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발코니 밖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바다로 스며드는 흙탕물마저 운치 있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여행 중 내리는 비는 특별한 감흥을 준다. 차분하게 분위기를 잡아주고, 조금 더 깊숙이 그곳에 스며드는 느낌.
저 멀리 맹그로브 나무 하나가 바닷물에 잠식된 모습이 보이고, 바로 앞엔 하야 새 한 마리 (아마도 왜가리일까?)가 유유히 서 있다. 이 고요함이 좋다.
우산을 챙겨 들고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하러 타이오 마을 메인 시장 거리로 나섰다. 숙소 사장님이 건넨 우산을 쓰고,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옯겼다.
오늘의 목적지는 타이오마을 방문 전 찾아놓았던 화기찬실 (華記餐室).
가게 이름만 봐도 뭔가 로컬 감성이 물씬풍겨오는 이곳은 홍콩 어촌 마을의 소박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뭔 뜻인지는 모름)
홍콩감성 듬뿍인 입구. 찾아보니 화기찬실은 '화씨가 운영하는 식당'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고 한다.
오픈라이스에 따르면 아침 6시에 연다고 하니 꽤나 이른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시작된다는 뜻이 아닐까? 내가 방문한 시간은 8시 38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식당은 꽤 차 있었다.
맨 끝 구석에 2인용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나름 한적하고 식당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는 자리라 마음에 든다. 다행히 자리가 하나 남아있었다.
이 시간에는 아직 관광색이 없을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들은 거의 다 타이오 마을 로컬 주민들이 아닐까 싶었다. 내 주변은 이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나는 혼자 관광객으로 이방인의 묘한 기분을 느끼며 앉아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그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의 주문받기, 이제는 정겹다.
아침이라 속을 달래줄 국수를 시켰다. 원래는 피시볼을 시키려고 했는데 실수로 비프볼 누들 수프를 주문해 버렸다. 반반으로 시킬 걸 그랬나 싶었지만, 괜찮다. 홍콩 여행을 꽤 해 본 이들이라면 익숙하게 느낄 동네 차찬텡 같은 곳이다. 관광객이 없는 로컬 분위기 속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이 묘한 느낌이 좋다.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이곳에 잠시 소속된 듯한 그 기분.
곧 국수가 나온다. "너무 맛있어요!" "인생 맛이에요!" "무조건 드세요!" "찢었다!" 이런 건 오바고, 홍콩 어딜 가나 실패 없는 그 꾸준한 맛을 가진 그런 집인 것 같다. 국물은 구수~하고, 비프볼은 쫄깃쫄깃하며, 씹을 때 그 고소한 풍미가 좋다. 같이 나오는 아삭한 채소와, 건면 같은 그 질감의 면발, 사진에서 상상되는 그대로의 맛이다.
한국에서 칼국수 먹을 때 맑은 국물로 시작해 나중에 양념장을 넣어 맛을 변주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먹다가 매운 고추기름인 라유를 살짝 추가했다.
아... 라류의 기름진 매우맛이 입안에 훅 들어왔다가 금방 사라진다. 진리다, 라유는. (손 맛이 웬만큼 하는 집이라면) 홍콩 어딜가나 맛볼 수 있는 평균적인 홍콩분식 맛이지만,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없는 '동방불패' 같은 그 맛이다. 홍콩에서의 이른 아침, 로컬의 한복판에 앉아 느끼는 이 소박한 행복이 좋다.
만족스러운 아침식사 후, 다시 숙소로 향하며 오늘의 계획을 떠올린다. 숙소에 들려 준비를 하고 Fushan 파우산 뷰잉 포인트를 향해 가는 트레킹을 할 준비를 해야한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트레킹은 또 어떤 느낌일지 기대된다.
Mui Wo 무이 워는 광둥어로 '메이 웨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북쪽의 Silvermine Beach 실버마인 해변과 함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던 곳이다. Tung Chung 퉁청 라인이 생기기 전까지는 홍콩 도심에서 이어지는 란타우섬의 각종 휴양지들로 이어주는 첫 관문이었다.
영화 속 장만옥과 유덕화가 홍콩 도심에서 오가던 페리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이다. 장만옥의 극 중 고향인 타이오 Tai O로 가는 첫 버스도 이곳에서 출발한다.
| 무이워 Mui Wo 버스 정류장
<열혈남아>에서 가장 유명한 공중전화 키스신의 포스터 촬영지다. 아마도 수많은 영화팬들이 여기를 방문했을 것이다. 비록 그 공중전화는 없지만 그럼에도 추억을 기리기 위해 가는 곳.
무이워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자전거들이었다. 불과 5천여명이 산다는 (그것도 2012년 기준) 작은 지역이니 주요 교통수단일만 하다. 현지 주민들 뿐 아니라 여행객 대여용으로도 보이는 수많은 자전거들의 주차장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렸을 적 이곳을 방문한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하도 오래전이라 이런 기억이 거의 없다.
무이워 선착장과 버스정류장은 짧은 거리로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영화 속 장만옥과 유덕화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다. 앞서 말했듯 홍콩과 란타우섬을 연결하는 유일한 관문인 만큼 유덕화에게는 비정한 거리를 벗어나 평온한 안식처를 찾는, 장만옥에게는 작고 답답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거점으로, 커플의 감정선의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다행히도 그 뒤로 보이는 굴곡진 계단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건물의 형태는 옛 영화 속 모습 그대로였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상상하고 왔지만, 주변에서 진행 중인 인프라 공사로 다소 번잡한 느낌이 들었다. 4박 5일의 홍콩 여행 내내 비가 많이 왔지만 이 시점의 날씨는 너무나도 화창해서 사진을 찍을 때 빛이 번져 나왔다. 그래서 나와서 한 컷 더 찍고 ㅎ, 암튼 이곳은 영화에서 너무나 자주 봤던 장소라 익숙함이 먼저 다가왔다.
| 영화 속 선착장 페리 출입구
영화 속에서 중요한 무대가 되었던 선착장 좌측 출입구. 배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오다 뒤를 바라보면, 유덕화와 장만옥이 서로를 기다리던 그 배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기둥은 영화에서 자주 봤던 것 같아서 같이 나오게 찍었지만,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센트럴에서 온 나는 오른쪽 출입구로 나왔지만, 영화 속에서는 항상 이 왼쪽 출입구가 등장한다.
| 공중전화 박스 터를 찾아서
그리고 키스신.
<열혈남아>의 팬이라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찾을 그 키스신의 공중전화박스.
영화 속에서 상징적인 장면을 연출한 그 공중전화 박스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이곳에 서면 여전히 그 장면을 떠올리며 영화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위치를 대략 추정해 보면,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 정도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통신사업자가 바뀌고, 공중전화의 색깔도 주황색에서 파란색으로, 위치도 조금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2016년의 구글스트리트 뷰에서는 저 PCCW 파란 색의 공중전화박스가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위치조차도 약간 애매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진 인도 코너와 비교해 보면, 공중전화 박스가 조금 더 내려간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카메라의 구도나 렌즈 왜곡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16년 PCCW 박스와 영화 속 HKT 박스 위치가 약간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70,80,90,00년대 옛 무이오 버스 터미널 사진을 한 시간 정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그 오렌지 공중전화박스를 담은 사진은 찾지 못했다. 위 1983년 버스 중 타이오 행 1번 정류장이 가장 끄트머리라 좀 만 더 오른쪽 샷을 담았더라면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증거나 단서를 찾을 수 없으니 아쉽다.
'54년에 홍콩에 처음 공중전화 생기고 특히 7,80년대에 들어 저변(공중전화박스) 인프라를 확장 시켰다고 하니 저 1983년 사진에 공중전화박스가 존재했을 만도 한데 말이다. (영화는 1989년)
참고로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오렌지 공중전화 박스는 홍콩텔레콤 시절 거고, 2000년 이후로 목격되다가 사라진 파란 색 공중전화박스는 PCCW 것이다.
선착장 앞에 있는 다른 공중전화 박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영화 속 공중전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형태는 같아도 색상과 로고가 바뀌었지만, 이곳에서 그나마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래 볼 수 있었다.
영화 속 공중전화 박스 추정 위치에 서서, 버스 정류장의 구조물들을 바라보면 그 허름한 모습 때문에 옛 흔적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아쉬움을 다시 한번 달래준다. 이따가 저기서 버스 타고 장만옥이 일하던 부이 오로 향할 예정이다.
|무이워 개선 작업으로 인한 변화
키스신 공중전화 박스 터를 지날 때의 느낌. 무이 워의 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라 공사가 한창이다.
이 공사는 무이워의 현대화 및 편리성 강화를 위해 계획된 것으로, 남북 워터프런트 산책로, 광장조성, 교통 개선, 공공시설 재배치 및 신축 등을 포함하고 있다. 2023년에 시작된 이 작업은 약 4.5년 동안 계속될 예정이다. 공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가 알던 <열혈남아> 속 무이 워 모습은 아마도 영영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영화 속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영화 속 무이워 촬영지 지분은 배경까지 잡더라도 위 노란 사각형 딱 저 정도다)
| 선착장 주변 산책 한바퀴
영화 속 무이워 선착장/정류장이 등장하는 횟수도 많고 그만큼 임팩트도 강하지만 실제 촬영 장소 반경은 아주 좁아 촬영지 순례는 생각보다 금방 끝난다. 대략 100미터 정도만 걸어도 모두 둘러볼 수 있을 수준인데 물론 그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또 다를 것이다.
계획보다 일찍 온 덕분에, 아침 식사 장소를 찾으며 선착장 주변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영화 속 버스정류장 뒤의 배경이었던 건물도 좀 자세히 살펴보고,
그 건물들 옆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경치도 느껴보고,
공삿길 위로 구도를 잡아보니 야자수들을 보며 열대 지방에 온 느낌도 들었고,
무이워 페리 피어 로드 쪽으로 들어가니 두기봉 감독의 액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집약적인 홍콩 감성의 건물 배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우리에게 익숙한 홍콩 택시는 빨간색인데, 이곳 란타우섬에서는 파란색 택시를 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에 주차된 것처럼)
란타우섬에서만 운행하는 이 파란 택시들은 현재 섬 전체에서 '24년 4월 기준 75여 대가 운행 중이라고 한다. (빨간 도심 15,250데, 녹색 뉴테리토리 2,838대) 다 고유의 운행 영역이 있는데 홍콩국제공항, 디즈니랜드, 홍콩 쪽 홍콩-주하이-마카오 브리지는 예외라고 한다.
홍콩의 간판과 도로 사인들이 건물 배경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감성은 언제는 나를 매료시킨다. 오래전부터 홍콩은 (조금 과장해서) 길을 잃을 수 없을 만큼 도로 표지판이 잘 배치된 도시로 평가받았었다.
코너 블록을 한 바퀴 돌면서 보니 공사가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저런 화살표 전광판 보니 또 괜찮아 보이고,
맑은 하늘아래 따듯한 오렌지 색조가 돋보여서 그랬는지 피자가 왠지 맛있을 것 같았던 음식점.
구글 지도에서 미리 보았던 바다를 바라보는 중국과 레게 느낌이 뭔가 대조적이었던 차이나베어 음식점. 방문 시 문은 닫아 있었다.
우와... 그리고 또다시 마주한 자전거들. 공사 때문에 다 밀려나서 이런 것 같은데 빡빡한 홍콩의 도심 건물 분위기가 자전거 공간에서도 느껴졌다.
블록을 돌며 보이는 무이워 선착장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이 여유로운 산책을 마무리해 갔다.
| 홍콩 로컬 바이브, 카페 파라디소에서 아침식사
구글 지도에서 근처에 실시간으로 열려 있는 곳을 찾아보니, 이름부터 시네마 천국을 연상케 하는 카페 파라디소 Cafe Paradiso가 눈에 띄었다. 느낌이 왔다. 이번 여행에서 홍콩 특유의 빡빡한 느낌의 건물 사진들을 특히 많이 찍었는데 그렇게 찍은 저 핑크색 아기 돼지같은 건물 아래에 위치했다.
요렇게. 카페는 거리 쪽으로 작은 2인용 테이블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처음에는 위 사진 같이 허~한 느낌이 들어 문이 닫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애매~해 보여 한 번 다가가 보았다.
냉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문이 아주 살짝 열려있었고, 작고 소심한 "오픈" 사인이 걸려 있었다. 오전 8시 30분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테이블에 영국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인테리어와 공간이 아주 작고 귀여운 카페였다.
아침부터 날이 더웠던 터라, 상큼한 레몬 프레시 소다(설탕 없이!)와 간단한 영국식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먹는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온 손님들로 작은 공간이 금방 채워졌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에서, 동양과 서양의 오묘한 조화가 느껴지는 옛날에만 느낄 수 있었던 홍콩의 로컬 바이브가 참 좋았다. 요즘 홍콩 도심은 너무 대륙인들에 의해 잠식되어 많이 변했지만, 이곳 무이워의 조용한 카페에서 옛 홍콩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힐링이 되었다. 이 경험이 너무 좋았기에, 나중에 이 카페에 대해 따로 포스팅할 계획이다. 만약 이 카페가 평행우주 선상에서 열혈남아의 타임라인 속에도 존재했다면 분명 유덕화와 장만옥도 이 곳에서 이국적인 자국의 홍콩 바이브를 흠뻑 느끼며 자신들이 아지트로 삼았지 않았을까 싶다.
카페를 나와 건너편을 보니, 또 다른 홍콩 특유의 건물, 혹은 아파트? 무이워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 다시 촬영지 순례: Pui O 부이오를 향해 출발
선착장 앞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눈앞에 펼쳐진 복합적인 바다 뷰가 좋았다.
또다시 마주친 수많은 자전거들이 아까 정박해 있던 페리가 떠나면서 더 눈에 띄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차이나 베어를 지나 멋진 느낌의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무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울창한 자신감을 뽐내며,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 나무의 위용을 보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공적인 마천루 대신 자연이 만들어낸 랜드마크 같았다. 검색해 보니 아마 망고 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그 나무 바로 옆에는 맥도널드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카페 파라디소의 평온함과는 달리 이곳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한 바퀴 돌아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유덕화가 장만옥을 만나러 가던 그 루트를 따라 부이 오 Pui O로 떠날 시간이다. 9시 20분 출발 버스를 타기 위해 9시 16분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3M 번은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운행되지만, 대략 아침 6시부터 밤 11시 45분까지 나름 좁은 간격의 시간대로 운행된다. 주말과 평일의 스케줄도 좀 다르지만, 구글지도나 아래 뉴란타우버스 홈페이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M 말고 다른 번호들도 간다)
3M 버스의 종점은 퉁청 케이블카 버스 터미널이다. 여기가 출발점이라 나와 또 다른 한 명의 승객뿐이어서 저 2층의 맨 앞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원래 부이오를 지나치려 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들르기로 했다. 하차 지점은 부이오 Pui O의 로와이춘 Lo Wai Tsuen이다. 유덕화가 실제로 내렸던 지점은 정식 버스 정류장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로와이춘과 선와이춘 Sun Wai Tsuen 사이다), 나는 유덕화가 내리기 직전 정류장에서 내려 장만옥이 일하던 (구) 시브리즈 레스토랑 Sea Breeze Restaurant이 있던 터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영화에서 잠깐 보였던 저녁 신에서, 장만옥을 만나러 가던 유덕화의 루트다. 영화 속 시절 버스는 1층짜리였지만 아무렴 어떠나, 길은 동일한 사우스란타우로드다. 가자고, 고!
나중에 무이워 벗어나기 전 찍은 건데 고프로도 정면에 설치 완료. 마을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많이 타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저 노랑 안전봉 밑으로 재배치함. 유덕화는 사이드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일치하는 구도는 아니지만 뭐 ㅎㅎ
아침 8시 14분에 도착해 9시20분의 버스를 타기까지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이 워에서 경험한 생각지도 못했던 힐링과 로컬 바이브의 카페 파라디소, 그리고 맥도널드 옆 망고나무의 인상적인 모습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종점에서 부이 오로 출발한다.
여행 중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에서 현지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런 상황도 여행의 큰 묘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홍콩 샤틴의 신흥 맛집, 테오추(치우차우) 비스트로 (Teochew Bistro 陳鵬鵬潮汕菜館 진붕붕 조산채관)를 소개한다 (아직 네이버나 티스토리에서도 리뷰가 안찾아진다는게 포인트!).
| 웨이팅 전 음식점 소개
평일 목요일 저녁 7시경, 사람들로 북적이는 테오추 비스트로 앞. 웨이팅 등록만으로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게 앞에서 이미 ‘이곳은 맛집이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왜냐면 주변에 좀비처럼 웨이팅 중인 사람들의 풍경 때문. 2024년 4월에 오픈했다는 정보가 있는데, 새로 생긴 맛집이라 그런지 인기가 대단한가 보다. 분위기는 고급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딱 캐주얼한 스타일. 접근성은 Shatin 샤틴 역에서 바로 연결된 Citysky 시티스카이 아케이드 7층이라 좋다. 다만, 침샤쵸이에서 조금 거리가 있다는 점은 미리 참고하는게 좋을 듯. 부모님이 "여기는 꼭 와야 한다!"며 데려간 곳인데, 거리가 있어도 자주 오신다고 한다. 역시 중화요리는 한 명이라도 더 해져서 여러 명이 먹어야 제맛!
홍콩 로컬 맛집 앱 , 오픈라이스(Openrice.com)의 평점도 괜찮다. 2900여 명 참여 5점 만점 중 4점.
말 그대로 기다림의 뜨거운 열기가 너무 핫한 나머지 중간에 지쳐 나가 떨어지는 팀도 많았다. 덕분에 생각보다는 일찍 들어갔지만. (6시 40분 즘 등록, 8시 45분경 입성, 두 시간 ㅜㅜ) 전광판 하단 공지를 보면 음식이 불만족스러우면 환불 보장이라는 것 같은데 맛에 자신은 있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도 기다리나.
메뉴에는 당연히 화려한 소개글들이 있는데 번역해 보니 대략 광둥성 치우차우 식 요리집이다. (潮州를 읽으면 한국어로 '조주', '치우차우'는 광둥어 발음, 그 지역권 사람들의 민남어 발음은 '테오추'라고 한다. (나무위키보니) 그 지역 사람들은 만다린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만다린 발음은 차오저우 임)). 암튼 음식점 시그니처 메뉴는 거위요리와 치우차우 식 죽이다. 메뉴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 쉐프관련 '20 프랑스 푸아그라 대회 아시아 지역 챔피언 - 음식점관련 '17년 중화 치우차우 요리 조림거위(직역함) 왕 경연 대회 선정 - 홍콩 치우차우 요리 대회 은메달
암튼 추가 설명까지 요약하면 '16년 탄생한 정통 조주(潮州 치우차우) 식 요리 체인으로 중국 본토에 30개 직영점이 있는데 이번에 홍콩점을 열였고, 마카오점도 열 계획이라고 한다.
단거는 안 먹는 편이라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그 밑에는 달달한 디저트 메뉴를 따로 소개하고 있다. 대만식과 차오산식 그리고 커스터마이즈 할 수 있는 추가 재료들. 潮汕 Chaosan 차오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데, 조주(潮州)는 도시 이름으로 보면 되고, 조산(潮汕 차오산)은 조주와 인근 한 산터우 지역을 모두 포괄하여 부르는 지역 이름이라고 한다. (TMI..ㅜㅜ)
| 가게 내부와 주문
내부공간이 작은 건 아닌데 중국 요리집치고는 또 아주 큰 편은 아니다. 오픈한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청결도는 좋다. 서버 분들은 식당 마스코트처럼 저래 다 흰 티셔츠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메뉴판이 있긴 한데 웨이팅할 때 간이식 종이 메뉴판을 들고 와서 따로 찍진 않았다. 영어 이름이 없는 건 아쉽지만 관광객 용이 아닌 로컬 음식점이라는 느낌을 확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요리들이 사진이 포함되서 번역기도 잘 돌아가는 요즘 세상, 음식 선택은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최고의 난관은 주문 시점인데, QR코드 주문이 기본이다. 위와 같이 위챗, 인스타 등의 앱 QR로 연결하면 스마트 폰에서 메뉴 선택하고 바로 주문하는 방식이다. 우리도 처음에 시도했다가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그냥 웨이트리스 분께 구두로 주문했다. 중간에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놀라면서도 호감적이더라. 특히 만다린으로 주문하니 더 놀라워함. 요즘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서 인종차별 난무하던 옛날 옛적이랑 달리 어딜 가더라도 온도 차이를 크게 느낀다. 암튼 말 안 통하면 대충 사진 가리키며 주문하면 될 듯.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국음식점 주문과 서빙 시 특유의 그 '퉁명스러움'이 전혀 없었다 (익숙해서 별로 상관은 안하지만 ㅋ). 국내 패밀리 레스토랑의 업! 텐션 수준은 아니더라도 매우 친절하다. 뭐 이 정도 수준의 프랜차이즈면 당연한 거긴 하지만 ㅎㅎ.
자리의 기본 세팅. 저 모래시계는 전광판에서 본 그 30분 이내 요리가 안 나오면 돈 안받습니다를 실천하는 모습이다. 해보진 않았는데 재미 삼아 주문하고 시계 돌려놓으면서 가게 내부 풍경도 보고 메뉴도 보면서 기다리면 될 듯.
뭔가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마케팅을 자신있게 설계한 느낌이다. 냅킨 통에 써져 있는 걸 보면 아래와 같다. (번역기 돌린 후 요약)
1. 서비스 요금 없음 2. 식사 전 간식비 안 받음 3. 차 제공하는 자리 비용 안 받음 4. 30분 넘어 나온 요리 비용은 안 받음 5. 맛 없으면 돈 안 받음 6. 식사용 종이 냅킨 돈 안 받음 7. 생수 요금 안 받음
냅킨이 없어서 얘기하니 저 냅킨통을 준 다음 미니 포켓 티슈에서 휴지를 뽑아 꽂아 준다. (포켓 티슈 이미지는 음식점에 쓰는 거랑은 상관없이 인터넷에서 퍼 온 거임)
| 식사, Go!
먼저 주문하기 전에 자리 앉으면 바로 나오는 무료 식전(?) 디저트, 肚臍餅(두제빙). 너무 달아서 한 입만 살짝 베어 맛만 봤다. 비주얼에 딱 보이는 바삭+달달 맛이다. '배꼽떡'이란 건데 차오산 지역에서 유명하다고 한다. 이름은 그냥 배꼽 모양 닮아서 그렇다고 ㅎ. 바삭한 껍질과 얇고 부드러운 흑설탕 필링에 씹으면 질긴 질감이 특징이라고 한다. 단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맘에 들 듯하다.
먼저 나온 거위요리. 원래 시그니쳐는 '金獎卤鹅拼盘 골드메달 거위조림 모둠'인 것 같은데 다른 요리들도 같이 시키다 보니 반반 소짜 느낌의 상등급 부위를 시켰다. 개인적으론 이 날 최고의 맛이었다. 원래 홍콩 오기 전 스트리트 음식 같은 느낌인 하이난 식 치킨 볶음밥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닭도 아닌 심지어 거위로 대체한 날이었다.
'大대.만.족.'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는데 식초 베이스의 저 산미가 풍부한 소스와 찍어 먹으면 기름진 거위의 풍미를 느끼하지 않고 오히려 풍미를 더해주는 판타스틱한 맛이 난다. 특히 상부라 그런지 거위목도 나왔는데 뜯어먹는게 그 식감이 감히 치킨 목살 뜯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고기 밑에 두부도 같이 나오는데 부드러우니 어르신들 먹기도 좋고 맛이 좋다.
그리고, 우리나라 물가가 너무 올라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홍콩달러 98불 (약 1,7000원)인데 서울에서 좀 비싼 냉면 한 그릇 값이다. 이 가격에 이런 맛과 양이라고? 혜자다.
다음에 또 갈 기회가 있다면 오른쪽 상단의 저 모둠을 시켜보면 아주 좋을 것 같다. 거위 고기, 날개, 두부, 달걀 포함이다.
다음은 또 하나의 시그니쳐이자 부모님의 페이버릿, 여긴 이거 먹으러 오신다는, 나무 국자가 인상적인 '조산식 해산물 사골죽 (潮汕砂鍋粥)'이다. 죽이다 보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한테도 부대끼지 않는 소화는 물론 맛까지 모두 커버해 줄 수 있는 기특한 맛이다. 부모님 원픽이라 2인분 시킴. 새우, 바지락, 바닷가재, 게, 굴 등이 들어간 죽인데 굴 맛에 따라 비리게 느낄 수도 있다. 저건 날에 따라 호불호가 있는 듯하다.
다음은 죽과 딸려 나온 피시볼과 비프볼. 와.. 이것도 짭짤 구수 쫄깃~하니 괜찮았다. 술 마시고 싶은 욕망을 뜨거운 차로 다시 쭉쭉 누르며 한 입식 베어 먹어 본다.
비프볼과 피시볼 안의 모습. 이거 먹고 다음 일정인 타이오 어촌 마을 가서 꼭 먹어야 한다는 대왕피시볼 못 먹은 걸 지금까지도 후회 안 하는 이유다.
이어 나온 小吳烤蝦 소이 구이 새우. 코코넛과 함께 구운 거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짜지도 않았고, 이미지에서 보듯 쫄깃하고 바삭한 식감이 좋았다. 일본 식 꼬치와는 또 다른 중국식 꼬치의 맛깔스러움.
그리고 다음 대망의 피날레 장식할 부모님의 두 번째 페이버릿, 제철 해산물을 강조하는 향기로운 팬에 구웠다는 향전창어(香煎鲳魚). (장어 아님! '창'어임)
비주얼만 봐도 빠삭+꼬소~함이 느껴진다, 근데 또 부드러움. 저 작은 파들은 살짝 올라가 있지만 생선튀김 곳곳에 그 상큼함이 배어 있다. 머리와 꼬리는 가장 중요한 분에게 드리는 법.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아주 맛있게 드셨다. 그만큼 튀김의 내부는 또 부드럽다는 반증! 올때마다 해산물 사골죽과 함께 항상 드신다는 메뉴. 먹을 때는 병어라 하셨는데 포스팅할 때 메뉴 보니 창어라고 써져 있어 뭔가 헸다니 병어다. 병어튀김.
여기까지가 세 가족이서 정말 배부르게 최선을 다해 먹었던 음식이었다.
가족식사란 불편한 것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소중한 것인 것 같다.
기.억.
| 음식점 메뉴
과대광고에 솎을 때도 많지만 사람 많은 곳엔 이유가 있다고, 정말 맛있었던 한 끼였다. 메뉴는 위와 같다. 스마트폰 번역기 돌려 보면 될 듯. 아쉽게도 홍콩김치처럼 먹는 초이썸 같은 야채볶음 메뉴는 없었다. 그래도 행복했던 가족 저녁식사. 이거 먹고 완차이 숙소 돌아가 원래 계획했던 일정 다 취소하고 포만감에 휩싸여 바로 잤다. 그 다음 날은 란타우섬 행.
| 위치.location
음식점의 위치는 아래와 같다. 구글지도 링크.
一期7樓703A號舖, 新城市廣場, 18號 Sha Tin Centre St, Sha Tin, 홍콩
홍콩을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침샤쵸이의 MTR 지하철 역 기준으로 샤틴 Shatin 역까지는 약 25~30분이 소요된다.
포스팅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마찬가진데 샤틴역에서 구글 길 찾기를 찍으면 저렇게 밑으로 쭈욱~ 8분 도보로 돌아가라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지도 자세하게 보면 샤틴 역에서 스카이 시티로 바로 이어지는 길 하나가 보일 것이다. 그 길로 조금만 가면 바로 시티스카이 아케이드로 이어진다. 대충 근처 엘리베이터 찾아서 7층으로 가면 된다.
이 스카이시티 아케이드가 지어지지 얼마 안 되었는지 엄청 크고 깨끗하다. 음식점 가서 웨이팅 등록하고 그냥 이것저것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웨이팅 등록하고 30여분 지나면 모두가 좀비가 된다. 주위에 앉을 곳이 있긴 하지만 모두가 좀비처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도 유명한 제이드 가든도 여기에 고급스럽게 자리 잡고 있기도 하고, 여기저기 음식점이 많다. 우리도 기다림에 지쳐 여기 갈 뻔했었다.
| 번외, 이후
그렇게 길고 지치던 기다림도 잊혀주게 한 맛. 특히나 오랜만의 홍콩에서의 가족 식사여서 더 특별했던 하루였다. 하지만 몸이 지치기에 향후 취소한 일정들이 있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몸이 너무 힘드니 홍콩 지하철 MTR 고급석 타기로 했다. 자리가 편하다. 부모님은 먼저 내리고 나는 뷰 좀 잡아보려고 따로 잡은 숙소인 완차이 쪽, 애드머랄티에서 내린다.
여기서 택시 잡고 호텔 가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제2의 고향 홍콩을 방문하고 새삼 느꼈던 것이 왜 이리 택시 잡기가 힘든가!
어케어케 택시 잡고 숙소로 돌아온 후 대충 사진 좀 찍고 이내 잠들었다. 다음 날은 아침에 바로 배 타고 란타우 섬으로 가는 일정.
10년 만기 마일리지 소진을 위해 떠난 홍콩, 그리고 그곳에서 2박을 보낸 란타우 섬의 타이오 어촌 마을. 1박 후 아침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그 보기 힘들다는 핑크 돌핀들을 연달아 여러 번 만났던 특별한 하루였다. 타이오는 일몰이 유명한 지역이어서, 저녁에는 수상가옥들을 배경으로 3층에서 아름다운 일몰을 즐길 수 있다는 히든 타이오 (Hidden Tai O) 식당에서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실패하고 운 좋게 로컬 맛집 찾은 이야기.
| 히든 타이오: Closed!
홀로여행의 로망인 로컬맛집 경험. 아침엔 현지인들로 가득한 맛집에서 훌륭하게 시작했으나, 피시볼 대신 실수로 미트볼 국수를 시켜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점심은 분위기만 좋았고 맛은 실패였기에 저녁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졌다. 일몰에 시간까지 딱! 맞춰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을 즐기려 했지만, 간판과 부엌 불은 켜져 있고 오픈 사인도 있었는데 사장님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바로 끊어버리셨다. 아마도 로밍 때문에 외국 전화번호로 뜬 걸 보고 그랬을 거라고 이해는 했지만, 손님도 없는 상황에서 가게 문을 열어 둘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혹시 몰라 조금 기다려보았지만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다른 식당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마치 이름처럼 원주민 가옥 촌 안에 찾기도 힘들게 몰래 숨어 있는 'Hidden' 타이오를 뒤로하고, 메인 거리로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시간은 이미 저녁 7시 50분 경.
타이오 마을은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당일치기 코스로 방문하는 곳이라 관광객들은 떠난 시점이었다. 문 연 식당이 많지 않아 불안해졌다. (그럼 이 시간에 문 연 식당들은 대부분 로컬들을 위한 걸 거잖아 완전 럭키비키잔ㅎ...이고 나발이고, 꺼저)
여행 전 무려 3주 동안 공들여 '설계'한 계획이 틀어지며 완젼 초조해졌다 (INFJ로서 계획 어긋나면 지구파멸급 멘붕임). 마침 타이 오 메인 시장 거리 근처에 보기 드물게 큰 음식점 하나가 있긴 했는데, 이 집은 어제도, 오늘도 늦게까지 열려 있었다. 몇 년 전 '짠내투어' 방송에도 나왔다는 집이다. 하지만 방송을 보고 온 한국인 및 중국인+외국인들 많은 사람들이 구글 리뷰에서 낮은 평점을 남겼고, 홍콩 맛집 리뷰 플랫폼인 오픈라이스(Openrice)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원래 계획엔 없었지만, 선택지가 없어 거의 이곳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근처 타이오 시장 거리에 위치한 작은 음식점 하나. 아무런 기대도 없이 들어갔지만, 이곳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될 줄은 몰랐다.
| 진진찬청 입성!
윙온스트리트에서 타이오로 건너오는 다리 넘어서자마자 위치한 이곳은, 영어로 Zhen Zhen Restaurant, 광둥어로 '전전찬텡'이라 불리며, 한문으로는 ' 珍珍餐廳 (진진찬청)'이라 적혀 있다. '진(珍)'은 소중함을, '찬청(餐廳)'은 식당을 의미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차찬텡(茶餐廳)의 '찬텡'과 같은 단어다. 그래서 이곳을 진진식당이라고 부르면 딱 맞을 것 같다.
어차피 혼자 여행 중이라 요리를 시키는 것도 약간 부담스러웠는데, 이곳은 혼밥 하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쨋든 나의 모든 감각들이 여기로 들어가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착석 후, '여기라면 최소 두 가지는 가능할 것 같다!'라는 마음으로, 기대를 안고 메뉴를 집어 들었다.
| 주문과 식당 내부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진 몰라도 손님들은 세 테이블 정도. 거의 마감 분위기 (저녁 8시 갓 넘음) 쨋든 무언가 로컬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나중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구글리뷰는 15개, 오픈라이스에는 고작 6개의 리뷰만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 사진들이 많아서 선택에 도움이 되었다. 뭔가 메뉴가 엄청 많아서, 마치 홍콩의 김밥천국? 뭐든 다 되는 동네 백반집 느낌이랄까? 다행히 영어 메뉴명도 있어 주문하기 수월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세히 살펴볼 시간은 없었고 눈에 딱 들어온 하이난 치킨라이스. 어촌 마을까지 힘들게 와서 마지막 저녁 식사로 해산물을 안 먹고 하이난 식 치킨라이스냐 싶지만, 홍콩을 떠나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리웠던 맛이기 때문이다.
쨋든 타이오 오기 전에 홍콩도심에서 먹은 거위 요리로 이 그리움을 접었었지만 메뉴 사진을 보니 다시 불타오르는 그리움. 주저 없이 결정! 그리고 사이드로는 메뉴도 보지 않고 초이썸 (채심)을 시켰다.
"and... 초이썸."
".. 초이썸?"
볶음밥 시킬 때만 해도 '너 이거 뭔지 알고 시키는 거냐'하는 눈치로 두 번 확인 하더만, 그런 뭣도 몰라 보이는 외국인이 메뉴도 안 가리키고 "... 앤드... 초. 이. 썸?"을 느지막이 외치니 주문받는 사장님의 눈이 순간 흠칫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
"오케이"
암튼 이내 "초이썸? 오케이"를 외치며 주방으로 오다를 전달하러 가셨다. (재료가 남았나 머릿속으로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무슨 미션임파시블 빙의 마냥 낭만에 빠져서 여행 중 발생하는 모든 순간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런 상황이었을 수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듯이 초이썸 같은 야채는 홍콩에서 김치처럼 사이드로 자주 먹는 반찬이다. 홍콩에 있던 시절 이 맛에 상당히 길들여져서 한국에서도 초이썸은 물론 퉁초이(공심채), 빡초이(청경채)를 맛과 양 대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감수하며 종종 먹곤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먹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기회가 많이 없었다.
벽, 천장, 선풍기가 모두 백색인데도, 청결 상태가 좋아 보였다.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테이블 분위기. 참고로 화장실은 좀만 움직여도 벽이 부딪힐 정도로 좁고 사로는 일어서야 물을 내릴 수 있는 평평~한 좌식인데, 시골 마을의 작은 식당 치고는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본다.
티 대신 물 달라고 했는데 양도 넉넉하다. 외국인이라 "워터?"를 먼저 물어본 것 같은데 정신없어서 바로 "오케이, 워터" 해버렸다. 그냥 따듯한 차이니즈 티 마실 걸.
테이블에 앉으면 기본 세팅은 요렇게 되어 있다. 저기 왼쪽 양념통은 라유, 오른쪽은 1회용 설탕 봉지다. 설탕은 아마 아침식사 때문에 있는 듯.
보니까 아침식사도 제공한다. 언제 시작인진 모르겠지만 일찍 열면 함 와보고 싶다. 아침엔 영락없는 차찬텡 느낌의 공간일 듯.
| 하이난 식 치킨라이스와 초이썸의 매력
먼저 등장한 하이난식 치킨 라이스 (스크램블 에그 추가) 비주얼부터 마음을 사로잡더니, 한 입 배어문 닭고기의 부드러움에 감탄한다. 뼈에 가까워 질 수록 쫄깃한 식감까지 더해지니, 퍽퍽한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닭고기 육수가 밥에 충분히 베어 있어, 볶음밥 자체도 정말 맛있었다. 함께 제공된 소스도 빼놓을 수도 없다. 식초 맛이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생강과 파 등의 (맞나?) 향이 어우러져 꿀맛을 선사했다. 고기를 다 먹고 난 후에는 비빔밥의 민족답게 이 소스에 밥도 촵촵 비벼 먹었다.
중식에서 빠질 수 없는 라유, 고추기름장이라고 해야 하나? 고추장, 스리라챠, 소이소스 같은 만능 소스! 밥, 만두, 생선, 국수 등 무엇이든 잘 어울리는 만능 소스! 매콤한 맛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금방 사라지는, 마치 야구에서 번트처럼 가볍게 치고 빠지는 느낌이랄까? 우리나라 된장과 고추장처럼 각 집마다 맛의 차이는 당연히 있고 그만큼 또 흔하고 평범하지만 현지에서 맛보는 이 라유의 매력은 여전했다.
이 라유를 사이드로 조금씩 곁들여 먹으니,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그 맛이 살아났다. 물론 이곳이 홍콩 최고의 볶음밥 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홍콩 어디에서든 (특히 손맛이 좋은 곳이라면) 부담 없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 웬만해선 실패하기 어려운, 손맛 좋은 동네 맛집. 타이오 마을의 '볶음밥 맛집'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이어 등장한 초이썸(채심)! 비주얼만 봐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갈릭이나 굴소스로 볶은 게 아니라, 통으로 데친 후 잎과 줄기의 경계만 한번 싹둑 잘라 굴소스를 옆에 따로 제공해 준다 (이게 클래식이지).
입사귀는 부드러우면서도 쫀득 약간 사각, 줄기는 오독오독한 식감이 일품이다. 달달~한 굴소스를 살짝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극락의 맛이다. 나중에 메뉴 확인하고 보니 이렇게 채심만 주는 건 없고 당근과 채심 볶음으로 주는게 있었다. 그래도 얘기하면 이렇게 주는 것 보니 홍콩 로컬 체험하고 싶다면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채심 (초이썸)만 주문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늦게 온 데다가 먹는 속도가 너무 느린 편인데, 눈치를 주지 않았다 (내가 모른 것일 수도 있지만). 물론 사장님들 남편분, 아내분, 딸내미분 한 명씩 돌아가면서 나와서 자리는 지키긴 했는데 눈도 안 마주치고.. 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마감 시간 가까워지면 직간접적으로 눈치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푸시하는 느낌을 받지 않아서 오히려 놀라웠다. 오히려 나 혼자 계속 시간을 의식하며 속도를 높였다.
최대한 빨리 먹으려 처음부터 노력은 했지만 느린 데다, 음식은 또 넘 맛있어서 계속 먹게 된다. 이게 배려인진 모르겠지만 홍콩 및 중국에서 이런 분위기의 식당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이 집에 늦게 찾아가도 문제없어요!라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소식가인 나로서, 이 정도 먹었다면 정말 잘 먹은 거다. 양도 많았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 8시 9분에 주문하고 15분에 볶음밥, 18분에 채심이 나왔고, 8시 57분에 식당을 나섰다. 한 40여분 동안 먹으면서, 옛 기억과 더불어 오랜 시간 갈구했던 그 맛을 현실에서 만나 삼위일체의 경험을 한 듯 뭔가 홀린 듯 먹고 나왔다. 친절한 배려의 바이브까지 더해져서, 이번 홍콩 여행 마지막 저녁 식사의 피날레로서 전혀 아깝지 않은 선택이었다.
| 너무 늦게 들어와서 죄송했어요
한국에서도 지방 여행을 종종 다니다 보니, 특히 어촌 지역에서는 일상이 빨리 시작되고 일찍 끝난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비싼 음식을 여러 개 시킨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미리 ChatGPT에게 번역을 부탁해 계산할 때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사장님이 "으음?" 하며 보시더니 이내 "아아~ 하핳하" 웃으시더라. 영어로 이미 닫았을 시간인데 너무 늦게까지 머물러서 미안하다고 한번 더 얘기하고,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다고 인사를 나누며 굿바이 했다. (사과하고 나니 맘이 좀 편해졌다)
홍콩이나 중국을 여행하면 음식점에서 주문을 받을 때 느껴지는 그 특유의 그 퉁명스러움이 익숙해지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느낌의 거의 없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가게 외관을 두 컷 찍었다. 안을 보니 사장님 가족들이 얘기하고 계셨는데, 아마도 방금 내가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목소리 톤과 표정이 다들 좋아서, 마음이 한결 안심되었다.
| 구글/오픈라이스의 식당 리뷰:
그렇게 많이 달려 있지 않지만 번외 겸 리뷰들을 살펴보았다. 네이버 같은 경우엔 모두가 가는 곳으로 몰리는 '쏠림' 현상이 강해 참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 여행지역 음식점 검색 플랫폼이나 구글 리뷰를 활용한다 (구글까지가 딱 마지노 선인 듯). 더군다나 요즘은 번역 기능도 점점 좋아져서, 현지 리뷰를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니 더욱 유용하다.
오픈라이스 (Openrice.com)은 일본의 타베로그 (Tabelog.com)처럼 현지 사용자들의 리뷰를 참고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구글 리뷰는 다양한 국가의 여행객들이 남긴 리뷰들을 볼 수 있어, 두 가지를 함께 보면 좋다. 특히, 영업시간이 한 곳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거나 틀린 경우가 있어 크로스 체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식당의 리뷰는 많지는 않지만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점은 합리적인 가격과 맛있는 볶음밥이다. 역시 볶음밥 맛집은 맛 집인 듯. 물론, 볶음밥이 너무 촉촉하다거나 치킨이 냉동치킨 같다는 부정적 의견도 있다. 암튼 타이오 마을은 명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어촌 마을이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관광지라면 흔히 떠어로는 게 뭐?
"바가지 눈탱이 ㅎㅎ"
그래서 여기처럼 가격이 합리적인 곳을 만나면 반가울 때가 많다.
(물론 이곳 외 다른 곳들이 다 바가지라는 얘기는 아니다)
1. 착한 가격: 외딴곳이라 어느 정도 높은 가격을 예상했지만, 이 식당은 대부분의 리뷰에서 가격이 착하다는 점이 언급된다. 이런 외딴 관광지는 특히 생필품이나 음료수 같은 것들이 종종 어이없는 가격으로 판매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음식점들도 그런곳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걱정이 없었다. 맛도 좋고 양도 충분해 가성비가 매우 좋다고 해석할 수 있다. 큰 요리 제외, 보통 한 접 시 당 HK 50~58 달러 선에 책정되어 있다.
2. 볶음밥: 대부분의 유저들이 볶음밥이 맛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새우젓 볶음밥 이야기가 많은데, 타이오가 새우젓과 반건조 생선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보니 새우젓 볶음밥을 시그니처 메뉴로 내세우는 타이오 음식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전 날 다른 집에서 맛보았기 때문에 하이난 치킨라이스를 선택했다. 하이난 치킨라이스는 원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대표 음식이지만, 홍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메뉴다. 그만큼 먹고 싶었다! 한국 지방 여행가서 거기 특산 요리 안 먹고 맛있는 동네 짜장면 먹는 경우라고 보면 될 듯 하다.
| 에필로그: 마지막 밤
식당이 위치한 Tai O Market st. (타이오 시장 거리)에서 Shek Tsai Po st. (섹 차이 포 거리)를 따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
행복한 포만감을 안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여행 전만 해도 외진 곳이라 밤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돌아보니 그저 조용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숙소가 있는 건물 옆에 사는 마을 가족들이 모닥불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활기찬 모습이 나도 모르게 기분을 밝게 해 주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잠자리 채 들고 여름방학 숙제하러 가는 기분의 소환 같은 느낌이랄까?
숙소에 도착. 여인숙의 낭만이 묻어나는 이곳은 귀여운 발코니가 매력적이다.
옥상을 루프탑 라운지처럼 꾸며 놓아, 그곳에서 아름다운 달빛 아래 타이오 마을 마지막 밤을 만끽할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올라가 보니, 모닥불 놀이는 이미 끝나 있었다. 저 바로 앞의 하늘은, 란타우섬을 끼고 크게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비행기가 홍콩 공항에 착륙하는 루트로, 비행기에서 하강하기 전 타이오 마을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오래된 마을답게 마치 영물처럼 보이는 고목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흔들리는 나뭇잎, 잔잔한 바다의 물소리, 그리고 시골 마을의 조용한 각종 소리들은 이 시간마저 멈춘 듯한 평온을 선사했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고, 마음 또한 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또한 맑아서인지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나의 귀와 코 상태가 훨씬 개운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생각만 들고, 아름다운 마음만 존재했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