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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쓸 작품으로 까지 평가 받고 있는 추격자.
전 포스트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늘어 뜨려 놓았지만 아쉬운 부분만은 분명 남아있다.

이 영화가 한국 영화가 국내에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흥행 영화로서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준 것은 분명하지만 전혀 새로운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쓸 작품이란 찬사를 붙이고자 하면 분명 '새롭고' '참신하고' '실험적'인 요소들이 어딘가 존재해야 하지만 그것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중경 삼림], [타락 천사]의 왕가위 영화나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에서 볼 수 있었던 현대 홍콩이란 도시를 그려내는 방식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그러한 도시 공간 묘사 기법이 그저 한국이라는 실정으로 옮겨진 것일 뿐 90년대 추격이나 폭력을 소재로 하여 도시라는 공간을 묘사하는 외국 영화들에서 크게 다른 점이 보여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추격 영화의 고전이라 꼽히는 [프렌치 커넥션]을 한 번 더 보는게 나을 수도 있다.

깐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식상함을 꼽을 때 지겨울 정도로 세련된 유럽 영화의 문법을 고스란히 고수하는 것을 뽑는데 [추격자] 또한 90년대 우리가 많이 봐왔던 외국 영화의 문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막말로 심형래의 [용가리]나 [디 워]가 우리도 SF 영화 한번 만들어보자 하여 외국 괴수 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옮겨 놓고 실패한 반면 [추격자]는 그 반대로 추격 영화를 만들고 문법을 그대로 따르며 성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 뿐이다.
그리고 좀더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봉준호의 [괴물]에서 간혹 나오던 '정치적' 조롱이라 불린  블랙 유머가  조금 직설적이고 촌스러웠던 반면 [추격자]에서는 좀더 심화되고 미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 되어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만 놓고 볼 때 [추격자]를 연출한 나홍진 감독은 분명 센스와 실력을 겸비한 좋은 감독이다. 하지만 이상적으로 바라볼 때 그가 장편 데뷔작이라는 정말 바늘 구멍 뚫기도 힘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 줄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분명 장편 영화의 메가폰을 쥐는 것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할 영화 학도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로또와 같은 큰 기회다.
분명 흥행에 성공하고 평단의 호평도 일구어 냈지만 정작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다시 보며 만족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연출이 가능한 감독이라면 분명 자신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문법'을 이해한 똑똑한 학생의 잘된 과제물 정도의 영화를 보고 아쉬울 것이다.
각박한 한국 영화판 실정 안에서 엄청난 부담과 여러 사람의 요구를 채워야할 의무가 분명 있었겠지만 좀더 욕심을 내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 전체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어느 정도 만큼은 감독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했으면 정말 한국영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무언가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명세 감독의 [인정 사정 볼 것 없다]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한국, 특히 서울이라는 공간의 독특한 해석을 특유의 영상미로 담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또한 외국에서 찬사 받는 이유는 비단 '충격적'인 영상과 내러티브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떠한 한국적인 새로운 영상미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어필할 수 있는 이유도 한국에서는 아무도 다루고 있지 않은 '중산층' 소시민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격자]에서 이러한 '특유'와 '오리지널리티'는 실종되고 10년 전부터 수없이 보아 왔던 모습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만 보고 우리만 즐기려 한다면 큰 문제 없을 테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바라본다면 진부한 영화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외국인에게 잘 보여야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근대, 현대화 이후 우리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남대문까지 날아가버린 상황에서) ,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문명 사회에 있어 전대 미문의 미로 속을 걷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외국인이 아닌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좀더 자신을 더 내보여야 하는게 아닐까?

나홍진 감독, 이런한 맥락에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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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존 웨인 식의 서부 영화를 생각했다면 엄청나게 실망할 것이다.
영화는 길고 전개는 지루하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이 대게 그렇듯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액션은 마지막 10~20분에 펼쳐진다. 누가 아직도 헐리우드 간판을 들고 이런 영화를 만들고 있나 했더니... 엔딩 크레딧에 오래된 기억을 꺠우는 이름이 나왔다.... 제임스 만골드...

감독인 제임스 만골드의 이름은 먼저 부담으로 다가 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십 년 전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과 선댄스 영화제에서의 호평으로 세인의 관심을 끈 [Cop Land 캅 랜드] (맞나?)의 감독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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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영화도 [투 유마]와 굉장히 비슷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나지만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지루한 전개의 영화였다.
하지만 웃긴 것은 '잘 만든 영화'라는 것. 그래서 "재미 없다"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못 만든 영화다"라고 말하긴 커녕 "잘 만든 영화"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아주 가혹한 영화다.

만골드는 그 만의 철학을 뚝심있게 관철 시킨다. 그 철학은 관객가 쉽게 공유될 수 있을 지언정 그가 내러티브를 끌어나가는 연출 방식은 공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하고 정적으로 흘러간다.

[3:10 To Yuma]도 마찬가지다. 그 만의 확고한 철학으로 관객에게 인정사정 없이 그 만의 방식으로 철저하게 끌어나가는 그런 영화다.
따라서 이런 전개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루함에 의해 극장 자리에서 꽈배기를 틀 수 밖에 없다.

광활한 자본 주의 공간에 같인 '좁디 좋은' 사람들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우선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냉소가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남북 전쟁 직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미국 땅 안에 그 뿌리를 박기 시작하는 시기다. 가축을 키우는 농경 생활에서 아직 대다수가 몸을 담고 있고 자본과 경제에 눈을 뜬 지주들과 '기업'들은 광활한 미국 땅을 서로 네트워크화 시켜 줄 '철로'를 놓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철로 사업이라는 경제 개발 때문에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될 크리스챤 베일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다.

시대의 마지막 신화적 영웅이자 로맨티스트, 벤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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럿셀 크로우 분의 벤 와일더는 이름 처럼 와일드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무법자이자 자본주의 세상에 등을 돌린 무법자다.
그가 깨닫고 있는 것은 틀에 박히고 세뇌 당하고 이용 당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도래했고 그는 굴복할 수 없다. 그가 성경에 꿰뚫고 있으면서도 식 전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성경이란 자본과 경제의 꽉막힌 틀에 박혀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것도 아닌, 하나님과 예수라는 혹은 신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키는 그런 도구가 아닌 인생의 지침서다.

그리고 그가 던진 "녹색 눈빛의 여인"의 문학적/미학적 중얼거림은 바로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신화적 '영웅'이자 질풍노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것을 확인 시켜 준다. 그는 참 모습의 '인간'과 '자유'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다.

이 시대 마지막 양심이자 권력에 희롱당하는 소수자,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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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베일 분의 에반스는 언뜻 보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그는 영화에서 깔아놓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덫에 걸린 불쌍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제도화된 결혼, 가족, 자본, 경제... 이 모든 것이 근대 자본 주의 사회가 인간을 권력의 틀 안에서 쉽게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덫이고 에반스는 이 덫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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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업이지만 따지고 보면 국책 사업이나 다름없는 철로 사업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되고 '자본'이라는 것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힘에 한 없이 무력한 사회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아들에게서 무시 당하고 그의 부인 또한 그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상화에 처해 있는 것은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그의 신체에서 보여진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사회적 '거세'의 상징으로서 근대화의 법칙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벤 와일더가 말을 타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정 반대다.

사회라는 테두리에 갇혀버린 그의 움직임은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나라를 위해 싸웠을 지언정 나라가 그에게 해준 건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총 한자루 뿐이고 그에게 있어 총이란 한 남자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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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근대 사회적 테두리 안에 갇힌 에반스를 벤 와일더는 '또 하나의 답답한 인간'으로서 바라본다. 하지만 유마 행 기차를 향해 가며 이들 사이에 우정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믿음이 생겨난다. 바로 신념이라는 믿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때문에 와일더는 점점 에반스에게 같은 인간애를 느끼고 에반스 또한 같은 심정으로 마지막 와일더에게 '나를 알리고 싶어서...'라는 고백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관찰 시킴으로서 아들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며 마지막을 장식한다.


때묻지 않은 순수의 상징, 에반스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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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에반스와 와일더를 연결 시켜 주는 고리는 바로 아들이다.
그 아들은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으로 그 자유에 대한 열망과 정의감이 와일더로 하여금 자신을 보게 만든다. 즉,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알고 와일더가 영화에서 나오는 캐릭터 중 유일하게 '겁'을 내는 이가 바로 에반스의 아들인 것이다. (마지막 아들이 와일더에게 총을 겨눌 때 벌벌 떠는 그의 모습에서 이는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 코드로 뚝심있게 풀어낸 제임스 만골드
서부영화라는 장르의 틀을 깼다면 깬것이 [투 유마]의 큰 장점이다. 근대 자본 주의의 출발이라는 맥락을 받아들임으로서 진부한 형식에 둘러 쌓인 서부극의 장르를 [용서할 수 없는 자]와는 또 다르게 풀이해냈다.
자본 주의 코드 때문에 노예로서의 흑인이 등장하지 않고 대신 자본주의의 개미 같은 존재로서 동양인, 중국인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인디언과의 혈투는 절제 시킨 것이 바로 이 이유 떄문일 것이다.

어찟하였건 영화는 지루하였으나 이처럼 자신만의 철학을 끈질기게 끝까지 밀어 부친 감독 제임스 만골드에게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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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혜성처럼 나타나 전 세계 하우스 씬을 싹 쓸어버린 이 시대 최고의 듀오라 일컬어 지는 다프트 펑크! 어떤 이는 세계가 프랑스를 아직도 우습게 보지 못하는게 그들 때문이라고 우스게 소릴 할 정도다. 70년대 프렌치 디스코 아이콘인 Cerrone 이후 잠잠했던 프랑스 댄스 음악씬을 단숨에 세계의 중심으로 올려놓고 프렌치 하우스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락 밴드로 출발한 그들은 걍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 냈으나 어떤 영국 평론가의 혹독한 혹평을 받고 새로운 전자 댄스 듀오로 거듭나는데 그 평론가가 그들을 비꼴 때 사용했떤 단어가 바로 Daft Punk다.

이미 그들의 출현 즉시 부터 골수팬들과 함께 전 세계에 폭 넓은 지지도를 가진 초대형 거물급이었지만 이번 그래미 시상식에서 Hip Hop 아티스트 칸예의 공연에 깜짝 출현해 대중의 인지도까지 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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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Ed Banger 레이블의 아티스트들, 특히 Justice는 새로운 다프트라 불리며 현재 한창 진행중인 Electro House를 통해 제 2의 프렌치 하우스의 르네상스를 다시 열었다.
 
그 다프트 펑크의 반 쪽인 Thomas Bangalter 토마스 뱅갤터는 다프트 펑크 말고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듀오로서 [일렉트로마 Electroma]라는 실험 영화를 깐느 영화제에서 소개하기도 하고 혼자서 모니카 벨루치, 빙상 카셀 주연의 [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의 사운드 트랙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 토마스 뱅갤터를 중심으로 한 주옥같은 사운드들이다.

As Himself
[House/French] Love by Thomas Bang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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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렌타인 데이 기념으로 뱅갤터가 내놓은 트랙으로 아마도 지금 구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최근의 트랙일 것이다. 음악 제목처럼 들뜬 기분에 클럽 플로어를 로맨틱하게 장식할 하우스 트랙이다.  (** 수정: 나중에 알고보니 프랜치하우스 에벤절리스트로 거듭나는 루이스 라 로시의 자작극으로 판명되었었음... 고로 뱅겔터의 음악이 아님 후우...)



With DJ Falcon
[House/French] So Much Love to Give by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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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인가 03년 당시 나를 거의 혼수 상태에 빠져버리게 만들었던 트랙이다.
쿨 앤더 갱의 음악을 샘플링한 곡으로 뱅갤터와 깊은 인연이 있는 DJ Falcon과 함께 Together란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며 내놓은 트랙으로 그 해 클럽 플로어를 쓸어 버렸다. 아마도 그 해를 기준으로 2,3년 간 유럽에서 나온 클럽 댄스 트랙 중 Moloko 몰로코의 "Sing it Back," Modjo 모죠의 "Lady"와 함께한 최고의 댄스 트랙이 아니었나 싶다.
이 때 비슷한 시기에 Eric Pryds의 Call on Me가 나와 대중적 성공은 에릭 프리즈에게 넘어가긴 했는데 DJ Falcon이 먼저 Call on Me의 리믹스를 틀고 다녔다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크레딧은 에릭 프리즈에게 넘어가고 할 수 없이 So Much Love to Give를 택했다는 ... 믿거나 말거나...
다프트 펑크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반복에 의한 유포리아 Euphoria가 최절정에 다른 듯한 생애 최고의 리믹스 중 하나다.




As in Stardust
[House/French] Music Sounds Better With You by Star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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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프렌치 하우스의 또 다른 거성들인 Alan Braxe 앨런 브랙스, Benjamin Diamond 벤자민 다이아몬와 토마스 뱅갤터가 만나 만든 프로젝트 그룹으로 이 또한 클럽 댄스 클래식 중 클래식이다. 곡은 CHaka Khan 샤카 칸의 Fate를 샘플링 했다.
뮤직 비디오는 미셀 공드리가 연출했으니 할 말 다 했다.




As the Half of Daft Punk
[House/French/Electro] One More Time (The House Moguls 2007 Remix) by Daft 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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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프트 펑크의 세계에 이 트랙으로 입문한 사람들도 엄청 많을 것이다. 그 정도로 다프트 펑크의 대표 음악처럼 알려져 있는 클래식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리믹스가 존재하는데 위의 트랙은 2007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놈으로 일렉트로 사운드가 더 강화되었다. Ediir Johns의 More Spell on You를 샘플링 한 곡으로 Music Sounds Better With You와 마찬가지로 Romanthony 로만쏘니가 보컬을 맡고 있다.




Remixes
[House/French] Signature (Thomas Bangalter Edit) by DJ Meh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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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Bangalter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DJ Mehdi의 작품이라고 하는게 더 맞을 듯 싶다.. (뱅갤터 에딧이긴 해도) 어쨋든 다프트 펑크 크류와 조인하고 있는 Dj Mehdi의 Luck Boy 앨범에 수록 되었던 곡으로 Dynasty의 Strokin'이란 음악을 샘플링했다. 메디는 일렉트로 힙합퍼인 Uffie의 동생인가 언니의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 또한 Fafi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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