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Dust's House
http://kinopravda.egloos.com/3935329#9003138

(전문은 위 링크로 가서..)
멜랑꼴리+희망... a Voice at the End of the Line by M. Ward

너무 좋은 글이라 블로그에 담아 읽고 싶어 퍼왔는데...
이 분 블로그에 댓글 쓰는 방법을 모르겠다...ㅜㅜㅋ
트랙백 거는 링크도 잘 몰겠고...
알림 없이 퍼왔음...ㅜㅜㅋ
(나  인터넷 세대 맞니?)
만일에 혹시 보시는 일이 있다면 한마디 던져 주시길...
암튼...
 

나 또한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며 마음을 쿡쿡 찌르고...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글...
자기 개발서가 시장 탑을 달리며 판을 치는 세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세상에...
한 방울의 이슬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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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예비 저자들을 위하여: 대기만성이 당신들의 길은 아니다

믿고 존경할 만한 어른 없는 세대에게


우리나라 근대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이 살아야 한다는 명분하에 무엇인가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건국기를 맞게 된다. 나는 이들을 1세대라고 부른다. 이오덕 선생 같은 분들이 이 1세대에 속하는데, 좌파든 우파든 이 시기에는 정말이지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꿈이 있었던 것 같다. 한 번도 정리되지 않은 우리말 문법을 만들고 사전을 만들고 말꼴을 만들어내던 이 시기의 1세대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처럼, 사회 전 분야에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꿈이 있었다.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이들은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 1세대들이 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돌아가셨다. 2세대가 등장했을까? 불행히도 이 땅에는 2세대가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시스템에 아직 새로운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등장했던 민주주의 세대는 1세대와 비교하기에는 너무 일찍 부패해버렸고, 또 무능했다.


 지금의 우파들은 게으르고 파렴치하다. 논문도 슬쩍슬쩍 베끼고, 일반적인 우파들이 가지고 있는 심미적인 추구는 물론 독창성도 없다. 가끔 전형적인 우파학자들을 만나서 “요즘 공부 좀 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면, 새삼 왜 그런 얘기를 해서 날 곤란하게 만드느냐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열심히 살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우파를 만나기가 어렵다.


 기 소르망은 전형적인 우파 학자다. 그래도 독서와 사색의 크기만큼은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다. 기  소르망 정도로 열심히 독서하고 정리하는 우파 인사가 있다면 인정해주겠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우파들은 지나치게 게으르고, 베끼기를 즐겨하고, 전형적인 우파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독한 질문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황우석? 학자로서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게으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나라 좌파들은 무능력하다. 그래서 우기기를 즐겨한다. 일제시대와 해방기에 활동했던 우리나의 좌파 지식인들은 고독한 학처럼 우아했다. 지금 고독하면서 우아한 좌파지식인이 있을까. 난 견문이 짧아서 잘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든 우파든 떼로 몰려다니면서 별 내용도 없는 말을 하면서 서로 감격하고 박수치고 우쭐해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추천하면서 감격해하지만, 그들의 글과 책은 전혀 감격스럽지 않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한 바퀴 돌아가는 일정한 반열에 올라간 사람은 좌파에도 우파에도 없는 것 같다(물론 나도 속이 꽉 막힌 바보 같은 말만 해대고는 한다).


 한마디로 믿고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세대를 우리는 사는 셈이다. 이정표처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지만, 농촌에 지혜로운 촌로들이 사라지고 공동체의 주춧돌이 사라진 것처럼, 학계를 비롯한 이 사회 어느 구석에도 어른은 없어 보인다. 좌파에도, 우파에도, 그런 어른은 없는 것 같다. 지금 30대 후반부터 50대까지, 앞으로 10년 내에 어른이 될 만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침묵의 관찰자 일부와 언제든 광란의 선동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있긴 하지만, 1세대가 사라진 이후에 어른이 될 만한 분은 어지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20대여, 글을 쓰고 책을 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선각자들은 20대에 자신의 논을 내었고, 자신의 첫 주장을 했다. 어떤 면에서 한 명의 사상가나 철학자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같이 만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누가 이 시대의 어른이 될 것인가. 그리고 누가 시대를 이끌어 갈 것인가는 개인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어두운 시대에 누가 불을 밝힐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 불은 한 사회가 같이 밝혀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다못해 이어령도 20대에 선배 문인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했고, 시인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다 20대에 논을 제시하면서 등장했다. 20대라는 나이는 “다 틀렸어!”라고 객기를 부려도 좋고, 대안이 없어도 좋을 나이다. “대안? 나중에 보여줄게”라고 객기로 치고 나가도 좋은 나이다. 어느 누가 20대의 작가에게 사려 깊지 못하다는 비판을 하겠는가. 그 나이의 그 시절에는 그런 질문이 필요한 시기이다. 20대 작가에게는 상업성과 기획력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질문 그리고 다음 세대의 시각을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더 많은 20대들이 글을 쓰고 책을 내기를 바란다. 그건 좌파든 우파든 상관하지 않는다. 돈독에 찌든 일부를 제외한다면 언제나 다음 세대의 질문은 신선하고,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세대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이런 게 ‘협력진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가 별 거 없기 때문에 좌파도 무식해졌고, 좌파의 질문이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우파도 게을러진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가 아닐까. 이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혹은 어떤 목적으로든 더 많은 20대들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책을 내고 서로 반박 가능한 형태로 논쟁하는 것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20대에 책을 내고 데뷔할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설령 덜 다듬어져있고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어떠냐! 원래 20대의 특권이 그런데 말이다.


 나는 지금 인터넷에서 A4 한 장 짜리 글을 쓰는 이들이 A4 100장으로 자신의 생각과 시각을 정리할 수 있고,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이들이 작가로 물결처럼 데뷔하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나처럼 4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겨난 대기만성의 길을 모두가 걸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올해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 11년째이다. 모든 사람이 학문의 길을 걸을 필요는 없고, 모두가 박사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학자의 입장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상가와 행동가의 길을 걷거나 사색자의 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은 20대를 넘기지 않고 자신의 첫 책을 출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좌파든 우파든 그런 건 상관없다. 비록 나중에 부끄러움에 뼈를 깎는 듯 한 고통을 받을지 몰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그걸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20대가 더 많아지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망일 것이다. 자신의 모자람과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어 남들이 알게 함’이라는 부끄러움을 통해서 한 세대가, 그리고 한 시대가 협력 진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0대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여, 부디 용기를 내시기 바란다.


 스물일고여덟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20대에 작가로 혹은 사상가로 데뷔할 수 있는 인생의 단 한 번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이들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명석함과 함께 부끄러움까지 모두 사회에 꺼내놓는 데 머뭇거리지 말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 한 청년의 방황과 갈등, 그것은 모두 사회의 것이다. 마지막 밑천까지 탈탈 털어낸 알몸의 모습으로 사화 앞에 홀로 서 있는 20대가 많아질 때, 이 사회는 비로소 좋은 방향으로의 진화를 시작할 것 같다는 것이 내 개인적 믿음이며 바람이다.


 실패! 어느 작가도, 그리고 어느 사상가도 자신의 첫 번째 책으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한 번에 성공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설득력 있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 10년을 쓰게 될지 혹은 평생을 쓰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인류 역사가 원래 그렇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1만 명의 20대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삶을 책으로 엮어낸다면, 예비 철학자 혹은 예비 사상가 1만 명이 나이를 먹고 생각이 굴절되면서 진화하는 과정을 이 사회가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생활인은 직업으로 완성될지 모르지만 사상가는 책으로 완성된다. 동시대인들과 함께 1만 명의 20대가 한 명씩 나이를 먹어가고 생각이 변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완성되는 과정을 같이 보고 싶다.


 지금 책으로 데뷔하는 20대가 10만 명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정말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10만 명의 젊은 사상가들이 서로 논쟁하고, 사회가 그걸 지켜보는 상황은 가히 학문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수 있다. A4 한 장짜리 글을 쓰면서 ‘인터넷 논객’이라는 호칭을 받는 것이 행복하신가. A4 100장 이상의 글을 쓰는 것을 우리는 책이라고 부른다. 치고 빠지는 단타 전문으로 20대를 활용하는 지금의 세태는 잘못되었다. 더 진지하고 더 길게 생각을 한 바퀴를 돌리는 훈련을 받고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도록 30대와 40대가 도와야 한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20대 작가 기금’이라도 만들어서 발간을 돕고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인터넷 논쟁에 댓글이나 달고 있으면서 사상가나 철학자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젊은 작가들이 더 많이 필요하고, 이 사회는 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30대가 되는 것이 무서운 많은 인문학도와 과학도, 이들에게 자신의 말을 책으로 엮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하고, 이들의 미숙함을 꼬집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격려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길’이 열린다.


 20대 후반의 방황하는 많은 젊은이들이여. 그 고민을 책에 담고, 책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꺼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시장은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을지 몰라도, 한국의 사상과 문화는 지금 20대 작가들을 목놓아 찾고 있다.


 20대의 기자들과 학도들,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만들고 싶어서 오늘도 고통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낸 이들이여. 제발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첫 책을 위해 고민을 시작하시기 바란다.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시스템의 생존과 진화를 위해서 새로운 고민의 물결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건투를 빈다.


우석훈,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59-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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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참으로 감동적인 글이라서 글의 전문을 적어본다. 고종석의 ‘내가 만일 국어선생님이라면’ 이후에 이처럼 가슴 한 구석을 지피는 글은 오랜만이다. 우석훈의 이 책은 전체적으로 노무현 시대를 바라보는 한 지식인의 성찰로 읽히지만(그러니까 그 자체로 저널리즘적인 가치도 있다), 앞서 크게 인용한 글은 한 인생의 선배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극진한 전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글들은 될수록 많이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석훈의 말을 뒤집어본다면 나는 우석훈과 같은 선배들, 기성세대들이 10만명, 혹은 욕심을 내어 100만명 정도 한국사회에 존재하길 바란다. 이런 넉넉한 분들이 자신의 생각들을 후배들에게 많이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에겐 패기 넘치는 20대들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이런 기성세대들의 지지 역시 똑같이 필요하다.


오늘 수능 치는 후배들, 학생들은 내년에 20대가 될 것이다. 우석훈의 20대가 이들에게서 많이 등장하기를 소망한다. 아무튼 나 역시 그들에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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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씬
(엔딩 장면이 뭐가 될지 짐작할 수 있을만한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 있음)
크게 상관은 없을듯...ㅜㅜㅋ

...

영화에는 안어울리는 뜬금없는 노래지만 .. 어쨋든 제목만...ㅋㅋㅋ
Sexual Healing (Mercurius FM Soul of House Mix)  by Marvin Ga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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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위그라프는 마지막 용의 성배를 들고 바다 위에 떠있는 그렌델의 어머니 품에 안겼을까?

개인적인 생각의 답은 "아니다"

영화 상 시대는 어느덧 신화와 영웅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운 크리스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에쿠우스를 연상시키는 듯한 호르스가 왕의 똑같은 스텝을 밟은 베오울프 또한 신화적 영웅으로서 육체의 쾌락은 금기시 되지 않는다.
그 또한 오딘을 신으로 섬기는 마지막 영웅이며,
이 신화의 영웅은 나약하고  고독하고 섬세하다
.


하지만 크리스챤의 시대가 도래하며 변한 것은 무엇인가?
육체라는 것은 한 낫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천한 것이 되어버리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구원이라는 요소만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남녀 간의 (남남, 여여 간의 관계는 고사하고)  육체관계는 탐욕, 쾌락의 요소를 가짐으로서 금기처럼 여겨졌다.
오늘 날 현대 사회에서 꺼리낌없이 자신의 육체 관계를 말하는 사람을 보며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서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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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였건 신화와 영웅의 시대의 마지막 영웅인 베오울프는 호르스가 이전부터 이어졌음직 한 지독한 신화적 알레고리를 끊어버린다. 그럼으로서 동시에 신화의 시대도 막을 내린다.
육체를 불사르며 끊임 없이 이어지는, 돌고도는 여행, 고독, 싸움을 통해 신의 경지로 오르게 되던 시대는 지고,
그런 힘겨운 육체를 버리고 정신적인 구원만을 기다리는 '나태(?)'의 시대에 올라선 것이다.

베오울프를 뒤를 잇는 위그라프는 더 이상 "아들-아버지" 관계로서 오른 왕이 아닌 친구로서, 동지로서 신화적 알레고리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인물이다.
따라서 이성적? 이상적으로 볼 때,
크리스챤니티와 함께 중세를 벗어난 접점기 혹은 그 시작에 선 위그라프는 분명 크리스챠니티가 중요시 여기는 '금기'에 대해 순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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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로 , 그 육체의 쾌락을 떨쳐 버림으로서 순수한 혈육 관계의 아들을 나았을 것이다.
 동시에 그렌덜의 어머니 괴물 또한 신화시대의 마지막 괴물로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프로이드가 등장 할 때에 맞추어 인간의 정신 속 혹은 심리 속에서 다시 부활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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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고등학교 영문학 시간에 어려운 고전 영어에 낑낑대며 읽은 기억만이 남아있다....
물론 내용이며 메타포에 대한 기억은 '클리어'되어 있다...
그러니 오히려 더 주관적인 나름의 시나리오가 나오게 되더라는 주절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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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개인적인 취향에는 맞지 않는 영상이었다...
그리고 가끔 300을 연상 시키는 시퀀스들도 그저그랬고...
그래도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스펙터클과 내러티브에 침 질질 흘리면서 보게 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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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엔젤리나 졸리...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라 그런지...
베어울프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영화 상에서) 신화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괴물, 팜므파탈, 애증의 관계...
이런 요소를 소화내기엔 뭔가 세련됨과 깊이가 모자른 캐릭터라고나 할까?
아니면 스칸디나비안의 냄새가 너무 나지 않아 어울리지 않을 것일수도...
갑자기 스칸디나비안에서 왠 라띠노+이딸리안 삘이 나는지... 이건 좀 삑사리 같다...
신화의 원조인 중동을 바라보는 마음에서 중동삘을 원한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누가 어울렸을까?
밀라 요보비치는 영상 분위기 상 어울렸겠지만... 졸리보다 더 싼티가 팍팍 났을테고...
잘 모르겠다...ㅜㅜㅋ 암튼 졸리는 미스캐스팅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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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절한 처지에 어울릴까나?
A Dear John Letter
by Nada Ubankova & Ladislav Vodic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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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요약 하자면,

아마도 레드포드는 영화미학에 대한 많은 걸 포기하면서까지
관객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싶었겠지만
아무리 그런 간단한 교육영화 순준의 깊이라도,
그 진의들은 뉴스 속 자막과 같이 밑에 읽혀지지 않은 채로 흘러갈 뿐
대신 메인 뉴스거리가 된 연예인 가십에 집중하는 현대인처럼
레드포드, 스트립, 탐 크루즈의 늙어버린 모습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태반일 듯 싶다.


실망
정치 영화를 좋아하고 요즘 워낙 기근 현상을 보이는 지라 아주 반가이 맞이한 레드포드의 라이언즈 포 램즈..

뚜껑을 열어보면 그 화려한 캐스팅과 포장에 비해 많이 실망스러운 영화다...
한마디로 받은 느낌은 어느정도 알맹이와 깊은 논의를 다 짤라버린 대중용 교육 영화랄까?

더군다나 교수라는 캐릭터를 직접 떠맡고 관객에게 '강의'하고 '설득'시키려는 레드포드를 바라보는 내 입장은 거침없는 선댄스키드도 아니오 일저리 동분서주하는 대통령의 사람들의 기자도 아닌 저 구름 위 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레드포드의 모습이라 심이 불편했다.

같은 '테러' 테마의 영화인 [킹덤]의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전쟁터, 의회, 학교 이렇게 3부분으로 나뉘어 6 명의 메인 캐릭터를 심도 있게 다루는 것은 완전히 실패한 듯 보인다. (물론 연출에 있어서도)

또한 이러한 느슨한 전개와 연결성에 의해 맥이 풀리는 내러티브와 이러타 할 평가도 내릴 수 없는 그저 안정스럽기만 한 영상 또한 마지막의 애매한 클라이맥스 (1.항복하려 한걸까? 2.탈레반 따위에게 잡힐 바에 죽자라고 총쏘는 척을 한걸까?)를 더욱 애매하고 맥 풀리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도 한 번 쯤 보고 생각할만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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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가 감동이라던지 어떠한 깊이를 가진 것 처럼 '치장'한 반동스러운 상업 주류 영화라고는 평가하기도 애매하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몸과 정신을 팔며 너무나 가벼운 삶을 살아가는 무지해진 우리 현대인에게 한번쯤 봐볼만한 영화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물론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 영화다. 하지만 중학교 수준의 교육 영화라 하더라도 과연 현대 성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이런 문제 말고도 신경쓰고 스트레스 받을 일 많은 성인들에게...

레드포드가 모두에게 보여주고픈 교육 영화로서 사람들이 너무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미학적인 요소, 예를 들어 메타포의 사용 등을 과감히 절제했고, 또 너무나 재미 면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자극적인 면도 차단해버린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주관적으로 받은 영화의 핵심은 바로 '가상 Virtual'이었다.
이 한 단어가 모든 내러티브와 영상의 핵심이 된다.
로스트 라이언즈의 뒤에는 보드리야르의 그림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듯 했다.

현실을 살아가며 현실에 대한 액션을 취하는, 현실과 부딪히며 사는 이들의 모든 배경, 근거, 논리, 경험 등은 가상적인 경험에 베이스를 두고 있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허튼 짓거린가 싶지만...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탁상공론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가상 경험에 따른 현실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물론 거시적으로는 똑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1.탐 크루즈 (정치 의회)와 메릴 스트립 (미디어)의 대립
 -역시 똑같다. 정치나 미디어나 우매한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전설 따위를 만들며 현실의 가상을 꾸며 현실화 시킨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서있는 우두머리들은 지독하게도 가상적 경험에 따라 모든 것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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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선동해 테러 관련 공화당 정책을 관철시키려는 탐 크루즈는 육군 사관학교 출신 고급 엘리트라는 아우라만을 뒤집어 썼을 뿐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모든 정책에 대한 베이스는 너무나 초라하게도 사무실 안 전화기라는 커뮤니케이션 매체 뿐이다.

메릴 스트립 또한 탐 크루즈와 대치하며 베트남 전의 히피나 민주당 배경적 성격을 약간 불러 일으키고 전형적인 '정의'의 심볼이 되지만 그녀 또한 정확한 현실이 아닌 가상에 따른 가상을 만들어내는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마지막 장면에서 참전 용사 무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듯한 여기자... 하지만 그녀의 감정 또한 자신의 직업이 제공하는 물리적 공간에 갖혀 끌어낸 가상적 경험에 따른 판단에 의한 슬픔과 정의의 감정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탐 크루즈나 메릴 스트립이나 가상적 경험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두 동일하다. (메릴 스트립 또한 그녀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펜촉과 메모장에서 시작한다)
 
2.레드포드와 학생
 -신이시자 교수님이시자 스토리텔러이시자 설교자이신 레드포드를 보느라 불편하지만 어찌하였건 정치 과학학도 학생 또한 자신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학교 안의 학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군다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 학생이 보는 뉴스의 메인은 연예인 가십거리였고 밑에 자막으로 테러 관련 자막이 짧게 흘러나온다. 분명 자극적인 미디어의 수용에 의해 길들여지고 가벼워지는 우리 현대 대중을 질책하는 씬이긴 해도 너무 너무 직설적이기에 너무 너무 뻔하고 가벼워 보일 뿐이다.


3.전쟁터
 -두 명의 마이노리티 출신 학생 지원군들보다도 아미 베이스가 더 인상적이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며 한 때 '유행'했던 미디어 자극의 극치였던 그 녹색영상!
가상적 토대를 통해 두 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그 작은 아미 베이스야 말로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상 경험에 의해 돌아가는 의회, 미디어, 학교 등의 사회 공간의 가장 작은 집합체다
.
언제 꺼져버릴지도 모를 것 같이 치직 데는 영상 안에서 스타크래프트의 조무래기인냥 꼼지락 거리는 작은 점들이 바로 현실 속의 숨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우리는 알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 영상 자체가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논의 또한 상당히 진부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상황은 더욱 지독하게 악화 되가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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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치가들과 미디어가 순간순간 던져주는 떡밥을 물고 이리저리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우리 대중이라는 물고기 무리가 사는 곳이 연못이던, 강이던, 바다던 무슨 상관인가?
떡밥만 보고 쫒아다니면 공간이 넓건 좁건 벽(땅)의 경계에 맞딱뜨릴 염려는 없다
왜? 그들이 인도해주니까... 그들이 그런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머리를 박으면 대중이 정신 차리게 될테니까
대중이 재정신을 차리면 모두 상황이 무섭게 격변해 버릴 수 있는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본주의에 의해 정신과 몸이 황폐해져 이젠 노예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회...
적어도 노예에겐 근성이라도, 혹은 희망이라도 존재할 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의 노예를 초월해 몸을 파는 존재가 되어버린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떡밥의 존재에 감사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딘가에서 한없이 우리를 비웃으며 피를 빨아먹고 사는 '그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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