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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존 웨인 식의 서부 영화를 생각했다면 엄청나게 실망할 것이다.
영화는 길고 전개는 지루하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이 대게 그렇듯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액션은 마지막 10~20분에 펼쳐진다. 누가 아직도 헐리우드 간판을 들고 이런 영화를 만들고 있나 했더니... 엔딩 크레딧에 오래된 기억을 꺠우는 이름이 나왔다.... 제임스 만골드...

감독인 제임스 만골드의 이름은 먼저 부담으로 다가 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십 년 전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과 선댄스 영화제에서의 호평으로 세인의 관심을 끈 [Cop Land 캅 랜드] (맞나?)의 감독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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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영화도 [투 유마]와 굉장히 비슷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나지만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지루한 전개의 영화였다.
하지만 웃긴 것은 '잘 만든 영화'라는 것. 그래서 "재미 없다"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못 만든 영화다"라고 말하긴 커녕 "잘 만든 영화"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아주 가혹한 영화다.

만골드는 그 만의 철학을 뚝심있게 관철 시킨다. 그 철학은 관객가 쉽게 공유될 수 있을 지언정 그가 내러티브를 끌어나가는 연출 방식은 공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하고 정적으로 흘러간다.

[3:10 To Yuma]도 마찬가지다. 그 만의 확고한 철학으로 관객에게 인정사정 없이 그 만의 방식으로 철저하게 끌어나가는 그런 영화다.
따라서 이런 전개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루함에 의해 극장 자리에서 꽈배기를 틀 수 밖에 없다.

광활한 자본 주의 공간에 같인 '좁디 좋은' 사람들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우선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냉소가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남북 전쟁 직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미국 땅 안에 그 뿌리를 박기 시작하는 시기다. 가축을 키우는 농경 생활에서 아직 대다수가 몸을 담고 있고 자본과 경제에 눈을 뜬 지주들과 '기업'들은 광활한 미국 땅을 서로 네트워크화 시켜 줄 '철로'를 놓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철로 사업이라는 경제 개발 때문에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될 크리스챤 베일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다.

시대의 마지막 신화적 영웅이자 로맨티스트, 벤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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럿셀 크로우 분의 벤 와일더는 이름 처럼 와일드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무법자이자 자본주의 세상에 등을 돌린 무법자다.
그가 깨닫고 있는 것은 틀에 박히고 세뇌 당하고 이용 당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도래했고 그는 굴복할 수 없다. 그가 성경에 꿰뚫고 있으면서도 식 전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성경이란 자본과 경제의 꽉막힌 틀에 박혀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것도 아닌, 하나님과 예수라는 혹은 신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키는 그런 도구가 아닌 인생의 지침서다.

그리고 그가 던진 "녹색 눈빛의 여인"의 문학적/미학적 중얼거림은 바로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신화적 '영웅'이자 질풍노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것을 확인 시켜 준다. 그는 참 모습의 '인간'과 '자유'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다.

이 시대 마지막 양심이자 권력에 희롱당하는 소수자,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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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베일 분의 에반스는 언뜻 보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그는 영화에서 깔아놓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덫에 걸린 불쌍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제도화된 결혼, 가족, 자본, 경제... 이 모든 것이 근대 자본 주의 사회가 인간을 권력의 틀 안에서 쉽게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덫이고 에반스는 이 덫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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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업이지만 따지고 보면 국책 사업이나 다름없는 철로 사업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되고 '자본'이라는 것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힘에 한 없이 무력한 사회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아들에게서 무시 당하고 그의 부인 또한 그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상화에 처해 있는 것은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그의 신체에서 보여진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사회적 '거세'의 상징으로서 근대화의 법칙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벤 와일더가 말을 타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정 반대다.

사회라는 테두리에 갇혀버린 그의 움직임은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나라를 위해 싸웠을 지언정 나라가 그에게 해준 건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총 한자루 뿐이고 그에게 있어 총이란 한 남자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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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근대 사회적 테두리 안에 갇힌 에반스를 벤 와일더는 '또 하나의 답답한 인간'으로서 바라본다. 하지만 유마 행 기차를 향해 가며 이들 사이에 우정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믿음이 생겨난다. 바로 신념이라는 믿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때문에 와일더는 점점 에반스에게 같은 인간애를 느끼고 에반스 또한 같은 심정으로 마지막 와일더에게 '나를 알리고 싶어서...'라는 고백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찰 시킴으로서 아들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며 마지막을 장식한다.


때묻지 않은 순수의 상징, 에반스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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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에반스와 와일더를 연결 시켜 주는 고리는 바로 아들이다.
그 아들은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으로 그 자유에 대한 열망과 정의감이 와일더로 하여금 자신을 보게 만든다. 즉,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알고 와일더가 영화에서 나오는 캐릭터 중 유일하게 '겁'을 내는 이가 바로 에반스의 아들인 것이다. (마지막 아들이 와일더에게 총을 겨눌 때 벌벌 떠는 그의 모습에서 이는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 코드로 뚝심있게 풀어낸 제임스 만골드
서부영화라는 장르의 틀을 깼다면 깬것이 [투 유마]의 큰 장점이다. 근대 자본 주의의 출발이라는 맥락을 받아들임으로서 진부한 형식에 둘러 쌓인 서부극의 장르를 [용서할 수 없는 자]와는 또 다르게 풀이해냈다.
자본 주의 코드 때문에 노예로서의 흑인이 등장하지 않고 대신 자본주의의 개미 같은 존재로서 동양인, 중국인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인디언과의 혈투는 절제 시킨 것이 바로 이 이유 떄문일 것이다.

어찟하였건 영화는 지루하였으나 이처럼 자신만의 철학을 끈질기게 끝까지 밀어 부친 감독 제임스 만골드에게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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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재밋게 본 아동영화였다.

머시기의 나침반, 반지의 제왕류 판타지나  디즈니, 픽사의 아동 영화류가 이제 조금 지겹다 싶은 사람들이 보면 옛 판타지 영화생각이 날 정도로 진부한 정통 아동 스토리 설정의 영화다. (하지만 이 점이 참 좋았다!)

특히 영화도 그리 길지 않아 더 좋다!
액기스만 척척 나오니...

예를 들어 맨날 햄버거만 먹다가 하루 쯤은 핫도그를 먹어주었을 때의 그런 신선함이랄까나?

몬스터들의 모습도 신선하다기 보다는 옛날의 향수를 일으킨다. 왠진 몰라도 토마토의 습격이나,네버엔딩 스토리, 그렘린 같은 옛날 영화 그리고 고전 몬스터 물 게임 캐릭터들이 떠오르게 한다..
특히 파이널 판타지도! (왠진 모르겠따)

거기다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엄마역의 메어리 루이즈 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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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짜증 나는 점이 있다면, 1인2역을 소화해낸 프레디 하이모어의 '열정적인 연기'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봉봉짱에게 요즘 하고 있는 리얼리티 쇼 얘기 하나를 들었다.

무슨 영화배우 지망생들 나오는 모양인데
한 후보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했더니
심사 패널의 한 감독이 "연기는 열심히 한다고 되는게 아니에요"라는 식으로 말했나보다...
거기다 후보가 너무 열심히 연기하니까,
너무 열심히 하지말라고 오히려 더 짜증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프레디 하이모어의 너무너무 열심인 연기가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지고 오히려 불편했다... 너무 열연하니...
차라리 꽥꽥데는 사라 볼거의 연기가 훨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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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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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명장면이 하나 있다면 한 방에 모든 괴물을 싹쓸어 버리는 피를 상징하는 토마토 즙이 온 집안을 뒤덮는 장면이었다.
요정과 몬스터들이 나오는 아동 영화가 한 순간에 처참한 피바다의 고어 영화로 변해버리는 순간이었다!
오, 애들 보기에 얼마나 잔인한 장면인가하면서도,

기억에 남는 명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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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에티켓 또 하나! 떠드는 아이들!
음.. 애들 영화라 애들이 떠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애가 너무   떠든다 싶으면 주위 사람 생각해서라도 예의상,
"사람들 많은데 조용해야지"라고
립 서비스 한번 해주는 센스는 필요하지 않을까?
어차피 애들 영화 중 애들이 떠드는 건 누구나 다 감안하고 왔을 터라 이해는 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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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에티켓 둘! 중간에 나가면 커튼은 닫고 나가자!
간혹 영화 중간에 바깥에 나갔다 오는 관객들이 있다.
근데 문제가 종종 커튼을 닫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앞쪽 사이드 자리에 앉게 되는 관객은 이 경우 비상구 사인의 밝은 불 빛 때문에 영화 관람에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자꾸 신경이 딴 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커튼은 닫고 나가고 닫고 들어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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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재밋는 영화를 봤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환 줄 알았다가 원래는 제작인걸 미디어가 깜쪽하게 만들걸 깨닫고 기분이 좀 나빠 기대를 별로 안했었는데..
우하하 ... 재밋었다...


관객과 영화의 싱크 공간, 극장!
TV가 나와도 비디오가 나와도 DVD가 나와도, 그리고 지금 컴퓨터 다운로드가 판을 쳐도 여전히 사람들은 극장으로 향한다. (아무리 요즘 영화계가 죽는 소릴 해도 영화는 굳건한 일등 산업 중에 하나다)

저마다 극장이란 공간에 대한 매력에 대한 한마디를 가지고 있고 많은 논문들과 해석들도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친숙한 것이 아마도 폐쇄된 어둠 속의 공간과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만들어 내는 일종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것 말고도 그장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극장이란 공간 안에서 관객과 영화의 인터랙션이 액티브하게 오고갈때의 순간이다.

물론 내면적인 것도 있지만 겉으로 표출되는 싱크의 경험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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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상 몇 가지 예를 들면
-[인정 사정 볼 것 없다]에서 장동건이 출연할 때 서울극장 개봉 첫날 첫회의 몇몇 여성들은 오르가즘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미스트]에서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짜증나는 기독교 아줌마에 총 한방 갈겼을 때, 극장 여기저기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러저러한 소소한 관객들의 반응이 영화의 재미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의 경험을 한 층 돋구워 준다.

외국 극장에서는 많이 봐온 일이지만 유독 국내 극장에서는 관객들이 참 얌전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많다. 물론 극장 에티켓을 넘어서서 무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좋진 않지만... 영화 관람에 에너지를 더해주는 그런 '싱크의 순간'이 있다...

제일 좋은 예는 아마도 컬트 영화일 것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보며 코스튬을 차려입고 장면 장면마다 행동이나 따라하는 대사 혹은 관객의 대답 등이 따로 존재하고...(굉장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종종 그런 관객과 영화의 인터랙션이 있을 때 극장을 나서며 기분이 참 좋은데..
이번 [오퍼나지:비밀의 계단] 같은 경우도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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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판타지 공포물인 까닭에
사람 깜딱깜딱 놀라게 하는 장면이 많은데...
공포물을 볼 때 꼭 지 옆에 여자친구 놀랠 킬려고 이상한 타이밍에 "워!"하면서 판을 깨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족속들은 없었고... 혼자 놀라 자빠지는 이들의 탄성이 기가막히게 싱크가 됬다.
효과는 공포감의 극상승이었다.
다운로드 받고 집에서 혼자 볼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군중 속에서 함께 느끼는 그 긴박감!

그건 분명 '개인'이 아닌 '무리'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 (집단이 한 번에 미치광이가 되는 현상처럼)

오죽 했으면 화장실 가는 긴 생머리 여성의 실루엣을 보고 나를 포함한 몇 몇 관객들이 씨껍했고 그 여성 또한 놀라 자빠질 뻔 했다.

어쨋든 열에서 백까지 열거할 순 없지만 간만에 관객과 영화가 하나된 재밋는 경험이었다.


영화도 일품!
이런 관객의 인터랙션이 존재하고 영화까지 좋았으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 돈이 아깝지가 않았다.

기존 헐리우드나 디즈니 영화를 보면 지나치게 '가족주의'를 내보이며 '아이'를 신성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족의 중요성을 붕괴시키려는 그들의 '세뇌의 장치'일 뿐이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애들 나오는 영화가 많이 식상할 때가 있는데...

[판의 미로]같은 경우 잔인하고 현실적인 동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어 굉장히 좋은 기억이 있었는데 [오퍼나지] 또한 아이들을 그렇게 까지 내러티브적으로 학대하진 않지만 유럽 동화식의 내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여기서부턴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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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과 비교되는 열린 결말
가장 기억에 남는다기 보다는 영화의 결말도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 여느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식의 두 가지 해답을 모두 가능케 하는 흔한 결론이긴 하다.

근데 최근 한국 영화였던 [더 게임]을 본 터라 둘다 열린 결말로 끝맺는 부분이 사뭇 비교되었다.

물론 [오퍼나지]의 경우 비중이 아이는 벌써 죽고 어머니는 약 때문에 꿈을 꾸거나 죽기전 환상을 겪은 것 뿐이다라는 이야기에 더 힘이 들어가긴 하지만 판타지적으로만 보면 실제로 그 아들을 만났다고 할 수도 있다. (헌데 이 해석은 조금 약하다)

어쨋든 이런 열려있는 결말 행함에 있어 마지막 관객에게 실망을 주는냐, 여운을 주느냐는 그 결말까지 끌어오는 영화의 내러티브가 얼마나 촘촘하고 그 개연성이 있는냐에 따른다.

헌디 [오퍼나지]의 경우 직접적인 판타지적 climax 영상은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현실 세계 속에서 그 암시만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내보내는 전략을 통해 그 판타지적 열린 결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이 부분 만큼은 그동안의 내러티브와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분위기의 결말을 이끌어 냄으로서 (몇 몇 장치는 있었지만) 관객에게 허탈감만을 안겨준 [더 게임]이 배워야 하지 않을 까 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 부분이 다시 한번 관객들로 하여금 한국영화를 품게 만드는 중요 요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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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대형 간판 걸고 나온 한국영화보고 숨통이 좀 트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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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그리 신선하지 않다. 하지만 외국영화에서 그 고리타분한 몇 몇 장치들과 담론들이 한국이라는 사회 실정에 맞추어져 빛을 낸 수작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바람난 가족]이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가 외국에 나가서 진부한 이야기라는 도장을 받고 판정패 당한 것의 반대 현상이 아닐까?)

또한 영화의 백미인 골목길 추격씬과 영화 오프닝의 서울의 영상같이 도시를 담아내는 기법은 기존 홍콩 느와르 영화나 프룻챈 감독의 영상이 많이 떠오른다.

영화의 좋은 점들에 대해서는 여러 블로그들이 이미 열을 내며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거기다 더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간간이 보여지는 '작은' 장면들이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잠바의 시장에게 똥을 던진다던지, 아줌마들의 주책 때문에 큰 사고가 두 건이나 벌어진다던지 하는 장면... 공무원 (경찰 등)들의 일처리가 왜그리 속터지는지, 뛰고 또 뛰는 주인공 등등
감독이 사회적으로 꽤 할말은 많은 사람이란걸 느낄 수가 있었다...ㅎㅎㅎ 물론 동감도 하고...


붉은 십자가에 묻혀 버린 서울 외곽의 스카이 라인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망원동의 스카이라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서울의 밤을 보면 어두운 스카이라인에 빽빽이 박힌 붉은 십자가들을 보며 공동묘지와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영화에서 시체들은 집 앞 뜰에 묻혀 있지만 경찰들은 망원동의 산을 뒤짚어 엎는다. 하지만 이 장면 자체가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교회의 붉은 십자가에 의해 묻혀버린 시체의 도시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더군다나 더욱 각박해진 우리네 삶을 바라보며 일에 미쳐 돈에 미쳐 소비에 미쳐 꽥꽥되며 시계바늘 처럼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좀비와 별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밀도 높은 십자가의 박힘 속에 공동묘지에서 깨어나 일을 나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서울의 삶...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린이..구구절절 코드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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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점은 어린아이 캐릭터의 처리다. 개인적으로 많이 짜증나 했던 부분을 조금 완화시켜 준 것이라 상당히 주관적인 의견이긴 한데, 어린아이의 비중을 타 영화에 비해 상당히 낮춰주어 한결 나았다.

어린이라는 캐릭터를 빌미 삼아 그 지겨운 신파류의 질질짜기, 연민, 사랑 등의 구구절절한 코드를 억지로 끌어내는 장치가 다소 약했던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느슨한 후반부
이래저래 2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참 재밋게 즐긴 영화였다. 하지만 언제나 영화보고 대화를 나눌때 튀어나오는 말이지만 1시간 30분으로 줄여도 충분한 이야기...
엄중호-미진-미진의 딸의 삼각관계에 대한 트라이앵글 설정에 막혀 후반부에서 영화는 이 실타래를 푸느라 초반과 중반의 탄탄함을 다소 잃어버리는 듯 싶다
.
긴박감있게 잘 끌어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느슨해지고 좀 구구절절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기존의 타 영화들 보다는 훨씬 잘 풀어낸 듯 보인다.

하정우 캐릭터에 대한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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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정우의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다.
개인적 의견은 아니지만 상당히 동감하는게 '봉봉구리'짱의 의견에 따르면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모두 강한 모습을 보이는 살인마의 캐릭터가 조금 설득력을 잃은 듯 싶다.

영화가 전반적으로도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간간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처럼 살인마 지영민의 캐릭터 또한 조금 더 그것에 닮아 있더라면 했던게...

어쩔 수 없이 전형적인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보통 남성들은 여성에게 맘껏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여성 운전자에게) 하지만 같은 남성 특히 건장한 장정에게는 끽 소리 못하거나 위축을 당하기 쉽상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은 많이 없어졌겠지만 옛날 일터에서 동성(남성)에게 깨지고 와 집에 들어와서 마누라 패던 모습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할 수도 있다. (비약적으로 말하면)

또한 전형적으로 여성을 타겟으로한 남성 연쇄 살인마들의 특성을 보면 주로 여성에게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이지만 같은 동성인 남성에게는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인다. (마초들은 이 때 "이 기집애같은(ㅜㅜ) 새끼"라고 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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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자주 비교 당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의 살인마 캐릭터는 전제적으로 페미닌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 다소 야누스적인 측면이 떨어졌는데 [추격자]의 지영민은 (꼰대에게 열내는 거나 여형사에게 찝적거리는 장면은 있었긴 하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달라붙는 쌈닭으로 거듭나며 좀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야누스적 캐릭터를 잃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어쨋거나 저쨋거나 저예산/독립 영화판을 벗어나 대형간판을 건 상업영화에서도 이렇게 준 수작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 대는 한국 영화판에서 그런 빛을 보았을 때 기분은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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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Jacques Beineix [DIVA], 1981

90년대 국내 카페란 카페에는 죄다 걸어놓았던 베티 블루 포스터를 기억하는 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국내 영화팬들의 프랑스 사랑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피 마르소는 드봉 광고를 찍기도 했었고 이자벨 아자니, 쥴리엣 비노시 등 수많은 프랑스 여배우들도 큰 인기를 얻었었다.

암튼 국내에서 가장 팔린 영화 포스터라는 베티 블루의 감독인 쟝 자크 베네 감독의 걸작, [디바]

훗날 모든 헐리우드 영화의 추격씬의 교과서가 될 만큼 당시 볼 수 없었던 충격적이고 현란한 추격씬을 선보였다.

수많은 씨네필들을 오페라의 길로 빠져들게 했던 영화이기도...



지금 보기에는 그저 그럴 지 몰라도 이 영화가 나오기 이전 이런 추격씬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다.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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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다보니 간만에 극장서 돈주고 본 한국 영화에 대해 너무 매몰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우석훈 씨의 <88만원 세대>를 막 읽은 시점이라 영화와 88만원 세대와의 연결 고리가 생각나 몇 자 끄적여 본다.
분명 말하지만 이건 꿈보다 좋은 해몽이다..


<88만원 세대>라는 책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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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비판하는 자들은 대부분 너무나 유럽모델 지향적이어서 한국 실정에는 비현실적이다라는 이유를 들고 있는 걸 보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설사 그럴지라도 그런 간단한 이유 하나 때문에 이 책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

경영이 아닌 한국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눈높이를 낮추어 많은 세대로 하여금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지금 10,20대들이
"왜 나는 안되는가?" "이 노무 세상 좆같은 세상"을
하염 없이 외치지만 잡히지 않았던 이유의 뿌리를 알게 해준다 - 바로 시스템적 문제라는 것.

또한 기성 세대들에게는
"왜 내 자식은 이 모양 이 꼴인가?"
"사교육비는?" "부동산은?"이라는
생활적 어려움의 근본적 이유와 자식 세대와 겪는 격심한 세대 차이에 대해 이해를 도와 준다.

바로 상생을 위해 서로에게 손을 내밀자라는 사회적 합의를 유도하고 있는게 <88만원세대>가 말하는 것이다.

결국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결론과 느낌은 여타 사람들의 의견과 비슷한듯 싶다.
'재테크'에 미친 젊은이들이여 공부하자...
그것만이 다양성이 중요시 될 미래에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인문과 과학의 소양은 결국 흐름을 읽게 해주고 결국엔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있게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고 경제 경영 관념 다 때려 치라는게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열정이 '재테크'에만 쏠리고 있다는 것은 지적하고 싶다.

어쨋든 이런 이유들만으로도 <88만원세대> 현 지옥같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세대에게 꼭 꼭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88만원 세대>와 [더 게임] 무슨 연결 고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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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 포스팅에서도 부르짖었듯 잘만들긴 커녕 지루하다. 영상적으로나 내러티브적으로나 말 그대로 꽝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 그나마 옅게 녹아들어 있다. (그 옅음이 문제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회적인 이슈와 모습을 조금씩이나마 담으려는 의지가 있긴 하지만 너무나 미약하여 오히려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조그만 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예를 들어 사채 때문에 조폭들에게 협박받으며 간간이 꽃집으로 연명해 가는 신하균의 여자 친구 캐릭터가 그러하다.
그녀는 신하균에게 스타벅스 커피를 내밀며,
"오빠, 그래도 가끔은 이런 것 좀 마셔 줘야지"라고 한다.
된장녀 신드롬의 원산이었던 스타벅스를 영화 초반에 전면으로 내세우며 프랜차이징과 대 기업의 마케팅에 사로 잡힌 10,20대들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에이 ... 그래도 난 자판기 커피가 좋더라."
라는 신하균의 대사 한마디로 모든게 뭉뜽그려 진다.

된장녀라 부르짖으며 그녀들을 욕했던 (같이) 못 가진 마초 성향의 된장남들이 그래도 맞는 생각이라는 가난한하고 공허함 공감대만을 부르 짖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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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러한 '된장'을 여자 친구로 두고 있는 된장남들은 된장녀들을 욕하면서도 그저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라는 이유로 ,
 "그래, 그래도 넌 내 여자 친구니까...그래도 난 자판기 커피가 좋더라"며
나의 된장'녀'를 인정하고 끝까지 된장'남' 습성을 버리지 않고 그저 합리화 시켜 버린다.

이게 현실의 탁월한 묘사라면 묘사겠지만...
이러한 처리와 메시지는 그저 지금 10,20대들이 속해 있는 현실에서 그저 사랑 하나로 모든게 합리화시키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듯한 태도는 너무 공허하다 못해 더 위험하다.

더군다나 이렇게 민감한 이슈에 대한 영화의 미지근한 처리는 스타벅스 브랜드가 카메라에 잡힘과 동시에 스타벅스 스폰서 받은 PPL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된장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세대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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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변희봉과 신하균은 88만원세대에서 다루고 있는 세대 간의 대립과 꼭 같은 설정이다.

변희봉은 대표적으로 모든 부귀영화를 거머쥐고 사회의 시스템을 장악한 기성세대다. 바로 10대를 인질로 삼고 20대를 착취하는 악질적인 '꼰대'의 전형이며 기업과 정부라는 시스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신하균은 거리에서 초상화나 그리고 겨우겨우 삶을 연명해 가는 비정규직 20대다.

그리고 기성 세대의 20대 착취 현상의 메커니즘은 변희봉이 신하균에게 '그럴듯한' 게임을 제시하며 작동한다.
말 그대로 궁한 비정규직 20대 신하균 앞에 돈을 떡하니 내밀고 그를 게임을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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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서 돈은 어떤 의미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경제권을 주고 자식의 독립을 지체시키며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 세대의 부모들이며,
-10대 여성들한테까지 화장을 부추기며 그들의 부모의 지갑을 열게 만들 잔인한 마케팅을 펼치는 대기업이며,
-인문과 과학적 소양을 통한 다양성이 필수인 젊은 세대에게 재테크, 공무원 시험, 토플, 다단계를 부축이는 악질적이고 슬프디 슬픈 현재 대한민국 경제 시스템의 모습이다
.


결국 그렇게 힘없고 발언권 없는 불쌍한 비정규직 20대 신하균에게 펼쳐지는 건 무엇인가?
악랄한 정도로 이어지는 그 노동 착취는 바로 몸의 뒤바뀜에서 이루어 진다.
어쩌면 20대에게 가장 크고 유리하고 값진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음을 앗아간 것이다.
노인의 몸을 가진 20대는 그 부실한 육체적 고통과 그로 인한 거동의 힘듬을 이어받음으로서 개미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악질 경제 시스템의 먹이감의 우리에 갇혀진 완벽한 가축이 되어 버렸다.

아니, 이미 그나마 쓸만하던 육체까지 앗아같으니 가축보다 더 낮은 레벨이 되어버렸다. 쓸만한 것 없으니 그냥 버려지는 것이다.
그래도 경마들은 은퇴한 뒤 전원으로 돌아가 그나마 원만한 성생활만은 누린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을 착취하고 있는 기성세대가 그런 자비까지 베풀것 같은가?
그냥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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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인, 바로 패자부활전에 속하는 두 번째 게임의 승자는 결말을 보지 않아도 누가 될지 뻔하다.
경험, 지식, 권력, 경제력 이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서 나가 있는 기성세대에게 오늘 날 처럼 연약하고 심리적 고통 만이 가득 차 있는 20대는 잽도 안된다.
그저 남아 있던 핏골까지 뺴먹혀 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다음 세대에 대한 착취가 고 연령 세대를 맞이하고 있는 그들한테도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선 나 살고 보자 하며 그것을 깨달을 수록 오히려 더 착취현상만 심해질 것이다.
바로 그게 우리나라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며 얻지 못한 사회적 문화적 소양으로 인해 일어나는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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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의 마지막은 신하균이 공원에서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결국 게임에서 변희봉이 이기고 신하균의 대리 인생을 시작했다
-결국 승자는 기성세대이고 20대는 무참히 착취당하고 전사했다. (근데, 일말의 반항이나 있었는가?)
-결국 88만원 세대를 착취하여 얻은 이득으로 또 다른 화려한 실버 라이프를 즐기는 셈인데...
이러한 결말이 맞아 들어갈까? 여기서 영화는 스릴러의 마지막씬의 장치적 모방으로 인해 이런 문화적인 담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의도되었건 아니었건 간에 그렇다는 얘기다)
어쨋든 현실적으로 젊음을 다시 찾은 듯한 화려한 실버 라이프는 1차원적으로는 당연한 얘기다.
그만큼 부를 거머줬으니 이젠 즐기고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음 세대의 다양성과 실력, 경험 부재... 즉 그들의 바톤을 이어받을 다음 세대의 실종은 결국 시스템의 붕괴로 인해 함께 괴멸할 수 밖에 없다는 엄청난 재앙을 불고 올 것이다.

그래도 '선택'받은 대한 민국 2% 상류층은 나라 망해도 살아 남긴 할 것이다.. 말 그대로 '선택'받은 신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열받긴 해도 그들에게는 해당 안돼는 사항이다.

2. 모든건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
-신하균이 꾼 일종의 백일몽이었다는 결말이다.
아님 뭐 구운몽 정도로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면 되나?
어쨋든 덥썩 10만원을 거머쥔 비정규직 20대 신하균이 꾼 일종의 악몽이었다.
이러한 내러티브로도 기성세대의 20대의 착취 매커니즘은 똑 같이 설명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말이 다르니 결말에 대한 해석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결말이 이렇게 되도 상황은 밝지 않다.
한 달에 88만원이나 벌을까 말까한 20대 비정규직 신하균의 흔치 않을 재수 좋은 날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10만원은 저축으로 들어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힘든 삶을 겪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들어갈 것 같은 설정이 더 강하다.
저축은 없다.. 복권으로 당첨된 돈이 더 빨리 새어나가듯 자신의 규칙적 수입이 아닌 이 10만원은 신하균의 경제적 현실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그 10만원을 한 번에 소비해 버리며 소비에 대한 눈높이와 경험만 더 높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벤츠 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1000cc급 자동차타라면 타겠는가? 같은 이치다. 
그렇게 소비 패턴의 고급화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더 심화되고 들어 오는 족족 지갑을 열어대는 젊은 세대는 결국 경제권을 쥐고 있는 부모의 지갑을 열 것이며 그런 부모 조차 존재하지 않거나 그런 부모 조차 경제권이 흔들리면 그들의 삶의 괴리감은 더 커지기만 하고 불행한 삶만 살게 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잘 살고 있는 것 같고...
음식점, 편의점 알바를 하며 그들에게 버릇없이 구는 손님들 중 기성세대 보다는 그들의 또래에게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상대적 괴리감은 자신의 또래에게 창을 겨누게 만들고,
'선택' 받은 이들을 향한 심리적 상처와 분노 게이지는 높아진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적 사회로 돌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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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꿈 보다 좋은 해몽이었다.

88만원 세대의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영화에서 보여지는 작은 부분들이 있어 조금은 작위적으로 관계를 맺어 보았는데...

정말 아쉽다...
더 깊은 사유와 고찰을 가능케 하는 영화가 아니었다는게...

어쨋든 이번 설 연휴는 정말 여러모로 괴로운 설연휴가 될 것 같다.
현실적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괴리감이 이렇게 절정인 지금...

과연 새해 복 많이 받을 수 있을까?
새해에도 잘 살아 남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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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스케일의 나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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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7,8년 전인가 처음 중국에 가서 정말 숨막히는 경험을 했다.
그 놈의 넓은 땅덩어리에 수 많은 인간들 등...
미국과는 또 다른 차원과 느낌, 정말 말 그대로 Scale의 압박이 정말 대단했다.

아마 중국에 처음 간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명장도 이러한 맥락과 같이 한다.
명장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전쟁 씬은 시종일관 중국 특유의 스케일의 압박에 의해 정신은 멍해지는 느낌이다.

명장이 전체적인 영화를 두고는 그리 잘 만든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스케일'을 두고 하는 게임에 있어서는 중국을 넘을 만한 나라가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바로 그 면을 명장의 전투 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스케일에 인한 압박은 바로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며 처음 중국을 방문한 이들의 충격과 비슷한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로 표현 못한다.
이건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한다.



화려함과 강렬함이 배제된 색감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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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또 하나 색다른 면이 있다면 바로 색감과 분위기다.
중국 문화도 타 문화 못지 않게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문화로 큰 스케일에 오바스럽다고 까지 할 수 있는 화려함이 항상 더해진게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예를 들어 [패왕별회]나 몇 년 전 개봉했던 [황후화]를 떠올려보면 그 영화들이 스케일+화려함 속에 미학에 빠져들었던 생각이 난다. 또한 화려함의 하모니가 없다면 강한 색감도 돋보이는 것이 내가 느끼던 중국 영화의 특성이라면 특성이었다.

하지만 [명장]은 다르다.
분명 그 안에 스펙터클과 어떤 Sublime한 느낌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친숙한 색감의 화려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종일관 침체된 Saturate 청색톤의 색감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그 액션이 펼쳐지는 무대 또한 텅 비고 좁으며 답답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유덕화의 씬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Full Metal Jacket 풀 메탈 자켓]을 연상 시킬 정도다.

이것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주연 캐릭터의 설정이다.
이연걸은 전쟁에 패해 비겁하게 살아남은 장군이고 금성무와 유덕화는 산적이다.
어쨋든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나라의 병사로 거듭나고 새로운 성공, 즉 단순한 가족의 의무를 떠나 어지러운 세상을 다시 한번 뒤집어 엎는 대업을 실현 시켜 나가게 된다.

중요한 것이 그들의 태생과 신분 자체가 왕족이나 귀족도 아닌 것이 사회의 가장 밑 단에서 시작하여 장애물을 하나하나씩 쳐나가며 성장하는 것이 그런 어둡고 음침하며 고통스러운 색감과 분위기 연출과 잘 맞아들어간다...

마지막 난징을 점령하고 들어가는 이연걸의 씬을 보라... 얼마나 거대한 동시에 공허한가!

물론 그들의 마지막 또한 마찬가지다.

항상 밑 바닥의 삶과 부딪혀 온 그들에게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의미를 다지는 술파티를 할 만한 귀족의 여유란 없다. 그저 앞으로 처절하게 전진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영화의 색감과 분위기 연출은 탁월한 선택이 된다.


현대인의 처절한 삶의 녹아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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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바로 그 안에 담겨 있는 시대정신이다. 말은 거창하긴 하나... 별거 아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명장의 장면 장면들은 시대극으로서 옛날의 분위기를 느낀다기 보다는 지금 현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그것도 여러 장치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금성무가 적장의 목을 따고 하늘로 치켜 들고 표효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고 이라크를 떠올리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고 김선일씨 사태를 겪은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더 큰 아픔과 자극으로 다가온다.

또 하나는 출신과 처세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운명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점이다.
이건 비단 현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큰 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슬픈 운명이다.

중산층의 개념 뿌리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명장에서 보여지는 구슬픈 운명은 오래 전 무협/사극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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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은 그들이 만들어내고 결국 그들은 처단 당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

'선택'받은 자가 아닌 사람은 공을 세워도 결국은 위협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제거다.

뒤엎으려면 모든 걸 뒤엎어야 한다.

일정 한계 이상의 큰 일을 해냈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자기 윗사람이 있다면 윗사람을 처단해야 하고 자신이 완벽하고 새로운 기득권 자리에 올라야 한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처단해야 될 때는 처단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세상이 향해 가고 있는 게임의 법칙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라는 말은 약자의 투덜거림으로 비추어 질 것이다.


깨져버린 삼국지의 미학(스포일러 약간 있음)

세 명의 의형제 맺음은 삼국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떠올린다. 유,관,장이란 어떤 캐릭터들인가? 바로 의로 똘똘 뭉친 의의 대표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결국 치열한 삶의 기로는 전쟁터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돌아가는 음모라는 것을 까발리고 아주 오랜 동안 사랑받던 대의와 신의를 중요시하던 삼국지의 미학을 당당하게 깨버리고 개인의 삶과 사회는 무서운 게임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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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를 떠받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유비의 캐릭터를 대신한 듯한 이연걸의 대의는 그 진의성이 자신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패장이라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했고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떠한 대의를 떠받칠 만한 그릇도 작았다.
또한 전쟁터에서의 용병술을 겸비한 뛰어난 무장일지는 몰라도 처세술에서 만큼은 엉망인 소인배에 불과했다.

인간과 신의를 중요시 여기는 관우를 떠올리는 유덕화의 캐릭터는 어떠한가...
그의 무식할 정도로 강한 우직함에 의해 그는 조직내에서의 돌아가는 숨은 법칙을 어기고 제거 제 1대상이 되고 만다. 또한 군복을 입고 서있는 전직 산적의 그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선택'되지 못한 자의 신분상승 욕구와 만족감마저 느껴진다.
결국 관우가 오나라의해 처형 되었던 설정은 믿고 있던 제 형제에 의해 (나라의 어명이었지만) 무참히 살해된다는 설정으로 재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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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떠올리는 듯한 금성무는 어떠한가...
어설픈 대의와 보이지 않는 신분 상승 욕구의 가장 큰 피해자이다.
결국 장비처럼 복수를 외치며 칼을 들지만 그 칼은 오나라를 향한 것이 아닌 제 형제를 향한 것이었고 그는 그 무식함과 우직함이라는 '의'를 끝까지 따라간다.

마지막 제거되는 이연걸의 최후를 보고 현대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릴적 삼국지 연의에 눈물흘리며 보던 이들은 아마도 일궈 내지 못한 대의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기득권 세력에 분노했겠지만,
냉철한 삶의 게임을 펼쳐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아마도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그게 영화 [명장]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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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금성무는 연기 수업 좀 더 해야 겠다...
유덕화는 정말 많이 발전한 것 같은데... 명장에서의 금성무는 [인정 사정 볼 것 없다]의 장동건을 보는 느낌이었다.


뒷담...

중국이 영원한 저질 카피캣으로만 남진 않을 것이다
디자인계에서 중국은 후진국이며 카피를 일삼는 무도덕군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중국 문화 전체를 두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디자인은 디자인계 나름의 상업적 진화 속에 중국도  후발 주자로서 그러한 단계를 지나가는 것일게다. 우리나라디자인도 중국의 지금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 저것 베껴대는 카피캣의 습성을 아직도 떨궈 내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만 두고 저질이다 뭐라 하고 있기만 하면 금방 역전 될 것은 뻔하다.

디자인 얘기는 뒷전으로 두고..
사실상 중국 영화의 역사 자체는 그리 선진이라고도 할 수는 없다. 장예모 감독과 공리가 세계를 재패한 시절은 일종의 중국 영화의 거품의 시기였다.
그나마 홍콩의 느와르 영화들이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선전을 펼치긴 했지만 그것 또한 '한 때' 였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이 깊은 영화 역사를 가지지 못한 것이 중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실력이 떨어지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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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angelo Antonioni [Beyond the Clouds (Par Dela Les Nuage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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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로 인해 사실 상 원활한 인간의 의사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안토니오니 감독을 위해 빔 벤더스가 조감독을 하겠다고 참여한 과정자체가 감동적인 영화...(당시 안토니오니 감독은 Yes/No 정도의 의사 표현 정도가 가능했다고 한다)

옛날 안토니오니 감독이 끄적여 놓았던 단편 영화 시나리오들을 그 부인이 대신 창고에서 꺼내주어 태어나게 된.. 사실 상 장편으로서는 안토니오니 감독의 유작이 되어버린 영화..
그래서 그런지 왠지 감독의 지난 날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듯한 애절한 마음이 찡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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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ch Sequence

U2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말코비치와 소피 마르소의 비치 시퀀스 중 한 장면인데... 사실 말코비치가 좁은 골목을 통해 소피 마르소를 천천히 뒤쫓아 가는 장면이 더 압권이지만... 유튜브에 없다.ㅜ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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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렌느 쟈코브와 빙상 페레의 씬으로.... 정말 달콤쌉싸름한 마지막 장면 쟈코브의 한마디가 인상적이다...양심 상 스포일러는 올리지 않는 것이 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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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ire Denis  [J'ai pas sommeil (I Can't Sleep)]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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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하우스에서 이 영화를 본 순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두 번 밖에 상영을 하지 않아 첫회를 보고 당장 한번 더 보기로 마음 먹었었다..
거기다가 감독인 클레어 데니스가 와서 토론을 벌인다하여 들뜬 마음에 일주일을 기다려 다시 갔으나...
감독의 개인사정으로 토론회는 취소되었다는 절망적인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시 봐도 푹 빠져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걸작...

물론  오래 전 일이라 스토리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쨋든 욕망이란 어떻게 채워지는가...
자신이 바라는 최후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지만 부분적으로 욕망을 채울 수는 있다는 철학을 담고 붙잡을 수 없는, 형체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묘사한다...

물론 배경이건 설정이건 캐릭터건 침울하고 어둡고 비관적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그 사이키델릭한 몽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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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중간 스포일러 튀어 나옴 !


Roar!(Cloverfield Overture) by Michael Giacchino
(내가 좋아하는 트랙이 이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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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인가... 흥미로운 영화 프리뷰를 보았다.
"01.18.08"이란 날짜 표기만 붙어있던 이 프리뷰는 아무 정보 제공 없이 아주 짧은 핸드 핼드 영상만을 담고 있었다..

영화 제목이 먼가 열라 뒤져 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이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데... 클로버필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게 되어 기쁜 맘으로 극장을 찾았다.

고다르와의 연관성
이 영화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쟝 룩 고다르의 핸드 핼드 영상 기법이 생각 난다.. 비록 최초는 아니었지만 Breathless라는 영화를 통해 핸드핼드 카메라의 기법을 적극 수용하며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의 화려한 장을 열었다.
플러스,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올라오는 Drew Goddard라는 라이터의 이름을 보고 순간 쟝 룩 고다르와의 연관성을 떠올린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찾아본 결과 둘의 관계는 성만 똑같다는 것...ㅜㅜㅋ
TV 작가로 대표작으로는 Buffy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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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고다르 (쟝 룩)의 핸드 핼드 도입의 의미와 클로버필드의 핸드 핼드 의미는 그 시대정신 적 측면에 있어서 다르다. 누벨바그는 미쟝센이라는 공간적 제한이 있는 스튜디오 촬영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공간인 거리로 그 카메라를 옮김으로서 '자유'와 '리얼리티'라는 영화적 의미가 더 부여된 반면 클로버필드의 핸드 핼드는 UCC나 이미지, 미디어 사회라는 오늘 날의 시대적 현상의 의미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클로버필드가 첨부터 끝까지 핸드 핼드로 밀고 나가는 것 뿐만 아니라 잠시 잠시 보이는 테이프에 먼저 녹화되어 있던 롭과 베스의 영상, 일렉트로닉 전자 제품 가게 씬 등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진다.


블레어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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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안떠올릴래야 안떠올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블레어 위치]다.
어쩌면 블레어 위치의 Rip Off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내러티브를 풀어나가는 기법이 유사하다.
단지 상업 / 인디 영화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서도 그리 아류라고 부를 만큼 화가 나지도 않는다.
클로버필드는 클로버필드대로 상업영화의 장치 속에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



아쉬운 부분들
단지 아쉬운 점들이 눈에 많이 띄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1. 사랑이야기:
너무나 작위적이고 아무리 대중영화라곤 해도 이 부분에 너무 매달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 "I Love You"를 서로 외치며 마지막을 맞는 주인공들... 위험을 무릅쓰고 베스를 향해 달려가는 롭의 설정은 (거기다가 '작은 괴물'들도 그들의 길 앞에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짜증날 정도로 작위 적이다.

2. 괴물:
 너무 괴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것도 만든 이들로 하여금 굉장히 괴롭힌 부분이라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블레어 위치와 비교 되는 상황에서 괴물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그 미스테리어스함과 공포감을 최절정으로 끌어감에 대한 내러티브... 그 면에서 만큼은 어쩔 수 없이 블레어 위치를 벗어나고자 한 것 같다... 제작한 이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화가 나타내는 공포감과 몰입도의 저하를 초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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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쉬운 이야기 전개 : 전지 전능한 수퍼 캠코더
이건 핸드 핼드로 인한 영상의 흔들림을 참고 볼 수만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잘만든, 재미있는 오락 영화다. 하지만 끝으로 가면서 너무 빨리 모든 걸 정리해버리려는 부산함이 느껴진다.
어느 회사 제품인진 모르겠으나 7시간이 넘는 (중간에 플래시까지 키는데도 불구하고!) 촬영 타임을 소화해내는 최첨단 캠코더!!! (진짜 있다면 나도 사고 싶다)
위험한 순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스테디한 영상을 담아내는 아마츄어 카메라맨!!!
그 카메라 맨이 죽자 영화를 갑자기 끝낼 수 없어 베스와 카메라를 같이 집어 드는 롭!
헬기가 추락해도 살아나는 주인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이 살아남는 카메라!
이 카메라는 어떤 폭발과 추락에도 끄덕 없는 최고의,
불멸의 생명력을 가진 제품이다!!!
이하 등등... 초장에는 꽤 긴 러닝 타임을 괴물 침략 이전의 장면에 할애 하면서도 마지막을 이렇게 후다다닥 wrap up을 하니... 긴장감은 자연스레 낮아진다...
폭탄을 맞고 총을 맞고 쓰러지지 않는 괴물보다 더 질긴 건 바로 이 캠코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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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이런 몇몇 아쉬운 점을 제외하곤 정말 잘 즐긴 영화였다.
만약 [Them]이라는 영화처럼 러닝 타임을 차라리 1시간이나 50분 정도로 확 줄여서 더 인텐스하게 찍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핸드헬드 영상도 좀더 심하게 해주고...
(어쨋든 이렇게 극장에서 사람들이 중간에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영화는 첨 봤다.. 대부분이 40,50대 아저씨들이더라... 나이는 어쩔 수 없나보다,,,ㅜㅜㅋ)

영화의 백미! 사운드 트랙!
이 영화의 최고의 묘미를 뽑자면 나는 음악과 사운드를 뽑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아마도 "Oh My God~~~!" (오 마이 갓)이라는 대사일 것이다. 가끔 너무 많이 들려 짜증날 수도 있겠지만 캠코더가 잡아 주는 소리의 영역을 뛰어 넘어 지직거림과 들리는 이 비명 소리는 리얼리티를 십분 살려 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사운드 트랙은 요 근래 영화를 보면서 들어봤던 중 가장 최고였다.(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 이후로)
"두둥~~~"하며 무게감과 진동을 전하는 엠비언스가 가득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영화가 추구하는 상징성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걸작이다. (사운드 트랙의 구입을 심각히 고려하는 중이다)

결론은 흔들리는 영상만 참아 낼 수만 있다면 돈주고 극장에서 꼭 봐봄직한 영화다.
그리고 어딘가 2% 모자를다 싶으면 블레어 위치를 먼저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블레어 위치를 보고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여 죽는 줄 알았다.
나의 변태성의 표출인지는 모르겠으나...
공포영화를 봄에 있어 나름대로의 세팅이 있다.

보너스:
공포영화 재밋게 보는 방법
1.꼭 1,2시 즘의 새벽녘에만 볼 것이며,
2. 혼자 봐야 하며,
3. 불은 당연히 꺼야 하며,
4. 방에서 볼 경우, 문을 아주 살짝 열어 놓을 것이며 (영화를 보면서 계속 살짝 열린 문이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5. 창문에 커튼이 있을 경우 커튼을 끝만 살짝 열어 놓을 것이며,
6. 침대에서 시청하는 경우 발을 땅에 붙일 것이며 (그렘린을 생각해보면 된다)
7. 마지막으로 헤드폰을 낄 것...(이건 밖의 상황을 헤드폰 소리 떄문이 인지하지 못함으로서 공포감의 효과를 100배 올릴 수 있다.)

이 방법은 비단 공포 영화 뿐만 아니라 클로버 필드에도 잘 적용될 것 같다.
위의 방법으로 새벽의 저주, 링, 블레어 위치를 봤다가 난 죽는 줄 알았다...ㅜ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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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정사]로 소개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걸작 [L'Avventura].

모니카 비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영화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장면이 수두룩 하다.

건축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속 동선의 움직임이라던지 컴포지션은 정말 탁월하다...(거장이란...참...)

잊을 수 없는 몇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 모니카 비티가 마을에 혼자 남아 노골적인 타인들의 시선을 느끼는 장면이다.

영화 전체에서 표현되는 '알 수 없도록 결정 된 것 (미디어/사건 등)'에 대해 알려하는 부질 없는 노력... 그 정치적 경계선에서의 돌고 돌아 처음으로 되돌아 오는 소용돌이 같은 내러티브는 이 후 [Blow Up]에서 더 노골적으로 다루게 된다.




그녀가 모르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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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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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과 프레데터가 보여 주었던 폐쇄된 공간 안에서의 공포 그리고 숨바꼭질 같은 추적의 미학은 사라지고 완벽한 오락 영화로 탈 바꿈한 AVP 시리즈..
그리고 그 2탄...

역시 별 기대 없이 본지라 딱 그만큼 만의 오락을 보여주는 아주 '착한' 영화다.

그래도 그들은 이런 영화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깔고 간다.

대표적인게 에일리언의 침입은 테러리스트의 뜻하지 않은 공격을 연상시킨다.

어쨋든 젤 볼만했던 건 다짜고짜 핵으로 도시를 밀어버리는 고위층들...ㅍㅎ~!

항상 영화들을 볼 때 공화당 쪽 군부 고위층을 풍자하는 씬에서 전시 비슷한 상황에서 참모급 5스타들은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한다... "Nuke'm"---핵으로 밀어버리겠습니다!

정말 핵은 군인의 로망인지 전쟁의 로망인지....
그들의 로망인 듯 착각이 들만큼 핵의 전지전능한 파워를 페티사이즈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묘사,
단-무-지 (단순-무식-지랄)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뭐 별 다섯개나 잡수신 모든 분들이 그러겠냐마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들의 풍자적 이미지는 그런 거란 것... ㅎㅎㅎ

에일리언도 프레데터도 핵에 쓸려가버리는 ----  핵위 위력이여.....

어쨋든 돈 7000원 주고 극장에서 볼만한 영활까?
정말 심신이 허하다면 돈주고 봐도 괜찮을 듯...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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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관람 후 할말이 별로 많지 않은 영화를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재킷은 시간이동과 폐쇠된 공간 안에서의 설정의 공식을 아주 잘 따른 영화다.
고로 못만든 영화가 아니라 공식을 잘 따른 '잘 만든' 영화다.

하지만 새롭지도 않고 진부하여 할말이 없는 영화다.

이러한 소재가 인디 영화 속에서만 나도는게 아니고 [나비효과] (시간이동)와 [소우] 혹은 [본] 시리즈 (폐쇠 공간) 등의 대형 블럭버스터에서 충분히 다뤄졌고 관객들도 그에 많이 길들여진 이상 전혀 새로울게 없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영화 나름의 잘 짜여진 내러티브 속 캐릭터들끼리의 관계정도만이 영화가 끝날 때 즘 경찰관 살인범을 알으켜 줌으로서 '아하~' 식의 아주 작은 보상을 준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그렇다. 많은 이들이 눈치 챘겠지만 경찰관의 살해범은 바로 매켄지다.
007 주연급의 배우가 왜 이리도 비중없는 캐릭터였을까 하는 의문은 여기서 해결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 애드리안 브로디가 뇌진탕으로 쓰러질 때 매켄지가 창문을 통해 보며 손가락에 끼고 있는 녹색 노끈은 브로디의 편지의 모놀로그 장면에서 경찰관 살해범이 바에 앉아 녹색 노끈을 돌리고 있는 장면을 삽입하며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

얼굴이야 많이 변했지만 시체실에서 쳐박혀 있던 동안 매켄지도 시간 이동을 했고 빌어먹게도 브로디를 만나 그의 인생을 저주로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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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안 브로디는 역시 불쌍한 연기에 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카이라 나이틀리...
그녀의 입모양새는 왜 항상 그리 삐뚤어져 있는지...
매력이긴 하다...
하지만 뭔지모를 대형 영화에 출연하며 어딘가 속세에 많이 찌들은 느낌이 나는건..
[Bend it Like Beckham]에서의 그 풋풋했던 모습은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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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Avery [Killing Zoe],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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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의 감독의 영화들에 항상 붙어다니는 이름이 하나 있다. 타란티노가 영화 긱(Geek)이였던 시절 죽이 잘 맞던 친구였던 로져 에버리.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과 트루 로맨스의 스크립트 작업에 부분적으로 참여 했고 펄프픽션의 스토리를 쓴 장본인이다.
킬링 조이는 프랑스 간판 배우인 쟝 위그 앙글라드와 쥴리 델피 그리고 에릭 스톨츠가 출연하는 B-급 느와르 영화다. 단지 컬러로 만들어졌을 뿐...  타란티노의 연출이 촐싹맞다고 느껴지는 이들에게 진정한 한방을 선사해줄 명작이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지만 오프닝 씬만 파리에서 찍었을 뿐 모두 로스엔젤레스 로케이션 촬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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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자신이 속해 있던 세대에 대한 극한의 예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비록 세상을 더 밝게 만들려는 희망에 찬 낙관 주의자들도 존재하지만 당시 에버리에게 90년대의 세대는 병들은 문화에 찌들은 세대였고 그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극단의 폭력성을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비록 LA 로케 촬영이었지만 파리를 표방한 설정과 느와르 그리고 블랙 코미디의 전개는 그 옛날 느와르 영화의 고향이었던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느와르 영화들에 대한 오마쥬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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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마켓의 거대한 유리입구는 미디어에 노출된 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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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미스트 포스팅에 이어 이건 또 다른 생각을 해봤다.
생각이라기 보다는 워낙 영화가 메타포 투성인지라 그만큼 할 말도 많아서 어제 밥먹다가 나누던 얘기 중 흥미로운 관점이 튀어나왔었다..

바로 영화가 미디어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
바로 수퍼마켓의 큰 창문을 바로 TV화면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
그리고 왜곡된 현실에 좌지우지되는 우리같이 우매하고 불쌍한 대중의 군상을 보여주었다는 것...

요컨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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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개=알수 없는 현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는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현실들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서만 그 현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현실은 관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결국 우리는 어떠한 사고를 당했어도 그 사고 자체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사고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고로 현실은 알 방법이 없을 뿐더러 현실에 대한 앎은 전적으로 미디어의 관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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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퍼마켓의 유리 = TV 화면 (혹은 미디어 매체)
-가장 간단히 말해 TV일 뿐이다. 어떠한 미디어 매체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TV처럼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괴물이 쉽게 부셔버릴 수 있는 유리...유리는 약하다... 깨지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혹은 그것이 현실로부터 우리를 '막고' 있다.
이것을 미디어 매체라고 생각한다면 수퍼마켓의 입구가 유리에 쌓여 있다는 것은 엄청난 미디어 매체에 노출된 현대 대중을 의미하고 있음이 설명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지만 현실에 대해 손을 뻗칠 수 없다.
미디어의 보호를 내던지고 현실로 나간다는 것은 괴물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다는 엄청난 위험이며 도박이며 결국은 ... '안전한' 공동체를 뒤흔드는 배신행위까지 될수도 있다.
현실의 입구인 수퍼마켓 매장의 입구와 반대로 마켓의 뒷편엔 무엇이 있는가?
창고가 있다. 단단한 셔터로 잠겨진 그곳은 현실의 저 편에 자리한 막다른 곳이다.
그곳에는 현실도 없을 뿐더러 미디어가 손을 뻗칠 필요도 없는 전형적인 비주류의 공간이다.

TV를 보지 않고는 사회생활 원만히 하기 힘들다.
왜냐면 모두 TV를 보니 TV얘기 뿐이다.
드라마에 빠져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고,
오락프로그램에 빠져 힘든 하루와 일주일의 보상을 받고,
뉴스를 통해 왜곡된 현실을 바라보고,
르뽀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큰 손'들이 원하는 곳을 향해 웃거나, 울거나 , 화낸다
.
일주일에 5시간을 훨씬 넘게 TV 앞에 앉아 있는 현대인은 자신들이 얼마나 세뇌당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을 원만한 삶의 방식으로 정당화 시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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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독교 아줌마 = 미디어의 선동/세뇌 장치

-사람들을 극장에서 박수치게 까지 만들었던 이 기독교 아줌마의 짜증남의 설정은 비단 종교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싶다. (더군다나 이 영화처럼 절대 집약적이고 복합적인 메타포가 혼재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의심해 볼만하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선동적 성격을 통해 거시적으로는 미디어라는 선동 장치에 대해 더 이야기 하고 싶었던 듯 하다.
앞서 말했듯... 안개라는 보이지 않는 현실, 그리고 유리라는 미디어 매체, 그리고 바로 이 기독교 아줌마를 통해 미디어가 어떻게 매체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가에 대한 장치의 작동 그리고 그에 쉽게 영향 받는 대중들의 우매한 모습이 담겨 있다.

1920년대 즈음 미국은 자본주의를 통한 정복을 위해 (선동)'프로파간다'의 개념을 확고히 다진다.
그리고 40년대 2차대전 시 히틀러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프로파간다라는 단어 자체는 사라지거나 불순한 성격을 가지게 되지만 어느새 '홍보' '마케팅'이라는 그럴싸한 경제 용어로 탈바꿈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아주 정당하고 엘리트적인 방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업체의 광고다..
간단히 주위를 살펴보라,
홈쇼핑 광고에 홀딱해 서슴없이 자신의 지갑을 열어 재끼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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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원작 영화?
-정말 안좋아한다..
하난가 두 개 정도 뺴고 정말 하나도 재미없었다...

쇼생크 리뎀션의 감독? 
-omg! 그 영화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포스터를 보니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안개 앞에 서있네? 
-뻔한 "헐리우드식 가족주의"에  "아버지=영웅"이라는 가부장적 코드가 달린 뻔한 액션 영화겠군!

-그래 걍 기분도 꿀꿀한데 액션 영화나 보는 셈치고 속고 보자라고 본 영화...


뚜껑을 열어보니 왠일 인걸?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70년대 뉴 어메리칸 시네마 이후 헐리우드 상업 영화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온 영화 중 가장 통쾌하고 신선했다...(적어도 나한테는)


스포일러에 앞서 크게 요약하면 3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1. 영화적 의미 - Convention을 깨다
진저리 날정도로 짜증나고 열뻗치는 뻔한 가족주의와 기독교 코드를 헐리우드 상업 영화라는 영역 안에서 파괴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값지다

2. 안개의 심리적/문화적 메타포 - 제한된 상황
안개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제한 된 상황 속에서 결여 되는 인간의 판단력, 믿음, 경험 등 심리적인 층면부터 집단 광기 등을 통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측면까지 살펴보고 있다. (물론 sarcastic 하지만 통찰력있다)

3.  안개의 정치적 메타포 - 수퍼마켓=미국사회
안개라는 메타포는 정치적으로도 풀이 될 수 있다. 죠지 로메로의 Dawn of the Dead를 떠올리는 듯한 배경 설정으로 수퍼마켓의 사람들은 일종의 전체 미국 사회 국민들의 집약적 형태며 안개는 대선을 (꼭 대선이 아니더라도) 앞두고 한치 앞도 모를 국가와 사회의 운명적 배경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스포일러가 섞일 수도 있는 영화 감상 평



소비주의 사회의 상징, 좀비 그리고 로메로 감독의 유산!
죠지 로메로 감독은 약 30여년 동안 4편인간의 "***of the Dead" 좀비 시리즈를 통해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 안에 좀비들은 물론 현대 인간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고 그 좀비들 또한 시대에 맞추어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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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 of the Living Dead에서 현대 인간의 좀비화를 눈치챘다면
-Dawn of the Dead에서는 동이 터오르듯 그 모습을 들어내는 좀비사회의 여명을 다루고
-Day of the Dead에서는 말 그대로 소비사회의 좀비의 날이 도래함을 알렸다. 
-Land of the Dead에서 그 좀비들이 결국 세상을 완벽히 지배하게 되고 나름대로 진화했음을 알렸다.
-2008년 신작인  Diary of the Dead는 아직 못봤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씨네마 베리테적인 형식으로 현대 소비주의 사회를 드라이하게 펼쳐놓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좀비들이 드디어 미디어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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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제일 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에 치달은 지금 사회에 다시금 좀비 영화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메로 감독은 지금 (조금 늦은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대중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고 고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서 로메로 감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미스트]가 좀비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메로 감독의 설정 메타포를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다. 새벽의 저주의 배경이 소비주의의 상징인 쇼핑몰인 것 처럼 미스트의 배경 또한 수퍼마켓이다. (의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거기다가 색감 또한 엄청 비슷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수퍼마켓은 미국 사회를 묘사한 집약적 설정
어쨋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모든 사람이 이 곳을 대피한다. 그리고 이 곳에는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는 곧 미국이라는 소비주의 사회의 국민을 집약시켜 놓은 메타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캐릭터들을 살펴볼 때 미국 사회라는 조직적 체계를 이루는 대표적인 요소들이 이곳 저곳 존대한다.
예를 들어,

-신앙(기독교적 믿음): 미국은 절대적인 크리스챤의 나라이며 아직도 미국인의 과반수 이상이 진화론을 거부하고 (혹은 알지도 못하고) 인간은 하느님이 만든 산물이라 믿고 있다...(통계에 따른 사실이다)
 
-과학: 신앙과 가장 대치되는 상징적 요소다. 과학은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인 사고를 요한다.  이 또한 과학 선진국인 미국의 핵심 중추역할을 한다.

-애국: 이 영화에서 나온 노인들은 아마도 세계 대전 혹은 베트남전이라도 겪은 이들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노인들은 맹목적인 애국심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젊은 군인들은 이라크 참전의 코드가 들어있다.

-가족: 미국의 정치/자본주의 시스템은 모순적이게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파탄 시키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의무감은 미디어나 영화를 통해 해소된다.


믿음이고 합리고 이성이고 나발이고 다  X까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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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였건 이러저러한 나름대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뿌리같은 요인들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불안정하다.
바로 '안개' 때문이다.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그것은 사람의 판단력과 의지를 떨어뜨리고 때로는 극단의 공포심을 유발한다. 바로 이 안개라는 장치에 의해 이성이고 나발이고 모두 붕괴 된다...
적나라하게 벗겨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전염병처럼 퍼져가는 공포감에 의해 성경을 손에 쥐고 심판의 날을 부르짖는 기독교 신자 밑에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 든다.
이성적 판단의 무리들은 아마도 그들이 '희생의 제물'의 카드를 가지고 나올 것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될것이라 예상한다. --참 이성적인 판단이다 ^^ㅋ

여기서 여주인공은 우리는 성숙한 '문명임'이며 '문화인'임을 외치며 인간은 인간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 본성의 담론까지 들고 나온다. (정말 많은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 문명이라는 것, 문화라는 것... 이 상황에서는 아직까지 공포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지막 체면에 불구하다.... 허울일 뿐이다...

식당에서 에티켓 없이 우적우적 밥을 먹고 식사 후 찍찍 쯥쯥 소리내며 이빨에 낀 음식물 제거하는 인간들이며 에티켓을 지키며 입 안벌리고 소리 없이 오물오물 식사하고 고고하고 세련되게 카페오레를 즐기는 '지성인'들이며 전쟁이라도 터지면 똑같은 처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보라 합리적 지성인의 판단을 앞세우던 그들마저 결국 가족을 죽여버리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며 똑같은 인간임을 증명했다.

닥친 현실을 앞에다 두고 아직도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꽉막힘'으로 자신의 논지만을 앞세우는 지성인이건 종교인이건 과학자건 정차가건 이런 상황에서는 암적이고 시한 폭탄 같은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헐리우드 세뇌의 장치, 가족주의와 맞딱뜨리다!

영화는 이 사회의 주요 구성 요소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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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심에 꽉꽉차고 윗 사람 우습게 보는 젊은이를 제일 먼저 괴물의 밥으로 보내주고,
자격지심과 사회적인 박탈감에 꽉찬 노동자 계층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무식함'에 대한 죄를 심고,
약을 먹고 죽은 할머니를 통해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현대 사회인의 모습을 축약하고,
사회계층의 윗 레벨인 변호사 무리도 시원하게 찢어죽여 주고,  
짜증이 날 정도로 설교해대던 종교인에게 총알 두 방을 날려주고,


대탈출의 미션에 몇몇 남은 주인공 무리들을 남겨 둔다.
그리고 아주 기가막히게 마지막 마켓 매니져를 과정에서 제거함으로서 정말 정말 기가 막히게 '가족의 구성원'을 만든다...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자식"
마지막 대단원인 헐리우드 식 '가족주의'의 단계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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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은 '가족 레저 차량'인 SUV를 타고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 나간다...
과연 영화는 뻔한 헐리우드 식의 결말로 치닫는가?
절대 아니다...
설마 설마 하는데...
기름이 멈추어버린 절망 앞에서 그들은 모든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린다.
미디어와 역사가, 정치가들이 그토록 떠들어 대는 American Dream, Americanism을 가능케 했던 그 핵심 요소가 제거된 것이다.
그리고 지성인이며 문명인임을 자처하던 그들은 그 안개 속에서 유발된 절망감에 손을 들고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탕탕탕탕 총알 4발에 가족주의는 완전히 붕괴된다..
아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가족이라는 굴레/속박/족쇠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법적 결혼제도와 가족이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장치이며 짐이다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물론 가족을 내팽게 치라는 말은 아니다.. 순응을 요구하는 체제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 뿐...))

그리고 서서히 안개는 거친다...
두두두두둥....
수퍼마켓에서 아들이 군인 무리에게 언제 당신 친구들이 탱크몰고 오느냐에 대한 물음이 현실화되어 돌아왔다... 그것도 사람들이 죽은 몇 분 후에...
미국과 헐리우드의 모든 세뇌 공식의 장치들이 산산조각이 나는 장엄한 순간이다!

이 부분은 정말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블랙 코미디적으로 받아들여 시원하고 통쾌하게 헐리우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웃어줄 것인가?
아니면 주인공들과 함께 안개에 쌓여 흐려지고 와해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다시 돌아오며 인간의 심리적이고 나약한 모습에 혀를 내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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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영화의 장족의 발전-족쇄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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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이런 현실에 대한 직시에 대한 흐름은 요즘 헐리우드 대작들을 연출하는 신진세력들에게서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전설이다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부분 영화의 1/3~2/3 가량을 자신의 연출력으로 화려하게 수 놓고 1/3정인 클라이맥스와 결말 부분은 헐리우드의 공식을 '따라주는' 접점 찾기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어찌하였건 이것은 70년대 말 세계 영화의 질적인 수준을 상당하게 낮추어준 [죠스]와 [스타워즈]의 출연 이후 헐리우드라는 시스템 속의 장족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의 이런 흐름 (완벽하진 않아도 부분적으로는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만들어보고자 하는)의 시작은 한 10여년 전 즘 부터 시작된 인디 거장들의 헐리우드 진출이 기점이 아니었나 싶다. 스티븐 소더버그, 브라이언 드 팔마등과 같이 그 옛날 인디 영화계의 영웅들과 예술 영화의 거장들의 어쩔 수 없는 '역량' 덕분에 이러한 흐름의 물고를 튼 것이 아닌가 한다.



영화의 백미 - 어? 크리스토퍼 람베르 아냐? 에밀리 왓슨 아냐?

이 영화를 보는 재미는 또 하나 있다...  바로 출연진들의 모습이다..
다 어디서 한번 본 듯한 모습들... 그러나 다 그들이 아니다..
기독교 교주는 파도를 가르며의 에이미 와슨같고 남자 주인공은 크리스토퍼 람베르 같고...
이것도 치밀한 설정인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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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의 Happily Ever After는 돈으로 완성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누던 중 현대 일본 젊은 여성들이 저축을 하지 않는 현상이 오고갔다. 그녀들의 머릿 속에 저축 개념이 들어있지 않다기 보다는 오히려 '투자'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거이다. 돈이 제일인 세상에서 그녀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젊음 동안 유지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빛을 내서라도 헤르메스, 샤넬 등의 고가 브랜드로 치장을 하고 성형, 미용등을 통해 자신을 가꾸어 남자를 '채'는 것. 분명 이것은 된장짓이라던지 머리가 비었다던지라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욕만할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그녀들이 양육강식 그리고 돈 제일 주의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일종의 방식이며 싸움이다. 소비주의 사회 안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 분명 이것은 일본 뿐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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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한 마디로 요즘 세상에서 Happily Ever After로 살고 싶다면 돈밖에 없다는 아주 씁슬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근 몇 년동안 재패니메이션을 제외하고 세계 만화시장 지존의 위치에서 군림한 월트 디즈니를 향한 공략이 거세게 몰아 붙었었다.
대표적인 예가 [슈렉]시리즈로 월트 디즈니의 간판인 '영원한 행복의 나라' 타이틀을 전면으로 부정하며 아름답고 멋지기만 동화 속 캐릭터들을 괴물로 바꾸어 놓고 조롱과 풍자의 요소를 통해 멋지게 관점을 흔들어 놓았다.

드디어 디즈니도 참기만 할 수는 없다였나...
그들 또한 전면으로 Happily Ever After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들고 맞대응에 나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오는 괴물은 분명 슈렉을 상징하고 있고... 그림체 또한 정말 '대충' 그려놓았다.

디즈니는 풍자 등을 통한 현실 세계의 적나라한 반영이라는  요즘 나오는 만화영화들의 트렌드를 그대로 따라간다. 아니 혹은 그것을 더 뛰어 넘어 진정한 '세뇌'의 달인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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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소비주의 사회를 향한 찬양 (풍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절대 조롱은 아니다)은 이미 확고한 엔터테인트먼트적 요소로 무장하고 관객에게 다시 한번 디즈니식 꿈과 사랑의 메시지를 선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달 디즈니의 영화를 전면 부정한 것도 아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주옥 같은 주인공들의 메타포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또한 이 영화의 백미인 센트럴 파크 뮤지컬 씬은 직접적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연상케 하며 미국인 (혹은 미국화된 전 세계인)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가족주의...
홀로 사는 아버지와 딸의 이빨 빠진 가족 구성을 지젤 공주가 멋지게 아주 환상적으로 끼워 맞추며 동화와 현실의 괴리감을 없에고 새로운 소비주의 사회 안에서의 내러티브를 마감한다.

또 얘기가 길어진다. 기억에 남는 몇 장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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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역으로 나오는 패트릭 댐시는 역시 잘나가는 변호사다. 어머니의 부재 즉 불안정한 가족이라는 미국 가정의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는 것 뺴면 뉴욕의 비싼 아파트에 살며 돈 잘벌고 젠틀하고 착하기 까지 한 완벽한 여피 아저씨의 모습이다. 거기다가 지젤이 가장 처음 뉴욕에서 만나는 젠틀맨이기도 하다. 첫 장면에서 누추하고 가난한 거렁뱅이 할아버지에게 머리띠를 빼앗기며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외쳐대는 장면과 비교된다. 만약 설정이 서민층이거나 돈 없는 가정의 아버지를 지젤이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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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시의 딸... 어머니가 없는 관계로 학교 생활도 부적응으로 힘든 설정이다. 지젤을 만나며 새로운 가족애에 대해 눈뜬다. 하지만 이 어린이야 말로 돈의 절대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무도회 의상에 걱정하는 지젤은 말한다..."날 도와줄 요정도 없어..." 여기서 딸은 명언 한마디 남긴다...
"요정보다 더 좋은게 있어요.." 하며 서랍 속의 비상용 신용카드를 꺼낸다. 그것도 골드 카드다.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미용실에서 미용을 받으며 지젤에게 한마디 던진다..
"이게 엄마랑 쇼핑하는 기분인가요?"
그렇다...
엄마와 딸이 쇼핑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기 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넉넉한 돈이 있음으로서 모녀 관계에 대한 애정이 더 풍족해질 수 있다는 부분은 좀 씁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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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 동화 속의 순수한 공주...
그녀는 "열받어"라는 단어도 모를 만큼 행복의 상징이다.
댐시와 사랑에 빠져 왕자와 함께 안달루시아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한다.
이유는 사랑 뿐만이 아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돈 맛을 조금씩 알아간 그녀는 이 욕망과 탐욕의 생활에 눈을 뜬 것이다.
돈 맛을 알아버린 이상 풍족한 생활도 보장 되었는데... 동화의 나라까지 돌아갈 필요 없다.
돈 만 있으면 이 곳은 천국이다.
그녀의 특기인 옷만들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롤리타 풍의 옷가게를 열고 한 가족으로서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물들은 그녀를 도와 열심히 옷을 만들고 있다.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더라도 그녀의 옷가게 성공 덕분에 댐시는 바쁜 변호사 일 때려치고 '좋은' 가정적인 아버지의 생활을 할 것이며 그녀의 눈에는 하트 대신 달러가 켜질 것이다.
앞으로 생겨날 노동자들인 동물들의 '착취' 또한 눈에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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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왕자...
역시 전통적으로 디즈니 영화에서도 마지막에 공주를 구출한다는 것 뺴고는 왕자라는 캐릭터는 그다지 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소비사회에서 잘 나가는 현실의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 이상 그의 캐릭터는  더더욱 힘을 잃고 필요 없어진다.
그는 돈이고 나발이고 그냥 동화나라로 돌아가고픈 철 들지 않은 순둥이일 뿐이다. 그는 행목하게만 자란 마마보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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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기서도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이 나타난다. 바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커리어 우먼들이다.
킹콩을 패러디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도 빌딩탑으로 끌려올라가는건 여자가 아닌 남자다. 그리고 여성인 지젤이 칼을 뽑아들고 그를 구출한다.
왕자의 어머니 또한 여성 캐릭터로서 영화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지녔다.
낸시 또한 댐시에게 버림 받지만 왕자를 차지하고 먼저 선 키스를 날린다.
마지막으로 지젤은 옷가게의 디자이너로서 어엿한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린다.
역시 돈지랄판이다.

그다지 이런 소비주의 성향의 세뇌적인 측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영화는 굉장히 즐길만한 요소를 많이 제공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어린이들을 볼 때 어른들보다도 돈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성장할지를 생각한다면...
어느 한 측면에서는 얘가 어릴 때부터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겠구나 안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잃어버릴 순수함은 누가 책임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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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얘기는 이정도로 하고,
어쨋든 이 영화의 최고 백미는 단연 칩몽크다. (줄다람쥐)
CG도 깜쪽같고 영화에서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영화의 최고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듯 옷걸이에 십자가 형태로 매달려 칩몽크 특유의 소리를 내며 낑낑대는 장면이다...
보고 뒤집어 지는 줄 알았따....^^ㅋ





That's How You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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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Luc Godard  [Masculine, Femi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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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뉴웨이브의 선구자인 고다르 감독의 알파빌 이후 만든 1966년 작.
하도 옛날에 봐서 스토리는 다 까먹었지만 그 감정과 느낌만은 아직도 강렬히 남아 있는 영화

"오늘 날 프랑스의 젊은이들과 섹스"라는 캐치 타이틀을 걸고 고다르는 이 영화를 소개함에 있어 전 세계 중산층 문화를 정의 내린 코카콜라와 사회주의 이념의 칼 마르크스의 아이들에 관한 영화라고 한다 . (1968년 학생 운동이 일어나기 몇 년전을 배경으로 60년대 중반 프랑스의 시대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미국의 팝 문화에 대한 임팩트를 다룸으로서 영화 속 장면 들 또한 신선하고 패셔너블하다. 그런만큼 로맨스와 섹스 그리고 팝에 빠진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성격을 그린다.

이러저러한 역사적 배경을 따지지 않더라도 패션이나 디자인 등 감각적인 면만을 찾는 이에게도 권하고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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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포의 페르소나였던 장 삐에르 뤼드와 샹탈 고야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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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적으로 [오메가맨 Omega Man]을 엄청 좋아했던 까닭에 더 많이 기다려졌던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뚜껑을 열어보니 핵심적인 부분에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주인공의 인종이 바뀌었다 부분이 있지만 이건 뭐... 넘어가기로 하고...

[오메가맨]에서는 종교, 이념 대립 등의 체제적/사회적 문제가 크게 대두된 반면에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보다 인간의 고독과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측면이 대두되고 있다.

로져 무어 감독의 [보울링 포 컬럼바인] 이후로 이미지 꽝이 되버린 Mr.Heston 찰튼 헤스턴은 꽤나 로맨티스트로 그려진다. 그도 윌 스미스 처럼 고독감과 절망감을 가지고 있으나 윌 스미스의 아우라에는 현저히 못 미친다. 오히려 일요일마다 쌔끈(?---톰 존스를 떠올리는)한 의상을 하고 만찬을 먹으며 시져와 체스 한판을 두는 낭만주의자다.

그 반면 윌 스미스는 정신적으로 상처입고 두려움과 고독감에 휩싸인 정신분열적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모습은 누군가 말했듯 강아지를 껴안고 욕조 안에서 잠든 그의 모습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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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져 조각상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던 헤스턴과는 달리 윌 스미스에게는 영원한 인간의 동반자인 강아지가 따르고 있다. 더군다나 암컷 쉐퍼드인 샘 (사만다의 애칭)은 윌스미스에게 동반자이자 어미의 역할까지 떠맡고 있다.
따라서 [오메가 맨]에서 찰튼 헤스턴이 여자를 만나 사랑을 키우게 되는 연인 관계라는 설정이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딸/애인/부인/어머니의 4요소를 가진 샘이라는 장치에 의해 불필요해 진다 (혹은 대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족주의라는 헐리우드 영화의 고질적 설정을 충족시켜 줌과 동시에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파고 들 수 있는 문을 만들어 준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음악이다.
밥 말리의 레게 음악을 통해 사랑으로 하나되는 세계에 대해 윌 스미스는 논한다. 현대인의 정신 분열적 심리 상태에 가까운 윌 스미스 버젼이 택한 음악이 저항의 음악이 레게라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하지만 찰튼 헤스턴 버젼은 재지한 라운지 음악으로 그의 낭만주의적 분위기를 한층 돋군다. 개인적 심리 분열 상태 보다는 체제와 이념 대립의 성격이 강한 헤스턴 버젼이 라운지 형태의 음악을 선택하다니...
오히려 이론 상으로는 이 부분이 뒤바뀌어야 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모순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워 지며 딱히 영화를 망쳐 놓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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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돌연변이들의 설정...
오메가 맨에서는 일종의 총체적 사회집단 체제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말도 할 줄 알며 한편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영화의 처음에서 보여지는 히피 영화 씬의 히피족의 어떠한 체제적 완성 형태를 언급하는 것 같아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는게 흠이라면 흠이다...

어찌하였건 나는 전설이다의 돌연변이들은 좀비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것도 [28일 후]에서 엿볼 수 있는 강하고 민첩한 포스트-좀비의 형태다. 윌 스미스가 현대인의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만큼 현대인의 심볼이라는 뿌리를 밖은 '좀비' 자체의 설정은 괜찮은 듯 싶다. 더군다나 소비주의 사회에 이르러 현대인의 메타포가 벰파이어 흡혈귀에서 죠지 로메로의 좀비로 이동한 만큼 뱀파이어의 숙적인 늑대인간의 요소를 좀비에 첨가한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찌하였건 좀더 돌연변이들의 묘사가 액션씬을 위한 부가장치로 많이 치우쳐져 있다는 점은 지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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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며 요즘 헐리우드 영화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현상이 있다.
헐리우드의 고질적 문제는 영화의 2/3 정도의 시점에서 맥이 탁 풀리는 현상에 있다. 이 현상이 요즘은 극으로 치닫는 듯하다. 이 문제는 아마도 헐리우드 영화의 필수 요소인 '가족주의'와 '기독교'의 강제적 장치 때문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옛날 일본 핑크 영화가 섹스와 폭력이라는 요소만 집어 넣으면 감독의 자유성이 어느정도 보장 되었던 것 처럼 헐리우드에서도 이 요소들을 충족시켜 주면 옛날보다는 감독의 자유가 많이 보장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충돌이 감독의 연출이 어디서부턴가 힘을 현저히 잃어버린다는 느낌이 여러 영화들에서 속출하고 있다.

[나는 전설이다]의 경우 처음부터 강아지 샘이 죽는 장면까지가 아마도 최고의 부분이자 감독의 순수한 연출력의 결정체 인 듯 싶다. 새로운 인간들을 발견하며부터 가족주의와 신의 존재라는 장치가 노골적으로 부각되며 영화는 힘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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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지나면서 지난 일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것이 인간 문화의 이상한 특성 중 하나다. 그 시절에는 이딴 건 가치도 없어라고 언더들은 외치지만...시간이 지나면 미래 시대의 언더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이게 진짜야!라고 외치게 되는 현상도 벌어진다. 물론 누구나 많이 경험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정도의 차이일 뿐. 그러다가 그 시절의 진짜 언더를 뒤늦게 경험하고 놀라 까무러치는 일도 벌어지긴 하지만...

어쨋든 옛 시절 뮤지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태생 자체가 행복함의 세뇌라는 뮤지컬을 보고 기뻐만 했을까?
아니면 전쟁의 상처를 애써 지우려는,혹은 정책과 이데올로기의 세뇌라는 정책에 대해 분노했을까?

이 영화에 대한 요점은 "뮤지컬이란 환상의 장치를 가지고 우매한 대중들의 자위행위"를 도와줌으로서 이 영화를 봄으로서 내 할 일은 다했다라는 '경험'을 영화관 안에서 하게 해준다는 것.
따라서 화관이라는 신비적 공간을 벗어낫을 때 내 할일은 다 했음으로 (윤리적 가치관의 달성이라는 착각을 심어줌으로서)  다시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로 다시 돌아가게,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는 모든 뮤지컬은 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완성도를 가지고 볼 때 헤어스프레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치다 싶을 장면들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말랑말랑하고 신나는 음악과 율동에 심취에 사회적인 동물으로서의 책임감을 다 했다는 안심을 하게 된다...
그것도 두 시간이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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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헤어스프레이]를 보며 첫 30분 간 엄청나게 웃어버렸다... (너무 재밋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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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0분이 지나고 "이거 좀 너무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더니 끝무리와 중간 중간 이것을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받아들임을 이미 포기한 상태임으로) 견제를 해야 하나 고민을 안겨준 영화 였다.

재밋었다는 건, 인종적 (Racial) 이슈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코믹하게 다루는 것
역사에 근거를 둔 조크(joke)를 내보내는 것... (나름대로 미국인들만의 위티한 표현)
아주 쉬운 예를 들어 ... 헤어스프레이로 백인들이 멋진(?) 석고상 머리를 장식하고 있을 때
흑인들은 같이 머리를 손보며 멋낸 머리가 "시위드 Seaweed"(미역)으로 풀이된 것...(정말 정말 최고!!!!)  {{{{{{{왜 번역가는 시위드라고 번역했을까?왜 [미역]이라고 번역 안했을까>???????????????]

암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녀, 인종, 사회지위 등의 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가벼운, 웃음거리의 이야기를 했을 때 일어나는 파장이다.
그 파장이라는 것은 서로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만났을 때 일어난다.... 말 그대로 파장이... 그것도 아주 폭력적일 수 있는 안좋은...
하지만 어느 정도 서로 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던지는 한 두번의 조크는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기능도 한다... "헤이 니거~"
바로 이 정화와 동감 부분이 딱 영화의 30분 부분이다.

그 이후로는 상당히 무서워 진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거기다가 노엄 촘스키의 책을 읽고 있는 상황에 본 영화라 더더욱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중 '병신 만들기'의 가장 큰 주역의 하나인 헐리우드의 무서움을 세삼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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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뮤지컬을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정서는 어떠했는지 모르갰으나 지금 우리는 그 시절 헐리우드 뮤지컬을 클래식으로 칭송하며 힘든 사회에 꿈과 희망을 실어주며 행복을 느끼게 해준 그런 작품의 형식으로 느낀다. 그리고 헤어스프레이는 그런 '선입견'을 잘도 활용하며 도에 지나칠 정도로 이 선 저 선 (line)을 넘나들며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역사와 문화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굳이 왜곡시켜야 하는 액션을 취한 것은 명료하다.
인터넷 등을 통한 정보 혁명을 통해 대중들도 이제 웬만큼 알 사항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왜 모르겠는가?
옛날에는 알면서도 못했지만 지금은 알기때문에 미디어 상에서도 꺼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요즘 세상에 못생기고 뚱보라고 무시하지 말것이며 유색인종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적 윤리적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다 아는 윤리다. (단지 속 마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사회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세상에 굳이 헐리우드가 애써 모른척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대중과 가장 친한 미디어 중에 하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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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미국의 대선이 얼마 안 남아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시대적 설정인 50년대에서 60년대로 넘어가는 격변기는 곧 정권 교체에 의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처럼 보여진다. (영화에서는)

60년대를 맏이하며 인종차별의 해소의 분위기와 케네디라는 밝은 태양을 통한 사랑과 평등의 시대가 도래할 것 처럼 보인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미셀 파이퍼는 철퇴를 맞고, 흑인과 백인이 아무렇지 않게 결혼하고, 뚱뚱보에 못생긴 얼굴을 가져도 더 이상 불이익을 받지 않는, 교회의 사회 장악에서 빠져나온,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꿈과 희망, 달나라에 첫 발을 내 디은 60년대로!
하지만 지금 위의 말들이 진정으로 현실화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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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적어도 60년대는 그랬을까?
40,50년대를 벗어나며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비로소 이념의 싸움이 시작된 긴긴 냉전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로서 정책은 정치와 분리되었고 프로파간다를 앞세워 대대적인 대중 세뇌 운동과 미디어 선전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도태되며 위기를 맞고 본격적으로 '우매한 대중'은 더욱 소수의 큰 손들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다.
그 뿐인가? 자본주의 시대의 바람 앞에 삶은 더욱 힘들어 지고 가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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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타당치 못한 테러 전쟁을 시작했고 그의 영부인 재클린과 함께 미국 정부를 위한 화려한 전설 만들기의 일부로 전 세계인의 기억 속에 남겨졌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대대적 행진을 본 딴 듯한 극중의 흑인들의 방송국 행진 장면을 볼 때 처럼 흑인들의 투쟁은 그렇게 얌전하지 않았다. 팔장만 끼고 바라보는 극중의 경찰처럼 백인들은 그렇게 잠자코 지켜 보지 만은 않았다. 그야말로 피를 튀기는 전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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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하고 못생겨도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
60년대를 지나고 70년대가 도래하며 먹고 살만해지자 '웰빙'과 '헬스' 붐이 크게 일어나며 사람들은 패션과 몸짱과 건강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군중앞에서 튀는 것만이, 겉으로 아름다워지는 것만이 자신을 사회 안에서 살아남게 만드는 방법이란 것을 깨닫게 되고 실행했다... 이것의 극치는 80년대 MTV의 탄생과 함께 극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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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러티브를 만들고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이들은 자본주의에 몸을 판 창녀/남들이다... 말이 그렇다 뿐이지 그들은 대중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들 줄 아는 '엘리트 들이다.'

말이 좀 과했나?
어쨋든 엘리트는 몸을 팔았고 우리같은 대중은 이용당하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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