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컬쳐 매거진 블링 연재 중인 일렉트로니카 이야기 관련 칼럼인 PLUR & Vibe Upon the World 옛 하드카피 원고들입니다.
hyperlink를 통해 좀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아직 연재 중인 컬럼이니 잡지와는 시차를 두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퍼가시게 될 때는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PLUR & Vibe Upon the World 13:  2007년  10월자
              2nd Summer of Love, the London tale: 두 번째 사랑의 여름

IBIZA; 발레릭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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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러버들의 영원한 고향인 이비자 섬은60년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곳이었지만 그 시절 공산주의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정책에 의해 새로운 관광의 요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특히 낮았던 스페인 환율 덕분에 이비자는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지 못한 젊은 중산/노동층 영국인들에게 고아와 카쉬만두와 함께 환영 받는 휴가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비자의 공짜 파티, 보헤미안적인 열린 분위기와 아름다운 달과 별빛은 어둡고 우울한 런던에 지친 젊은 브릿들을 따스하게 맞이 했다.

이 때 Pacha와 Amnesia는 이비자의 중심 클럽으로 히피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 시절 Amnesia는 전기 공급이 없는 농장 같은 곳에서 모닥불을 피고 레게와 사이키델릭락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디스코의 시대가 도래하며 히피 세상은 막을 내리고 이비자의 클럽들 또한 나이트클럽으로서의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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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접어들며 젊은 브릿들 뿐 아니라 게이, 뉴 에이지 전도사 등을 포함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비자를 찾게 된다. (이와 동시에 전설의 엘릭시르elixir로 통하는, 엑스타시도 슬슬 이 곳을 상륙한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1987년경 이비자의 산 안토니오에 The Project라는 바가 문을 열게 된다. 영국 DJ 트레버 펑과 이언 세인트 폴이 세운 이 곳은 브릿들만의 일종의 미팅 포인트가 되었다. 프로젝트에 모인 젊은 브릿들은 암네시아로 자리를 옮겨 엑스타시에 취해 DJ 알프레도 피오리오가 선사하는 몽환적인 여행을 떠났다. (Amneisa의 DJ 알프레도 피오리오 Alfredo Fiorillo는 서로 다른 연령과 사회 계층이 주를 이루는 특이한 환경에 의해 다양한 음악으로 그들의 여행을 책임 졌다. 레게와 Funk로 시작해 존 레논의 감미로운 이매진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식의 그 만의 디제잉은 트렌드를 떠나 폭넓은 사람들의 정서를 껴안을 수 있는 이비자 섬만의 에센스를 담아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스라이 동이 터오는 새벽의 신비로움, 히피의 유산 그리고 쾌락의 요소를 담은 발레릭 코드가 탄생하게 되었다.)그리고 Cala Salada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카페 델 마르Cafe Del Mar로 움직여 DJ 호제 파디야가 떨어뜨리는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를 들으며 상쾌한 오전의 공기를 흠뻑 마셨다. 그런 루틴을 반복하며 보낸 그들만의 여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상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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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해 9월 훗날 폭풍처럼 휘몰아쳐올 영국 애시드 하우스 씬을 이끌어 갈 핵심 인물들이 이 프로젝트 바에 모이게 된다. 폴 오큰폴드, 쟈니 워커, 닉키 할러웨이 그리고 대니 램플링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전 브릿들과 마찬가지로 엑스타시와 함께 발레릭 사운드를 처음 접하며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비자의 주술에 휘말린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느낌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리라 결심한다.   


다시 우울한 런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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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가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좌파 정당과 잦고 길었던 스트라이크를 이끈 노동계급의 패배는 젊은 브릿들로 하여금 마가렛 데쳐의 보수정당을 향한 깊은 증오와 패배감만을 안겨 주었다. 또한 데쳐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빈부의 차이는 더욱 늘어나고 모두들 신용을 이용한 소비에 미친 듯이 열을 올렸다. 이는 무인지경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돈이 곧 신이요 법이라는 진리를 만들어 냈다. 이 흐름 속에 찾아온 영국의 경제 침체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열등감과 허탈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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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분위기는 런던의 클럽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런던의 클러빙이란 그저 술에 찌들어 이성에게 집적대고 디자이너 의상으로 화려하게 차린 자신의 쿨 함을 한 것 뽐내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들은 춤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대략 옛날 국내 나이트 실정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 컬쳐의 공간에는 당연히 돈과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낄 수 없는 그런 성역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트렌디들을 향한 ‘가진 것 없고, 촌스럽고 지저분한’ 이들의 열등감은 팽배했다. ‘

   
          사운드적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영국은 Jazz와 Funk 등의 Rare Groove에 의해 주도 되고 있었다. 그 즈음에서 나온 섹스프레스나 M/A/R/R/S 등의 팝 차트 선전이 애시드 하우스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아직까지 영국에서 애시드 사운드는 일종의 페드fed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조금씩 늘어나는 브릿-이비쟌들의 여름의 향수를 채워줄 공간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클럽 노엘과 딜리리엄이 런던에서 유일하게 애시드 사운드를 제공하였지만 기존의 Funk, Hip Hop 그룹과의 충돌이 잦았다. 예를 들어 그 때 당시 선풍적이었던 디트로이트 테크노 트랙인 데릭 메이의 Strings of Life는 댄스 플로어를 싹 비워버리는 진공 청소기와 같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비자에서의 소중함 기억을 현실화 시키고자 결심했던 오큰폴드, 폴, 램플링, 홀로웨이 등이 각기 런던에 발레릭-애시드 클럽을 열며 영국 전체 클럽 씬은 물론 브릿팝의 판도 자체를 발칵 뒤집어 놓게 된다.   


The Project & Spectrum : 광란의 월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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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데 없이 방황하는 런던의 브릿-이비쟌들에게 오큰폴드와 이언 세인트 폴은 프로젝트 클럽이라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경찰 검문에 의해 금방 문을 닫게 되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 둘은 생츄어리 클럽에서 Future 나이트 파티를 열게 된다. 이비자의 메모리를 바탕으로 한 퓨쳐 나이트를 이끌어감에 있어 오큰폴드에게 주어진 하우스 트랙 설렉션은 긴긴 밤을 책임 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다양한 음악적 배경과 DJ 알프레도의 섬머 앤썸 등을 활용하며 오큰폴드는 발레릭 클럽의 이미지를 부각 시켰다. 그때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한 클러빙 경험은 생소했지만 브릿-이비쟌들과 많은 로컬들은 열광했으며 성공적인 하우스 열풍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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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이비자의 발레릭 바람이 런던 언더그라운드 클럽 계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을 무렵 이언은 오큰폴드와 쟈니 워커에게 엄청난 제안을 한다. 바로 1500명+ 수용의 헤븐 클럽에서 월요일 파티 이벤트를 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해본 적도 없는 무모하게만 보이는 이 계획은 “Spectrum: a Theatre of Madness”라는 타이틀로 감행된다. 클럽 경영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갑자기 엄청난 센세이션과 함께 기적적인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웨스트 엔드 트렌디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디자이너 의상을 던져 버리고 춤추기에 편안한 트레이닝 복과 배기 팬츠로 무장한 클러버들은 황홀경에 빠져 월요일 밤을 뜨겁게 불살랐다. 세련된 드레스 코드 문화와 트렌디의 전통을 무참히 깨어버린 대 사건이었다. “우리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었으며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억압되었던 에너지의 폭발로 인한 오버나이트 센세이션이었다. 이 새로운 열풍은 곧 i-D매거진과 같은 팬진에 소개되기도 하지만 중심 요소인 엑스타시나 애시드에 관해서는 자세히 소개되지는 않았다. 브릿-이비쟌들에게 있어 이비자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자신들만의 소중한 씬을 지키고 싶은 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The Shoom: 걱정일랑 접어두고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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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큰폴드 등과의 이비자 여행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대니 램플링은 그의 아내, 제니와 함께 1987년 12월경 클럽 역사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슘 클럽을 열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섹시한지를 과시하는 웨스트 엔드와는 달리 슘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한 경험이었다. 사랑, 함께함, 나눔, 인생의 환희를 모토로 삼아 슈머Shoomer들은 애시드 음악에 빠져 사랑과 희열의 밤을 보냈다. 춤이라기 보다는 음악의 비트에 빠진 쿵푸 모션에 더 가까운 그들의 프릭키 댄싱 (Freaky Dacing)은 스타일에 찌들은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이 지쳐있었나를 보여주는 거침 없는 하이킥이었다. 뉴욕의 스튜디오 54를 방불케 할 만큼 까다로운 도어 폴리시에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단 인사이더로 인정 받으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안에서 모두는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들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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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비자의 유포릭Euphoric한 경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시간 상 가장 가까운 모체인 히피 사상을 차용했다. 사랑, 평화, 존중을 외치던 히피의 60년대는 분명 이러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첫 번째 사랑의 여름은 바로 히피의 60년대를 지칭한다) 그러한 영향과 함께 대니는 히피의 상징이었던 노란 스마일리 로고를 슘의 마스코트로 도입한다. 그때부터 “the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Happy Shoom Club”의 글과 함께 수많은 스마일리 로고가 눈처럼 슘의 플라이어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물론 스마일리 페이스가 레이브의 상징이 된 것도 이때부터다) 제2사랑의 여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슘은 철저한 뉴스레터와 클럽 멤버십 스킴 관리에서부터 물, 과일 등의 공짜 제공 등 훗날 레이브 프로모션의 좋은 지침서로 자리 잡았다.

             만약 누군가 갑자기 당신의 볼을 쫙 잡아당기며 “웃어요~”라며 스마일리 스티커를 붙여준다면? 당신은 그를/그녀를 꼭 껴안고 “사랑해요”라며 환한 미소를 건넬 것이다. 슘은 그런 행동이 가능하고 당연한 곳이었다.


 RIP party: 런던 블랙 컬쳐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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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비자 베테랑들과 백인 위주의 성향이 짙었던 애시드 하우스 열풍 속에 RiP파티는 이비자와는 상관없이 기존 런던의 흑인 문화를 위주로 자신들만의 파티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시카고나 뉴욕의 웨어하우스 파티 그리고 레게와 소울의 전통을 지켜나간 폴 스톤과 루 뷰코빅의 RiP(Revolution in Progress)은 테크노,애시드,개러지 사운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파를 소화해 냈다. 슘이 연령, 성, 사회적 계급 등의 벽을 허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파티로만 보여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RiP의 경우 흑인 백인 등의 인종별 다양성을 넘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이었다. 옛 클러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RiP파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과 가장 추악한 사람들 모두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펑크의 배경을 가진 루 뷰코빅은 여기서 애시드 문화가 가진 정치적 힘을 보았다, 바로 새로운 변화의 물고를 틀 수 있는 강력하고 순수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조화의 힘을.

자신들만의 씬을 지키기 위해 뷰코빅은 철저히 미디어의 개입을 막았기 때문에RiP파티는 슘과 스펙트럼만큼 오늘날의 클럽 전설로 회자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에 의해 상처받는 수많은 언더문화들을 보면 그들만이 간직했을 ‘열정과 순수함’은 충분히 상상해 볼 만 하다.


The Trip: 애시드 하우스의 폭발 그리고 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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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6월 런던 웨스트 엔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애스토리아Astoria에 트립 TRIP자리를 잡으며 제2 사랑의 여름이라 불리는 레이브 / 엑스타시 열풍은 오버그라운드화 되어 버린다. 하룻밤 만에 모든 런던 주류의 클럽 사운드가 애시드 하우스로 대체 되며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문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트립의 주인인 닉키 할러웨이는 수많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슘 클럽 또한 ‘그들만의 파티’이기를 포기한 듯 웨스트엔드의 토튼햄 코트로 자릴 옮기고 유명한 셀레브리티들을 모시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메인 파티 이벤트를 오큰폴드의 퓨쳐 나이트와 겹치는 목요일로 재설정하며 이비쟌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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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애시드와 엑스타시에 대해 떠들어 대자 아무 생각 없이 이 흐름에 너도나도 동참하는 애시드 테드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던 ‘그들만의 파티’는 종료되고 기존의 이비자 베테랑들과 애시드 테드들 간의 복잡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비자의 기억과 히피적 사상이 전무했던 애시드 테드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엄청난 양의 엑스타시를 복용하고 “애시~~~~드!!!”를 외치며 미친 망아지들처럼 씬을 휘졌고 다녔다. 그때까지 영국의 클럽은 3시 이후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후 거리로 뛰쳐나와 날뛰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의 사이렌을 붙잡고 전율을 느끼며 “Can You Feel it?”을 외쳤다고까지 하니 그 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스펙트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고 이 언더문화는 도태되기 시작했다. 순수함과 흥미에 의해 시작한 파티 관계자들도 파티 이벤트를 돈의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우정도 깨지기 시작했다. 마약의 유통과 파티 프로모션을 통해 ‘한 몫 챙길 수 있는 장사’의 가능성이 확인되며 갱들도 이 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경찰은 애시드 하우스 파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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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and Groovy” 같은 기사를 통해 새로운 애시드 문화에 친근감을 표했던 미디어는 “요즘 아이들이 어떤 위험한 것에 빠져있나” 레퍼토리를 들고 나오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디어는 엑스타시와 LSD의 차이를 알지도 못한 채 아이들이 클럽에서 문란한 성생활과 폭력에 찌들은 것처럼 선전했다. 영국의 유명한 음악 차트 방송인 Top of the Pops는 Acid란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노래들을 차트에서 제외시키는 이래적인 모라토리움을 선언했고 팝 스타들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마약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깨끗하고 도덕적인 생활의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주제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대중을 선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파시즘적인 미디어의 폭력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찌하였건 이런 기성 세대와 미디어의 소란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청년들이 생각 없이 애시드 열풍에 동조하도록 불만 지핀 셈이었다. 이 때부터 애시드 하우스는 대중 문화를 뛰어넘어 민감한 국가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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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애시드 하우스 클러버들도 큰 문제를 안고 있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디어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엑스타시를 마약으로 조차 여기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1988년 이후로 마약이 이른바 보편적 레져 문화로 올라섰고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은 9 to 5로 대변되는 챗바퀴 같은 자신들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너도 나도 일을 그만두고 쾌락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급기야 애시드 문화의 인사이더인 슘은 뉴스레터를 통해 “제발 당신의 직장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 당시 잊고 있었던 것은 어떠한 좋은 경험이든 영원할 수는 없다는 간단한 인생의 논리였다. 문제는 그토록 그들을 괴롭히던 현실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기에 정신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약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현상에 중심에 엑스타시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 젊은이와 노동계층에게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데쳐 정부에 대한 개인의 무력함에서 따라온 심리적인 거세와 억압이 음악과 춤을 통한 파티라는 대규모의 집단적 문화 현상에 의해 치유되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맨 정신에 환희와 희열의 트랜스를 느낀 한국인들처럼) 이 논리를 깨달은 이비자 베테랑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떠났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현대 전자 댄스 음악의 문화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파티 문화가 세계 이곳 저곳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았던 제 2 사랑의 여름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채 그렇게 끝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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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감성...거스 반 산트의 명작!!!!

개인적으로 성장기 영화를 좋아한다.
불안한 그들의 심리적 감성을 표현하고 철도길의 로드 무비 처럼 목표점이 보이지 않는 끊임없는 여행...
언젠가는 사라질 순수함...

영활 보고 난 후 솔직히 감탄했다.
거스 반 산트의 감독 영화를 좋아하기는 해도 거장 중의 거장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이젠 '거장'이구나.

그 누가 틴에이져들의 감성을 이렇게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틴 에이져들의 감성을 파고 드는 요소는 두 가지다.  스케이트 보드와 이모 Emo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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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세대는 90년대 즈음에서 화두가 된 새로운 세대를 지칭한다.
연약하고 여성적인 남자아이들...
난 이런거 못해, 난 이런거 관심없어...
다 싫어...
부모가 보면 한숨만 푹푹 쉴 그럴...
간단히 말해 그런지의 광분이 180도 돌아가버린 형태다.
그들의 옷 스타일 자체는 그런지의 패션을 차용하며 고딕과 뉴로맨틱의 가학적 화장 및 스타일이 가미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분노를 더 이상 표출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가두어 버린 복잡하고 유리처럼 부셔지기 쉬운 감정 상태와 끊임없이 억제되고 있는 분노의 표출 그리고 자각되지 않은 성숙의 외줄에서 한없이 발란스를 잡으려 뒤뚱뒤뚱하는 현대의 각박한 삶과 어른들의 사회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종족'이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스케이트 보드 영상은 바로 이 면을 강조하고 있다)

롭 라이너 감독의 [스탠드 바이 미]에게 오마쥬를 바침과 동시에 어메리칸 드림이라는 허구의 희망에 휩쌓여 그래도 끊임없이 목표를 설정하며 성숙하게 되는 철도길 등장의 70년대 틴에이져들을 그린 로드 무비 형식과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한다. (밀레니엄 이후의 세대를 바라보며)

음악 또한 한 몫 한다. 나는 Avant Pop 이라고 혼자 부르는 새로운 형식의 전자 음악과 포크 송이 한데 어우러지는 사운드트랙은 몽롱하고도 불안정한 심리상태와 순수함을 향한 향수를 풀어놓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한 거스 반 산트 특유의 게이와 롤리타 성향의 모습 또한 유감 없이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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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포스터가 말하듯.. '진실은 조작될 수 있다'를 뒤로 한 스릴러적 홍보 마케팅에는 관심도 없어야 하고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기대하는 반전 스릴러도 아니요
화려한 액션을 선사하지도 않으며
[오션스 11]의 유머가 한 0.0005g정도 들어가 있는 아주 드라이한 영화다.

영화를 보며 괴로워하는 것을 즐긴다는 말이 있다. (SM..ㅜㅜㅋ)
영화가 얼마나 지루한지를 참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며 일탈이 아닌 자신의 현실을 직시해보는 것이다.
괴로운 현실을 살면서 영화를 보면서까지 왜 괴로워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이는 그냥 패~스하는게 좋을 영화.  

이 영화는 요즘 경마장 광고랑 비슷한 선상에 있다.경마장 광고가 "너만 회사 다녀?" 등의 현실의 괴로움을 사용해 인터넷과 블로깅으로 A4 반장짜리 사고를 하게 된 현대 문명인들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마이클 클레이튼은 적어도 A4 50장 분량의 에세이를 통해 약간의 '사고'를 하게 해주는 영화다.

킬링타임용 혹은 스트레스 해소 용이지만 그래도 1g의 반전과 아주 쬐금이라도 두뇌를 자극할 반전 요소를 기대한다면 아마도 [마이클 클레이튼]의 옆관에서 [히트맨]을 보는게 차라리 좋은 선택일 것이다. (물론 히트맨도 좋게 봤다 ^^)

어쨋든 이 영화는 시드니 폴락의 뚝심, 거침없는 스티븐 소더버그와 죠지 클루니 그리고 틸다 스윈튼의 양념이 어우러진 내러티브의 승리다.

어쨋든 [마이클 클레이튼]에서 내가 좋았던 건 3가지.

1.비현실 적인 상황 설정 속에 놓인 탁월한 현대인의 심리적 현실 묘사
2.딜레마,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문제의 연속
3.그리고 연기 하지 않는 죠지 클루니와 연기 하는 틸다 스윈튼


이건 스릴러가 아니라 고품격 사이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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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인 상황 설정 이랄 것 까진 없지만, 어찌하였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한 '영웅'이 나타나 거대 기업체의 '잘못'을 '까발리고' 세상을 '구원'한다라는 설정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왜냐면 정의 'Justice'는 틀 안에서 '정의' 'Define'될 뿐이니까... 요즘 세상에 도덕이고 윤리고 나발이고 떠들어 대 봤자 뭐가 나오는가?

누가 말했듯 차라리 세상엔 나쁜 사람들과 사기꾼 천지라고 아예 생각을 해버리면 '못된'일 겪어도 그러려니 넘기게 되고 혹이나 '착한' 사람을 만나면 그가 '바보'라고 생각하기 보다 오히려 더 존중 'appreciate' 가치가 더 높아진다.

어쨋든 영화가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여러명의 땀에서 비롯되는 집단 지식 창작물인 만큼 만드는 이들도 이 고리타분한 상황설정에 대해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형적인 스릴러/액션에서 빠져나와 탈많고 문제많은 자본주의 속 현대인의 심리적 상황을 드라이하게 까발리는 형국으로 진득하게 몰고 나간다.

여기서 [제이슨 본] 시리즈의 액션을 기대한 관객과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인간의 심리적 묘사와 폐쇠된 '공간' (실체적/심리적)에 대한 감독의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관객을 생각하는 영화란 여러가지 측면을 볼 수 있다. 그들의 편의를 생각해 재미적인 요소를 부각시킬수도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재밋게 풀어나갈만한 역량을 가진 토니 길로이 감독은 오히려 '솔직'해 지려 한다.

그리고 감독은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네오 리얼리즘처럼 때로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심리적 리얼리즘 처럼 자본주의 말기의 현대인의 삶을 아주 드라이하게 '보여줄 뿐이다.'


누가 미친놈인지...무참히 짓밟히는 순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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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계의 전설 아서가 까발리려는 U/North의 행각,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은 그를 미친놈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미친짓은 그가 정신질환 치료약을 먹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라 굳게 '믿는다.'
언제부턴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현실'의 직시란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되었다.
고로 자본주의 체제 속의 현실이란 당연히 '돈'과 '사회적 지위'가 우선한다.
양육강식과 자본의 축적, 그것은 자본주의 현실의 진리다.
그 곳에서 신화적/도덕적 정의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이고 멍청한 것이다.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인들의
대부분이 제각각의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단면을 보여준다. 이제 '미친놈'의 정의는 희미해진다. 아서가 미친놈인가 그를 미친놈이라 부르는 인간이 미친놈인가? 정의할 수 없다.

 바로 그 체제 속의 전설 아서, 30년이 넘도록 쉬지도 않고 치밀하게 일을 해오며 자본주의 사회 속의 영웅이 된 아서는 한 순간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이 내막은 영화 시작의 연극적 모놀로그와 빨간 책 속에 들어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일구어온 사회적 성공에 갑자기 신물이 난다.
사람을 위한다는 마케팅과 미디어의 가면을 쓴 기업체를 경멸한다.
그는 꺠달았다기 보다는 순수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느낀 것이다. 왜 그가 수많은 소송자들 중 아나에게 그토록 집착했을까?
아나는 성인의 캐릭터가 아니다
. 아마도 대학생 혹은 대학을 갓나와 사회에 찌들지 않은 상태의 아주 순수한 존재로서 아서에게 그가 로스쿨을 갓나와 책의 정의 속 '정의'와 앞으로의 '성공'을 꿈꾸는 그 순수한 시절로 돌려보낸 존재다. 그래서 아서는 그녀를 천사 혹은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만든다.
마이클의 아들과 심각한 대화를 하고 어른들의 세상과는 동떨어진 아이가 권하는 책을 읽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체제와 체제가 만들어낸 현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유와 취지가 어찌하였건 기둥을 흔드는 일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마이클 클레이튼 = 수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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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 죠지 클루니...
위험에 처할 때 나타나 구원해주는 수퍼맨처럼 그는
회사의 숨은 해결사, 곧 수퍼맨 같은 존재이다.
적어도 타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도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사의 완벽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고급 양복과 최고급 벤츠 그리고 회사의 영웅 아우라를 지닌 그는 누가 봐도 성공한 사회인이지만 도박 중독에 부업 실패에 의해 빚만 떠안은 빈털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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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설정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미국과 국내의 실정만 봐도 그렇다. 변호사, 의사, 금융계와 같이 성공으로 정의 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 중에 부채에 시달리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어떠한가? (이것은 '사'자 직업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인을 향한다)
주말이건 밤이건 새벽이건 엄청난 일량을 풀어나간다.
이미
그들에게 회사와 개인의 삶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 그들은 소가족 체제를 고수한다.
부담되는 아이는 한명 내지 두명이며 거기다가 별거 혹은 이혼 중이라 위자료 문제 뿐만 아니라 가정의 삶도 순탄치 않다.
삶의 질이고 자시고 모든 것은 망각되어있고 앞길로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앞길은 자신이 세운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체제가 시간마다 던져주는 문제를 푸는 일 뿐이다. 이미 그들은 노예다. 하지만 그것을 떨쳐버리는 순간 그들은 빈털터리는 물론 삶의 의욕자체를 잃어버릴 것이다.

성공의 시작은 이미지 구축에서 시작해서 이미지 구축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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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자신의 이미지 구축밖에는 없다. 자신이 원해서 그래서일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타인들은 그 이미지를 보며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를 구축해야만 삶도 약간은 편해진다. 돈 없어도 외제차를 사야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난 일개의 청소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꺠달은 마이클이 아무리 난 '무능해'를 외쳐도 회사 내부에서 마이클이 구축해온 이미지와 아우라에 넘어간 이들은 믿지 않는다. 언제나 그는 그들에게 '해결사'다.


이 해결사 아우라는 틸다 스윈슨에게 철처히 해체된다.
틸다 스윈슨은 분명 젊은 나이부터 현실체제의 삶의 방식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그 공식에 맞추어 살아온 캐릭터다. 그녀의 끈질기고 엄청난 노력은 그녀의 일과 스타일에 포커스 되어있다.
치밀한 프레젠테이션 준비와 거울앞에서 그녀의 군살을 감추고 어엿한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변신하는 모습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더 이미지를 먹고 사는 사회의 현실에 대해 직시하고 있다는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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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도 프레젠테이션 전 후 심장이 벌렁벌렁거린다. 그리고 그 멋진 커리어 우먼의 스타일 안에는 삼겹살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 이런 '이미지 구축은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사상을 가진 그녀가 15년간 한 회사에 있으면서도 임원자리에 오르지 못한 마이클 클레이튼의 해결사 아우라를 느끼지 못하고 우습게 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마이클의 아우라는 내부인 외에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 돈 없어도 벤츠 몰아야 하고, 돈 없어도 10만원 짜리 점심을 먹고, 무식해도 갤러리 안 작품에 대해 '유식한' 한마디를 던저야 하는 수퍼맨 이미지의 사회...
하지만 언제나 영화는 '가르치거나' '타이르지' 않는다. 제대로라고 혹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현실을 관조하며 보여줄 뿐이다. 선택과 판단은 언제나 관객의 몫이다.


딜레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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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현실은 엄청난 실타래에 꼬여있는 복잡계다.
하나가 해결 된 듯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진다.
연쇄작용과 같다. 문제가 터지면 곧바로 다른 문제가 터지고 또 터지고...
순간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매력인 '딜레마'의 부분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연극과 문학책에서만 보는 고상한 사상적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매 상황 햄릿의 딜레마에 빠져 살고 있다
.
그리고 그 결과는 선택한 후에만 알 수 있다는 지독한 상황 속에 있다.
마이클을 보라... 회사에서는 아서 문제를 풀어내라 한다. 동시에 그는 일주일내에 빚까지 갚아야 하며 이혼한 후 애도 정기적으로 봐야하고 형제 지간 사이도 좋지도 않고 아주 골머리에 골머리를 썩는다.
그가 도박중독에 빠져 있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이다.
오히려 아서처럼 약물 치료도 받지 않고 계속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그만 그렇겠는가....
40대 후반과 50대 초반 아주 애매한 나이에 이미 사회안에서 어느정도의 자리는 꽤차고 있어야 할 그 불혹의 나이의 유리같이 쉽게 부셔질 수 있는 정신적 심리적 결정체를 보여주는게 마이클의 캐릭터다.
그룹 넥스트 1집에 들어있는 아버지에 관한 노래가 떠오른다.
어쩔 수 없다. 심리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거세'를 당한 그 나이의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침묵이다. 그것이 그가 가정과 사회 속에서 일구어 온 자신의 권위를 지켜나갈 마지막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아직 마이클은 그런 막장의 불혹은 찾아온 것 같지는 않다. 아직까지 현실을 살아갈 일말의 에너지와 희망이 남아 있다.

가족주의적 결말 하지만 기분나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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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헐리우드 제품 답게 고질적인 '가족주의'로 흘러간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가족주의다.
갑자기 차를 멈추고 언덕의 말 3마리를 보러 올라가는 마이클.... 그리고 그의 벤츠는 꽝 하며 폭탄이 터진다.
세마리의 말은 내 생각에는 마이클, 마이클의 형, 그리고 티미를 의미하는 것 같다.
결국 신화적인 결말이긴 하지만 어찌하였건
가족의 신비한 힘은 마이클의 생명을 구함과 동시에 형제들을 다시 친밀한(?) 관계로 이어놓는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결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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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거의 2/3는 이렇게 상황과 캐릭터의 관조로 일관한다. 지루할 듯 느껴지지만 오히려 탄탄한 내러티브에 의해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다.
그리고 마이클이 아서의 집에 몰래 들어가고 경찰에게 잡히는 순간 기존 액션/스릴러로 돌변하는 맥빠진 결말을 선사할 거라는 의혹을 잠깐 품게 하지만 이내 초심으로 돌아가며 (감독의 뛰어난 재량이다 이건...) 아틀란티스와 같은 [Realm & Conquer]의 발견과 함께 사이코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죠지 클루니, 앞으로도 연기는 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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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클루니...
정말 연기 안하는 배우다...
옆 사진을 보라... 틸다 스윈슨이 아닌 어린아이와 불꽃튀는 연기 대결을 펼치고 있따!!
그는 항상 그다.
언제 어디서나 어느 영화에 나오건 그는 죠지 클루니다.
영화의 제목이 [마이클 클레이튼]이 아니라 [죠지 클루니]라고 해도 무방하다.
죠지란 이름도 마이클이란 이름처럼 흔한 이름이니 제목이 가지고 있는 메타포도 해치지 않는 것 같고..
하지만 언제나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선택 혹은 제안 받는다...  이것도 복이다...
연기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배우가 있을까?
40후반~50대 초반의 남성이 가진 혹은 원하는 머스큘린한 이미지를 잘 충족시키는 그런...

그냥 오션스 시리즈에서 대니 오션의 더 개인적인 모습을 보여준 드라마라고 해도 무방하다.
때거지로 나오는 오션스 시리즈에서 좀더 자신만이 부각되는 영화가 찍고 싶고 스티븐 소더버그와 상의 후 이런 플롯을 현실화 시켜줄 힘을 가진 인물은 시드니 폴락 밖에 없다는 결론 후 지들끼리 만들고 싶은 영화 뚝닥 만들어버린 느낌이다.

혼신의 연기를 편친 틸다 스윈튼을 보면 클루니가 성의 없어 보여진다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어쨋든 이 영화는 죠지 클루니를 위한 죠지 클루니의 영화인 만큼 그에게 딱 어울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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