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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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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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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 & Vibe Upon the World 13:  2007년  9월자
              Krautrock과 Kraftwerk: 독일 김치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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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의 음악 씬은 히피의 문화 혁명을 겪고 프로그레시브 락과 아트 등이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죠지 해리슨에 의한 후기 비틀즈 사운드(‘I am a Warlus’ ), 벨벳 언더그라운드, 롤링 스톤즈 등이 선봉장을 맡았었다. 이들의 Hedonistic 헤도니스틱 (쾌락주의적) 사운드는 아직도 기존 음악이 가지고 있던 (히피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한) LSD 영향과 정치적 성향을 극적으로 극복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혹은 논외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사운드는 어느 정도 엠비언스와 기계음의 미학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편에서는 Stockhauzen 쉬톡하우젠과 같은 전위 음악가들이 에드가 바레즈의 바톤을 이어 받아 좀더 깊이 있고 자유로운, 하지만 아직 엘리트적인 틀에 갇혀 있는 전자 음악 사운드의 실험을 추구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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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맥락을 2 세계 전쟁의 범인이라는 엄청난 죄의식은 자존심과 민족성이 강한 독일인들에게는 크나큰 상처였다. 또한 전쟁 이후로 세계 1 파워가 미국의 문화적/예술적 식민주의 정책 또한 독일의 아티스트들에게는 뼈저린 고통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60년대가 막을 내리고 있을 무렵 세계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는 독일에서 크라우트락 Krautrock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Faust 파우스트, CAN , Neu! 노이!, Kluster 클러스터, Popul Vuh 포폴 , Tangerine Dream 탠져린 드림, Kraftwerk 크라프트베르크 등에 의해 주도 흐름은 60,70 Rock 밴드의 형태 (ex. 기타, 드럼, 베이스) 취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에드가 바레즈에서 쉬톡하우젠으로 이어지는 독일 아방가르드 전자 음악의 실험 정신과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의 동시대 아티스트들이 열어놓은 -전자음악 크로스오버의 가능성을 확장 시켰다. 이들은 주류 시대 정치적/문화적 사상에 반항적이었던 락과는 별개로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의 되는 세상을 직시하며 새로운 미학을 추구해 나갔다. 따라서 이들의 사운드는 미국 문화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맥락에서는 정치적이지만, 음악적으로 좀더 학구적/미학적 이였고 서민적이면서도 기계적인 엠비언스가 가득한 '공장 심포니' 가까웠다. (선형적이고 직설적인 기존 락과는 달리 자유롭고 해체주의를 지향하는 Freeform Rock 프리폼 또는 사운드 꼴라쥬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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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우트락의 가장 특징은 전자 음악 평론가 Peter Shapiro <Modulations>에서 묘사하고 있다. 동시대 아티스트들은 보아라, 나의 손가락이 얼마나 빨리 움직일 있는지를당신은 나를 보고 감탄 것이다 대해 빠져 있었다면, 크라우트락 아티스트들은 보아라, 내가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보다는 그들을 치유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크라우트락이 2007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가지를 찾을 있다. 째는 앞으로 (70년대를 기준으로) 다가올 암울하고도 희망적인 모순적 테크놀로지 중심 사회를 인지한 그들만의 외로운 외침이다. 데스크탑 컴퓨터를 넘어 랩탑, 핸드폰, Mp3, PDA, PMP 각종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에 의해 네트워크화 지금 디지털 사회에 의해 우리 인간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컴퓨터 없이 업무 생활이건 불가능 사회가 왔다. 영화 <다이하드 4.0>에서 보여주듯 네트워크가 이상을 일으키면 국가뿐 아니라 세계가 순간에 정지될 수도 있는 사회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까지 변할 것이라 그들 또한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그들의 사운드 안에는 충분히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번째 성격으로 말할 있는, 그들이 추구했던 기계적 사운드에 담긴 깊은 엠비언스다. 바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담겨 있던 너무나 완벽한 아트 뮤직의 한계를 소리와 테크놀로지를 통해 확장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오선지에서 벗어난 무한한 우주의 세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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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만도 하루에 억만 건이 넘을 핸드폰과 인터넷 사용에 왔다 갔다 정보들의 흐름에 대해 상상해 있는가? 만년 전과 다를 없이 인간은 신체를 움직여 일하고 있지만 그런 동시에 수많은 정보들의 움직임과도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보들의 움직임이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우리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받아 들일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 건축의 관점에서 월드컵에 의한 시청 앞의 광장화 라던지 운하 건설 계획 같은 당장 앞에 보이는 것만 갈아 치우는 개발주의적 마인드가 낡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 말로 누구를 선동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은 밝혀두고 싶다) 어차피 땅을 파해 칠수록 지구의 수명을 단축할 뿐이고 좁게는 그루의 나무가 살아 숨쉬는 맑은 공기의 공간을 없어지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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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기회와 성공을 향한 말초적인 본능과 이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소중한 꿈까지 포기하며 매달릴 밖에 없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헛된 병아리의 날갯짓이라는 것에 대해 절망할 밖에 없는 사회, 바로 이것이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현대 사회이며 예술품이다. 그리고 말초적인 사회 안에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가벼운 메이져 영화와 대중 음악 속에서 우리는 순간마다 위안을 얻을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음악 가수들의 생명이 짧은 것도 이유가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한다. 가지지 못한 다수들에게 작위적인 꿈과 희망과 안심을 선사하려면 만큼 분위기도 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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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우트락이 현대의 우리에게 선물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자신 만이 빠져들 있는 깊은 공간 ,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떠올려 보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칸트.) 처음에 언급 했듯 정형화된 오선지에서 벗어난 자유롭고도 무한한 세계로의 창문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음악에서의 엠비언스다. 엠비언스란 말이 난해하게 들릴 뿐이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이유와 해결을 찾을 있게 도와주는 치유의 음악이고 소리 조합이다. 영화 <라따뚜이> <초밥왕> 같은 만화에서 여러 음식들의 조합을 통해 무한한 우주와 형이상학적인 세상에 눈을 뜨는 것처럼 엠비언스는 소리의 새로운 공간으로 듣는 이를 유도한다- 마치 소시지 맛만 보다 사우어크라우트 (독일 김치) 맥주를 곁들이며 환상적인 조화에 의한 새로운 맛의 공간에 눈을 뜨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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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우트락은 70년대 뉴웨이브와 펑크의 등장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지만 흔적은 훗날 Tortoise Coil 등으로 대변되는 인더스트리얼과 포스트 펑크 뿐만 아니라 뉴에이지, 포스트락 음악 영역 전반을 통해 발견된다. 물론 대부분 크라우트락 밴드의 사운드는 대중 손쉽게 접근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가득한 소음과 난해함으로 여겨질 있었던 사운드가 대중들로 가까이 다가갈 있도록 것은 바로 크라프트베르크가 적극적으로 사운드를 끌어 안으면서부터 였다. (물론 엄격한 장르적 의미에서는 시점 이후의 크라프트베르크 사운드를 크라우트락이라 부를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미학적 사상과 가치 추구는 크라우트락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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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의 수용은 1972 <아우토반> 세계적 성공으로 들을 훗날 다가올 전자 댄스 음악 문화의 아버지로 만들게 된다. 이후 철저한 과학문화의 수용과 기계 안에서 존재하는 영혼의 믿음 그리고 미래 기계문명 사회의 공허함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었다. 자동차와 라디오의 찬양을 거쳐 인터넷이 나오기도 이전에 컴퓨터를 사용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는 미래 인간의 허무함과 절망감등을 노래한 것이 좋은 예다. 당시 쉽게 없었던 최고의 테크놀로지, 기계음을 통한 미래적 사운드와 그들을 대신하는 로보트 인형의 등장, 미니멀리즘적 전개로 인한 간결함과 몽환적 분위기 등은 그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깊은 철학을 배경으로 그들은 미래에 어울리는 음악을 구현하고자 것이다. 그들의 앨범 하나하나는 모두 완벽하리만큼 철저한 컨셉트 앨범이었으며 여기서 기계의 영혼화, 인간의 기계 제어라는 미래 사회의 예시와 지나간 역사의 향수라는 미래에 다가올 테크놀로지 사회의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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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은 이미 70년대 데이빗 보위 등의 당대 내노라 하는 아티스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80년대 미국과 영국의 주류 음악인 일렉트로 (Electro) 신스 (Synth Pop) 그리고 힙합 음악과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크라프트베르크의 미래주의적인 기계문명의 미학은 80,90년대를 뒤흔들 디트로이트 테크노(Detroit Techno)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들이 꿈꾸던 미래지향적 현대 문명의 사운드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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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거의 모욕에도 가까운 크라우트락의 명명은 역시나 시절 악명 높은 영국의 음악 평론가가 지어준 것이다. 사실 위에 언급된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Krautrock으로 알려지는 것에 꽤나 불쾌해 한다고 한다. (타국인이 '김치음악이라 명명하는 행위 속에 내포될 있는 은근한 조롱의 맥락). 어찌하였건 메탈이나 기존 주류 음악에만 빠져있던 리스너들에게는 굉장히 깊은 의미를 선사할 음악 장르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뉴에이지나 엠비언트,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대한 깊은 포용도 가능하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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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mmended Krautrock Music
1. <Neu!2> by Neu!
2. <The Faust Tapes> by Faust
3. <Tago Mago> by CAN
4. <Musik Von Harmonia> by Harmonia

5. <Yeti> by Amon Düül II

Recommended Kraftwerk Music
1.<Autobahn>
2.<Trans-Europe Express>
3.<Computer World>
4.<Radioactivity>

5.<The Man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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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클라우드 형식으로 표현한 일렉트로니카 타임라인

(Width X Height: 4m X 1m )  1년여에 걸쳐 완성된 것이지만 이미지가 너무 큰 관계로 웹상에서 디테일은 보여드릴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PLUR and Vibe Upon the World 10: ELECTRONICA Timeline

 컬럼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최근 흐름에 (2000년도 이후) 대한 굵직한 요소들은 어느 정도 얘기한 것 같아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로 방향을 수정해 보려 한다. 그리고 뭐부터 시작해야 되나 생각하다 막혀버려서 우선 큰 그림을 던지기로 마음 먹었다. (이 한정된 지면 안에서 전자 댄스 음악 문화사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어 보여 자세한 디자인 컨셉트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점은 이 연대기는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흐름을 봐야 한다' 믿음 하에 전자댄스음악의 큰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기술과 예술을 두 개의 큰 축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전자댄스 음악의 장르와 문화의 흐름에 따른 일종의 정보 집합의 과정이다. 즉 연대기에 표기된 정보 하나하나가 그 특정 시대에 있어 일렉트로니카 문화와 관계성이 높은 세포들이라고 보면 된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시간이 지날수록)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것처럼 연대기에서 정보들이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문화의 확산을 뜻한다. 디자인 설명은 대충 이 정도로 끝내고 역사를 한 번 쓱 훑어 보겠다.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가는 만큼 지루하고 숨가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오버뷰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이야 말로 우주와 지구 그리고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원초적인 '언어'와 '조화'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우리네 삶의 애환과 행복을 대변해주는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18,19세기의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후 신은 곧 인간이었으며 종교란 인간 자신의 의지와 믿음이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인간에게 돌아온 것은 더욱더 복잡해진 스트레스, 사회, 사상, 현실 그리고 황폐화 된 지구뿐이다. 어찌하였건 과학기술의 발달이 그 엑셀레이터를 밟는 순간 하나였던 과학은 두 개의 전혀 생소한 분야, 예술과 테크놀로지로 갈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인간은 (음악적으로만 얘기한다면) 하루가 바삐 생겨나는 새로운 기계들을 통해 기계에 의존하면서도 인간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기계와 인간의 합성이란 현대 문명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겨우 100년 전에 이렇게 전자음악의 작은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엑스터시 마약의 탄생도 그 때 즈음의 이야기다) 벌써부터 이 시절의 음악가들은 소음과 반복이란 요소를 찾아내었고 1920년대에 그 때까지 무성했던 이론을 뛰어 넘어 프랑스의 에드가 바레세가 실질적인 전자음악적 시도를 하며 새로운 활로를 뚫게 된다.

이 탄력은 1950년도까지 올리비에 메시앙이나 존 케이지 같은 (그리고 스톡하우젠으로 이어지는) 전위 음악가들로 하여금 전통적 형식을 대담하게 거부하고 절대적이었던 서양 사상을 벗어나 동양적 사상을 품으며 기계음이 단지 소음이 아닌 새로운 '희망'이라는 이론적 틀을 마련해 주게 되었다. 그리고 테이프의 탄생과 함께 이를 활용한 구체음악이 발달하게 된다. 이 시점 이후로 독일,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각지에 전자음악 연구소들이 생겨나며 새로운 문화의 탄생의 불을 조심스레 부치고 있었다.

 60년대는 그야말로 인간이 만든 새로운 세계관이 질풍노도 같은 발전을 거듭한 숨막히던 시절이었다. 인간이 달 착륙에 성공한 것은 물론 멜로트론과 모그 신디사이저가 탄생했고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시대를 예고했으며 티모시 리어리는 LSD와 마리화나를 찬양하며 앞으로 다가올 사이키델릭하고 영상에 입각한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을 외쳤다.

그 뿐 인가. 비로소 '젊음의 문화'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이 시기다. ‘스윙잉 런던’과 ‘우드스톡’으로 대변되는 모드와 히피 문화는 세상 사람들이게 '젊은이'라는 신인류의 출현을 인식시키고 새로운 세계관을 제공했다. 대중 음악인들의 전자음악적 시도도 이때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밥 딜런은 전자음악을 품기 위해 통기타를 집어 던졌으며 죠지 해리슨은 비틀즈로 하여금 전자음악과 사이키델릭의 세계로 유도했다. 무그 신디사이저를 통해 웬디 카를로스는 바하의 음악을 전자화 시켰다. 재즈의 위기를 일찍이 감지한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를 락과 신디사이저에 접목시키고 자마이카에서는 리 스크래치 페리를 필두로 테크노와 힙합의 모태인 덥과 레게를 탄생시켰다. 락 음악계에서도 지미 헨드릭스는 전자기타를 통한 예술적 퍼포먼스로 세상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핑크플로이드와 벨벳언더그라운드 또한 소음과 전자 음악기기와의 힘겨운 씨름을 통해 예술적 대중 음악으로의 승화를 성공시켰다. 바로 락 밴드와 신디사이저의 결합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마이크 올드필드나 탠져린 드림 같은 아방가르드 신디사이저 및 뉴 에이지 아티스트의 탄생에도 불을 붙이게 된다.

이러한 60년대의 문화적 폭발을 배경으로 70년대에 들어 지금 일렉트로니카로 대변 되는 실질적인 전자댄스음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의 주역이 바로 신스팝의 대명사인 독일의 크래프트워크다. 이들의 영향은 곧 80년대 일렉트로, 테크노, 애시드 하우스로 이어진다. 이들은 순수한 전자댄스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고 미디어, 전자기기와 하나가 된 인간 사회를 표현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탄생하기도 전 이들은 컴퓨터를 통해 사랑에 빠진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특유의 엠비언스를 강조한 뉴에이지 음악과 소음과 반복의 에센스를 계승하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한 레게 음악의 영향을 받은 힙합을 (그랜드 마스터 플래시의 스크래치의 발견과 함께!) 필두로 한 블록파티와 디스코에 의해 비로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파티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전자댄스음악 씬의 그 장엄한 서막을 올린 것이다. 60년대 히피에게서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은 곧 사회적인 체제와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를 중요시 여기며 게이와 레즈비언 등의 사회적 마이노리티의 커밍아웃을 유도했다. 그리고 이들, 하위문화 소수들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그들만의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바로 디스코 음악이었다.

하지만 디스코가 대중문화의 수면위로 떠오르며 디스코는 만인의 그리고 소위 '골 빈' 연예인들과 부르주아들 및 '잘 나간다는 겉 멋 든 이들'의 잔치판이 된다. 플랫폼 슈즈와 벨벳 자켓 그리고 코케인과 섹스의 문화로 타락해버린 디스코 씬은 (지금 케이블의 부XX비의 씬이 이 것과 꼭 닮았다. 섹스와 마약을 요소를 빼더라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를 기점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디스코 죽이기' 운동과 함께 일격을 맞게 된다. 그리고 디스코는 다시 언더그라운드로 그 장소를 옮기게 되고 어둡고 차가워진 소수를 위한 언더그라운드적 요소를 계승하며 프랭키 넉클의 시카고 하우스씬을 탄생시킨다. 또한 디스코의 전통적인 소울과 펑크(Funk)적 요소는 뉴욕의 래리 르반의 천재적 리믹스를 필두로 한 개러지 하우스 씬으로도 이어진다. (디스코의 Funk와 소울적 요소는 훗날 딥하우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문화적 폭발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디트로이트에서는 데릭메이, 후왕 앳킨스 등이 테크노 사운드를 퍼뜨리고 있었으며 영국 맨체스터의 토니 윌슨은 해피 먼데이즈, 조이 디비젼과 함께 전설의 클럽 하씨엔다를 열며 '매드체스터씬'을 탄생시켰다. 이 때가 애시드 락과 이비자의 발레릭 씬 그리고 폴 오큰폴드와 대니 램플링에 의한 2nd Summer of Love를 이어주는 접점이 되었다. 바로 엑스터시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레이브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 때는 1988년으로 전통에서 노통 시절에 막 접어든 서울올림픽의 시점이다) 이 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해의 영국 축구 훌리건들의 폭력 사건 비율이 몇 십 퍼센트 이상 떨어져 아주 잠시나마 '훌리건'이 아닌 '러브써그'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였다. 클러빙 이외에도 스톤헨지, 글라스튼베리 페스티벌과 같은 우드스톡 이후 대규모 음악 축제가 성행했다.

하지만 엑스터시와 사랑으로 가득했다는 2nd Summer of Love(첫번째는 60년대 히피 문화를 지칭한다)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규모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태동은 곧 돈 냄새에 민감한 프로모터들과 장사꾼들의 레이더에 재빨리 포착되고 주류 및 대규모 레이브와 클럽들이 성행하게 된다. 지금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파티'라던지 '클러빙'이라는 현상은 이 때 확립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대적인 문화 폭발 현상이 전자댄스음악과 관련된 테크놀로지의 확산과 장르의 다양화를 촉진 시켰다는 것이다. (연대기를 볼 때, 비로소 문화와 장르를 표현한 오렌지와 노란색의 글자들이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90년대에 들어 위에서 언급한 대규모 상업적 레이브와 클럽이 그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또한 하드코어와 애시드가 주를 이루던 거칠고 빠른 음악 성향에 대응해 차분하고 정적인 엠비언트 하우스나 트립합 장르가 태어났다. 이는 곧 미친 듯이 소릴 지르고 몸을 흔들어대기만 하던 전자댄스음악에 '칠아웃'이라는 새로운 '휴식'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는 훗날 라운지 씬 탄생에 영향을 준다)

이 밖에도 이런 '리스너'를 위한 음악지향성은 전자댄스음악의 지나친 상업화와는 다른 노선의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비트사이언스 등의 새로운 실험과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하며 에이펙스 트윈이나 DJ 스푸키 같은 새로운 실험적 사운드를 구사하는 아티스트 형 DJ들의 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상업성과 유행성이 강한 트랜스나 하우스에 대응해 드럼엔베이스와 같은 장르들의 출현은 전자댄스음악 씬의 줄기찬 언더그라운드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레이버들은 인터넷, 포토샵과 같은 동시대의 멀티미디어 환경을 적극 수용하며 새로운 B급 디자인 문화와 자신들만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이 정도로 확산되고 성숙의 조짐을 보이면 당연히 주류로 올라가기 위한 '성인식'을 치러야 한다. 갑작스러운 미디어의 '띄우기' 및 '흠집내기' 그리고 이에 영향 받은 기성세대의 간섭을 뜻한다. 이 정도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좀 '독한' 문화는 정부의 간섭까지 행해진다. 그 후 적당히 필터링 되어 '모든 이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중 문화가 되어 예쁜 새 색시/신랑 마냥 때때옷을 입고 사람들을 반긴다. 전자댄스 음악도 이 혹독한 성인식을 치러야 했다. 물론 미디어가 거는 딴지의 원인은 엑스터시 마약으로 시작되었다. (이 영국의 엑스터시 스캔달은 1930년대 미국의 리퍼매드니스로 통하는 마리화나 퇴치 운동과 많이 닮아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다양한 장르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락이나 클래식처럼 어느 정도 고정된 공식의 해석에 익숙한 평론가들에게 이런 음악의 해석은 거의 불가능이었으며 수십 개가 넘어가는 장르의 개수는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 뿐이었다. 마치 지금의 인터넷 하이퍼 링크 흐름을 보듯 뚜렷한 분류체계 없이 그 '유사함'과 관계만을 강조하며 순식 간에 증식하는 이 현상에 음악 평론가들과 미디어는 난색을 표하며 절대적인 어명을 내린다. 

 

 “이제부터 이 모든 중구난방의 음악들을 일렉트로니카라 명하겠노라.” 

 

 그렇다. 일렉트로니카의 어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5년, 암묵적인 전자댄스음악 문화의 죽음이 선포된 해였던 것이다. 전자댄스음악 씬의 ‘공식적인 끝’은 바로 여기까지다. (이 단어의 사용이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어쨌든 이 덕분에 레코드샵의 얼터너티브 섹션 안에 모비, 케미컬 브라더스, 사라 맥라클랜 그리고 너바나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현상은 점점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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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 & Vibe Upon the World 06년 11월자

02_Money’s Too Tight to M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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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세상은 날이 갈수록 편해진다고 한다. 핸드폰을 비롯하여 쏟아져 나오는 첨단 기기들의 칩에는 더욱 향상된 인간의 기억과 논리가 탑재되어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준다고 한다. (더 이상 기기 (gadget)가 아닌 인공지능의 로봇으로 탈바꿈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또한 개인화 되어 가는 사회를 지적하며 유전적, 문화적, 개인적 차별화는 서로의 다양성을 공유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뚜렷이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공해 가득한 도시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전원의 쾌적함, 숨막히는 일상에서 느낄 줄 아는 커피 한잔의 여유, 몸에 좋은 유기농 식품과 금연, 당당함과 자신감을 찾아주는 자기관리 등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뭔가가 많아진 건 사실이며 틀린 말 또한 아니다. 문제는 미디어는 유행을 만들고 우리에게 삶의 요소들을 끊임없이 정의하고 강요한다는 것이며 그 강도는 심해지고 있다.

결국 공식은 하나다. 이 특권들을 누리는 대신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어차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이미지를 먹고 사는 우리는 끊임 없이 소비를 해야 하는 운명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상당한 뒷받침이 되어 주지 않는 경우라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이미지를 먹기 위해 치열하게 삶과 부딪히고 있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돈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지를 뛰어 넘는 것에 대한 괴리감에 빠지는 신세기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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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으로 사회가 시끄럽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이념을 뛰어넘은 지 오래되었고 결국 경제력 확보에 관한 싸움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맞은 핵실험 후의 ‘타인’들의 반응은 전쟁이 아닌 ‘돈 있으면 빨리 주식을 사야 되는데. 어차피 전쟁 날리는 없는데 반등할 것 아냐’였다. 이미 안전불감증에 빠져 버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미지를 먹기 위한 끝없는 도약인가? 과연 첨단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인가 미디어인가? 미디어가 말하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에 감춰진 일관성과 폐쇄성이란 소용돌이 안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인가? 해답도 없이 인간 사회에서 두고두고 되풀이 되기만 하는 질문이다.

          레이브 문화의 매력은 바로 그 다양성 안에 있었다. 소수의 모임이면서도 타인을 수용할 수 있고 음악과 춤을 통한 트랜스 (trance)라는 보다 원시적인 요소를 통해 자신과 사람들 그리고 자연의 소중함에 눈떠가는 사랑의 여정이었다. 독자적인 문화이기에 레이브만의 언어는 존재할 지라도 그것을 강요하고 정의하지 않았다. 또한 기나긴 히피의 트레일러 여정처럼 일상의 삶이란 바퀴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지도 않았다. (on-going이 아닌 one-shot event이기에) 인종도 사회적인 지위도 그리고 나이도 묻지 않았으며 모두가 뒤섞여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오직 음악과 춤으로 하나가 될 뿐이었다. 레이브도 산업화와 상업화의 과정 속에 죽어 버린 지 오래지만 그 요소들은 곳곳에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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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업적인 캐릭터가 강한 클러빙은 아직도 건재한 것 같다. (죽어버린 레이브에 비하면) 그리고 한국의 클럽 문화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소수의 문화라고 불려지고 있기에 (기준이야 어찌하였건) 이러한 레이브의 요소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무작정 가져본다. 일이 커지면 사람들 눈에 띄기 마련이고 눈에 띄기 시작하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지난 호에 잠깐 언급했듯이 2000년도 이후의 댄스음악 문화는 하나의 거대 산업으로 볼 수 있다. 필자의 취지는 어디 까지나 댄스 음악 문화의 옛 모습을 찾아보는 것임으로 산업으로서의 현재 댄스 음악 신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상업화의 공식은 같기 때문에) 따라서 근 몇 년간의 모습은 새로 발생하고 있는 전자 음악 신의 몇 가지 트랜드나 사건만을 꼽아서 2부에 걸쳐 나열해보려 한다.



Politics of Dan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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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 DJ가 되었으니 이제 정부에 가서 자선 이벤트 좀 하게 도와달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겠군요” 2005년 당시 Paul Van Dyke의 말이다. 워낙 장난기 많은 사람이라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을 한번쯤 곱씹어 볼만하다. 어두운 창고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담배 연기나 날리며 이성이나 탐닉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상한 양아치들이 쪽수가 많아지더니 제법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힘이란 사회에서의 발언권과 추진력 그리고 존재성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들어 반가운 소식은 미국 일리노이 주 경제청과 관광청에서 추진한 Chicago Move! House Festival이다. 참여자들의 반응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하우스의 고향인 시카고에서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나마 그 역사적 중요성을 정부가 인식하고 실천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무적이다. (시카고 시청 장이 하우스 음악에 심취해 있다는 야담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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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행사의 번복을 거듭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러브퍼레이드가 지난 9월 열렸다. 독일 러브퍼레이드의 자매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독일과는 무관하게 San Francisco Love Fest란 새 이름으로 독자적으로 열렸다. Peace, Tolerance, Understanding (평화, 박애, 이해)의 모토와 함께 미국의 암울한 전시 분위기를 바꾸고 라디오나 MTV 등의 주류 미디어에서는 알 수 없는 일렉 댄스 음악문화를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 옛날 레이버들의 본거지 였던 글라츤베리 페스티벌 (Glastonbury Festival) 또한 2007년엔 17만이 넘는 인파를 수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대규모 일렉 댄스 음악 관련 행사들이 펼쳐지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누가 더 많은 이슈를 끌어낼 것인가 하는 ‘숫자놀이’에 치우치는 경향도 지적을 받고 있기에 조심스레 바라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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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장과 함께 당연히 DJ들의 지위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물론 수퍼스타 DJ들에게만 한한 것이겠지만) 이번 올림픽월드컵의 음악을 Tiesto와 Bob Sinclar가 각각 맡은 것만 보아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수퍼스타 DJ 시대가 도래하며 클러버들은 이른바 ‘빅 이벤트’만을 좇아 다니게 되었다. 모두의 손과 눈은 DJ를 향해 있고 그는 뒤에서 신,scene의 전체적 흐름을 이끄는 가이드가 아닌 화려한 유명세와 테크닉을 선사하는 지미 헨드릭스가 되어 간다. 이것은 락 콘서트가 아님을 말하고 싶다. 우린 아직도 디즈니랜드에서 캐리비언 해적의 주제가를 트는 Tiesto보다는 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 에서 은은히 만나는 언더월드 (Underworld)가 더 반갑다.- 야담이지만 ‘큰형님’ 띠에스또가 심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그의 최근 상업적 행적에 괘씸해 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쾌유를 빌어주자. Gouryella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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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se of VJing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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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몇 년간의 전자 댄스 음악 신에서 가장 주시하고 싶은 건 빠르게 자라고 있는 VJ(Video Jockey) 문화다. 음악과 영상의 실시간 싱크의 개념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야 주류의 눈에 띄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DJ와 VJ가 분리 되어 완벽한 싱크를 보여줄 수는 없다. 새로 나온 DVJ 기구를 통해 기술적으로나마 싱크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벌써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빠른 시간 안에 극복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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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아티스트 중 Addictive TV가장 먼저 상업적 주류와 손을 잡은 케이스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개봉 예정인 안토니스 반데라스 주연의 ‘Take the Lead’의 Trailer를 맡아 영상의 리믹스를 하게 된 것이다. 과연 Hollywood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건’을 벌였을까? 그 속셈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영화 자체보다 트레일러가 더 기다려지긴 처음이었다. 물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www.youtube.com에서 take the lead trailer를 검색하면 볼 수 있다. 벌써 리믹스 버전이 몇 개 더 나왔던데 addictive TV remix 강추!) – 얼마 전 모 케이블 채널 광고에서 이 Take the Lead 리믹스의 무심한 표절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딴 방법은 없었을까…ㅠ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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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Motion Graphics가 영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제 헐리우드는 영화 보다 더 멋진 오프닝을 선사한다. 또한 소수 영화 매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엔딩 크레딧 (보통은 자리를 빨리 뜨라는 큐 사인으로 인식 되는 것 같으며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고층 건물 극장에서 이에 반응하는 관객들의 민첩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종종 사람들을 끝까지 붙잡아 놓고 있다. 이제는 트레일러 마저 영화의 종속성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거듭나다니! 영상과 음악 디자인의 앞날은 희망차 보인다. DVJing이 활성화되는 그 날이 올 때 클럽 신은 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과연 음악과 영상의 싱크의 개념이 우리 클러버들과 레이버들에게 통할지. 우리는 그것 (음악과 영상이 하나된 무언가)을 보아야 할지 들어야 할지 또는 우리의 몸과 눈은 어떻게 반응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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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J 문화와 관련해 유럽의 Sonar Festival은 1997년에 시작되어 이제는 전자 음악 댄스 신에서 가장 중요한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다. 2006년도는 흑인 음악을 테마로 일렉 음악의 역사를 돌아보고 ‘일본의 소리’라는 사이드 테마로 이루어졌다. 유럽은 너무 멀어 갈 수 없지만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에서도 국내 최초 소나 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번 호가 발매 되면 벌써 끝나 있을 것이어서 소개를 일찍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홍대 M2에서 벌써 두 번째 VJ 파티 소식이 들리는 바 한국에서의 VJ신의 발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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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만한 VJ Artist 5 (DJ Mag 참조)

- Addictive TV – ‘Mixmaster’ series

- Hexstatic영국 템스 페스티벌 게릴라 쇼

- Eclectic Method ‘We’re not VJs’
           -VJ Anyone- Hed Kandi Series
          
- VJ Culture- Lumens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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