 여건에 맞춰 구조를 유연하게 조정한 사례다.

Fat Siu Lau의 대표 메뉴에는 비둘기 구이 외에도 커리 크랩, 아프리칸 치킨, 포르투갈식 덕 라이스, 매케니즈 폭찹 라이스, 양고기 요리 등이 있다. 광둥 전통 위에 포르투갈의 풍미가 얹힌 매케니즈 요리가 자연스럽게 포개지며 마카오 퓨전 식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100년 넘게 미식의 도시에서 명맥을 이어온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비둘기 외 메뉴들도 경험해 보고 싶다.

비둘기구이와 더불어 레몬과 서브되는 따듯한 차를 주문했다. 17세기부터 내려온 마리아쥬 프레르(Mariage Frères) 브랜드의 프리미엄 홍차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2천 원 차이밖에 안 났는데 마셔볼걸 싶다. 암튼 따뜻한 차는 특히 중국요리와 궁합이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이 날 모든 테이블에 수플레가 놓여 있던 것이 눈에 띄였는데 난 혼밥에다 소식좌라 시키지 못했다. 매우 아쉬웠다.
| 투박하지만 클래식, 테이블 세팅

투박한 듯 과시 없이 클래식한 테이블 세팅이다. 마카오가 가진 다중적 문화 구조와 어울린다.

물티슈와 비둘기 구이를 먹기 위한 비닐장갑. 홍콩과 마카오는 물티슈는 물론 냅킨 자체를 주지 않는 식당들이 많은데 여기는 로고가 찍힌 커버까지 따로 만들어 나름 '노포다운 격식'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가격은 그만큼 노포 프리미엄).

매케니즈 식당을 돌며 공통적으로 느낀 건 식전 빵의 퀄리티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쓸데 없는 기교 없이 유럽식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묘하게 옛스러운 클래식 풍미가 입맛을 단단히 잡아끈다.

기름진 비둘기 구이를 대비해 주문한 따듯한 차이니즈 티까지 세팅 완료. 이제 메인 요리를 기다릴 일만 남았다.
| 비둘기 구이 등장

레몬 조각과 청경채 위에 얹혀 나온 비둘기구이. 머리가 통째로 붙어 있는 모습에 어린 시절의 호기심이 다시 떠올랐다. 크기는 작지만 단단하게 구워진 껍질과 윤기만으로도 탱탱한 식감이 전해진다. 야무져 보인다는 말이 어울린다.

신기해서 요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기도 했다. 근데 사진 찍을 여유가 없다. 저녁 9시가 넘은 만큼 난 배가 고팠다.

비닐장갑을 끼고,
자, 어느 부위부터 맛볼까?

너부터다.

비둘기의 별미는 '뇌'라고 들었다.

머리를 ‘와작’ 깨물자 얇은 껍질이 얇고 크리스피한 과자처럼 바삭 부서진다.

안쪽에서 드러난 하얗고 작은 뇌를 쪽! 빨아먹었다. 홍어애와 비슷한 크리미 한 질감—호불호가 갈리겠지만 호기심을 채우기엔 제격이다(개인적으로 크리미 한 식감은 별로여서...).
특별 부위를 시식했으니 지금부터 본 게임에 들어간다.
살코기 타임.

가장 통통해 보이는 허벅지부터 한입 베어물었다. 바삭한 껍질은 캐러멜 코팅처럼 달짝지근한 로스팅 향이 나면서 ‘탁’ 깨지고, 속살은 닭과 오리 사이 어디쯤의 부드러움과 쫄깃함이 공존한다. 육즙이 톡 하고 터지며 감칠맛이 입안을 채운다.

첫맛이 예상보다 좋아 잠시 사진 촬영은 잊었다. 특히 껍질이 매력적이다. 가슴살, 날개, 목살까지 골고루 뜯어보니 닭고기처럼 부위마다 매력이 달랐다. 어느 하나 거스를 것이 없다. 특히 목살은 탱탱해 손으로 들고 뜯기 딱 좋다.

기름기가 살짝 느껴질 때마다 청경채와 식전 빵, 뜨거운 차를 곁들이니 입안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조합이 좋다.

비둘기구이 맛 삼매경에 빠져 먹다 보니 어느덧 한 피스밖에 남질 않았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사진을 좀 찍어봤다.

마지막 조각까지 바삭·촉촉·쫄깃·달짠의 균형이 흔들리지 않는다. 포만감에도 불구하고 더 먹고 싶은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여행 마지막 날 저녁에 예약해 둔 또 다른 레스토랑의 비둘기 구이가 남았으니—오늘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 식당을 나와서

만족스럽게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니 시계는 밤 10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마감 임박 시간임에도 눈치 주지 않는 종업원들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여유 덕분에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가격 & 만족도
- 비둘기구이: 138 MOP(약 24,000원)
- 현지 기준으론 다소 ‘프리미엄’이지만 국내에서 치킨 한 마리를 더 비싼 값에 먹는 걸 떠올리면 고급 식재료 + 전통 레시피 + 숯불 조리를 감안해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카오 여행 최고의 한 끼”로 남았다.
| 마무리 : 식후 산책, 한 밤의 마카오 반도

배부름 뒤에 또 하나의 행복이 있다면 산책이다. 멀지 않은 호텔까지 마카오 페닌슐라의 매력적인 밤 풍경 속을 걸어본다.

식당 바로 맞은편 SanVa 산바 호텔 외벽에 영화 <이사벨라>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코타이 대신 반도-타이파- 콜로안을 위한 마카오 4박을 하게 만든 영화다.

중국반환 전의 이야기를 다뤄 마카오판 <중경삼림>이라고도 불리지만 두 영화의 결은 아주 다르다.

언제나 매력적인 레트로 네온과 옛 흔적들

신마로를 지나가는 밤버스

마감 직전에도 서두르지 않는 응대,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거리 풍경,
그리고 120년 레시피의 비둘기 한 마리.

Fat Siu Lau는 ‘노포’가 왜 오래 사랑받는지를 한 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카오의 한 세기를
— 그중에서도 밤의 얼굴을 —
불과 한 시간 남짓에 압축해 경험한 만족스러운 여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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