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영화 <이사벨라 Isabella>는 1999년 중국 반환 직전 마카오의 공기를 섬세히 그려낸다. 반환 테마 때문에 ‘마카오판 <중경삼림>’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결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중경삼림>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이들도 있다. 영화가 전하는 그 혼란과 몽환의 느낌이 전혀 다른 것이다.
화려한 카지노 대신 로컬 골목·오래된 건물·도시 속 작은 자연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 매력에 이끌려 나 역시 4박 마카오 여행을 결심했었다.
- 감독: 팡호청 (彭浩翔, Pang Ho-cheung)
- 주연: 두문택 (杜汶澤, Chapman To - 싱), 이사벨라 롱 (梁洛施, Isabella Leong - 얀)
- 조연: 황추생(Anthony Wong, 黃秋生) — 감칠맛 나는 먹방 조연
- 수상: 2006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은곰상(최우수 음악상·피터 캄)
마카오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
여행 후 깨달은 것은 이 영화는 마카오의 역사와 공간을 알면 알수록 더욱 깊어지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공식 트레일러 속에 등장한 장소 가운데 직접 다녀온 곳들을 정리했다. 한 곳 한 곳이 마카오의 깊은 역사를 품고 있어 영화 팬이 아니더라도 마카오여행의 풍미를 짙게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다 (다른 로케이션 장소들도 추후 소개 예정!).
촬영지 지도:
- Travessa da Paixão (트라베사 다 파이상- 사랑의 골목)
- Iec Long Firecracker Factory ((구)익롱 폭죽공장)
- Pátio do Espinho (파티오 두 에스피뉴)
- Rua de Santo António (산투 안토니우 거리)
- Guia Fortress Lighthouse (기아 요새 등대)
- Rua de São Lourenço (상 로렌수 거리)
- SanVa Hotel, Rua da Felicidade) (산바 호텔, 행복의 거리)
1. Travessa da Paixão (트라베사 다 파이상- 사랑의 골목)
- 영화 속: 중반부, 술기운에 경계가 느슨해지며 서로의 관계를 ‘가족’으로 자각해 가는 장면의 배경. 성바울 유적 옆, 마카오의 역사와 일상의 틈새를 압축하는 장소로 쓰인다.
- 특징: 성바울 유적으로 이어지는 약 50m 골목으로 포르투갈식 파사드와 파스텔 색감이 연속된다. Paixão는 포르투갈어로 ‘열정/사랑’을 뜻하지만 가톨릭 용례에선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바울 유적과 맞닿은 이 골목은 사랑 ↔ 수난이라는 이격 된 의미가 자연스럽게 겹쳐 읽히는 점이 흥미롭다.
해가 뜬 오전 8시 경 인적없는 파이샹 골목의 모습, 영화 속 스폿 - 현장 메모: 세나도–성바울 축은 종일 인파가 몰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당일치기 방문이 많은 탓에 시간대 편차가 크다. 영화의 정서를 느끼려면 해뜨기 전~이른 아침(8시경)이 가장 적합하다. 영화 속 우리가 보는 장면에서 실제 캐릭터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영화 속 얀처럼 구멍에 몸을 넣고 계단을 봐볼 수 있었는데 다행히 그 시각엔 아무도 없어서 어색하진 않은 행위였다.
2. Iec Long Firecracker Factory — (구) 익롱폭죽공장
- 영화 속: 잃어버린 강아지 ‘이사벨라’를 찾는 장면들이 배치되는 곳. 타이파 골목이 감정의 폭발을 담는 배경이라면 이곳은 폭발 대신 잔잔함과 관망이 강조된다. 마음은 폭죽처럼 터질 듯하지만 지금은 죽은 공장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듯 엉켜져 있는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배경이다.
- 특징: 20세기 초 폭죽 생산은 마카오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이 폭죽 공장은 산업 쇠퇴 이후 장기간 방치되었고 지금은 폐허와 고목이 공존하는 풍경을 이룬다. 산책로를 따라 관람할 수 있으며 일부는 비개방 상태였다. 카페와 전시가 더해져 화려한 카지노 이전 마카오의 노동 역사를 보여주면서도 도시 기억을 재생해 나가려는 보존의 의미가 깃든 공간이다.
- 현장메모: 영화 속 처음으로 마카오의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 다만 산책로 조성 및 건물 진입 통제로 인해 정확한 촬영 ‘스폿’이라기보다 ‘사이트(부근)’에 해당한다. 연못은 접근조차 불가능했지만 폐허와 자연이 뒤엉킨 전체적 풍경은 영화처럼 독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인류가 사라진 아포칼립스가 연상되는데, 산업 쇠퇴 후 방치된 시간 속에서 함께 뒤엉켜 살아온 식생과 폐건물의 모습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에 남겨진 기억처럼 다가왔다.
3. Pátio do Espinho — 파티오 두 에스피뉴
- 영화 속: 싱이 깡패들에게 쫓기다 붙잡히는 장면의 배경. 싱과 얀이 공유하는 과거의 단서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이다. 다른 파티오에서도 유사한 해석이 가능했겠지만 마카오에 유일하게 남은 성벽마을이라는 역사적 무게 덕분에 “숨겨진 기억이 드러나는 순간”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 특징: 성바울 유적 바로 뒤에 있다. Espinho는 ‘가시’를 뜻하며 마카오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성벽마을(圍村) 보존 구간이다. 성 바울 대학 성벽의 흙다짐 일부가 직접 골목 경계를 이루어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를 띤다. 마카오에서 일반적인 파티우(Patio)가 생활 공동체의 내밀함을 보여준다면 이곳은 닫힘과 피난, 경계라는 성벽의 기억이 덧씌워진 예외적 사례다.
- 현장메모: 아침 일찍 찾은 골목은 고요했고 주민의 기척도 없었다. 버려진 듯 보였지만 벽돌, 석회, 목재, 양철이 뒤엉킨 흔적은 시대마다 반복된 변화와 적응의 기록을 증언하고 있었다. 골목의 끝에서 더는 숨을 곳이 없는 듯한 막힘은 영화 속 싱이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는 장면처럼 피난의 공간이 덫으로 바뀌는 아이러니를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았다.
4. R. de Santo António — 산투안토니우 거리
- 영화 속: 거리에서 아무 이유 없이 병을 깨는 건 위험한 행위다. 하지만 이 장면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딸에게 자신의 삶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순간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는다.
- 특징: 성바울 유적으로 이어지는 길이자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교구 중 하나인 산 안토니오의 중심 거리다. 이름의 유래가 된 성 안토니오 성당은 혼례가 자주 열리던 곳이라 현지인들이 “꽃의 교회(花王堂)”라 불렀고 이 별칭은 거리의 중국식 이름인 화왕당가(花王堂街)로 이어졌다. 지금도 중국식 골동품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바닥에는 포르투갈식 모자이크 자갈길이 깔려 있어 중국과 서양이 섞인 마카오 특유의 문화 풍경을 보여준다.
- 현장메모: 저녁 무렵 이 거리는 의외로 한산했지만 바로 앞 남쪽으로 갈라지는 경사진 예쁜 골목길인 칼사다 두 엠바이샤도르(Calçada do Embaixador)는 사진 찍는 이들로 살짝 붐볐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이 촬영지인데 이곳에는 한때 롱 하우스(Long House)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쿨리 무역(노동자 인신매매·노예 계약) 시절 해외로 팔려나가기 전 중국인 노동자들을 가두어 두던 바라쿤(억류 센터) 중 하나였으나 철거되어 흔적은 없다. 동서양의 문화가 묘하게 겹쳐진 이 거리의 상징성 위에, 영화 속 싱이 얀을 만나기 전 저질렀던 과거의 죄와 같은 그림자가 한 겹 더 얹힌 듯했다. 그것까지 영화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모호함 덕분에 이 거리는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5. Lighthouse, Guia Fortress — 기아요새 등대
- 영화 속: “마카오는 참 작아요”라는 대사와 함께 마카오 반도 최고봉에 위치한 등대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장면. 관객은 그 뷰를 직접 보지 못하지만 얀에게는 미래의 희망, 싱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겹쳐지며 가능성과 회한이 교차하다. 등대 내부의 톱니가 돌아가는 모습은 반환을 앞둔 도시의 시계 장치처럼 작동하며, 같은 ‘시간’의 은유를 다룬 <중경삼림>의 통조림 장면과 닮았지만 정조는 정반대다.
- 특징: 군사(요새)·종교(길잡이의 성모 예배당)·해양(중국 해안 최초 서양식 등대), 세 층위가 한 단지에 응축된 마카오 정체성의 축소판. 17세기 요새와 예배당, 1865년 점등한 등대가 함께 남아 있으며 예배당 벽화 속 중국 전통 복식의 천사상은 동서문화 융합의 흔적을 보여준다. 반환 직후 요새 아래 중앙정부 연락판공실 빌딩 신축으로 UNESCO를 통한 마카오 사람들의 경관 훼손 논란이 일었고 이는 곧 중국 정부 역시 이곳을 마카오 정체성의 상징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 현장메모: 맑은 날 오르니 옛 거리와 현대 고층건물이 한 프레임에 겹쳐 보이며 쾌적한 뷰를 이룬다. 호텔 전망대에서 밤에 바라본 기아 요새의 등대가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150년 넘게 항로를 비추며 여전히 살아 있는 도시유산으로 남아 있었다.
6. R. de São Lourenço — 상로렌소 거리
- 영화 속: 얀과 싱이 살레시아노 학교 (Instituto Salesiano)를 배경으로 상로렌소 거리를 즐겁게 걷고 있을 때, 맞은편 상로렌소 성당 계단 아래 차를 세운 황추생이 싱을 차 안으로 부른다. 그는 주빠빠오(포크촙 번)를 베어 물고 있다.
“애인인가?”
“딸이에요.”
“자네가 포르투갈 음식을 먹고 있다며? 그러지 마. 애인을 위해서라도.”
“딸이라니까요.”
카메라는 성당을 비추지 않고 차창 밖의 계단의 벽돌 일부만 흐릿하게 보여준다. 신앙의 공간은 사라지고 대신 인간의 오해와 체념만이 남는다.
- 특징: 상로렌소거리는 16세기 포르투갈의 임차지로 시작해 시간이 흐르며 유럽과 중국의 문화가 뒤섞인 공간으로 변했다. 성당(신앙)과 살레시아노(교육) 사이, 황추생의 차는 두 시대의 틈에 서 있다. 그의 먹는 행위는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변혁의 시대를 앞둔 끝자락에 남은 기성세대의 무감한 관성처럼 일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영화 속 세 번의 먹방 중 싱을 걱정해 주는, 그나마 상사다운 대사를 건네는 장면이어 특별하다.
- 현장메모: 상로렌소 성당은 바다를 향한 '풍순당(風順堂) - 순풍을 기원하는 예배당'이라 불리며 출항하는 선원들의 가족들이 안전한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빌던 공간이었다. 영화 속 지금은 간척을 통해 바다는 멀어지고 그 자리를 도시의 일상과 타협의 대화가 대신한다. 감독은 성당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옛 기도의 자리 아래에서 오해와 현실이 맞부딪히는 인간의 풍경을 남겼다. 계단 위엔 바다로 향한 기도의 기억이, 계단 아래엔 그 기억을 잊은 도시의 시간이 흘러간다. 영화 이사벨라는 마카오라는 공간과 역사와 문화를 알면 알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는데, 이곳에 와보고서야 살레시아노 학교가 건너편 상로렌소 성당이 있음을 발견하고 도시 자체를 미장센으로 다루고 있었다는 점에 감탄했다.
[이사벨라] 두 주인공이 배회하던 언덕의 거리 | 마카오 촬영지
성 라우렌시오 거리의 100살이 훌쩍 넘은 가톨릭 학교, Instituto Salesiano.| 황추생의 먹방 장면: 인상적인 디테일영화 는 '99년 중국 반환 직전 마카오의 정체성과 감성을 담고자 한 작품이다.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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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SanVa Hotel (Rua da Felicidade) — 산바호텔, 행복의 거리
- 영화 속: 싱의 집으로 등장하는 산바호텔(SanVa Hotel)은 영화 속에서 가장 정적인 공간이지만 그 정적 안에는 불안과 방황의 온기가 흐른다. 싱과 얀의 관계는 이 낡은 공간에서 시작하여 엉키고 설키며 결국 풀려 나간다. 좁은 복도, 습기가 가득하여 곰팡이가 득실댈 것 같은 벽으로 둘러싸인 이 낡은 공간은 고정되지 않은 삶의 은유로 보인다. 싱의 불안한 생활처럼, 그리고 반환을 앞둔 도시처럼. 머물되,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미장센이 된다.
- 특징: Rua da Felicidade - 이름은 행복의 거리지만 그 역사는 오래된 홍등가의 기억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이 거리는 한때 쾌락과 생존이 뒤섞인 마카오의 밤을 상징했다. 그 중심에서 14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산바호텔은 말 그대로 이 거리의 터줏대감이다. 관광지로 단장된 오늘날에도 그 구조와 질감은 크게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이 거리가 지닌 유일한 원형에 가깝다고 한다. 숙소라는 본질 때문에 산바호텔은 언제나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임시 거처다. 그래서 이곳은 늘 '흘러가는 시간의 중간지점'에 서 있으며 영화 이사벨라 속 싱이 머물 공간으로 더없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 현장메모: 관광 명소로 탈바꿈 한 곳으로 낯이건 밤이건 활기가 가득했다. 옛 홍등가 시절에는 여성들이 저 발코니에 서서 손님을 이끌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의 <2046>과 <에로스>가 1950년대의 홍콩의 분위기를 찾을 수 없어 이곳을 선택했다면, <도둑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힙스터식 마카오의 표정을 이곳에서 담았다. 그에 비해 <이사벨라>는 이 공간의 정체성과 역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마카오라는 도시의 시간감각과 감정의 레이어를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낸 영화로 보인다.
* 호텔 바로 맞은편에는 거리의 또 하나의 터줏대감,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중 하나인 팟시우라우(Fat Siu Lau)가 있다. 여기서 전통 광둥식 비둘기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비록 산바호텔에서 묵을 용기는 없었지만 거리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아주 좋은 대리 체험이었다.
[마카오] 120년 노포 팟시우라우, 비둘기구이 혼밥 후기
| 늦은 저녁의 Rua da Felicidade, 행복의 거리로홍콩에서는 거의 사라진 레트로 네온이 마카오의 밤공기 속에서는 여전히 반짝인다. 춥진 않아도 한겨울이라 습도는 다소 잦아들었지만 거리를 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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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사벨라>는 ‘반환 전 마카오의 기억’을 로컬 공간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곳들을 직접 걷고 바라보니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 카메라가 도시의 기억을 새긴 하나의 시대 기록처럼 느껴졌다.
영화가 남긴 시간과 공간의 결을 따라 걷다 보면 낡은 벽돌과 습한 공기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세포 같은 감정이 스며있었다.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인물의 시점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빛이 바랜 간판, 굽은 골목, 닫힌 창문들
모두가 지나간 자리이자 지금도 모두가 지나가고 있는 자리.
그곳에서 마카오의 표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결국 <이사벨라>는 도시가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에 관한 영화였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잠시 머물렀던 여행은 꿈처럼 짧고 오래 남았다.
TRIVIA: 공식트레일러
INSTA: 인스타도 간간히 하고 있음
https://www.instagram.com/groovie_s_lou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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